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8/23) 교갱협 제5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디모데후서 4장 6~8절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새벽기도는 평생을 해도 힘이 듭니다. 새벽이라는 구약의 말씀을 심도있게 다뤄볼 기회가 있었는데 새벽이라는 말은 '샤하르'라는 합성어입니다. 한 단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의미가 합하여진 하나의 복합명사입니다. 이 '샤하르'는 해석하면 '눈꺼풀에 날개를 달다'라는 뜻입니다. 제가 그 단어의 의미를 곰곰이 묵상하면서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저는 어제 강원지역협의회의 족구를 보면서 절망을 느꼈습니다. 저의 다른 목회의 소원이 있다면 대구내일교회를 족구로 한번 꺾는 거였는데 어제 강원도의 족구 실력을 보면서 이제는 족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영역에도 아무리 목사라도 선후배 동료들과 마련된 공동체 속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는 아직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목회의 철학과 모든 영역에 대해서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두 번 중퇴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슬쩍 보아도 불량스럽게 보이지는 않지요? 불량해서 중퇴를 했던 것이 아니고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퇴를 하고 고3 때 중퇴를 해서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저의 어머님이 장사를 하시던 가게가 불이 나서 어머니는 빚쟁이들 때문에 자식 넷을 낳아놓고 어디로 간다 온다는 말도 없이 도망가버렸고 그래서 가족이 졸지에 해체가 되었습니다.

저도 당장 먹고 살 궁리를 하기 위해 '이휘돈' 이라는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서 인천에 가면 주유소가 있는데 겨울에는 두툼한 방한복도 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쓸 용돈도 준다니 가보자는 말에 인천에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속은 것입니다. 부둣가에서 이상한 놈들한테 하여간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둘이서 다시 서울로 왔는데 갈 데가 있어야지요. 결국 취직한 곳이 그 친구의 먼 친척 뻘 되는 아저씨가 소개한 새를 파는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어디냐 하면 신촌로터리에 있는 아케이드 입구에 위치한 새집이었습니다. 거기서 한 달에 4천원씩 받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들이 밤에 후다다닥 날개짓을 하면 완전히 공해입니다. 거기서 생활을 하면서 새를 키워도 봤고 새를 잡으러 다녀도 봤고, 팔아도 봐서 새 전문가는 아니어도 아마추어 수준은 됩니다.

 

백조의 울음소리

새 가운데 암수를 제일 구별하기 어려운 새가 십자매입니다. 십자매는 아무리 보아도 모릅니다. 이 새는 울려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구별합니다. 십자매의 암수 구별하는 방법은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사람이 새의 울음소리를 내주면 십자매가 울기 시작하는데 그 소리를 빨리 듣고 구별해서 팔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안 생깁니다. 제가 한번은 우리 교회 교인집에 심방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댁에 잉꼬를 사왔는데 알을 낳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보니까 수놈이 두 마리입니다. 그러니 알을 낳을 턱이 없지요. 잉꼬는 코 밑의 색을 보고 암수를 구별합니다. 블루칼라는 수놈이고 살색은 암놈입니다. 짝을 맞춰야 알을 낳습니다.

새 중에서도 청승맞고 듣기 싫은 새소리가 비둘기 소리입니다. 비오는 날 처마 밑에서 주룩주룩 비는 오는데 밤에 비둘기 우는 소리를 들으면 꼭 뭐가 나올 것처럼 싫습니다. 그런데 새 중에서도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 평생 잊을 수 없도록 뇌에 각인이 되는 새소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의 주인공은 백조입니다. 백조가 죽기 전에 한번 우는 울음소리는 누구든지 한번 들으면 심금이 울리고 황홀하다고 합니다. 저도 아직 그 소리는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이 백조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인상을 남긴다고 합니다.

 

관제와 같이

저는 오늘의 본문인 사도 바울의 유언 같은 마지막 고백이야말로 그 백조가 죽기 전 황홀하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노래했던 그 울음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죽음을 앞둔 황혼의 노(老)복음전도자가 감옥의 차디차고 습기가 가득한 벽에 등을 기대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 여기서 '관제' 라는 말은 제사인데 제사 중에서도 가장 길고 순서가 까다롭고 복잡한 제사입니다. 이 '관제와 같이' 라는 짤막한 서두 속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조망하는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한 제사로 보았습니다. 이 정체성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자기자각이고 자기인식입니다.

