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8/18) 교갱협 제8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마태복음 16:16~1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방황 속에 만난 주님

여러분 대부분께서 저를 모르시기 때문에 간단하게 저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래야 저에 대해서 아시고 저의 관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1971년에 그 당시에 듣기 쉽지 않았던 조기 유학을 갔습니다. 그쪽에서는 제가 조기 유학의 원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가 한국 나이로 18살, 만으로 16살이었습니다. 만으로 17살이 되지 않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여러 가지 형편상 저희 부모님께서 한 2년만 미국을 경험하고 돌아와도 저에게 경험이 될 것이라 하여 다녀오기를 권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좋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사실은 제가 너무도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이곳에서는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대학도 못 들어갈 것 같아서 어떻게 길이 열리게 되어 미국에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숫자 계산이 빠르신 분들은 제 나이가 얼마쯤 되는지 파악하셨겠지만 올해(2003년 현재) 제 나이가 쉰이고 만으로 마흔 아홉입니다. 저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님은 불교신자였으며 외할머니는 아주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 가서 대학 4학년 때 아주 극적으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떠날 때도 그랬고 미국에서 유학할 때도 공부하기 위하여 국비장학생으로 준비되어 간 사람이 아니었기에 고삐가 풀린 것처럼 더 말썽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악하게 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우울증 증세와 합병증이 있어서 사춘기를 겪으면서 아주 심한 염세주의에 빠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아무런 소망도 의지도 없이 중학교 2학년부터 깊은 마음의 병이 걸렸습니다. 아무런 의욕이 없으니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그러다보니 도피하기 위해서 중학교 2학년부터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에서는 대마초도 잘 모르던 시절에 대마초에 손을 대고 그러한 모습으로 미국에서는 마약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가정이었기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들은 바도 없이 소망 없이 살다가 대학교 4학년때 주님께서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을 공부했는데 경영학 과정에서 갑자기 제 마음 속에 불 일 듯이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신다는 소명을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지 않던 저의 집에서는 아들을 미국에 유학시켰더니 공부는 집어치우고 갑자기 신학교를 간다고 하니 저희 집은 말할 것도 없이 뒤집어 졌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제가 신학교에 가는 것을 말리기 위해서 갑자기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오셔서 일주일을 설득하셨지만 저를 말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1976년이었고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1982년이었습니다. 그간에 많은 사람을 만났고 훌륭한 분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저의 부친만큼 인격적으로 훌륭하신 분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저는 저희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철저히 빚지고 살 수밖에 없도록, 정말 좋은 아버지로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 가는 것을 말리기 위하여 오셨을 때 저의 아버지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올 정도로 만류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해야 한다는 결단을 가지고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저는 유학을 하기 위해서 미국에 간 사람이기 때문에 틈만 나면 한국에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계획한 2년이 4년이 되고 그 4년이 6년이 되었고 그런 사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소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물색하였지만 주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리가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막고 계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민교회를 경험 삼아 한 3년만 섬기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염세주의 히피족에서 크리스천으로

저는 한국교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저는 평생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이제껏 미국 교회에서만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 교회에서도 유난한 시절을 목회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저의 책을 통해서도 아시겠지만 미국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 저와 같이 깊은 염세주의에 빠져 살던 히피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하나의 큰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런 움직임이란 움직임을 주도하는 리더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부에서 서부까지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 무리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허전함을 채워주셔서 정말 엄청난 젊은이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 물결 속에서 하나님이 저를 건져 주셨고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동료들은 다 그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미국 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고 있는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전부 그 세대의 목사님들입니다.

기성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새로운 부흥을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자 안에 살던 사람은 평생 상자 밖의 세상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 상자 안에서 상자 밖을 내려다 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상자 밖으로 나와서 상자 밖을 들여다보면 다른 관점에서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나 니콜 목사와 같은 사람들이 처음에 교회를 시작하면서, 자기와 같은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왜 당신은 교회를 나가지 않습니까? 무엇을 어떻게 해주면 교회를 나오겠습니까?" 그것이 하나의 상술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에는 그것을 배워서 방법론적인 면에서 사용하는데 저는 그것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당시 씨름하고 고민하며 갈등했던 것은 무슨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서 시대에 걸맞는 목회철학과 그것을 사용해서 교회를 키워보려는 욕심에서 나왔던 것들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서 그 마음 속에 있는 열정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들이 체험한 대로 행했던 것들입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는 히피족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머리를 아무리 길러도 흉악스럽지가 않지만 제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어디서건 경찰에게 걸리면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제 머리의 길이는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였습니다. 기성세대에 반항하면서 물질적인 욕심에 대항한 것이기 때문에 복장도 아주 간단했습니다. 없을수록 좋았습니다. 바지는 두 벌 이상 없었으며, 그것도 잘 빨지도 않고 하도 입어서 구멍이 났습니다. 요즘에는 멀쩡한 것을 구멍을 내어 입기도 합니다만 그 시절에는 멋을 내기보다 빨지도 않고 하나만 입고 다녀 헤어져서 구멍이 난 것이었습니다. 신발도 안 신는 것이 멋있는 것이어서 신지 않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마약을 하며 세상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던 젊은이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성교회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외모를 보아하니 도저히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의 마음은 금방 변합니다. 금방 천국이 되는데 외모가 따라오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자라지 않은 사람들은 마음이 변해서 내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졌지만 외모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들의 외모에 대해서 신경 쓸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데 그런 히피로 살던 아이들이 예수님을 만난 감격에 교회를 찾아갔는데 교인들이 볼 때는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감격에 환하게 웃지만 기성교인들은 마약을 해서 웃고 돌아다닌 것으로 알고 잔소리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복장은 제대로 하고 머리는 자르라는 등.

