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23) 교갱협 제10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요한계시록 3:1~6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3장 초두에 나오는  사데 교회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저 나름대로 깨달은 것, 또 저 자신이 주님의 음성으로 마음에 듣고 담은 것들을 몇 가지 정리하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사데 교회는 어떻게 시작된 교회인지 그 배경과 역사가 어떠한 것인지 전혀 성경에 알려지지 아니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주님게서 말세 교회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일곱 교회 중에 하나로 그 교회를 향해서 매우 진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곱 교회 가운데서 가장 초라한 교회가 아닐까. 또 성적표를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가장 성적이 좋지 못한 교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사데 교회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솔직히 성경 가운데서 제일 읽기 싫은 본문 중에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읽으면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주님이 형편없어 보이는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간절하게 경고하시고 권면하시고 어떤 면에는 격려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저의 마음에 와서 닿았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저 주님께서 얼굴을 돌려버리시고 다시 기대도 안할 것 같은 교회, 꺼져가는 등불 같은 초라한 교회지만 주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본문을 다시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데 교회의 세속화

먼저 제가 이 본문을 보면서 맘에 와 닿은 것이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사데 교회에 주신 이 말씀을 주신다면 어떻게 될까?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 주님이 오셔서 이 말씀을 가지고 질문하신다면 아니, 경고하신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간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로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만약에 주님이 오셔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내가 이십 년 삼십 년 목회한 교회를 놓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뭐라고 대답할까? 무엇이라고 변명할까?

여러분도 한 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이 말씀을 받아보세요. 주님이 지금 믿음을 탓하지 않습니다. 행위를 놓고 따집니다. 나는 믿음이 좋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믿음생활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을 논하지 않아요. 행위를 논합니다. 그 행위도 사람 앞에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은밀히 보시는 주님의 눈에 들어온 우리 자신의 숨은 내면의 행위,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 행위, 그것을 가지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말만 살았지 실상은 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저는 이것을 일컬어서 현대말로 '세속화'라고 이야기합니다. 크리스천의 세속화. 사람 보기에는 그럴 듯하고 하자가 없는 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펼쳐놓고 볼 때에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사람 보기에는 너무나 온전하게 보이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고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런 앞뒤가 다르고 표리가 다른 모순을 안고 있는 신앙생활을 일컬어서 오늘날 '크리스천의 세속화'라고 말을 합니다. 입과 행동이 따로 놀고 신앙 따로 놀고 생활이 따로 놀고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의 말씀 명령에 따라서 아멘, 할렐루야 하지만 실제로는 교회 밖을 나가면 세상 가치관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가는 사람, 육신의 어떤 욕심을 추구하는 사람, 그래서 어떻게 보면 회색지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세속화'라고 합니다.

사데 교회가 이런 심각한 영적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주님의 눈에 내 자신의 삶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내가 지금 섬기는 교회가 주님의 눈에 그렇게 비치지 않을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아. 우리 교회도 괜찮아.'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질(質)이 중요하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또 놀라는 것은 주님께서는 자기 교회를 진단하실 때 양(量)을 가지고 말씀을 안 하십니다. 전부 질(質)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일곱 교회 중 칭찬을 들은 교회, 책망을 들은 교회를 다 보시면 "야, 저 교회 사이즈 크고 너 정말 교회가 크게 성장했구나. 잘했다!" 하는 곳이 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양을 가지고 칭찬하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십년 목회를 하면서 교회가 매일 늘지 않아서 주님이 책망하는 부분은 어느 한 군데도 없습니다. 양(量) 때문에 책망 들은 교회가 없습니다. 칭찬을 들었든 책망을 들었든 모두 주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질(質)입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숨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목회해서 교회가 불어나고 교회가 커지면 그것이 목회 잘하는 것인 줄 알고 은근히 우쭐대고 은근히 자랑하면서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것이 별로 문제가 안 되나 봅니다. 질(質)이 중요합니다. 왜 주님이라고 양(量)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 하고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시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땀방울을 흘려가면서 찾아가시던 모습을 보면 왜 양(量)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말세 교회를 점검하는 자리에서 주님이 양(量)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질(質)을 따집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 이단을 용납한 교회, 성적으로 타락한 교회, 행실이 온전하지 않은 교회, 미지근한 교회 전부 다 질(質)을 따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 교회를 보고 질(質)을 가지고 냉정하게 평가하신다면 내가 주님 앞에 얼굴을 어떻게 들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가 교회 성장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목회하지 한 영혼 한 영혼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진심으로 고심하고 애태운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은혜의 전성기를 조심하라

