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8/18) 교갱협 제3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고린도전서 9장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성경의 무대를 이해하라

이스라엘의 지리와 문화와 식물, 동물, 기후 그런 것은 시간이 있는 대로 우리가 배우고 현장에 가서도 확인을 해서 성경을 읽을 때 문화에 대한 배경을 알고 읽으면 좋고 그 지리에 대해서 이해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면 더욱 효과적이고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가지고 가르치는데 성경에 있는 무대가 팔레스틴입니다. 그래서 무대의 장치를 우리가 해야하기 때문에 그 장치의 소재라든지 배경을 잘 모르고는 무대를 잘 꾸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번역된 성경주석이 대체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신 분들, 유럽에 가서 공부하신 분들이시고 성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상당히 문제가 있고, 또 우리가 그렇게 듣고 설교를 하다 보니까 우리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많이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 계신 곳에 지붕을 뜯고 사람을 달아내렸다.” 우리는 이것을 지붕을 뜯는 열심, 들어올려서 예수님께 내려준 열심을 가지고 열심히 설교를 하는데 사실은 지붕을 뜯는 공로가 없고, 지붕의 구조가 한국같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에도 옛날의 지붕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 몇 곳 안됩니다만, 신약시대의 유대나라의 지붕은 그 기후가 아주 덥기 때문에 지붕 위에 사방 1m정도의 구멍을 뚫어서 뜨거운 열기가 그곳으로 올라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지붕을 뜯었다는 것은 거기에 있는 돌을 옮겼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처럼 기와를 뚫고 지붕을 뜯었다면 이건 난리가 나는 겁니다. 그러니 번역하는 분들이 거기에 대한 문화를 전혀 모르고, 설교집을 읽어보면 지붕을 뚫는 것에 초점을 많이 맞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지붕을 뚫는 공로도 없고 시간도 안드는데 이런 것은 한국적 상황에서 이해를 하는 겁니다.

족장로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의 지리에 대한 이해가 참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북쪽에 요단강이 있고, 요단강 위에 갈릴리 바다가 있고 그 바다가 요르단으로 내려와서 사해바다로 들어갑니다. 동편에 있는 위에 요르단으로 왕의 대로라는 큰 길이 있습니다. 유대나라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저 북쪽에 있는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남쪽 이집트로 내려갈 때 전부 그 길을 이용합니다. 요단계곡은 세계에 있는 계곡 가운데 제일 큽니다. 저 요단에서부터 이집트까지 그리고 이디오피아까지 내려가는데 얼마나 큰지 인공위성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만리장성이 보이고 그 다음에는 요단계곡이 보인다고 할 정도로 큰 계곡입니다. 지상에는 그 이상의 계곡이 없다고 합니다. 계곡 위에는 산이 아니고 넓은 평지인 골란고원이 한없이 펼쳐져 있는 곳을 보게 되는 신비한 땅입니다.

그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대로가 있는데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시리아쪽의 길은 왕의 대로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즉 이스라엘 국경 안에 있는 길은 족장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두 길만 이해하면 전체를 이해하는데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족장로는 갈대아우르에서 나와서 아브라함이 간 길입니다. 야곱과 이삭과 요셉이 간 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길이 그 족장로였습니다. 그래서 족장로만 알면 성경의 4분의 3은 알게 됩니다. 신구약 성경의 모든 사건들은 족장로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의 가는 길이 다 그 길이었는데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가서 살았는데 헤브론의 높이가 1,000m입니다. 해발 1,000m이니까 얼마나 높습니까? 대관령이 800m 정도죠? 그리고 예루살렘이 800m 입니다. 베들레헴도 마찬가지고 그 족장로 중에 있습니다. 아래로는 내려오지 않고 다 그 위에서 다니고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다 그 족장로를 다니셨습니다. 엘가 제사장이 재단을 가지고 있던 곳이 실로인데 거기도 800m이고 사무엘의 집도 다 족장로이고 그 길로 다녔던 것입니다.