그러나 우리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데 왜 머리를 잘라야 하는지 말입니다. 예수 믿는 것과 넥타이 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단지 주님이 좋아서 주님 만나러 온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찾아가면 교회는 대환영하며 받아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굉장히 냉대했습니다. 그 젊은이들이 교회에 찾아가도 반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 같이 안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를 믿고 주위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예수 믿는다고 반가워서 길 가다 말고 껴안고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다

제가 처음에 미국에 갔을 때에는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엽전을 이야기하던 때입니다. 그 당시의 한국은 너무도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이 상해서 동양 사람을 보고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오면 일본이나 중국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할 때였습니다. 그러니 한국 사람 만나기도 어려운 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제가 잊지 못하는 분이 한 분 계시는데 미국에 가서 한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길 가다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한국 분을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시더니 너무 반가워하시며 자신의 집으로 저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길 가다가 한국 사람을 만나면 모르는 척을 합니다. 그 시절 제가 처음 예수를 믿었으니 얼마나 믿는 사람이 그리웠겠습니까? 교회가 그립고 예배가 그리워서 찾아갔지만 교회에서는 우리의 생각만큼 환영해주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 그 때를 생각하면 그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지만 제가 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사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적응하지 못했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밖에 나와서 그냥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희들끼리의 유행어가 있었는데 성경을 보다가 빨간색 글자가 나오면 그냥 그대로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전부 빨간색 글자였습니다. 그만큼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 당시 정말 엉뚱하게 예수 믿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환각제와 마약 속에서 살던 그들이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돌아온 친구들도 있었고, 많은 체험과 성령 운동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모습들을 부정적으로 보시든지 긍정적으로 보시든지 간에 그 젊은이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척 스미스 목사님의 갈보리 채플이 나왔으며 그 갈보리 채플로 인해서 마라나타 뮤직이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극적인 방법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난 우리들이 어느 곳에도 소속할 수가 없어서, 우리들끼리 빨간 글자로 된 것을 읽고 그대로 살자고 하며 신앙을 키웠습니다. 지금에서 보면 어설픈 것들도 많았습니다. 아는 것은 없고 성경을 봐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빨간 글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자! 받은 은혜는 너무 감사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싶지만 받아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정규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서 봉사하고 사역하고 전도하겠다고 했지만 제일 먼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신학교를 다녀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신학교 얘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는 대부분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전도할 사람은 많은데 데리고 갈 곳은 없으니 우리끼리 앉아서 빨간 글씨 읽고 우리끼리 교회하자고 해서 그렇게 하게 된 것입니다.

 

방황하던 젊은이들이 주님 앞으로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웃으시지만 저는 굉장히 가슴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런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 저와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많은 미국 사람들이 지금 미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목사님들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화요일 저녁마다 교회를 빌렸습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표현할 방법도 모르고 찬송가도 모르니까 그냥 우리가 아는 코드에 가사를 달았습니다. 대부분이 간단한 가사였습니다. 그것을 부르고 신학교에 다닌 사람도 없기에 미리 주석을 가져다가 자신이 공부한 것으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이었지만 말씀대로 믿고 따랐더니 그대로 되어져 갔습니다.