사데 교회가 왜 이렇게 세속화 되어 버렸을까? 해석상의 짐작입니다만 그러나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왜 이렇게 주님 앞에 책망을 받을 정도로, 어떻게 보면 칭찬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하는 이런 초라한 자리에까지 떨어질 만큼 교회가 세속화 되었을까 짐작이 되는 것은, 먼저 제가 생각하기에 사데 교회는 화려한 전성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려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물 붓듯이 부어 주시고 성도들이 구름떼와 같이 모이고 교회 앉아서 예배를 드릴 때는 모두가 은혜를 충만히 받고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것과 같은 은혜를 누리던 전성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전성기가 위기입니다. 교회는 특히 그렇습니다. 전성기가 위기입니다. 이 전성기 관리를 잘하면 그 전성기의 은혜와 능력이 상당기간 동안 이어지면서 풍성한 열매를 주님께 드릴 수가 있지만 이 전성기에 깜빡 하고 정신을 잃게 되면 이 전성기가 가져다주는 후유증은 심각합니다.

어떤 후유증이 주로 많이 옵니까? 여러분이 교회 가서 사람들을 한 번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유명했다던 교회를 한 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다 입만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모습들은 우리는 많이 봅니다. 그런 교회를 가서 보면 한 때 자랑할 만한 굉장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또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도 떠벌리고 믿음이 좋은 것처럼 이야기 하고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자랑을 하지만 가만히 보면 영적으로 다 죽어 있습니다. 다들 화려한 과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데 교회도 그러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한참 은혜를 부어주실 때 그 은혜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방심하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더 중시했습니다. 영적인 부분, 질적인 부분보다도 양적인 부분,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더 많을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목회자의 경우는 그렇게 되기가 싶습니다. 교회가 부흥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렇게 되고 조직이 자꾸만 비대해지고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프로그램이 다양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여러 시설이 자꾸만 늘어납니다. 또 헌금이 많이 들어오니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 여기도 손대고 저기도 손대고 이 곳 저 곳을 고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목회자도 자기도 모르게 본질보다도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은혜의 때가 주는 굉장히 위험한 유혹입니다. 본질보다도 비본질에 더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한 때 큰 교회, 한 때 유명했던 교회들이 나중에는 파리를 날리게 되는 기막힌 상황을 맞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을 때 목회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제가 큰 교회를 목회했기 때문에 위기를 자주 경험했습니다. 조금만 잘못을 하게 되면 끝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커도 목회자의 마음은 한 영혼에 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몰려와도 목회자의 마음은 주님처럼 한 영혼에 집중할 수 있는 순수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간이 필요해서 화려한 교회를 지었다 할지라도 목회자의 영적인 눈은 교회에 가 있으면 안 됩니다 사람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영혼, 사람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이게 본질을 붙드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러지를 못하고 교회가 한참 잘 될 때 비본질을 붙들어 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교인들을 세상 따라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비본질에 주목을 하게 되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 목회자의 입에서 진정한 메시지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비위를 맞추는 메시지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요새 말로 말하면 값싼 복음 전하는 일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모이던 사람이 행여나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듣기 좋은 메시지를 전해야 하고, 또 온 사람들이 기분 좋게 예배드리고 가게 하기 위해서는 메시지에 자꾸 물을 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선택할 때도 교인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좀 부담스럽겠다. 요사이 세상 살기가 어려운데 교회에 와서 은혜스럽게 말씀을 듣고 가게 해야지 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 중에 힘들고 전하기가 어렵고 사람들의 마을을 좀 우울하게 하는 것은 자꾸만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값싼 복음을 계속 전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메시지를 잘 전한다고 하는 목사님들의 메시지는 완전히 열려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든지 텔레비전을 보든지 무슨 말씀을 전하는지 다 나오는데 전해야 할 말씀을 못 전하는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아니, 내가 목회하는 교회의 생명이 걸려있는 문제들은 감히 건드리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은혜스러운 부분들만을 자꾸 이야기하다 보면, 다시 말해서 복음의 특권만을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복음의 책임을 거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은혜 받은 자의 책임에 대해서, 은혜 받은 자의 순종에 대해서, 은혜 받은 자의 헌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전성기를 누릴 때 빠질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함정입니다.

