(2001/08/22) 교갱협 제6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누가복음 10:25~3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저는 세미나나 집회에 참 많이 참석했습니다. 전라도 목포에 있기 때문에 세미나에 참석할 때는 주로 신문광고를 보고 고속버스를 이용하여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 정도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좇아간 세미나나 집회에 실망을 하고 돌아올 때는 억울하기도 하고 본전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 고향사투리로 저는 "워~매, 시간 완전히 조져버렸네이. 이 시간에 집에서 성경이나 봤으면, 내가 책을 읽었으면... 완전히 광고에 속아버렸고마이~." 그러며 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은혜를 받고 돌아올 때는 "워~매. 내가 횡재를 만났네. 내가 저분을 10년만 먼저 만났으면 내 눈이 달라졌을 것인데..." 하고 기뻐하며 옵니다. 그러면서 제 나름대로 나는 절대로 교인들 시간을 조져버리는 도둑놈은 안 되어야 되겠고, 정말 누구에게나 횡재가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망은 주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산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구원에 대한 진리를 가장 지혜롭게 그의 눈높이에 맞춰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돼. 그래야 영생을 얻어.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줘."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율법사에게는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너도 가서 그렇게 살아라. 그러면 살리라." 그랬더니 율법사는 묻기를 "내 이웃이 누군가요?"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있었지. 제사장도 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고, 레위인도 그를 피하여 지나갔는데 사마리아인 한 명이 지나가다가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상처의 모든 피를 닦아주고 포도주와 기름을 바르고 그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기를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노라고 주막주인에게 맡기고 갔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 그러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입니다."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러면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키워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해. 그러면 영생을 얻어."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사마리아인처럼 살지 않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영생 얻는 자의 모델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과 요한복음 3장 5절의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뭡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누가복음 10장의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너는 영생을 얻어. 이 성경을 뜯어버릴 수는 없어. 이 말씀 덮어버리고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면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저 나름대로 깨닫게 된 것은 요한복음 3장 15절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신다는 말, 그리고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하나입니다. 성령세례가 임할 때에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은 영생의 씨이고, 입으로 예수는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싹이며, 사마리아인처럼 사는 것은 영생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인가 가짜인가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의외로 진짜 같은 가짜가 많습니다. 나와 여러분의 삶이 사마리아인처럼 사는 삶이 되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지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입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 지셨는데 우둔한 우리들은 볼 수도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이 오셔서 그 사랑을 보게 하셨고, 알게 하셨으며,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안고 성령님이 직접 내 안에 임하셨습니다. 그렇게 임하신 성령님의 어마어마한 용광로와 같은 뜨거운 사랑을 내 혀끝, 내 손끝, 내 발끝을 통해서 난도질 당하고 상처받은 강도 만난 자에게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산다는 그 자체가 바로 성공입니다. 큰 규모의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해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목회 실패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안목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인물들을 보면 그 훈련의 목적은 좋은 이웃,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드는데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복을 공급해주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돼. 너는 만나는 사람마다 복을 공급해 줘야 돼." "요셉아, 내가 너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데리고 가고, '워~매, 이제 나는 죽었네' 하는 원수의 목전에도 데리고 갈거야. 그렇게 너를 훈련하는 최종 목적이 있어. 그건 네가 좋은 이웃되는 거야.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돼." "베드로야,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돼. 음부의 권세 속에서 난도질 당한 사람들을 살려주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돼."

성경의 모든 사람, 에스더, 느헤미야, 바울,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를 아실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을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환경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고 어려운 그늘을 거치게 하시면서 훈련하신 이유는 나와 같이 상처받은 사람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와 있는 것도 또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모두 좋은 이웃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간은 좋은 이웃일 때입니다

저는 좋은 교회에서 주일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해변가에 있는 아주 작은 시골교회였습니다.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면 안강부락에 위치한 교회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다닐 때 장년이 30명, 주일학생이 80명 정도였습니다. 그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가 하면 목포선교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배유지 선교사님께서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에 목포 땅에 목포양동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를 통해서 목포시내에만 300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배유지 선교사님이 세운 교회에 김재현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2대 독자이시고 그 장로님의 아들도 한 명밖에 없어서 3대 독자가 되었습니다. 6.25 동란 때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심화되어서 좌익 계통들이 김재현 장로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 장로님은 아들을 아들 친구와 함께 외갓집이 있는 해남으로 피신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피난 갔던 김 장로님 아들과 친구는 두세 달이 지난 다음 잠잠해졌을 것으로 생각하고 유달산 꼭대기만을 바라보며 밤을 이용해서 산을 넘었습니다. 연락선을 타기 위해서 용당이라는 곳으로 가야하는데 유달산 꼭대기만 보며 걷다가 도착한 곳은 바로 안강부락 해변이었습니다. 근데 그 동네는 전체가 좌익이었습니다.