청년들이 모여서 한 시간씩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던 젊은이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루하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서로 반갑고 기뻤습니다. 가르치는 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주시니 그 말씀이 좌우의 날 선 검보다도 예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의 전파임에도 회심하며 돌아오는 젊은이들이 수십 명씩이나 되었습니다. 끝난 후에도 서로가 성령 충만 받기를 기도하면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무것도 몰라서 빨간 글씨 읽고 그대로 하자고 하던 것 중에 사도행전 2장을 보니 성령 충만을 받았던 초대교인들이 밖에 나와서 전도하며 공동체를 세웠기에 저희는 커뮤니티라는 이름을 붙여서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히피족 시절에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무식하기에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과 직장의 유무와 가진 것의 차이가 있었지만 모든 것을 공유하며 연립 주택을 빌려서 5~6명 혹은 7~8명이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제일 나이 많고 성숙한 사람을 리더로 세우고 결혼한 사람들도 함께 하며 아침마다 모여 경건의 시간을 가지며 모든 삶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지루해진 옷이나, 작거나 큰 옷들을 잘 빨아서 교회에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옷을 사지 않아도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많고 적은 양의 돈에 상관없이 벌어 온 것으로 똑같이 나누며 살았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의사도 있었으며 주유소 점원도 있었습니다. 일 년에 십만 불을 벌어오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일 년에 만 불도 벌어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교회에 내고 살았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요?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그 당시에 그렇게 살았던 우리들이 지금은 교회 건축을 잘 해놓고 있습니다만 그 시절이 추억처럼 그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사랑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앞으로 여러분과의 말씀을 나누는 중에 어떤 것은 너무 과격할 지도 모르겠고 어떤 것은 너무 극단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를 잘 모릅니다. 다만 한국교회를 사랑할 뿐입니다. 32년 동안 남의 나라에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면서도 서글픈 일인지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서 조국의 교회를 섬기겠다던 욕심을 가졌던 사람이 이민교회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 때 절대로 비판하고 싶어서 과격하게 혹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을 하자면 굳이 이 자리가 아니어도 멀리서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저의 조국의 교회이며 조국의 앞날의 문제가 달려있기도 하기에 아니, 그것보다도 한 발자국 나가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차원에서 볼 때, 같은 운명 속에 같은 배를 탔기 때문에 이 시대를 같이 나눌 아픔이며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교회에서 단 일주일도 목회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냥 옛날에 무식했던 대로 빨간 글씨 읽고 그대로 하자고 했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목회는 나이 오십부터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목회도 어느 정도 앞이 보이고 무엇을 하는지 알고 약간 여유도 생기기 때문이랍니다. 저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100% 인정을 하지만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세월의 흐름과 축척된 연륜 속에 순수하게 가지고 있었던 믿음! 그냥 빨간 거 읽고 그대로 하자던 믿음! 지금은 규모있게 잘 관리하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욕먹지 않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또한 이런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과격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부드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나가야 할 길인가 묻고 싶습니다. 오늘 전해드리는 말씀의 반은 제가 다시 한 번 도전받기 위해, 그리고 반은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들으시는 중에도 저건 너무나 한국교회를 모르는 이야기라고 생각이 드시면 그냥 저의 배경이 그래서 그런 것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기 극복은 사람 밖에 없다

저는 어려서 미국에 갔기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음식도 먹을 수 없고 한국 사람도 만나기 어려운 곳에서 7~8년을 영어공부만 하다보니 영어는 잘 하는데 이젠 또 한국어가 신통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제가 미국에 들어간 지 11년 만에 한국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와서 처음으로 부모님 계신 곳에 머무르는 동안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샤워를 해야 하는데 샴푸가 없어서 한국에 살고 있던 막내 동생을 불러서 샴푸 좀 갔다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식당에 가서 샐러드를 달라고 하자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식당에서는 손님이 뭐가 좀 틀리면 바로 고쳐 줍니다. 그냥 듣고 이해를 하면 되는데 "아! 사라다 말이지요?"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한 2년 전에 한국에 방문해서 한 식당에서 샐러드빵을 주문했습니다. 조선호텔이었는데 이번에는 본토발음 말고 알아듣기 쉽게 사라다빵을 주문했더니 이번에도 역시 고쳐 주었습니다. "샐러드빵 말씀이지요?" 하고 말입니다. 미국 발음은 영국과 같지 않아서 많이 굴리게 됩니다. 한 번은 미국에서 영어공부를 하던 사람이 '워터는 워러, 빳데리는 배러리' 하고 발음을 굴려야 한다고 스트레스를 주자 앞에 있는 재털이를 집어들며 "너! 자꾸만 스트레스 주면 이 재러리 던져 버릴거야!" 라고 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 시작하면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고, 우리에게 위기의식을 주고 있는 우리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옥한흠 목사님께서 많은 것을 지적하셨기 때문에 저는 넘어가겠습니다. 옥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위기 속에서도 가장 고무적인 것은 위기를 지나면서 사람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 당면하고 있는 위기 앞에서 어떻게 이것을 탈출할 방법이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 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은 위기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위기의 대처가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위기의 대처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과연 그 대책은 무엇인가를 볼 때 저 역시 옥 목사님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문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1800년대 말에 영국 선교에 대해서 저항이 많았고, 그로 인해 영국 선교에 심각한 정체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그때 선교 전략가들이 모여서 위기 극복에 대해 나눈 것들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선교가가 말하기를 "우리가 당면한 이 위기 앞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탈출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사람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방법론 가지고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시대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것을 돌파하고 탈출할 수 있는 돌파구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우울증에 시달릴 때 누군가가 저에게 어떤 증세이며 어떤 마음이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답하기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긴 터널 속에 들어가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덮쳐오는 위압감을 느끼며, 마치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공포에 떨지 않고 절망하며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비록 그것이 아주 조그마한 점과도 같은 것이라 해도 빛이 보이기 때문이며, 그 빛이 희미하게나마 비쳐진다면 열심히 싸워 노력하다가 보면 터널을 통과하고 길이 보일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우울증에 시달릴 때는 암흑과 같은 터널 속에 들어왔는데 빛이 없는 것입니다. 나갈 수 있는 탈출구만 있다면 찾아보겠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복수로 나타내는 그들은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저는 목회를 굉장히 힘들게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옆에서 볼 때는 순탄하게 잘 나가고 있다고들 하지만 저는 힘이 듭니다. 그렇게 힘들어서 목사 안수를 받고 21년 동안 세 번이나 목회를 그만두겠다고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나 좀 살려 주세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목회를 그만두면 너의 양떼는 어디로 가니? 네가 목회를 그만두면 저 사람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니?"