 

루터가 빠진 함정

루터가 이런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저는 은퇴하고 나서 교회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생겨서 교회사 책을 열심히 읽습니다. 제가 무척 아끼는 '필립 샤프'의 교회사 같은 것은 1권부터 8권이 종교 개혁, 16세기까지의 교회사인데 엄청납니다. 양이 많아 시간나는 대로 틈틈이 읽습니다. 거의 70%를 읽은 것 같은데 읽다가 루터를 보고 놀랐습니다. 루터가 발견하고 루터가 깨닫고 루터가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가지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놀라운 진리의 한 마디를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루터는 평생 이 복음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꼭 붙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 종을 가지고 죽은 암흑시대를 되살리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행위는 구원과 관계가 없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가르쳐서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버리면 나중에는 값싼 복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루터가 그랬습니다. 루터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값없이 은혜로 받는 이 구원을 누구든지 체험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삶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어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 받은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은 남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고 너무 지나치게 율법적인 강조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루터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만을 강조하고 거기에만 힘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삼사십년이 지났습니다. 루터가 이제 나이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참 슬픈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95개조를 내다 건 비텐부르크 그 도시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거기에 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로만 가르치다 보니 나중에는 대학생이나 그 도시 시민들의 생활이 너무 방종해 버린 것입니다. 루터가 감당을 못할 만큼 방종해 버렸기 때문에 너무 마음이 상해서 루터가 그 도시를 떠나서 이사를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붙들어서 이사를 못 갔습니다. 또 한 때는 너무너무 방종하는 그 사람들을 보고서 속이 상해서 설교를 중단해 버렸습니다. 한 동안 설교를 안했습니다. 설교 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복음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지만 우리가 복음의 균형을 잡지 못하면 그렇게 소중한 복음을 값싼 복음으로 전락시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칼빈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칼빈은 정확하게 우리가 복음을 강조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약점을 꿰뚫어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자기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입증해야 한다."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 신앙은 무엇으로 입증할 것이냐? 자기의 거룩한 삶을 가지고 입증해야 한다. 그러므로 값없이 구원을 얻는다고 해서 되는대로 살면 된다. 어떻게 살아도 믿음이 있으면 구원받는다. 이런 식으로 교인들을 가르치면 안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 다음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칼빈 사상의 중심이 아닙니까? 제네바는 칼빈이 죽고 나서 60년이 지나도 지상에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학교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신앙에 삶이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제네바 교회 같은 교회를 놓고 주님께서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라는 말을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도전

