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 하나님만 바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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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하나님만 바라라
  • 옥한흠 목사
  • 승인 2000.08.2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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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8/21) 교갱협 제5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시편 42편 1~1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끼리 남겨놓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끼리 말씀 앞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이 없고 위대한 웅변가가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해도 성령이 우리를 책임져주시지 아니하면 그것은 꽹과리의 소리와 같습니다.

 

낙망하는 원인

시편42편, 43편은 한 통에 있는 말씀입니다. 편의상 두 편으로 나뉘었습니다만 내용은 하나입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칼빈을 비롯해서 스펄젼이나 위대한 성경해석자들은 주로 다윗이라고 말을 합니다만 그것도 확실한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록 저자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이 저자가 낙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큰 낙망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42편 5절, 11절, 43편5절, 계속 반복되는 후렴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낙망하는 원인이 뭘까요? 이 원인은 본문을 잘 살피면서 묵상하면 세 가지 정도는 유추해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보고 낙망합니다. 구체적으로 그가 어떤 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는지 말하기 어렵지만 그가 표현하는 원수의 압제나 대적의 비방이나 경건치 아니하니라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대충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아마 이스라엘 나라 밖의 어느 곳인가에 가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성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소에 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제사 드리고 싶어도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분위기는 비신앙적이며 무신론적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밤낮없이 저자를 보고 비아냥거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그는 보고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을 앞에 놓고 그는 마음에 엄청난 절망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그가 왜 절망하고 있는가? 무능한 자기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현실이 이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세속화된 현실이고, 하나님을 무시한 현실이며, 자기 자신이 이 문제를 극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자기 무능을 보면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재미있는 말을 했는데 "시편 42편, 43편 전체를 보면 이 저자의 입에서는 '나'라고 하는 1인칭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나, 나를, 나의 … 하면서 자기를 지칭하는 1인칭이 51번이나 나오고 있다. 그대신 하나님, 주님 하는 말은 20번 정도밖에 안나온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온통 내가 어쩌고, 내가 어쩌고 하고 떠든다." 이것은 저자의 눈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을 극복할 수 없는 무능한 자기 자신만을 보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왜 절망하는가 하면, 이 저자는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성전에서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기뻐하고 행복했는데 이제는 그 옛날 일만 기억하는 처지가 되었구나, 지나간 일 기억하면서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니까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절망이 되고 낙망이 되는 겁니다.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위의 사실을 보면 이 저자의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눈 앞에 벌어진 현실을 보고 절망하고 그 현실을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을 보며 불안해 하고 과거에 비해서 현재가 너무 좋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우울해지고 침체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