족장로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 선민의 삶은 언제나 상류의 삶, 높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지리적으로 어느 민족이든지 그렇게 살았던 민족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지요. 만약 유대인이 우리나라에 오면 산이라는 산은 다 점령해 버리고 한라산의 백록담에도 다 집을 지을 겁니다. 설악산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예루살렘이 800m이고 사해바다는 100m, 또 헤브론은 1,200m입니다. 전부 산 위에서 사는데 이게 무슨 뜻이 있느냐? 이것은 영적으로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낮은 곳에는 이스라엘의 평야가 있습니다. 블레셋평야, 이스라엘평야, 샤론평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높은 곳에는 아무것도 살수 있는 조건이 없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거룩한 성이 있고, 기도가 있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 족장로 아래로 내려오는 법이 없습니다. 아래로 내려올 때는 반드시 시험이 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위로 가고 롯은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또 아브라함도 아래로 한 번 내려갔습니다. 이집트로 내려갔는데 갔다가 엄청난 고생을 하고 다시 위로 돌아옵니다. 또 야곱이 그랬습니다. 야곱은 돈을 많이 벌어서 양떼와 소떼를 감당할 수 없이 가지고 내려와서 세겜에 가서 사는데 세겜은 낮은 곳입니다. 사마리아 바로 옆에 있는 아주 비옥한 곳, 땅이 아주 넓고 살기 좋은 곳입니다. 거기서 살다가 아주 혼이 납니다. 만신창이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다시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대체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세겜을 좋아하고 아래를 좋아하고 아래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고 아래 문제를 너무 중대하게 다룹니다. 너무 크게 다루는 겁니다. 아래는 버려야 되고, 무시해야 되고, 완전히 떠나야 되는데 오늘 우리의 관심은 아래에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곳은 이 족장로가 아닙니다. 족장들이 아니고 선민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텐트를 아래에 치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어요. 텐트부터 세겜에서 벧엘로 옮겨놓고 이야기를 해야지 세겜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열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사도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신약시대 때 사도들은 족장로를 벗어납니다. 신약의 사도들은 선교의 노선이 구약의 족장로를 벗어나는데 비록 저들이 예루살렘을 떠났고, 족장로는 다니지 않았지만 족장들 이상으로 영적으로 예루살렘의 길을 그대로 걸어갑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아브라함 이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은과 금,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아무것도 없이 위의 것을 좇아갑니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합니다. 일절 다른 것을 모르고 사도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알았던 것도 버리고, 가졌던 것도 버리고, 세상의 존귀한 것들은 다 배설물로 여기고 하여튼 저 아래 것들은 다 버리고 예루살렘의 것, 위의 것을 가지고 나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기도원에 와서 기도하고 은혜받고, 훈련받는 것이 대체로 남들처럼 땅의 것을 얻기 위해서, 아니 땅의 것은 아니더라도 혼합적인 것은 많다고 봅니다. 여러분, 땅에서는 영원히 잘되는 게 아닙니다. 땅의 것은 다 벗어 버리고 경주자로서 달려가야 되는데 우리가 그렇게 못 달려갑니다. 사도바울 같이 족장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데 나중에는 외투 한벌, 그걸 요구하는 것을 보면 저는 옷장에 넥타이도 많고 구두도 많고 옷도 많고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또 한국교회도 주차장 확보 때문에 문제가 많은데 족장들도 걸어다녔지 않습니까? 우리는 족장시대로 돌아가야 됩니다. 사도시대로 돌아가야 됩니다. 사도행전의 삶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영적인 위기는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인류역사 가운데 인간의 특징 몇 가지가 있는데 물질적인 위기, 군사정치적인 위기 등 이런 큰 줄기를 보면 이런 것이 닥치면 국가적인 부끄러움이고 재난인데, 사실 역사에서 이 두가지 때문에 망한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망한 나라도 없고, 군사적 정치적인 위기로 망한 나라도 없습니다. 망한 나라의 이유가 뭔가 하면 정신적으로 잘못되어서 망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정신적으로 건강한 그 시대에는 반드시 살아나고 이길 수 있는데 그 두 부분이 아무리 부유하고 풍성해도 정신적으로 황폐하고 가난하고 병들면 망했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남쪽 유다보다 더 번영할 때입니다. 타락하면 그 때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잘 살면서 잘 믿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잘사는 것을 떠나서 죽어도 잘 믿어야 된다. 오히려 모두 다 버리고 잘 믿어야 됩니다. 결코 믿는 것이 잘사는 것에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목회는 땅의 것도 얻고 하늘의 것도 얻는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는 겁니다. 목회자의 생명은 영적, 정신적으로 무장되어 있고, 실력있고, 하나님 주시는 은혜에 모든 것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미국이 세가지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것은 경제, 군사, 지식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은행이고, 군사적으로는 육해공군이 세계를 지키는 파수꾼이고, 지식적으로는 미국에서 제일 큰 수입은 대학에서 버는 것인데 온 세계의 지식인 들이 다 거기 가서 공부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중국, 일본, 등등 수십만 명이 미국에 가서 공부합니다. 지식적으로 앞서가고 있으니까요. 미국의 위기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미국의 문제는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고, 흐트러져 있고 길을 잃어버린 것에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병든 물질주의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미국에 가서 타이타닉호를 꼭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봤습니다. 그러다가 비행기에서 봤는데 1912년 영국에서 만든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으로 가는데 제일 잘난 사람, 최고의 인기인, 연예계 최고 경제계 최고, 모든 분야의 제일 최고의 분들이 모여서 최고로 좋은 다이아를 끼고, 최고로 좋은 모자를 쓰고, 최고로 좋은 옷을 입고 최고로 좋은 배를 타고, 최고의 음식과 최고의 주방장과, 최고의 침대와 최고의 음악과, 최고의 파티와 땅에 있는 것은 최고로 가지고 누리는 최고의 시민들이, 최고의 부자들이 그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요. 자신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물질, 지식만능사회가 말세다