'벤스 헤브노'라는 사람이 영적 사역은 네 단계를 거치기 쉽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활동하는 단계, 그 다음은 하나의 운동이 작용하는 단계, 그 다음은 하나의 기계가 돌아가는 단계, 마지막 하나는 기념비가 서있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묘한 말입니다. 은혜의 전성기가 한창 무르익고 진행될 때는 중심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설교자, 목회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서 교회가 막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라지면 그 사람의 정신을 이어받은 운동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정신을 이어받는 운동이 사람들을 얽어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갑니까? 또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저 기계 돌아가듯 쳇바퀴 도는 단계가 오는 것입니다. 이럴 때가 되면 십중팔구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가 되기 쉬운 교회가 되고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고 나면 어떤 사람은 기념비만 남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남는 것입니다. 혼은 떠나고 껍데기만 남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어떤 단계일까? 기계처럼 돌아가는 단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저를 위한 말씀이고 사랑의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무서운 것이 뭡니까? 그리고 사데 교회가 이렇게 세속화, 세상을 비슷하게 닮아가는 삶이 무너져 버린 이러한 지경에까지 빠진 이유는 화려한 과거에 대한 후유증일 수도 있지만, 또 하나 제가 볼 때에 도전이 약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셨을 때 세상에 도전을 해야 합니다. '사데'라고 하는 동네 도시는 고대 사회의 어느 동네와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문란했던 것이 사실이고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던 죽음의 도성입니다. 그러면 사데 교회가 살아있을 때 뭐해야 하느냐? 도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싸움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가서 담대히 전해야 되고 값을 치루더라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선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기를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세상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거룩한 갈등이 지속되면 잘못하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세상을 향해 도전을 해서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이 나중에는 핍박을 유발해서 교회가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단계까지 간다면, 그 교회가 살았다는 이름을 건 죽은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 교회는 결코 영적으로 죽을 수가 없습니다. 도전하는 교회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도전을 안 하고 세상과 공존을 하니까 세상이 자신을 위협하는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체가 썩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속화된 사데 교회를 눈앞에 놓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봅니다. 성령께서 이 모양으로 저 모양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하게 만들고 우리가 어떤 면에서 부족한가를 가르쳐 줍니다.

또 하나 깜짝 놀란 것은 세속화와 열심과는 관계가 없나 봅니다. 세속화와 신앙의 열심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데 교회는 세속화 되었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교회를 놓고 주님이 왜 미지근하냐? 왜 열심이 없느냐? 하고 나무라지는 않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나무라는 식으로 나무라지 않은 것을 보면 사데 교회는 그런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야단을 친 것 같습니다. 가슴이 뜨거운 것과 거룩한 것과는 일치가 되지 않는다, 일치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것은 저 자신의 목회의 경험을 통해서도 너무나 많이 본 흔해 빠진 사실입니다.

세속화와 다른 교리와도 별로 관계가 없나 봅니다. 사데 교회는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책망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 그대로 받고 그 말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사데 교회의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화 되었습니다. 이것도 사실입니다. 보수, 보수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속화가 더 빨리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현실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까?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세속화 되는 것 하고는 함수 관계가 별로 없습니다. 제가 사데 교회를 놓고 제 나름대로 대충대충 깨달은 몇 가지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저 자신에게 적용해 본 것이고 또 우리 한국교회에 적용을 해보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세속화