저는 이 시편 42편의 내용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저자를 통해서 반사되는 저 자신을 봅니다. 제 모습을 이 저자에게서 비쳐보게 되고 그러면서 나랑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세속화된 현실과 교회, 충분히 저 자신이 낙망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세상을 보나 교회를 보나 탄식만 했지 그 어려운 상황을 개선할 만한 능력과 지혜와 용기가 전혀 없는 저 자신을 보면서 낙망하고 불안해 하고 답답해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형편을 놓고 보면 30년 전에 비해서 지금은 식었다, 세상적이다, 교역자들이 30년 전에 비해서 너무 타락했다고 양쪽을 비교하면서 나도 모르게 절망합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오늘날 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을 보십시오.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가장 무서운 것이 가정의 파괴 아닙니까? 세상의 모든 죄악이 파괴된 가정에서 싹트고 열매를 맺어 이 사회를 더럽히고 사람들을 잘못된 곳으로 끌어가고 이 세상에 아직도 남아있는 일반은총의 거룩함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협의이혼과 소송이혼이 1년에 17만 건 일어납니다. 모 판사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대부분 이혼하는 사람이 20~30대 인데 이혼을 하고 서로 돌아서면서 후회를 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 아파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문제를 놓고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교회 안에서도 이혼은 이제 상식화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장로 입에서도 '어쩔 수 없지', 믿음이 좋고 새벽마다 기도하는 권사의 입에서는 자기 딸이 못살겠다고 하면 '이혼해라'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풍토가 되었습니다. 어느 조사를 보니 미국의 경우는 불신자의 이혼율과 성도의 이혼율이 거의 비슷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파괴된 가정풍토에서 오만가지 악이 싹트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청소년들은 인터넷이나 다른 채널을 통해서 너무나 해로운 문화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잔인한 폭력과 경건치 못한 방종과 사치에 그들은 휘말리고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는 점점 탈 기독교적인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점점 반기독교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82년도에 우리나라에 정식등록된 무당은 3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15년 지난 97년도에는 전국적으로 80만 명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했습니까? 무당과 점쟁이가 부흥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백성이 늘어난 것입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떠벌리고 비아냥거리는 반 기독교적인 사람이 늘어난 것입니까? 압구정동 같은 가장 잘사는 사람들이 버티고 있는 그곳에 무당, 점쟁이들이 메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밀실문화가 암세포처럼 퍼져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방'입니다. 전화방, 노래방, PC방, 만화방, 찜질방, 채팅방, 화상대화방, 온통 '방'입니다. 그 방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한 2,3년 전에 독일 튀빙겐대학의 명예교수로 아직도 일하고 있는 한스 큉을 우리 한국의 유수한 일간지 기자가 찾아가서 면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한스 큉이 한 말이 어떻게 보면 소름 끼치는 말이었습니다. "21세기에는 기성교회가 쇠퇴합니다. 반면에 일반사람들의 종교적 관심도는 점점 더 커져서 불건전한 영성운동이 활발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온 지 불과 1년도 안되어서 이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또 그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앞으로 산업화가 계속되고 민주주의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계속되면 사람들이 오랫동안 당연한 존재로 여겼던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막스 웨버가 말한 것처럼 세계각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잘 살고 잘 먹고 자신감이 생기다 보니까 그동안 괜히 하나님만 찾으면서 매달려서 살았구나, 그럴 필요가 없는데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지는 겁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기정사실로 인정된 하나님이 증발해버리는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세상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각성을 한 것입니다. 이런 시대가 21세기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쇠퇴

이런 통탄스러운 세상을 앞에 놓고 교회가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관심은 더 이상 교회로 몰리지 않습니다. 교인수는 줄어드는데 교회수는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 현재의 데이터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젊은이들이 중소교회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개척교회가 잘 안됩니다. 부천에 있는 어느 목사는 죽으라고 일해도 개척교회가 안되니까 나중에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방화를 저지르다가 투옥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자랑하던 무조건적인 헌신, 오직 주님이라고 하는 그 아름다운 신앙의 자세가 점점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20~30년 전에 이곳 저곳에서 불타오르던 성령의 불길이 오늘 어디 있느냐고 하면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힘 겨루기에 정신이 없고, 대접받기에 정신없고, 자기 건강 챙기기에 정신없이 나날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봅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몇 주 전에 우리 교회에 선교사 한 분이 오셔서 설교를 했습니다.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이라는 내전으로 인해서 초토화된 그 곳에서 벌써 15년 가까이 생명 걸고 복음을 전하다가 안식년을 얻어서 들어왔습니다. 안식년을 세 번째 맞아서 들어왔는데 들어올 때마다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또 다른 교회에 가서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가 강단에 올라가서 대뜸 하는 말이 "한국교회가 변하고 있습니다. 5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에 들어와서 보니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매우 어두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긍정을 하면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한 집에 사는 사람은 서로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모르지만 오랜 기간 떨어져 있다가 만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얼굴을 금방 압니다. 우리는 이 현실 속에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어느 정도로 기울어 가고 있는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밖에서 복음을 위해 생명 걸고 싸우다가 들어온 사람이 보니까 직감적으로 느끼는 겁니다. 10년 전에 왔을 때는 은혜를 받고 갔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도 그런대로 영적으로 재충전을 받고 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와보니까 마음이 더 공허해집니다. 그리고는 오래 있지 않고 바로 들어갔습니다. 그 선교사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 스스로가 자각증세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보다도 한국교회의 현실이 심각하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지난 7월초에 시드니 연합집회에 초청을 받아서 갔습니다. 수 년 동안 약속을 어기면서 가지 못하다가 금년에 가게 되었는데 올림픽 기념으로 시드니지역 연합집회를 했습니다. 낮에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서 식당으로 가는 도중 교회당 꼭대기에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왜 십자가가 떨어졌는가 물었더니 지금은 교회로 쓰지 않고 유명한 음식점이라는 겁니다. 외관을 바꿔서 레스토랑을 하면 좋을 텐데 왜 그대로 사용하는가 했더니 교회모양을 하고 있어야 인기를 끈답니다. 강대상 자리는 A석이고 성가대석이 B석이랍니다. 물론 술도 팝니다. 저는 그게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여러분, 왜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내 입에서 '망할 놈의 나라'라는 욕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내 입에서 그런 욕이 나오기 전에 두려움에 휩싸이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나라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지금 상황 같으면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와 같이 세상을 보아도 그렇고 교회를 보아도 그렇고 절망하고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믿음 안의 낙망