제가 그렇게 힘들어 하며 목회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르신 사랑과 그 강권 앞에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질질 끌려가면서도 내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저를 찾아와, 저를 바라보는 교인들의 눈동자 때문에 그만두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교회이고, 그것이 없이는 교회도, 세상도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는데까지 가보고 하는데까지 해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고 그 어떤 고통과 연단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는데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미국의 50년대에 역사적으로 유서 깊고, 활발했던 교회들이 점점 침체 상태에 들어가면서 문을 닫는 교회들이 많이 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인지 그에 따른 이유 다섯 가지를 들어보면 첫째, 그런 교회들은 살아남기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희망도, 비전도, 부르심의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며 살아남기 위해서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죄송하게도 제가 한국교회를 보며 느끼는 것입니다. 부흥하고 발전하기 위한 꿈을 꾸기도 전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너무 과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변화를 두려워 합니다. 네 번째, 지도자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미적지근한 영성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영성입니다.

저도 고민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모습 속에서 살아날 수 있을지 말입니다. 오늘 같이 읽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본질적인 것을 다뤄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했을 때 그 당시도 상당히 어두운 때였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던 때가 아닌 암담한, 빛이 보이지 않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소망을 주는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마저도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화려한 사역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어두워졌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뜨기도 전에 해가 지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장래를 걸었었는데 날이 갈수록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다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같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뭐라 하는지 여러분 들어 보셨습니까?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얼마나 교회를 비웃고 있는지 들어 보셨습니까? 교회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데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길바닥에 던져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했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 시대의 현실인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교회에서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가 아닌, 교역자들끼리 목사들끼리 모여서 우리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이야기가 아닌 정말 세상 사람들이 아니면 교인들이 술  한잔 나누며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들어 보셨냐는 것입니다.

질문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뭐라 하더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무어냐 물어보실 때 여러 선지자들의 이름을 대며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무어냐 하더냐고 물어 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말고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느냐?" 하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여러분의 가슴 속에 교회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까? 세상 사람과 나의 동료가 나를 향해 뭐라고 하든, 같은 노회 같은 총회에서 같이 목회하는 사람이 무어라 하든지에 상관없이 나는 교회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리십니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굉장히 고달픈 질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가끔 예수님이 가여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두근두근 하셨을까! 열 두 명을 끌고 다녔는데 한 놈 이라도 내가 누군지를 알고 있는지 말입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사역입니다.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얼마나 예수님이 외로우셨을까! 아무도 용기를 내지 못할 때 베드로가 대답하게 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반응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대답이 그렇게 즐거우셨습니다. 그 두근거리던 마음을 한 명이 알아 주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즐거워 하시며 웃으셨을 것 같습니다. "보라 너에게 복이 있도다 너에게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네가 안 것이 아니요 어디서 지식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요 어디 가서 배우고 전달받아 온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게 하셨도다." 그리고서 기쁜 마음 벅찬 마음을 가지시고 예언하시기를 "네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한다