여러분, 사데교회를 놓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목회하는 교회 또 넓혀서는 한국교회를 두고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될 지, 무엇을 두려워해야 될 것인가를 지적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장이 둔화되었다고 야단법석을 치지요?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양(量)을 가지고 책망하시리라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量)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까.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시고 주님은 분명히 질(質)을 따질 것입니다. 왜? 너무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교회를 놓고 주님이 믿음이 나쁘다고 책망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한국사람 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보다도 행위를 따질 것입니다. 분명히 목사든 평신도든 간에 행위를 논할 것이라고 봅니다. 주님은 한국교회의 열심을 가지고 책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만큼 열심이 대단한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열심이 많고 가슴이 뜨거운 것에 비해서 너무나 세상에 나가서 사는 삶이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큼 짠 맛이 없습니다. 우리처럼 주여 삼창 많이 하고 할렐루야 아멘 많이 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한국교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어떻게 보면 이것이 한국교회의 브랜드인데요. 그러나 문제는 가슴은 뜨거운데 교회 밖을 나가면 삶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열대 지방을 살고 밖에 나가면 한대 지방을 사는 것입니다. 너무 이상합니다. 목사도 장로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예수전도단 총재되는 로렌스 커닝햄 목사님이 예언을 했다는데 그 내용을 여러분도 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렌스 커닝햄은 20세기의 선지자입니다. 그 만큼 능력 있고 신실한 선교사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 분의 책을 읽으면 가슴이 팍팍 칼로 찔려지는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그는 말씀대로 살고 복음을 위해 희생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분이 얼마 전에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다녀가서 호주 시드니에 가서 조그만 기도모임을 하는 기도회에서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한 가지 예언을 하는데 주님이 나에게 예언을 주셨다. 내가 한국교회를 방문했었는데 한국교회가 너무 돈을 사랑한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너무 음란하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6개월 안에 한국교회에 피를 보게 하겠다."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헛되이 예언이다 뭐다 하면서 떠들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너무나 돈을 사랑합니다. 너무 돈을 사랑하고 너무 음란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하나 못 본 것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너무 거짓말을 잘합니다. 김승규 국정원장이 어느 모임에서 했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검사들이 자기 시간의 70%를 소비하는 고소 건이 있는데 그것은 위증, 사기, 무고 이 세 가지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가 검사들 하는 일의 70%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의 공통분모가 무엇입니까? 거짓말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검찰들이 에너지를 거의 다 소모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나라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공직자가 잘못을 범할 때에는 용서를 합니다. 그러나 거짓말 하는 것이 드러나면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서구사회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워터게이트가 터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공직자가 조금 잘못하는 것은 용서를 해도 거짓말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이 도덕성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기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록 기독교가 많이 쇠퇴해 졌지만 기독교가 끼친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런 가치관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민의 사분의 일이 기독교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누워서 떡 먹듯이 하지 않습니까? 일본교회는 성도들이 0.5%밖에 안 되어도 세계적으로 일본 국민은 정직하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국의 정직도는 최하위급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시지요? OECD 국가 중에서 제일 하위급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보세요. 도대체 교회가 이 땅에 5만 개가 존재하는 명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주님 눈에 보실 때에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의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다