결국 안강부락 주민들한테 잡혀서 김재현 장로님 아들은 죽창에 찔려 창자가 터져나오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고, 그 친구는 그래도 죽지 않자 주민들이 큰 돌을 가져다가 몸에 칭칭 감아서 저수지에 빠뜨려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 소식이 장로님한테 전해졌고 장로님이 와서 장례식을 치뤘습니다. "아들아, 너의 죽음은 절대로 헛된 개죽음되면 안돼. 원수를 은혜로 갚을 꺼야. 너의 죽음은 절대로 헛되면 안돼."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부지를 마련하고 18평 예배당을 짓고, 10평 사택을 지었는데 제가 주일학교 다닐 때 그 집이 동네에서 제일 좋았습니다. 전도사님에게 생활비를 주며 파송하여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 교회 시무장로가 바로 기독신문 총무국장이셨던 박용종 장로님이십니다. 역사의 산증인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던 안강주민을 구원하기 위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 어른성도 30명, 주일학교학생 80명 중에 주의 종이 10명이나 배출되었습니다. 나중에 김 장로님 아들이 먼저 천국에 가고 후에 장로님도 천국에 가셨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섰던 주님께서 김 장로님을 향해서도 '너는 승리했어!' 하시며 맞으실 것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멋은 좋은 이웃일 때 드러납니다.

전국을 다니며 많은 목사님들을 뵈면서 느끼는 것은 진짜 좋은 이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의 향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간혹 좋은 이웃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강도도 있더라구요. 강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좋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강도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병이 걸려서 그 아들을 살려야 되겠는데 돈이 없어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 한 명 잡아가지고 피투성이 되도록 두드려 패고 돈을 뺏어서 병원으로 달려가 자신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목적은 선하지요? 수단은 악합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악한 수단이 용납될 수는 없습니다. 강도는 사람을 이용해서 내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강도입니다. 몽둥이만 들어야 강도가 아닙니다. 칼을 들어야만 강도가 아닙니다.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그 사람이 바로 강도입니다. 좋은 이웃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몸을 관제로 드려서라도 "당신이 좋을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디딤돌이 되어주고 싶소. 나는 생명의 떡이야. 나를 먹어!"라고 하신 그 주님처럼 "성도들이여, 나를 잡수세요!"라고 하는 그 목사가 진짜 좋은 이웃입니다.

말씀을 보면 강도와 같은 목회자도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같은 목회자도 있어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의 모습과 길가는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성전에서는 예복을 입고 멋진 제사장이지만 그 가운만 벗고 나가면 세상과 구분이 안 됩니다. 성전과 세상에서의 삶이 너무도 다른 사람, 그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직분과 삶이 다른 사람, 마음이 다른데 가있는 사람은 제사장 의복은 입고 있지만 강도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정확하십니다.

이런 마인드를 갖고 있으면 생일이나 성탄절 같은 때 선물을 못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많이 고생하고 많이 희생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갚아준다는 사실을 나는 믿거든요. 나는 하나님을 믿거든요. 가장 매력없고 가장 멋없는 사람이 누구냐면 사람을 이용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겠다는 강도입니다. 정이 뚝뚝 떨어집니다. 저는 제 한 몸을 생명의 떡으로 우리 양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에게도 제 자신을 줄 겁니다. 저를 디딤돌 삼아서 역사를 만들어 가길 원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지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구역예배를 드리고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우리 교회가 개척한지 16년이 되었는데 처음에 개척해 가지고 6년까지는 어찌 그렇게 부흥이 안되는지 환장하겠더라고요. 그리고 가정적으로 밀려오는 시련과 시험의 파도가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잔뜩 열을 받은 상태에서 운전을 하니까 운전에 신경은 안 써지고 열받은 생각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4.5톤 트럭이 옆을 받았고, 제 차는 붕 떠서 옆 전봇대를 들이받았습니다. 그렇게 두 번 충돌을 하다보니까 목 척추가 골절이 되었고 전신에 마비가 왔습니다. 사지가 안 움직이고 피부감각신경도 없어져서 더운지 추운지도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또 세 번째는 운동감각도 살리고 피부감각도 살리는데 하수도처리 부분이 문제가 생겨 가버려요.

그런데 그 때 교단이 다른, 나에게 병문안을 올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 김용운 목사님이 제가 사고 났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오셔서 예배를 드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내가 하는 것을 이제는 네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아침 9시가 되면 "하나님, 나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했다가 10분만 지나면 "어째 나를 이렇게 맨들었소?" 또 10분 있다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했다가 다시 "어째 이렇게 해버렸소?" 하기를 거듭했었는데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는 그게 사라졌습니다. "내가 하는 것을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그 말씀을 통해서 나의 내일이 보였습니다. '그렇구나. 여기에는 의미가 있구나. 끝이 있구나. 하나님의 계획이 있구나.'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건강할 때 심방 안다녔던 것 회개하고, 건강할 때 더 전도 못했던 것 회개하고 그랬습니다.