탈출구가 없고 다름 방법, 다른 길이 없을 때 우리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의 첫 번째는 우리의 신앙 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은 이십 년, 삼십 년 전에 뿌려놓은 것 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축복과 형통을 강조하다가 보니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뿌린 것을 우리가 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전에 뿌려놓을 것을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면서 동전의 양면이 있는데 한 면만을 주장했습니다. 한 쪽만을 강조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받고 형통한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만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기쁨과 감격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같이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가볍게 만들고 쉽게 만들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대로 그 문장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초대교회 때 이 고백 때문에 많은 사람이 순교했습니다. 이 고백 때문에 자신들이 생명을 걸고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 믿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 듣고 은혜 받은 것으로 회개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때는 예수를 믿겠다는 것이 집에서 쫓겨나고 가정에서 쫓겨나며 마을에서 쫓겨나며 먹고 살 길이 막연해지며 순교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 그 고백 때문에 교인들은 사자의 밥이 되었고 굴 속에 갇혔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교회관이 잘못되어 있는 것, 목회관이 잘못되어 있는 것, 우리가 교인들을 잘못 가르치고 잘못 교육시킨 것은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누구라고 하십니까?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한 확신이 없이는 이 위기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목회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제 주위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로 헌신하며 선교사로 나가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12년 전에 저를 포함한 열 일곱 명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저를 뺀 모두가 전부다 선교사로, 목회자로 나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장로가 되고 집사로 안수를 받은 사람 중에 교회에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제가 한 3주 전에도 중국 연변으로 선교사로 나가시는 분의 파송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면 저는 우선 처음부터 말리고 봅니다. 가지 말라고 목사 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소명이 확실한 분들은 오기를 부리며 해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호통을 치며 목사 되는 것이 무언지 아느냐고 겁을 줍니다. 교포 2세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같은 질문을 합니다. 목사 되는 것이 무엇이며 목사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것인가를 말입니다. 목회에 고난이 얼마나 많고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말해 줍니다. 정말 목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주체가 분명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주체가 분명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을 하니 하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는 이 말씀 때문에 용기를 얻습니다. 포기하고 싶고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주체하지 못하여서 모든 것을 다 놓고 도망가고 싶을 때, 내가 10년 20년을 투자하고 가르쳐 온 사람들이 나를 배반하고 떠날 때, 하나님께 도저히 못하겠다고 몸부림을 칠 때면 하나님은 저를 불러서 이 마태복음 16장 앞에 서게 하십니다. "다시 읽어 보아라. 교회를 누가 세우겠다고 했는지! 바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여러분은 한국의 교회와 저는 조국의 교회를 위해서 근심하고 걱정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혼자도 노력해야 하고 같이 연합해서 공동체가 연합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철저히 명심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지만 우리는 손을 놓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내 교회가 아닙니다. 내 목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목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그렇게 항의합니다. "빨간 글자 되어있는 대로 하나님이 하세요!"

우리 가족은 매일 아침마다 교회를 갈 때 차가 3대가 움직입니다. 저와 제 아내, 그리고 큰 아이 각자의 스케줄이 있기 때문에 저는 12살 먹은 막내 아들만을 데리고 교회를 갑니다. 그 아이는 유난히 교회에 일찍 가는 것을 좋아해서 엄마나 형과 같이 가면 주일에 교회를 늦게 간다고 일찍 가는 아빠와 간다며 제 차를 타고 갑니다. 그 전에 모든 식구들이 같이 갔을 때에는 가면서 꼭 주일 아침마다 큰 아들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기도를 받았습니다. "아들아, 아빠를 위해서 기도 좀 해주라."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해 했습니다. 그러나 "아빠를 위해서 가장 진실하게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야. 오늘 아빠는 교회 가서 설교도 해야 하고 상담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지만 아빠 힘으로는 못 하는 거 알잖아." 아이는 너무나도 절실하게 기도해 줍니다. 제가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큰 아이는 굉장히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 아빠를 살려 주세요. 긍휼히 보세요. 하나님!"

요새는 그 아이의 기도를 받지 못하는 것이 한입니다. 요즘은 12살짜리 아들이 기도해 줍니다. 그 아이는 어려서 기도가 짧습니다. 저는 아이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기도를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기도를 받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교회에 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심정을 느끼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교회에 가고 싶지 않은 날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꼴도 보기 싫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 말합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꼴 보기 싫다고 말입니다. 너무 교회 가기 싫고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속고 사는 것 같은 때, 나의 기대를 너무 깰 때는 정말 교회에 가기 싫습니다. 교회에 가면서 주차장에 도착해서 빼놓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것은 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 교회에는 저를 위해 주일예배를 돕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 기도의 복병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투명할 정도로 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래야 저를 위해서 구석구석을 구체적으로 기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나는 정말 교회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왔으니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설교할 말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제가 한 60명 되는 그 분들과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합니다. 제가 무릎을 꿇으면 제 어깨에 손을 얹고 그 분들이 간절하게 기도해 주십니다. 목이 쉴 때까지 제 머리에 그 분들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기도해 주십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 목사님 오고 싶지 않은데 왔답니다. 마음 좀 고쳐먹게 해주시고 우리 목사님 좀 살려 주세요."

저는 매주를 그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교회입니다. 나는 도저히 세울 수가 없습니다." 누가 하는가의 주체가 확실히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께서 하셨고 그 분께서 말씀하셨고 그 분께서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빨간 글자입니다. 그 어떤 면에서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이야기, 나쁜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암흑과 같은 이 과정이 지나가면 또 빛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을 우리가 알지 못해서 조급해 하고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당신이 직접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과정이 분명해야 한다