저는 교단이고 노회고 이런 소위 교회 안의 어떤 정치적인 조직에 대해서 어떤 환멸을 느낍니다.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목회하는 교회, 이것 하나만을 가지고 제대로 하려고 해도 허리가 휠 정도인데 어떻게 교단 가지고 걱정하고 노회 가지고 걱정하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관심을 안 두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소속은 어디에 걸어야 하니까 내 친구가 있는 노회에 이름을 걸어놓고 노회에도 참석 안하고 내 할 일만 했습니다. 그저 제자훈련에만 열정을 쏟았고 전혀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저 자신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교회만이 교회냐?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가 잘못될 때 내가 그 책임을 벗을 수 있느냐?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인데. 그러므로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도와야 합니다. 잘못될 때는 잘못되지 않도록 몸부림쳐야 된다는 깨달음을 주셔서 그때부터는 노회를 나가고 나중에는 총대까지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가 보니 참 기가 막힙니다. 우리 교단이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 보수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수호한다는 입장이 아닙니까? 그럼 진리를 수호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알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말이고 그 진리를 위해서 생명이라도 바친다고 하는 영적인 지조를 가진 것이 보수가 아닙니까? 그 정도로 날이 시퍼럴 정도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생명 걸고 지키는 교단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적어도 목사끼리 모였는데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하는 짓들이 무엇입니까? 거짓말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합니다. 여기서 이 말 하고 저기서 저 말 하고 나중에는 안했다 하고 기막힌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오늘날 우리의 도덕성이 얼마나 마비되었는지 아십니까? 오늘날 목사들이 돈 때문에 영적으로 병이 들어도 문둥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돈 앞에서 맥을 못 춥니다. 교단 안에 문제가 되고 있는 심각한 문제의 배후에는 돈이 깔려 있지 않습니까? 루머들이 얼마나 많이 돌아다닙니까? 얼마나 돈을 사랑합니까? 총회장 선거할 때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봉투가 어느 것이 두꺼우냐를 놓고 선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울고 계십니다." 라는 전단을 만들어 가지고 총회 총대들에게 돌아다니면서 뿌렸습니다. "당신! 예수님이 울고 계십니다. 돈 받고 선거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울고 계셔? 안되지." 하면서 주머니에 전단은 넣고 봉투도 받습니다. 이것이 목사입니다. 돈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래 놓고 나중에는 안 했다고 거짓말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평신도들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는 절대로 평신도를 나무라면 안 됩니다. 평신도는 목회자가 만들기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것을 알았습니다. 평신도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데 교회를 놓고도 물론 그 교회 전체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만 주님이 특별히 규명한 것은 그 교회의 사자입니다. 그 교회의 사자인 것입니다. 사데 교회를 책임진 사자에게 주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자가 바로 되면 평신도는 바로 됩니다. 그 사자가 잘못 되면 평신도가 잘못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모든 책임은 교역자가 지어야 합니다. 교역자가 돈을 사랑하지 않는데 교인들이 돈을 사랑하겠습니까? 교역자가 음란하지 않은데 교인들이 간음죄를 범하겠습니까? 교역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벌벌 떠는데 교인들이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총체적인 위기는 교역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입만 살았지 실상은 주님 앞에 죽은 자와 같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말씀을 하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사데 교회를 향해서 하신 말씀 그대로 하시지 않을까? 만약에 그대로 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에게 이와 같은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할 능력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또 하나 제가 읽으면서 깊이 생각한 것은 사데 교회가 사는 길, 죽은 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는 회개하는 것이요, 하나는 이기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하고 주님이 엄하게 명령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는' 하고 명령하십니다. '이기는 자는'이라는 말씀은 '싸워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회개하고 선한 싸움을 싸워서 이기면 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끊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면 한국교회는 자신 자체의 힘으로는 회개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가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교회가 스스로 회개할 힘이 없습니다. 젊은 아이들이 밤에 못된 짓을 하고 와서 예배시간에 자기 가슴을 치고 회개하는 것 봤습니까? 성격이 안 맞는다고 티격태격 싸우다가 이혼장에 도장 찍고 그 다음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며 "주님, 제가 정말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회개하는 것 보았습니까?

회개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얼마나 회개가 철저했는지요. 그 사람들이 요즘 사는 사람들에 비해서 무슨 죄가 그렇게 많이 있겠습니까? 농사짓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많이 짓겠습니까? 그저 좁은 촌락에서 남이나 흉보고 서로 감정이 예민해서 미워하는 그 정도이지 도적질을 했겠습니까? 요사이 사람들이 범하는 무슨 죄를 범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예배시간 30분 전에 나와서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얼마나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했습니까? 저는 자랄 때부터 그것을 보고 살았습니다. 그 때는 너무 회개만을 강조해서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또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복음에도 기쁨이 있고 복음 안에 자유함이 있는데 날마다 회개하라고 하니 나중에는 회개할 것을 만들어 내느라고 고민을 할 정도로, 왜냐하면 회개할 것을 만들어내서 눈물을 좀 짜야 은혜 받았다고 할 수 있으니 어떡하겠습니까? 나는 어릴 때 그랬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잘못 되었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설교는 인기가 없습니다. 속으로는 내가 이래도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데 뭘 그리 야단이냐? 이런 식으로 자기 스스로 해석을 하고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고. 진정한 회개를 하는 사람은 선한 싸움을 싸웁니다.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잘못된 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워서 이깁니다. 주님은 이기는 자가 나중에 산다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안 되고 그래서 싸울 만한 힘을 갖지 못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따라서 세상을 닮아가는 세속화가 자꾸만 진전이 되는 것입니다.

