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22) 교갱협 제12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요한복음 15장 1~8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저는 모태신자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장로셨고, 어머니는 권사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밖에 모르고 교회가 모든 것이라고 배우며 자라왔습니다. 중3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신학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신학을 잘 배우기 위해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중에 고민이 생겼는데 과연 나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변함없는 3가지 영적 화두

저에게는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영적 화두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나는 주님 안에 있는가? 둘째, 주님은 내 안에 계시는가? 셋째, 나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얻는가? 인데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되는 자기 물음이고, 자기 점검표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물음을 하게 된 동기가 있는데 대학2학년 때 만난 저의 은사님 때문입니다. 저는 모태신자로서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서 자랐고 고등학교 때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이단론이었습니다. 침례교도 이단이고, 감리교도 이단이고 심지어 통합측도 이단이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가톨릭은 적그리스도의 집단이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은사님을 만나면서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은 프랑스 7대학에서 공부하고 오셨는데 전공이 비교철학이고 종교는 가톨릭이었습니다. 그 분이 파리 7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마흔이 되기까지, 수도원에서 독신으로서 수도생활을 하듯이 하면서 살아오셨고, 고국에서 공부하러 오신 한 자매를 만나서 그때 결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천주교인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분을 통하여 비교철학을 하면서 가톨릭철학과 가톨릭신학에 대한 접촉을 했고 동양철학과 심지어 불교철학까지도 그 분을 통하여 조금 배웠습니다. 아무튼 그 분을 통해서 가톨릭영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 있는가?

프란시스의 영성, 20세기의 토마스 머턴의 영성, 17세기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저는 그 분을 통해서 그런 분들의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화두로 삼았던 하나님 안에 있다는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과의 연합, 모태신자로 자라면서 설교에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임원하고, 대학부에서 성가대와 교사로 봉사하며 그것이 나의 신앙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그 분들의 책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개념이었는데 그것을 그때 처음 접했습니다.

그런 중에 요한복음15장의 "내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말씀은 이전에도 분명히 읽었었지만 그 때는 그냥 지나갔는데, 천주교 영성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이 성경본문을 가지고 심각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 3학년 때 대학부 수련회를 앞두고 수련회 교재가 CCC의 10단계교재(Ten step) 제3권 성령이었습니다. 저는 조장이었기에 미리 그룹스터디 준비를 위한 공부를 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교재의 서론이 꽤 깁니다. 빌 브라이트 박사의 "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는가?"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평소에 고민하던 문제와 연결되어서 저도 모르게 그 질문 안으로 빨려들어 갔습니다. 뭔가 답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읽는데 빌 브라이트박사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그 대답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죄에 대해서 수없이 들어왔고 때때로 회개도 하고 했지만, 성령 충만함이라는 성경의 요청과 하나님의 명령, 그리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죄의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고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갔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저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 같았고, 그런 존재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부르짖었던 말은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제 속에 주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알려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그 말씀을 받아들이니까 거짓말처럼 제 안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저를 이미 '깨끗하여 졌다' 하시며 안아주셨습니다. 그 순간 비로소 제가 주님 안에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교리와 말이 아니며 성경공부의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쓴 글을 보면 '어두운 밤'이라는 메타포(은유)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표현해가는데 신비적인 언어, 영적 언어에 대해서 그전에는 아무리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를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통하여 어두운 밤은 죽음의 사건이었고 그 죽음을 통과한 순간 이미 깨끗하여 졌다고 말씀해주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그 때 비로소 저는 목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성도들이 영적 목마름을 느끼며 그 목마름을 채우려고 갈망하는 것을 봅니다. 저 역시 그 체험 이후에 여러 은사체험도 있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신유의 체험을 해봤지만 성도들이 은사체험을 하려고 애를 쓰는데 제가 확신하는 것은 뛰어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원한다고 되는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오직 주님이 오셔서 안아주셔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안아주시지 않으면 그건 참된 주님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구는 특히 보수적입니다. 영적 체험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 갈증을 가지고 기도원에도 찾아가고 합니다. 저는 '주님, 안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가?

두 번째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가?'의 물음입니다. 비슷하지만 저에게는 구별되어지는 물음이었고 체험이었습니다. 아프칸 피랍사태로 인해 터져 나온 것이 한국교회를 향한 손가락질이고 비웃음이고 난도질이었습니다. 가슴 찢어지는 공감을 우리도 하고 있으며 '한국사회가 한국교회를 이 정도로 보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손가락질과 비난이 나에게 의미 있을 수도 있고,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실 때는 의미가 없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 받는 비난과 손가락질은 의미있는 것입니다.

니체가 한 말을 다 아실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 당시 독일교회 지도자들이 니체에게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랬더니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가보면 신이 죽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교회는 신의 무덤이다"라고 했습니다. 니체의 주장은 교회가 오늘날 신의 무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기독교와 우리 자신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이 있는 것으로 보일까요? 우리를 보며,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보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인정할 때는 어떤 손가락질도 의미가 없겠지만, 와서 보고 이 교회는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그 비난을 모두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갈림길 앞에서 저는 믿습니다. 무엇을 믿는가 하면 안티기독교인들과 네티즌들의 손가락질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 안에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찬수 목사께서 행한 설교에서도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는가? 아프칸 피랍사태를 볼 때 정말 심각한 고민을 하게 하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 옳은 접근이고 해석이라고 봅니다.