요한계시록은 말세에는 물질의 시대가 열린다고 하고 있고, 다니엘서 12장에는 사람이 빨라지고 지식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말세의 두 가지 쌍벽은 물질과 지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말세에는 물질과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많이 발달했습니까? 복제양 돌리가 나왔는데 앞으로는 같은 사람을 몇 만명도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겁니다. 얼마나 지식이 발달하는지요. 저희 교회에서 병원을 하나 하고 있는데 의사가 한 40명 됩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들 얘기를 들어보면 얼마나 지식이 발달하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금은 원터치 시대인데 앞으로는 타치가 아니라 원마우스 시대로 말 한마디만 하면 다 되게 된답니다. 밥도 밥솥을 눌러주는 시대가 지나고 그냥 입으로 ‘밥 나와라’ 하면 나오는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교통사고가 나서 10명이 죽게 되면 5명은 살아납니다. 왜냐하면 끼워맞추는 겁니다. 지금의 장기이식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변화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식으로 따라갈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지식이 로켓트와 같이 솟아납니다. 그냥 지식이 조금씩 머리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세가 있는 것을 믿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말세가 있습니다. 창세기가 있으면 계시록이 있습니다. 소련이 어려워지면서 온 세계는 물질이지요. 전 세계가 서서히 어떤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겁니다. 온 세계가 세종대왕(돈)을 그리고 있는 거지요. 앞으로는 뭐니뭐니 해도 머니입니다. 돈 없으면 안되는 시대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이 시대에 물질과 지식은 점점 인간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고 지식은 인간을 더 어리석게 만들고 있습니다. 더 무지하게 하고 더 방황하게 하고 갈 바를 모르는 인간이 많고, 고민이 그렇게 많고, 원한이 그렇게 많이 맺혀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동성연애 잘하는 대통령 되는 시대가 얼마 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죠? 그 분은 동성연애를 지지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여고를 하나 맡고 있는데 여고생들이 얼마나 동성연애가 많은지 아십니까?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겁니다. 지금 시대의 현주소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물질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입니다. 동성연애의 온상은 대학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배운 사람이 그럽니다. 동성연애의 발상지는 캠퍼스입니다. 전부다 그 쪽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대를 잘못 가고 있는 겁니다.

21세기에도 다른 길은 없다

우리는 족장 시대의 족장의 길을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거기에서 하나님께 브엘세바에서 재단을 쌓고, 야곱이 돌베개 하던 것으로 재단을 쌓고,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재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다 족장로입니다. 족장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족장로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영광과 거룩한 여호와의 축복이 거기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장비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많으면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소로본대학이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장서가 1,300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워싱턴에 있는 미국의 국회도서관의 책이 9,600만 권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더 이상 수집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책을 다 가져야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발표한 것에 보면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대인이고, 전문가라는 말을 하려면 하루에 쏟아지는 새로운 논문이 16,000개 정도인데 그걸 다 매일 다 읽어야 오늘날 최고의 지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매일 16,000개의 논문을 소화해야 됩니다. 하루에 쏟아지는 새로운 지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포기해야 된다는 겁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21세기를 준비하는 길은 세상에서 하는 길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하나인데 뚜렷합니다. 다윗은 많은 것 안가지고 물맷돌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완벽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영적인 삶은 능력보다 우선한다