제사나 제사장 또 제물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 이타적일 때 제사나 제사장이나 제물은 그 가치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번 갱신(Renewal)할 수 있는 영적인 자리에 같이 모였을 때는 잊어버렸던 자기인식을 사도 바울과 같이 회복하고 생각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진정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죄송한 얘기이지만 어떤 분들은 왜 목사가 되었는지 의심이 생길 정도로 소탐대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작은 이익 때문에 머리 터지도록 싸우고 악악거리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 왜 목사가 되었냐고 욕을 해주고 싶은 생각을 가질 때가 비애스럽게도 가끔 일어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 앞에 제사로 조망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오늘 여기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서 함께 한국의 교회를 걱정하는 우리 모두가 남은 인생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얼마를 사느냐는 인생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온 생애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조망할 것인가? 이런 분명한 자기 인식이 주 앞에서 새로워지고 초심의 마음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음이 되었다

그 다음 '부음이 되었다'는 말은 누가 죽었다는 통보의 부음이 아니라 헌주하다, 붓다는 뜻입니다. 제 고향은 경북 영주입니다. 저희 집안의 종손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국민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종손이니까 그 제사를 다 떠맡아야 하는데 1년에 8번 제사를 드리니까 어려도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지방 쓰는 것부터 아버지한테 맞아가면서 배웠습니다. 한국제사도 순서가 참 까다롭습니다. 명태는 어디에 놓고, 언제 물에다가 밥숟가락을 떠놓고, 지방 태우고, 손님 나가신다 문 열어놔라 등등 … 이 관제라는 제사도 참 순서가 길고 까다로운데 헌주를 함으로써 끝이 납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얼마남지 않은 시간을 여기서 보내고 있다, 하나님이 곧 나를 부르실 죽음의 시각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는 영적으로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그 다음에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이것이 그 감옥에서 자기의 지난 한 생애를 하나님 앞에서 조망하는 과거의 회고입니다. 여기 떠나다는 말은 '아나루세우스' 라는 말인데 이 말은 헬라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가 하면, 첫 번째가 이런 의미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 을지훈련이니 팀스피리트니 해서 본대를 떠나 일주일이나 열흘씩 평야에서 텐트를 치고 훈련을 합니다. 로마도 사단병력이나 중대병력으로 훈련을 나갑니다. 나가면 어둠이 내리기 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텐트를 치는 겁니다. 그 때는 거의가 삼각형 텐트였습니다. 텐트를 잘 쳤는가 아닌가는 이 텐트가 얼마나 팽팽하게 세워졌는가를 보면 압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양쪽에다가 폴대를 세우고 그 끝에다가 줄을 잡아맵니다. 줄에 힘을 주어서 양끝 땅에 팩을 박은 다음에 줄을 잡아 늘어뜨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행을 해도 그렇고 훈련을 해도 그렇고 이 텐트생활은 임시생활입니다. 얼마나 불편합니까? 옷을 제대로 갈아입기를 합니까? 머리를 제대로 감을 수가 있습니까? 샤워를 할 수가 있습니까? 만사가 불편하지만 어쨌든 그 임시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해가 밝아올 때 본 부대장의 구령소리가 들립니다. "제군들 오늘부로 우리는 본대로 귀대한다." 귀대나 귀향명령이 떨어집니다. 그 명령이 떨어지면 병사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텐트를 허무는 것입니다. 텐트를 허물 때에도 순서가 있는데 이것을 팩부터 뽑는 것이 아니라 텐트를 팽팽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양끝에 잡아서 늘어뜨려놓은 줄을 풉니다. 그 줄을 탁 풀면 이게 무너집니다.

사도바울도 말씀하시기를 '이 육신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하늘의 새집이 우리에게 덧입혀 온다'고 했습니다. 이 텐트가 무너집니다. '아나루세우스' 라는 말은 언제 쓰느냐 하면 그 줄이 풀릴 때 텐트가 허물어지는 순가 '아나루세우스' 라고 하는데 곧 그 말은 '이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본대로 귀대한다' 그 말입니다. 바울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로운 신천지를 향해서, 오늘이 현실이라면 더욱더 현실적인, 영원히 우리가 머물 그 주님의 나라에, 그 새로운 세계에, 그 아버지의 집에, 나는 이제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언제 사용했는가 하면 배가 망망대해를 항해하다가 여러가지로 지치고 또 보충할 것이 생기면 낯선 항구에 기착을 합니다. 닻을 내리고 밧줄을 육지의 쇠기둥에 칭칭 감습니다. 그리고는 몇 날 며칠씩 보충을 하면서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는 돌아갈 시간이 되면 "뿌웅~" 하면서 뱃고동이 울립니다. 그러면 항구의 사람도 알고 배를 타고 왔던 선원들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그 쇠기둥에 묶였던 밧줄을 풉니다. 그것을 풀 때 '아나루세우스'를 씁니다.