세 번째는 과정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잘은 모릅니다만 인터넷을 통해서, 혹은 신문과 언론을 통해서 한국교회를 모르는 사람이 멀리서 놓고 볼 때  한국교회는 지금 너무나도 파괴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서 극과 극에서 투쟁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것은 세상의 나라가 그렇게 하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비평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건전하고 확실한 비난과 비판이 교회에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건설적인 비판, 생산적인 비난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속에는 파괴적인 행위가 많고 하나님의 세우신 교회들을 부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양 행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우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물론 위기를 느끼면 서로 비난하게 됩니다. 잘 될 때는 다 덮어주다가도 자신이 잘 되면 옆에 있는 사람을 신경쓰지 못하다가 위기가 오고 일이 뒤틀리기 시작하고 내 마음이 불편하고 자신감을 상실할 때는 다른 사람이 잘 하는 모습을 이상한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공원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는데 삼천년이나 된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과학기술로 그런 나무들을 베게 되면 몇 시간 안 걸립니다. 세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거해서 잘라버리려고 하면 몇 시간이면 자를 수 있습니다. 과정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우기 위해서, 짓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청사진을 가지고 곳곳의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우셨던 그 분은 오늘도 서울을 향해서 울고 계십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곳을 보시며 울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청사진을 가지고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나와 함께 교회를 지을 자, 교회를 세울 자를 부르십니다. 세울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 전에는 한국에 나오면 한국을 부러워 했습니다. 목회가 잘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한국을 나오게 되면 이런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개척이 불가능하고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동정을 하고 위로를 해야 하지만 은근히 화가 납니다. 세상에 언제 이천 년 동안 개척이 쉬운 때가 있었나 싶어서 말입니다. 개척이 왜 힘드냐고 물으니 땅도 없고 건물 얻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 그 사람에게 예수님에게 가서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때도 없었고 바울 역시 그랬고 얻어터져가며 돌에 맞아가며 사람들이 집어던지고 배가 파선하고 강도 당하고 언제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개척이 쉬운 때가 있었다고 개척이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세워야 합니다. 부수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는 늘 도적질 하며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것도 풍성하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목회를 하실 때 교인이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천명이든 만 명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대로 교회를 세우시고 열심히 세우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세우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단 베닛'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 분은 신체장애인입니다. 한 쪽 다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구로서 미국에서 가장 높은 14,410피트, 약 5,000미터 정도의 산 양쪽에 클러치를 하고 산을 올랐습니다. 산을 오르다 아주 큰 고비가 있었는데 바로 빙산으로 된 절벽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두 다리가 있어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데 '단 베닛'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앞에서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음으로 깔려 있는 산을 건너기 위해 같은 팀의 사람들끼리 신을 바꾸어 신었습니다. 못이 나와 얼음 위를 걸을 수 있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난감했습니다. 다리는 하나가 없고 클러치는 있고 그런데 그때 그의 딸이 "아빠, 할 수 있으니 하세요." 자신의 딸의 충고에 도전을 받고 한 발에만 스파이크가 달려있는 신을 신고 자신의 클러치를 들고 얼음이 깔려 있는 절벽을 지나가는데 다른 방법은 없었고 자신이 쓰러지는 것이었답니다. 쓰러지고 손으로 끌어 올리고 다시 쓰러지고 손으로 끌어 올리고 다른 사람은 10분, 15분 걸리던 것을 장장 6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가다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고 견딜 수 없다고, 자신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6시간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극복하고 이겨나게 한 것은 옆에서 격려했던 딸의 음성이었습니다. '아빠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아빠입니다. 아빠는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할은 조금 바뀌었지만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힘들어서, 감당할 수 없어서 저와 같이 연약한 사람은 하나님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올라 온 것만 해도 주님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더는 못 하겠습니다. 더 이상 나는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제게 찾아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원기야 ! 너는 세상에서 최고의 아들이다. 너는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죽어도 세우고 사람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세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찾아와서 그것을 파괴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할 때 성령 하나님과 함께 청사진을 들고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 "주님, 연장을 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결과가 분명해야 한다

네 번째는 결과가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무리 사탄의 세력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 교회와 교인들을 뜯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어두워도 기억해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왜 우리의 목회와 교회에 희망이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이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교회를 이길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막강한 힘! 멸망하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도록 없어지지 않는 영원토록 건재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한 그 약속은 이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대로 효과가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인본주의, 세속주의, 다원주의, 도덕과 윤리의 타락과 교회가 힘이 없어 보이며 목회의 의욕을 잃은 것과 같이 방황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칼 바르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세상은 적극적으로 세속적입니다. 현대의 많은 영향들은 그리스도의 많은 관점을 파괴하며 믿는 사람들 신앙을 버리도록 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해당하는 가장 합당한 답은 믿는 사람들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영적인 적극성을 띤 권능을 회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강압적인  적극적인 세속적인 압력 앞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자꾸 앞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보는 대로 그들에게 어려움과 고통과 좌절과 낙망의 여러 가지의 조건과 환경이 있었지만 거기에서 포기하지 말고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의 문제는 우리 앞에 어려운 과제가 놓여 있는 것보다 우리의 할 수 있는 저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감이 분명해야 한다