이 현실을 보고 낙망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이 현실을 놓고 어떻게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함, 외소함을 보고 낙심하는 것이 비신앙적입니까? 낙망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까? 목사가 낙망하는 것은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위장하지 맙시다. 솔직히 위선하지 맙시다. 이런 상황을 놓고 이런 내 자신을 보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오히려 낙망하고 불안해하고 마음이 상해서 잠을 자지 못해서 신음하는 편이 영적인 지도자다운 자세가 아닐까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낙망하면 안돼, 그래서 고민도 안하고, 낙망도 안하고, 불안도 안하고 강단에 서면 좋은 말만하고 긍정적인 설교만 해야 할까요?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서 어려운 상황을 놓고 낙망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꼽아보세요. 누구입니까? 누가 낙망하지 않았습니까? 요셉에 대해서 낙망이라는 단어를 안 썼다고 해서 어린 요셉이 낙망을 한 번도 안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성경해석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있는 위대한 인물 치고 낙망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볼 때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의 가슴에 뭉쳐있는 불안을 들여다 봅니다. 낙망했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낙망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고, 또 현실을 보고, 과거와 비교하면서 그들은 몸부림쳤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의 자화상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하는 낙망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낙망에서 끝납니다.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듭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죤 뉴턴이 말하기를 "믿음의 사전에는 낙망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세상사람에게 낙망스럽게 보이는 것이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낙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낙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결국 믿는 자의 낙망은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하나님을 갈망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을 바란다는 말을 원문 그대로 따지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까? 오늘 설교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1절이 그 해답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바람은 갈급하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사슴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저는 사슴이 목이 마를 때 얼마나 이산저산 헤매면서 시냇물을 찾는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추축할 수 있습니다. 유대나라와 같이 건기가 오래 계속되면 시냇물이 다 마릅니다. 그러면 사슴을 위시해서 동물들이 물을 찾기에 혈안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목이 탑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정신없이 찾아 뛰어다닙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어떤 상황입니까? 물 아니면 죽음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찾습니다. 물을 찾으면 살고, 물을 못 찾으면 죽습니다. 그러니 물 아니면 죽음이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헤매는 것이 소위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찾으면 살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죽는다. 이와 같은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바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고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동행한다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찾아야 하느냐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만 여러분, 입으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해도 그 영혼의 깊은 곳은 하나님 없는 부재현상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영혼을 갈증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실존의 갈망이 우리 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어도 시편 저자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 자신의 무력감 등을 앞에 놓고 있으면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은 절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하나님은 침묵해 계시고, 하나님은 나의 문제에 관여하고 있지 않다는 외로움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찾아야 합니다. 신앙고백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실존이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세를 한 번 보세요. 모세와 하나님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대항하고 모세를 대적할 때 그는 그 현실 앞에서 몸서리칠 정도로 절망했습니다. 절망하자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호렙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40주 40야를 먹는 것을 전폐하고 하나님을 찾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하나님만 사모하고, 하나님만 만나고, 하나님 음성듣기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철폐하고 매달렸습니다. 이게 바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한 번만 그랬습니까? 율법을 받기 위해서 한 번만 그랬습니까? 잘은 모르지만 신명기서를 읽어보면 적어도 모세는 세 번 이상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매달렸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가나안 부족의 지도자들과 결탁해서 성적으로 잘못된 죄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자 얼마나 낙망하고 얼마나 가슴이 내려앉았는지 옷을 찢고 머리털을 쥐어뜯으면서 가슴을 치며 땅바닥에 앉아서 저녁에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갈망