즉,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는 내 고향바다를 향해서 떠나간다는 겁니다. 바울은 다가오는 죽음의 마지막 시간을 최후의 종말의 시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 앞에 새로운 신천지가 열린다.' 스펄젼은 말하기를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린다.' 그가 죽음 직전에 남겼던 말입니다. 끝으로 보지 않고 더욱 현실적인 저 새로운 나라, 주님의 나라가 내 앞에 이제 막 도래하고 시작하고 있다는 고백을 남겼던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 다음에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여기서 선한 싸움은 착하게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것이 다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의 의미는 내가 법대로 경주했다는 겁니다. 이 '선한'이라는 말은 법정용어입니다.

지난 97년도 11월인데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국제구제금융을 받던 그 달입니다. IMF를 우리가 2년 동안 얼마나 혹독하게 겪었습니까? 그 때 저희 교회는 예배당을 헐고 기공식을 드렸습니다. 첫 삽을 떴는데 그 다음다음 주에 IMF가 터진 겁니다. 정말 심각했습니다. 매주마다 멀쩡한 남자들이 목양실에 찾아와서 저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 저 해고당했습니다. 기도해주세요." 그리고는 웁니다. 생전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모르던 삭막한 사내들이 어린 목사 앞에 와서 기도해달라고 하면서 우는데 정말 저도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더라구요. 그게 한두 명이 아닙니다. 평균 다섯 명씩 찾아옵니다.

예배당은 헐어놓았고, 그리고 목동에 지하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 예배당 공사를 시작할 때 저희 당회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기에 공사를 하지만 이 예배당 공사가 10년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뒷돈을 주는 것, 불법거래 등 일절 탈법은 하지 맙시다. 모든 세금도 원칙대로 다 지불합시다. 두 번째, 예배당은 노량진에 있으니까 지역주민들의 원성을 사면서까지 공사를 강행할 이유는 없다. 민원이 들어오면 즉각 중단한다. 그래서 타협을 하고 협의를 해서 원만히 해결이 되면 다시 재개하는 것으로 결의했습니다.

저희가 한 60억 들여서 공사를 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건축계가 그렇게 더럽고 썩어빠진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목사인 줄 뻔히 알면서도 뭐 하나 따내려고 별 짓을 다 합니다. 그것도 기독교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합니다. 어느 성구사는 저희 건축위원장을 좋은 차에 모시고 자기 공장을 견학을 시키고 점심 때가 되어 식당에 가서 한 20명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점심값을 제가 지불했습니다. 그랬더니 뭐 이런 교회가 다 있느냐고, 안 먹히니까 막 화를 내고 가버렸습니다. 저희 당회가 어려운 건축기간 중이지만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담임목사 판공비를 100% 올렸습니다. 커피 한 잔이라도 목사님이 돈을 쓰라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도 내야 할 정당한 세금은 국가에 한 일익을 감당하고 있는 한 내야 한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입니다.