제가 이솝의 이야기에서 봤는데 여우가 길을 가다가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여우가 고양이한테 “야 너 어디가?” 그러자 고양이가 “놀러가요!” “조그만 게 겁없이 어디를 돌아다녀?” “예, 잘못했습니다.” “너는 잘하는 게 뭐야?” “나는 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잘합니다. 위기가 있을 때는 나무에 올라갑니다.” “바보 병신같이 그거 가지고 어떻게 살아. 나는 열두가지야. 나무에도 올라가고, 거짓말도 잘하고, 기는 것도 잘하고, 뛰기도 잘하고, 나는 못하는 게 없어!” 그 때 사자 한마리가 “어흥”하고 달려 들었습니다. 하나 밖에 모르는 고양이는 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여우는 이럴 때는 뭘 써 먹을까? 올라가야 되나? 내려가야 되나? 거짓말을 해야하나? 너무 많은 카드가 있어서 어떤 것을 써먹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죽었답니다.

우리가 다 가지고 목회를 잘할 수 있습니까? 다 잘하면 목회가 잘되는 겁니까? 괴짜 성도 하나도 제대로 못 이겨냅니다. 괴짜 성도를 만나면 천하의 지식도 소용없고,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안됩니다. 우리가 뭘 가지고 된다는 겁니까? 시험 하나만 닥쳐도 안됩니다.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뭘 가지고 우리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적으로 사도들이 걸어간 사도신경으로 무장하는 겁니다. 입만 열면 예수 십자가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승천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그 분이 다시 오시는 것을 우리가 바라 보면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고 일해야 합니다. 신앙고백 만한 무장이 없습니다. 신앙고백할 때 흥분합니다. 신앙고백할 때 감격스럽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니… ”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놀라운 분을 믿으면서 우리들은 힘이 없고, 그 믿음이 서지 못하고, 그 믿는 믿음의 부요함을 경험하지 못하면 문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더 영적인 사람을 찾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께 잘못할 때에 장소를 옮깁니다. 그래서 엘리에게 가있던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게 되고 제사장을 엘리에게서 사무엘에게로 옮깁니다. 사무엘은 참 잘했지요. 그런데 사무엘 아들들이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아들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서 사울에게로 넘어갑니다. 사울은 베냐민지파입니다. 베냐민지파의 사울이 하나님을 잘 경외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예루살렘을 바로 곁에 두고 점령을 하지 못하고 항상 거기서 블레셋의 침략을 당하고 결국에는 길보아산에서 자녀들과 생명을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또 옮기시는데 유다지파의 다윗에게로 옮기고 수도도 옮깁니다. 실로에서 사무엘이 다닐 때는 길갈이라든지 벧엘이라든지 여러 곳으로 순회를 했으니까 그 지역으로 하나님께서 옮기다가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기브아로 옮깁니다. 그 다음에는 다윗에게로 옮깁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 더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로 옮깁니다. 다윗은 절대로 다른 것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구원이시오, 힘이시오 하며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족장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다른 것은 가지면 안됩니다. 한번 안가지고 해보세요. 저도 가지면서 목회에 힘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저희 교회도 많이 가졌지요? 그게 교회 힘의 약화입니다. 많은 교인들을 바라보면 힘이 빠집니다. 큰 교회건물을 보면 힘이 빠집니다. 돈이 많이 들거든요. 교회조직도 힘을 빼앗아 갑니다. 목회에 중요한 하나님께 받쳐야 할 시간이 조직 속에서 많이 빼앗기는 겁니다. 내 영적에너지가 전부 그 쪽에서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로부터는 제가 얻는 거지만 사람에게는 다 빼앗기는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이 흡족해 하시고 이 이상 나에게 잘할 사람은 없다고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인쳐주셔서 그의 자손 메시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혈통을 복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남쪽 나라는 끝까지 오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별을 그려서 국기를 가지고 있듯이 새로 오실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물질주의로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현실주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주의 종들이 영적으로 무장하고 영적인 것을 찾고, 영적인 것 때문에 기도하고 영적인 것 때문에 울고, 영적인 고민을 가지고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영적 경주자로 달려가는 길이 나도 살고 한국교회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시하면 안됩니다. 저 깊은 산골에 있어도 하나님 편에서는 똑같이 보입니다. 어떤 형편에 처해있든지 하나님만 찾는 족장의 길을 걸어가는 분은, 그 분이 때가 되면 반드시 세울 것이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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