여러분, 이 자세가 뭡니까? 하나님을 찾는 자세입니다. 갈망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지만 이 어려운 절망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에스라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까? 불신자입니까? 누가 그런말을 할 수 있습니까? 무명의 한나라고 하는 여자도 상황이 너무나도 절망스러우니까 성소에 와서 입 속에 기도를 담고는 중얼중얼 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다가 술 취한 여자로 취급을 받는 모습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기 직전에 그는 심히 연약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때 그는 땀방울이 피가 되어 흘러 내리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하나님을 갈망하는 집요함, 끝을 내고 말겠다는 집요함, 아마 이것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증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목전에 두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집요함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집요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자세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지도자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교회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교갱협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하나님 앞에 조용히 질문한다면 바로 오늘의 이 현실을 앞에 놓고 하나님을 찾을 때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는 사슴처럼 집요함을 가지고 찾으면 살고 못찾으면 죽는다는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는 그런 사명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시편 저자와 같이 낙망하고 있습니까? 불안해 하고 있습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빈정대는 반 기독교적인 사회를 보고 낙망하십니까?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을 놓고 우리가 얼마나 낙망하고 얼마나 답답해 합니까? 또 한번 물어봅시다. 과거 위대한 우리 선배들의 그 아름답고 화려한 영적인 역사와 오늘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현실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낙망하고 고통하고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만약에 이와 같은 낙망이 있고 불안이 있다면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성령의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갈증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갈증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하나님 아니면 소망이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찾는 갈급함이 우리에게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 그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 집요함,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절박한 집요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라고 할 때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에 가책을 많이 받습니다.

지난 7월 말쯤 되었는데 제가 휴가 중이어서 시간을 내서 춘천지방에 갔습니다. 춘천근교에 백로마을이 있습니다. 하얀 백로들이 떼를 지어서 모여 사는 숲이 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백로를 찍으려고 갔습니다. 갔더니 한 300마리 정도 있는데 그 우람한 소나무 숲에 백로가 앉았는데 멀리서 보면 참 환상적인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 소나무 밑을 들어가 보니 백로들이 똥을 싸서 밑에 있는 작은 나무들이 전부 새빨갛게 말라죽었습니다. 그리고 온통 똥을 뒤집어써서 무슨 페인트 칠을 해놓은 것 같습니다.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모릅니다. 그래도 백로 좀 찍어볼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장비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 백로를 가까이 잡아당겨서 박력있게 찍을 엄두는 낼 수 없어요. 제 렌즈로는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번 찍어볼 생각에 갔던 거지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한 20m밖에서는 날지 않고 있어서 카메라 세트를 하고 찍으려고 하는데 냄새는 역겹고 또 얼마나 더운지 숨이 콱콱 막히고 가만히 있는데도 땀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백로들이 자기 찍으라고 포즈를 취합니까? 별건 아니지만 그 백로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할 때 어쩌다가 뭐 하나 잡아볼까 하고는 렌즈에다 눈을 대고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리면서 씨름을 했습니다. 거기에 올라간 지 3시간 가까이 되었을 때이고 제대로 사진도 찍은 것이 없었습니다.