86년도 아시안게임 때 유명해진 '임춘애' 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원래 2관왕 밖에 못하는데 3관왕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남아공출신 선수가 1등으로 들어갔지만 사진판독을 해보니까 금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선수의 목에 걸렸던 금메달이 취소가 되고 그 금메달을 임춘애 선수에게 걸어 주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목적과 결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프로세스, 즉 과정도 여전히 목적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여기 함께 한 모든 동역 목사님들 심령 속에 정말 목회를 은퇴하고 나서 목회를 놓을 순간에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라는 고백을 남길 수 있는 우리의 목회현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라고 했는데 바울은 운동경주에 해당하는 용어를 즐겨서 사용했습니다. 빌립보서에서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라고 했습니다. '달음질했다', '좇아갔다'는 말은 다 스포츠 용어인데 당시의 운동경기는 귀족들이 하는 경기로서 사냥이 있었습니다. 사냥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산에 들어가서 귀족들이 먹이감을 찾습니다. 말을 타고 활을 준비해서 살피다가 목표물이 나타나면 달립니다. 그러면 짐승들도 도망가겠지요. 예를 들어서 토끼가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 토끼를 향해서 막 쫓아갈 것입니다. 막 쫓아가고 있는데 옆길에서 사슴 한마리가 풀쩍 뛰어나옵니다. 토끼 쫓다가 사슴을 봤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느 놈을 쫓겠습니까? 물어보나 마나 대개가 토끼를 놓고 사슴을 쫓아갈 것입니다. 여기서 '달음질했다', '좇아갔다'는 말의 의미는 '더 좋은 이익을 위해서 덜한 것을 놓아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 거룩한 직분에 쓰임 받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더 좋은 가치 때문에 덜한 것을 놓아버린 사람들입니다. 늘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더 좋은 가치를 위해서는 덜한 이익을 놓아야 그것을 쫓아갑니다. 아직도 내 삶 속에 저 진정하고도 영원한 가치를 좇아가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놓아버리지 못한 덜한 이익이 있다면 백기를 드는 심정으로 놓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을 놓아야 더 진정한 가치를 좇아가게 됩니다. 그래야 이 길을 달음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뭔가 확 눈떠서 본 사람만이 그 덜한 이익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이 능력도 중요하고 은혜도 중요하고 은사도 중요하지만 '오, 하나님!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느냐? 이건 내 생명보다 중요합니다. 목회자의 시각이 비뚤어진다면 교회는 망하는 겁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에 함께 한 모든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의 눈 속에 하나님의 기이한 법을 발견하고 좋은 것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낮고 더러운 것은 놓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 고 했습니다. 마라톤의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올림픽 경주를 마치고 나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연습을 할 때 너무너무 힘들어서 트럭 밑으로 들어가 죽고싶은 충동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마라토너가 얼마나 고독한 경주가 힘들었으면 그렇겠습니까? 헬라 시대의 단거리 경주는 200m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 라는 말은 100m를 17초에서 18초에 뛰는 속도를 계속해서 42.195km를 달리는 그런 정도의 진력을 말합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그 다음에는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합니다. 이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우리가 쉽게 아는 '믿습니다' 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원문에 보면 '위탁물'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위탁물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다메섹 언덕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면서 바울을 불렀던 유일한 이유가 뭡니까? 그리고 그 바울의 전생애를 통해서 맡겼던 그것이 뭡니까? 그것은 '복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영광스러운 복음을 말합니다.

지난 주 윌로우크릭교회의 리더십세미나에 참석을 했었습니다. 둘째날 빌 하이벨 목사가 "다음 시간에 클린턴이 올 건데 여러분 용서해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참석했던 3,600명 정도의 목사님들이 장난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음 시간에 정말로 클린턴이 강단에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빌 하이벨 목사와 두 시간 가까이 대담을 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당신이 제일 많이 생각했던 것이 뭡니까?" "용서입니다." 르윈스키 사건을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는 2시간 동안 이런저런 참회의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시간에 일어난 일은 한국신문에 나지를 않았는데 '켄' 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교역자에 해당하는 스텝이 있습니다. 이 분이 나와서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왜 클린턴이 나와서 두 시간 동안 대담을 하면서 예수에 대해서 한 마디도 안 했습니까? 왜 참회를 한다고 하면서 예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다고 생각합니까? 대여섯 차례 윽박지르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저희들이 뭘 압니까? 가만히 있으니까 이 분이 하는 말이 빌 하이벨 목사가 예수의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클린턴이 예수의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참회를 말하고 회개를 말하고 반성을 말했지만 클린턴이 예수 얘기를 안한 것은 빌 하이벨 목사가 예수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강단에서 이 십자가의 피묻은 복음, 우리의 선배들이 순결히 지켜왔던 이 복음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얼마나 단순명료하게, 투명하게, 예수와 성경에 대해서 말합니까? 사도 바울이 전 인생을 통해서 위탁물로 받은 것은 복음입니다. 저는 오늘도 이 말씀이 유일한 대안이며 유일한 인류의 해답이라고 믿습니다. 성경 외에는 길이 없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언제부터 도덕적 설교가 나오고 윤리적 설교가 나왔습니까? 언제부터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설교가 나왔습니까? '예수천당' 만큼 가장 뚜렷한 신학적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바울이 전 인생을 통해서 맡았던 위탁물은 복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 한평생 이 유일한 해답인 복음을 들고 복음만 선포하는 합동측 교단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의로우신 재판장