호르몬제를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각각 두 방씩 여섯 방을 맞으면서 노력을 해보는데 큰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복음서를 읽으면서 전에는 전혀 느끼지도 못했던 말씀을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시는데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동조야, 너는 살고자 하면 죽어. 네가 죽으려고 하면 살아." 저는 지금까지 목사로서 내가 살려고 몸부림치고 뛰었지 주님을 위해서 죽으려고 몸부림치고 뛰지 않았어요.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너는 너의 명예를 위해서 뛰었지 나하고는 아무상관 없었다."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로 목회하겠습니다." 하며 매달렸는데 주님이 그 기도는 빨리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생각을 사용하시며 그 생각에 복을 주십니다.

가해자 차량은 무보험이었고, 면허증을 딴 지는 3개월이 되었고, 그 회사에 취직한 지 한 달 밖에 안된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내가 도와줘야 할 입장이더라고요. 그런데 성령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저는 '저 사람은 나의 가해자이지만 김재현 장로님처럼 나도 저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재현 장로님은 제 삶의 기둥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해자인 그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되겠다고 결심하고는 구속연기 청원을 해주고 합의금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합의금을 많이 받으려면 구속시켜야 되지만 저는 합의금에 목적이 있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람이 너무 과도한 합의금 때문에 평생을 그 빚더미 속에서 눌려 살고 형무소에 들어가서 고생고생 하다가 후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을 때 "목사라고 하면 이가 갈려. 그 이름 백동조!" 만약 그런다면 저는 이 땅에 존재할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달 병원비도 안 되는 700만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턱없이 부족했지만 합의해주고 형무소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허물도 많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런 저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을 사용하십니다. 좋은 이웃이 되고 내가 생명의 떡이 되어서 내 양들에게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습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전신마비 환자에서 저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장애인이 되어서 나오니까 교인들이 많이 떠나갔습니다. '목사가 뭔 죄가 많아가지고 저렇게 오그라졌을까?' 내가 불구가 되는 것은 견딜만 했지만 그런 사람들의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때 나를 위해서 주님이 만들어 놓은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제 스스로를 추스렸습니다. 그 좋은 이웃의 그 믿음을 보시고 떠나가는 교인들도 많았지만 교회를 부흥시켜 주셨고, 예배당을 건축하게 하셨고, 마무리 될 때에는 부흥선교 사역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룻은 자기의 시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어머니, 제발 나보고 돌아가라고 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나 없으면 죽어. 어머니는 나 없으면 죽어. 나는 평생 어머니의 좋은 이웃이 될꺼야. 내가 평생 모압 사람을 개 취급하는 히브리인들 속에 가서 살면서 개 취급을 받아도 나는 절대 어머니 안 버려." 그런 룻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보면 볼수록 느낌이 좋은 남자, 가까이 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한 남자, 향기로운 남자, 보아스! 성경에 나타난 남편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답고 좋은 그 보아스를 룻에게 주셨습니다. 그게 우연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과 같은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그 생각을 쓰시고 그 생각에 복을 주십니다. 목회하다 보면 가슴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참 많지요. 그래도 나는 좋은 이웃이 되겠다고 할 때 그들이 나의 좋은 참모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인의 의식과 미국인의 의식을 보면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주차 질서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일본인의 의식도 배울 점이 많지요. 한국 사람들은 공부해서 남 주냐고 하고,  미국 사람은 공부해서 남 줘야 된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은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토끼 잡으러 나갑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은 눈이 많이 와서 날짐승들이 먹이가 없을 때면 날짐승 먹이 주러 나갑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머리가 되는 생각은 좋은 이웃입니다.

 

주님의 뒤를 이어 양들에게 생명의 떡을 공급해줍시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 받는 목적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영생 얻은 자의 모델이고 목회자의 모델입니다. "너는 강도도 될 수 있어. 사람을 이용해서 너의 목적을 이룰 수도 있어. 너는 성전에서와 길거리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띨 수 있어. 가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가치 있고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사람은 좋은 이웃이야." 그래서 저는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서 저의 심령을 옥토로 가꾸려고 노력합니다. 심령이 옥토가 되지 못하면 그건 절대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가서 대표기도 하시는 장로님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걱정스러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가와 같고 돌밭이 되어버린 그 심령으로 기도하고 찬양을 하는데 전부 돌밭에서 나오는 찬양이고 말뿐입니다. 길가가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사역을 해도 생명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서지고 녹아져서 오만 가시밭과 같은 잡초가 뽑아져 나오고 성령의 생수의 강이 있어서 정말 기름진 옥토들이 되어 심방하고 설교해야지, 돌밭이 가서 심방하고 길가가 가서 설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옥토의 마음이어야만 30배, 60배의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옥토가 강단에 서서 설교하고 옥토가 심방가고 옥토가 찬양을 인도하고 그래서 가슴에 기름지고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아서 오직 주님의 뒤를 이어 생명의 떡으로 양들에게 공급해 줄 수 있는 좋은 이웃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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