조지 바나 리서치 센터를 아시지요? 미국의 기독교계의 여러 가지 통계를 조사하는 기관으로서는 가장 신빙성이 높은 기관입니다. 거기에서 이런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역량 있는 능력을 가진 집단이 되려면 도덕성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40% 이상의 격차가 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 믿는 사람 백 명을 세워놓고 조사를 해서 당신은 포르노 영화를 봅니까? 안 봅니까? 그 다음에 믿는 사람 백 명을 놓고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몇 명이 안 본다고 하는지 통계를 봤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 중에 나는 포르노를 안 봅니다. 라고 말한 사람이 서른 명이 나왔고 믿는 사람그룹에서는 사십 명이 나왔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도덕적인 차이는 10%입니다. 이 10% 가지고는 아무 역량을 못 끼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40% 이상,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이 서른 명이 안 본다고 한다면 믿는 사람은 70%내지 80%가 안 본다고 해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짠 맛을 내게 되고 사회에 역량을 끼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실제로 조사를 해보니 10% 밖에 차이가 안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생활에 회개가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생활의 영적 전투가 제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세상가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슷하니깐 결국에는 너나 나나 뭐가 다르냐? 성경 들고 다니는 것 외에는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제 구실을 못합니다. 입만 살았지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려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야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데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손에는 일곱 영이 잡혀 있습니다. 이 일곱 영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신 성령을 가르칩니다. 이 완전하고 충만하신 성령이 사데 교회에 힘있게 역사하면 스스로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가슴치고 회개하고 돌아서게 되고, 회개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이기는 승전고를 울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스룹바벨 당시의 귀하다는 유대 민족과 비슷합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다가 방해가 생기니까 손을 놓았습니다. 16년 동안 성전 건축은 관심사에서 떠났습니다. 자기 집안을 잘 가꾸고 자녀 잘 키우고 재산 늘리는 것에만 16년 동안 관심을 가지고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폭삭 젖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자고 합니다. 16년 동안 풀려있던 손이 무슨 힘으로 다시 재건을 합니까?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스룹바벨이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만 되느니라.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가 없다. 손 풀린 사람들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힘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싶습니다.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회개할 힘이 없습니다. 손이 풀렸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스룹바벨 앞에 산이 평지가 되듯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더러운 악한 세력들이 평지가 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야 우리가 회개를 하고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찰스 휘니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1880년대 그가 가는 곳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회개는 눈물 몇 방울 짜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여,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직업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아니하는 직업이면 직업을 버렸습니다. 철저하게 돌아서고 철저하게 울었습니다. 그 당시의 회개는 그랬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때 회개하고 새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 중에 188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의 주축세력, 중심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앞장서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이 시작되었고 금주운동이 시작되었고 여성권리 신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 근대화를 이루는 초석이 된 것이 아닙니까?

진정으로 회개하고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는 사람을 주님이 사용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에 임한 성령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주님의 영이 임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손에 있는 일곱 영이 우리를 사로 잡으셔야 합니다. 루터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칼빈이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웨슬레와 휫필드가,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휘니와 하디와 길선주 목사와 우리 한국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성령의 능력에 붙들려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할 수 있었고 더러운 죄를 철저하게 씻어내고 성령을 모시고 사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목사지만 못합니다. 회개할 힘이 없습니다. 만삭이 되었지만 애를 낳을 수 없는 산모와 같습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회개를 하고 싶지만 눈물도 안 나옵니다. 죄를 범했지만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한 감각도 없습니다.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시는데 주님은 싸워서 이기라고 하시는데 나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의 형편이요 한국교회의 형편입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재주 피우는 사람, 사람들 웃기고 사람들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나 인기가 있지 진짜 주님 보시기에 죽어있고 썩은 냄새가 나는 곳은 손도 못 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주를 찾는 사람이 거짓말을 함부로 합니까? 어떻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젊은이를 가르치는 사역자들의 70%가 칠계를 범했다는 말이 돌아다닐 정도로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될 수가 있습니까?