똥냄새 나는 숲에 앉아서 좋은 찬스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무슨 생각이 나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을 갈망하기 위해서 이 정도로 땀 흘리고 기도한 적인 몇 번이나 되는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이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오뉴월 여름에 무더위를 무릅쓰고 무릎 끓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씨름을 했는가? 문득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데 밥맛이 싹 없어지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별로 기억이 안나요. 세시간이나 이렇게 땀을 흘리면서 기도한 일이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몸부림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가슴에 떠오르면서 계속 거기에 있기가 민망해서 짐을 챙겨서 내려왔습니다만, 지금도 그 때 내가 받았던 충격은 아마도 성령의 음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가 좋아하는 사진 한 장을 위해서는 시간도 투자하고 왔다갔다 세시간 그렇게 투자하는데 하나님을 갈망하기 위해서 이 현실적인 낙망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아야만 살 수 있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너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땀 흘려 봤냐? 몸부림쳐봤냐? 하나님을 불러봤냐? 저는 아직도 그 음성이 제 귀에서 안 떠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바라고 우리가 바라는 그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절박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충분히 이렇게 해야 할 현실을 가지고 있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민수기 24장을 읽다가 제가 또 한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기 보면 발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발람은 거짓선지자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24장 16절을 보면 발람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 눈을 뜨는 자가 말하기를 ..." 대체적으로 거짓선지자가 하는 소리는 별거 아니다 하고 지나가잖아요. 그런데 그 날은 그 말씀이 강력하게 저를 잡았습니다. 제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거짓선지자도 이 정도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지 않는가? 거짓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환상을 갖고 있으며 엎드려 눈을 뜨고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을 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도대체 뭔가?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발람이 말하는 이 내용이 무엇인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실존적인 영혼의 만남을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저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갑니다. 발람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니까 그럴 수 있었지.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들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조명하시고 거룩한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입장인데 발람처럼 되지 못할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할 수 없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안다고 못할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상을 본다고 못할까요? 엎드려서 눈을 뜨고 신령한 영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이라고 말 못할까요? 천만에요,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의 충만함을 모르고 있을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현실 앞에서 낙망하고, 자신을 보고 낙망하는 것입니다.

 

낙망 안의 소망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매우 위급한 현실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더욱이 영적 지도자들의 영적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 겉모습만 그럴 듯 하지 너무나 힘이 없습니다. 우리 속은 썩을대로 썩어가고 있습니다. 생각들이 벌써 잘못된 곳에 가있고, 의식이 잘못 굳어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잘살고 좋은 차 타고 잘 먹고,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고 교회로부터 칭찬 듣고, 여러가지 면에서 즐기는 것이 많이 있으니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잘못된 대로 가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목사니까 성경 한 두장 읽는 것 가지고 하나님 만난다고 말하지 마세요. 하루에 성경 몇 장 읽으면서 하나님 음성 들었다고 말하지 맙시다. 저나 여러분이나 그런 소리하지 맙시다. 설교 한편 준비했다고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오늘 현실을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 앞에 순종하고 있다는 그런 건방진 소리 하지 맙시다. 설교는 목사니까 준비하는 겁니다. 목사 아니면 설교준비를 하겠어요?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겠어요? 다 직업적으로 하는 것 가지고 큰소리 치지 맙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낙망하고 불안해 하는 내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나아가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곳에 해답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모세가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고통하고 절망하고 괴로울 때 그는 성막에 가지 않고 호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현실은 성막에 앉아서 해결될 현실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 교갱협, 교회갱신과 내일의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성막이 아니고 호렙산일 것 같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 나만이 외롭게 몸부림쳐야 하는 곳, 하나님이 아니고는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곳,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씨름할 때 하나님이 이 시대를 위해서 소망의 말씀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준비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시고 우리의 무력한 팔을 붙들어 다시 능력있는 자로 세워주실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갈망합시다. 이번 수련회의 목적이 뭡니까?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박한 사슴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시간이 되어서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늘에 쌓아놓으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 쏟아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만 바로 되고, 우리만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우리만 하나님의 능력을 입으면, 아무리 현실이 어두워 보이고 낙망스러워 보일 지라도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이 자리에 임하셔서 그동안 목회하면서 지치고 낙망하고 불안해 하던 우리를 치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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