다섯 번째는 이러한 과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나 성령의 권능, 어느 것도 상관없이 어쨌든 세상이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인한 영적인 감동과 권능,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한 고백을 들으시고 칭찬하시기를 "이것은 혈육으로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으로 하늘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꿈이나 비전에 대해서 생각할 때 많이 하는 잠언의 말씀에 환상이 없으면 사람은 방자해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이야기하는 꿈은 어떠한 상징적인 비전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받았던 계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어디로 열리며 하나님의 민족이 어디로 나갈 지 알려주는 확실한 계시. 하나님의 사람들이 받았던 그 환상.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영감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우리는 우리의 혈육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머리에 들어있는 지식은 많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학문을 많이 연구했고 더 많은 학위를 받고 더 많은 책을 읽었지만 우리는 영감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교인들 앞에 이것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걸자고 단호하게 신념에 찬 확신이 있는 그러한 리더십에 찬 사람들이 너무나도 없습니다. 이 길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고 같이 기도 하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기뻐하고 감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같이 듣고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 마치 유행처럼 올해는 이거 해보고 내년에는 다른 것을 해보는, 또는 어디가면 이게 된다고 해서 쫓아다니고 저기 쫓아다니는 유행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각오가 분명해야 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시작은 멋지게 하나 제대로 각오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끝까지 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교회가 산다는 것은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영감은 받았지만 그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베드로가 금방 말립니다.

이것을 통해서도 사실은 우리의 목회의 현장에서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비참한 패배는 가장 멋진 성공 후에 따라 옵니다. 모든 사람의 사역을 보시면 다윗도 엘리야도 다 그러했습니다. 내가 좀 이룬 것 같이 내가 좀 알려진 것 같이, 이젠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것 같고 이제 하면 된다고 하는 착각이 들 때 실패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명답을 하고 나서 자기 제자들 앞에서 떴습니다. 베드로가 우쭐했습니다. 그래서 영감을 받은 김에 끝까지 사용하고자 "아니 되옵니다." 저는 생각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영감을 받아도 우리는 이 꼴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절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지 마십시요.

베드로가 오늘 이름을 두 개 받았습니다. 하나는 베드로, 하나는 사탄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일을 생각하던 사람이 아버지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렸습니까? 각오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단은 잘 합니다. 그러나 결과를 각오하고 오늘의 삶을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겠다고 하는 각오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나의 영웅 짐 엘리엇

어느 선교사가 말하기를 가장 효과적인 선교전략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신 분, 저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분 계시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짐 엘리엇'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1982년 저에게 짐 엘리엇의 책을 선물하였습니다. 그것이 최근에 번역된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짐 엘리엇이 17살 때부터 썼던 그의 일기였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7살 때부터 입학원서를 내면서 딱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대학에 갔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서 미전도 종족을 찾아 선교를 나가겠다고 하는 것이 고등학교 때부터의 그의 꿈이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회장으로 알려지고 명성을 얻고 졸업식에서 연설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미전도 종족을 찾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살에 기숙사에 들어가서 22살에 졸업하기까지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묵상하면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자신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단 하나의 목적, 아무도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전도 종족에 나를 보내 주시기를 말입니다. 대학에서 한 자매를 만나 사귀면서 결혼한 사람이 엘리자벳이었습니다. 두사람의 꿈과 이상이 너무나도 잘 맞았습니다. 결혼할 때가 다 되어 엘리엇이 청혼을 하는 대신 절교를 선언합니다. 딱 한 가지 이유였는데 자신이 교제했던 엘리자벳이 자신의 선교지까지 따라올 것 같지가 않아서였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내가 하나님 앞에 작정한 삶을 방해한다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고 절교를 선언합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같이 했던 비슷한 또래의 다섯 친구가 모입니다.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가 스물 아홉이 되었을 때 남미의 에콰도르라고 있는 조그마한 나라, 그 당시에 식인종으로 알려졌던 난폭한 부족에게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단기선교를 갔다가 에콰도르에서 엘리자벳을 만납니다. 놀랐겠지요? 그곳에서 엘리자벳에게 선교의 마인드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이 묻어두었던 사랑의 마음을 불태우며 돌아가지 않고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친구들과 모여서 에콰도르에 대해서 구체적인 꿈을 꾸고 준비를 해서 스물 아홉의 나이로 다섯 명의 젋은이들이 세 사람은 결혼하고 두 사람은 싱글로 에콰도르에 가게 됩니다.