저는 대구 범어교회에 95년도에 부임해서 현재까지 13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 이렇다 할 아무런 문제나 갈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어느 교회나 가지고 있는 문제를 겪고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부임해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늘 저에게 전화를 걸어주시는 장로님이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늘 같은 말을 반복하셨는데 "목사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긴 얘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날도 무슨 이유에서 인지 모르겠는데 "목사님, 그런 식으로 목회하면 우리 범어교회에서 계속 목회 못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제가 39살에 부임해서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60세가 넘으신 장로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교회에 나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목회를 못하고 떠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다. 저는 그런 기본 배짱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기본적인 믿음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는 그 장로님도 아무 말씀도 안하셨습니다.

99년도에 교회를 확장하면서 부속건물로 교육관을 지었습니다. 서울의 많은 교회들은 이미 성도들의 친교의 장을 마련하고 있는데, 범어교회도 교인들의 친교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커피숍을 만들고 이름을 '우물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중에도 성도들이 모여서 대화하고 참 좋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한 노(老)성도께서 노발대발하며 나타나셨습니다. "목사님, 주일에 이게 뭡니까?" 노(老)성도들의 시각에서 주일성수를 하는 철두철미한 신앙으로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일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 귀에 들려진 얘기는 이 커피숍 문을 안 닫으면 폭탄을 들고 와서 경상도 말로 "뿌샤뿐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101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노(老)성도들이 많고, 뿌리 깊은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순간에도 겁이 안 났습니다. 저는 평소에 겁이 많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는 물불을 안 가립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 어느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뿌샤뿐다'고 한 노(老)성도님은 우리 교회에서 영향력이 큰 분이셨습니다만 저는 겁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이 일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교회의 유행을 따른 것이며, 목사의 허영심으로 만든 것이라면 그 분이 부수기 전에 하나님이 부수실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안 부서진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주님이 계시는가?

오늘 한국교회를 향하여서 무섭게 난도질하는 어떤 네티즌들의 얘기라도 만약에 한국교회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떤 연약한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이런 일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벌벌 떨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한국교회가 망하는 것 같은 위기를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그것 때문에 이곳저곳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주님이 계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연약할 때마다 고백하고 부족할 때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큼 지탄을 받으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만큼 손가락질 당한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결국은 못 박히시고 결국은 허리에 창 찔리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하시는 그 고백처럼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기만 한다면 세상 앞에서 요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단지 지금의 어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반성케 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겸손하게 돌아보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겸손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우리 한국교회 안에 계시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주님이 내 안에 있다고 큰 소리 친다고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한국교회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5절 말씀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열매는 베드로후서에서 신의 성품이라고 하는 8가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성령의 9가지 성품입니다. 즉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이 열매는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는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신 '온유와 겸손'일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는데 사역의 열매가 아닙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주님이 안아주심으로 인하여 신비스러운 하나님과의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이와 같은 열매가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열매를 뒤로 하고 자꾸만 사역의 열매를 계산합니다. 목회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성도는 몇 명이고, 성전건축은 했는가? 이런 부분에서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열매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한국교회에 계시면 열매는 저절로 맺어집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며, 신의 성품이며,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나의 피조물이 아니라 주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저절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3가지 영성 - 순종, 순결, 청빈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이 한국교회에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수도자들의 영성 속에 나타난 기독교의 영성 3가지는 순종, 순결, 청빈이라는 개념입니다.

첫 번째는 순종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움직이는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임했는데 순종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순결입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딜레마는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허전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욕망입니다. 욕망이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저도 수없이 그 욕망 앞에 넘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청빈입니다. 우리 교회갱신협의회만큼은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단순한 토론과 논의가 아니라 각자가 주님 앞에서 청빈의 문제를 점검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화두입니다. '나는 주님과 같이 가난한가?' '전도하는 자는 옷 두벌도 가지지 말고 전대도 가지지 말라는 그 의미가 내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가? 저는 이 설교를 감히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나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섬기는 범어교회도 지금 성전건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회자로서 깊은 딜레마가 있습니다. 성전건축을 하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교인들에게 돈으로 인하여 시험에 들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굉장히 마음 아픕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을 때 나단을 통하여 하신 말씀 "내가 언제 너희들 보고 백향목으로 내 궁을 지으라고 했느냐? 나는 너희가 텐트에 있을 때 텐트에 있었고 광야에 있을 때 내가 너희들과 함께 광야에 있었거늘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궁을 짓겠다고 하느냐?" 그런데 우리는 지금 주님의 전을 짓겠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대로도 좋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자꾸 주님의 집을 지으려고 애쓰는 것이 저에게는 딜레마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시대에 허락하셨던 것처럼, 유용성을 따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교회가 되리라고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청빈에 대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묻고,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데 우리가 뭔가를 자꾸 만들어서 치장을 하고, 포장을 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을 쉽게 사용하는데 깊이 돌아봐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얻는가?

마지막으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기도의 문제입니다. 저는 기도를 하면서 '나는 과연 기도의 응답을 제대로 받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이 많습니다. 어떨 때는 기도하면 주님이 응답해 주시고, 어떨 때는 도무지 응답이 없이 침묵하시는 하나님, 내가 주님이 안아주심으로 그 품에 안겼고, 주님이 나에게 다가오셔서, 내 안에 성령을 보내주시고, 내 안에 계셔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는데 기도하는대로 얻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고민이 많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고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7절 말씀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라는 전제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문제는 결국은 첫 번째 화두와 두 번째 화두를 피할 수 없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지속되지 않는 이상, 기도의 응답은 없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사도바울의 말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문제는 믿는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온전히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늘 묵상하고 고민하는 영적 괴로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으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신비스러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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