 

창조적 소수가 만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

제가 깨달은 또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의 몇 사람을 놓고 기대를 거신다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을 주목하셨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말은 성적 타락에 빠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적 범죄에서 자기를 지킨 사람들, 사데 교회에 이런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의 항체였습니다. 사데 교회의 자존심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이 사데 교회의 몇 사람이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는 일에 주역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사데 교회를 다시 거듭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사데 교회의 거룩을 회복하는 길에 이 몇 사람이 앞장섰을 것이요, 사데 교회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에도 이 사람들이 앞장서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사데 교회 영적 싸움에서 이기도록 하는 일에도 이 사람들이 생명 걸고 앞장섰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역사를 보시면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소수를 주목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는 의인 열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본 신약 시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가장 약한 자 몇 사람이요 가장 작은 자 몇 사람이 나중에는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루는 놀라운 기적의 현장이 바로 신약 교회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삼년 동안 오셔서 사역을 하고 떠날 때에 그의 눈에 들어 온 사람도 열두 명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천 명의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이 주목한 사람은 몇 사람입니다. 주님의 손에 다듬어진 몇 사람이 주님에게는 소망이요 희망이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중세기 암흑시대를 여러분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저기 등불을 밝힌 사람들을 여러분이 한 번 보세요. 위클리프와 롤러드파, 보헤미안의 얀 후스, 독일의 루터, 제네바의 칼빈,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그들과 함께한 소수의 무리들이 그 시대를 밝혔습니다. 그 몇 사람 안 되는 사람들이 생명 걸고 싸웠습니다. 칼빈은 날마다 화형장으로 끌려갈 각오를 하고 평생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몇 사람이 시대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런 소수를 놓고 역사가 토인비는 말합니다. "역사는 창조적 소수가 바꾸어 간다." 이 창조적 소수, 세상의 세속 역사도 창조적인 소수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도 창조적인 소수, 성령의 손에 붙들린 몇 사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2005년 세계침례교대회가 영국에서 모였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릭 워렌이 한 말이 신문기사에 난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오늘날 유럽교회는 너무나 답답할 정도로 쇠퇴해 가고 있지만 이 유럽교회의 사회와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헌신된 2%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2%의 헌신된 사람만 나오면 유럽을 다시 종교개혁의 시대처럼 살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릭 워렌의 견해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희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몇 사람 안에 들고자 하는 간절한 불타는 마음이 있습니까? 내가 이 몇 사람 속에 붙들려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 기대하시는 몇 사람 속에 여러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한국교회 목사 오만 명 육만 명이 다 회개하고 다 이기고 다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가능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몇 사람,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사람을 주목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향하여 열정을 가지고 가슴을 불태우는 몇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십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거룩하게 구별하고 '주님! 나를 사용하시옵소서.' 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놓는 자 몇 사람을 주님이 주목하십니다.

여러분! 그 몇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그 몇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그 몇 사람의 소명을 여러분이 감당할 수만 있다면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놓고 희망을 가지신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를 주님이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고 한국교회에 대해서 반드시 기대와 소망을 가지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항체요, 여러분이 한국교회를 거룩하게 구별시키는 짠 소금이 될 수 있다면, 여러분이 정말로 선한 싸움에 앞장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면 한국교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의 영이 이 자리에 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몇 사람으로 구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를 구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를 구별해 주셔서 우리에게 회개할 것이 있다면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는 능력 주시기를 바라고 우리로 하여금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길 수 있는 새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장되고 우리가 이렇게 주님께 쓰임 받기만 하면 아무리 한국교회가 세속화 되었다고 할 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임재하신 주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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