'믿음을 지켰으니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거기 잘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의로운 재판장 밖에는 없었을까요? 시편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무궁무진합니다. 인애로우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가 많습니까? 그런데 하필 유언과도 같은 이 글을 마지막으로 남기면서 로마법정에서 쓰는 법정용어를 갔다 썼을까요?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도의 계산이 깔린 발언이며 기록입니다. 당시 로마가 어떤 나라입니까? 네로가 누구입니까? 그가 법입니다. 세상 최고의 법정은 로마의 법정입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을 붙잡아다가 그의 사형을 인정하고 사형언도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집행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글을 남겼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다.' 이 뜻은 세상 최고의 법정이, 세상 최고의 권력가가 나를 붙잡아 포승줄에 묶어 여기에 가두어 놓았지만, 나를 사형이라고 언도했지만, 이것이 마지막 심판이 아니라 더 영광스러운 의로운 진정한 재판이 남아있다. 완전히 로마정부 뿐만 아니라 세상의 판단과 평가에 대해서 소위 엿을 먹이는 겁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이 아니라 더 진정한 심판이 남아있다. 의로우신 재판장! 여러분들이 힘들고 지치고 어떤 억울함과 모함에 빠져있을 때 눈을 들어 그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98년도 2월14일, 그 다음날이 대통령 취임식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는데 "목사님, 오늘 각하(김영삼 전대통령)께서 자택으로 돌아가십니다. 이따 저녁에 오셔서 퇴임예배를 인도해주십시오." 약속을 취소하고 저녁에 갔습니다. 갔더니 다른 교회 장로님들이 몇 분 와 계셨고 같이 일했던 관료들이 좁은 마루에 가득 차 앉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이 평소에 매스컴을 통해서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제가 기억합니다. 나는 역사에 평가되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라는 게 뭡니까? 제5공화국 때 역적이 정권이 바뀌니까 영웅이 됩디다. 제5공화국 때 영웅이 정권이 바뀌니까 역적이 됩디다. 역사의 평가라는 것은 정권의 부침과 함께 바람 같은 것입니다. 장로님, 이 퇴임을 퇴임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소명으로 생각하셔서 역사의 평가에 신경쓰는 성도가 아니라 이제는 더 궁극적인 평가, 하나님의 평가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성공된 여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목회현장에서 이런 유혹이 많이 있습니다. 보이려고 하는 목회, 늘 우리 속에 눌러 놔야 겨우 잠재우는 용수철 같은 보이려고 하는 목회, 이런 유혹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게 전부 사람한테 평가받고 싶은 것 아닙니까? 자기영광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수많은 고초와 곤고함과 모진 세월을 지나 죽음이 눈 앞에 와 있지만, 그것을 죽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나에게 더 진정하고도 궁극적인 평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백조의 노래

스펄젼 목사님이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인데도 오해를 받고 힘든 목회현장이 있었습니다. 목사는 이익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명분 때문에 사는 것인데 사표를 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이어리를 보니까 심방이 약속되어 있는 가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했으니까 심방을 해주고 사표를 써도 써야겠다고 하고는 마침 목장을 하는 집인데 거기를 갔습니다. 심방을 착잡한 마음으로 끝내고 나오는데 목장을 하는 집이니까 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담이 둘러있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소들이 한 줄로 서서 담에 턱을 대고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이 주인에게 묻자 주인이 말하기를 "언젠가 주인이 문 열어줄 때를 기다리는 거죠." 여기서 스펄젼 목사님이 강력한 깨달음을 했습니다. '소도 답답하고 억울하지만 턱주가리를 담에다 걸고 언젠가 주인이 문을 열어줄 때를 기다리는데 그거 한번 억울한 오해를 썼다고 사표를 집어던지다니 내가 목사인가?' 그러고는 돌아와서 '소로부터 받은 은혜' 라는 일지를 썼습니다.

우리도 그런 억울한 현장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평가를 기대하고 바라보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 속에 사도 바울이 마지막에 황홀히 울었던 이 울음처럼 곧 의로우신 재판장, 이 마지막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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