선교를 떠나면서 그들은 이렇게 인사를 나눕니다. "엘리자벳, 가서 자리 잡아 놓을께. 빨리 내려와. 그 아크족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일단 우리가 먼저 가서 친구를 만들어야지. 그리고 집도 준비할 테니 그 때 만나자."고 하며 작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소속된 선교단체에서 조그마한 경비행기를 사용해서 아크족들이 살고 있는 해변가에 그들을 풀어 주고 떠났습니다. 선교본부에서 그들에게 지시하기를 아크족은 워낙에 잔인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아침 저녁으로 무전기를 통해서 안부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선교본부에 자신들의 안전과 그 곳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일주일쯤 지난 후에는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아크족들이 보고서 도망갔다는 내용들을 전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뒤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자신들이 두렵다는 이야기 등의 보고들을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아침에 소식이 끊어지고 저녁이 되어도 연락이 오지 않아 걱정은 하면서도 원주민과 접촉이 이루어져 마을에 갔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하루, 이틀, 사흘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일은 계속 흐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선교 본부에서 그들을 데려다 주었던 경비행기의 조종사를 그들을 내려주었던 해변가에 다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찾아온 조종사는 경악을 하고 말았습니다. 왜냐 하면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시체로 물 속에 떠 있었습니다. 나중에 신문보도를 통해서 알려졌지만 그들은 모두가 호신용으로 권총을 차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려서 시체를 확인해 보니 옆구리가 창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다섯 명 모두가 총을 빼려고 했던 흔적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총이 있었지만 동물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으며 그들은 그냥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소식이 미국과 유럽에 알려지면서 서구세계는 몽땅 다 뒤집어 졌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물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조차 이해할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왜 미국의 이 좋은 젊은이들이 다른 것도 아니고 개발되지 않는 나라에 들어가서 그들을 도와주겠다고 찾아갔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느냐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깊이있게 보도했던 '라이프' 매거진에서 표제 기사를 다루면서 제목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낭비인가" 다른 방법, 다른 차원에서도 이 미개인들을 도와줄 수 있었는데 젊음만 가지고, 꿈만 가지고 찾아들어가서 젊은이들이 이렇게 죽으면 아내들은 어떡하고 아이들은 어떡하냐며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음에 안타까워했습니다.

전능자의 그늘

그 기사를 썼던 '라이프' 매거진의 기자가 이 기사를 쓰기 전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벳을 찾아가 이야기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낭비인가를 말입니다. 너무 슬프겠다고, 들어가서 복음 한 번 전하지 못하고 도착하자마자 잔인한 사람들의 창에 찔려서 죽게 됨을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짐 엘리엇의 아내는 그 신문기자를 쳐다보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우리 남편의 죽음이 낭비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죽음은 우리 남편에게는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서 살다가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며 그는 거기에서 죽기 위해 에콰도르에 갔습니다. 그는 그가 평생 꿈꾸어 왔던 것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다시는 남편의 죽음을 낭비였다고 하지 마십시요!" 하면서 엘리자벳은 자기 남편이 17살 때부터 썼던 일기를 모아 '전능자의 글'이라는 책으로 편집해서 출판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다가 충격적인 문구를 발견해 내었습니다. 거기에서 19살 때 엘리엇이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나는 기도합니다. 나의 아무런 쓸모없는 장작개비와 같은 삶을 불태우소서!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불탈 수 있으니까 나의 인생을 소멸하소서! 나의 하나님! 왜냐하면 나는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소명을 완수할 수 있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주님과 같이." 19살 때 그가 남긴 기도입니다. 33살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처럼, 바울과 같이 선한 싸움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몇 살에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사람들이 완수할 수 있는 고백. 엘리엇은 그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짐 엘리엇이 남긴 유명한 구절입니다. "다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아무래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자를 어리석다 하지 마라."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난 후에도 정말 그것을 붙잡을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나의 꿈이 교회의 성장입니까?  나의 꿈이 나의 출세입니까? 나의 꿈이 나의 명성입니까? 올라가는 것입니까? 저는 그 책을 선물 받았을 때 만으로 스물 일곱이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저런 젊은 나이에 주를 위해서 순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22년이 지났습니다. 제 나이는 쉰이고 세월은 다 지나갔습니다. 저는 짦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속에는 너무나도 큰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지난 나의 22년이 짐 엘리엇의 일주일과 비교할 때 값어치가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단 일주일을 살아도 그렇게 깊이있는 삶을 살았던 짐 엘리엇 앞에 구차하게 오래 살면서 발버둥치는 나의 모습을 보며 무엇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짐 엘리엇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어차피 붙잡을 수 없는 것은 놓아 버려라. 그리고 영원히 놓쳐서는 안되는 그것을 붙잡아라." 제가 살다가 제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셋째 아들을 낳고서는 '엘리엇'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엘리엇'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보다도 우리 셋째를 부를 때마다 나의 영웅인 짐 엘리엇이 기억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저에게 구차하게 살지 않기를, 치사하게 미련두고 살지 않기를, 주를 위해 영원히 놓아서는 안될 것을 붙잡고 각오하고 살아라.

짐 엘리엇과 같은 사람이 우리 조국에 한 명만 나타나면 우리 모두가 뒤집어집니다. 왜냐하면 선교가 되지 않는다고 절망에 빠졌던 미국 선교에 1950년대 짐 엘리엇의 죽음은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에 헌신하게 만드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수많을 젊은 이들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도 짐 엘리엇처럼 살고 싶다." 어떤 면에서 저는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러분과 똑같은 아쉬움을 가지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을 세워 주십시오."

짐 엘리엇처럼 멋지게 사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새로운 각오로 목회에 임할 수 있다면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오늘도 엘리엇의 죽음은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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