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8/25) 교갱협 제4차 영성수련회 폐회예배

고린도전서 15장 9~10절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저가 평소에 늘 마음에 두고 사랑하고 묵상하면서 힘이 빠질 때마다 이 말씀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저 자신이 재충전 받고 일어서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은혜 속에서 무장을 하고 내려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가 참 좋아하는 말은 '카리스'입니다. 은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만 있는 우리 집안에 손녀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은혜"라고 지어 버렸습니다. 지난 7월에 우리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가서 일본에서 제자훈련을 하 있는 목회자들이 연례행사로 모이고 있는 컨벤션에 참석했습니다. 동경에서 한 600명 컨벤션을 인도하고 그리고 나고야에서 200명 모이는 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홋가이도에서도 그곳의 지도자분들과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들하고 만나서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고 할 때 그들의 기도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 '메구미'(은혜)라는 말입니다. 일본말로 그 말을 들을 때도 마음이 푸근하고 가슴이 뜁니다.

잘 알고 계시는 이야기이겠지만 수십 년 전에 영국에서 비교종교학자들이 모여서 신학논쟁을 했습니다. 비교종교학자들이 모였으니까 많은 종교를 앞에 놓고 서로가 토론하는 장소였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독특한 점이 뭐냐? 이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중인데 흔히들 말하면 "성육신이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비교종교학자들의 눈에는 그게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도 기독교의 유일한 복음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마는 비교종교학자들에게 그 말을 하면 다른 종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만을 가지고는 독특성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가 잘 아는 캠브리지 대학교의 C. S. 루이스가 그 방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들, 뭘 가지고 그렇게 떠들고 야단입니까?"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를 가지고 논쟁하는데 우리가 아직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C. S. 루이스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 말을 듣고 거기에 모인 학자들이 과연 은혜가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교리이고 진리인가를 서로 토의하다가 결론적으로 C. S. 루이스의 말이 맞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불교에는 피안에 이르는 8가지 길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피안에 이르는 8가지 길은 은혜와는 거리가 멉니다. 힌두교에 인과응보의 교리가 있습니다. 인과응보도 은혜하고는 너무나 상반됩니다. 회교의 계율, 얼마나 무섭습니까? 거기에는 은혜가 자리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유대교의 율법,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은혜하고는 상반되는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은혜란 무엇인가

그만큼 은혜가 너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저는 8절 말씀이 저에게 은혜의 정의요 은혜의 전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15장에 들어와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논쟁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은혜가 뭡니까? 내게도 보이셨다는 이 두 마디에 은혜가 다 들어있습니다. "내게도" 내게는 누구입니까? 다시 말하면 자격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관심을 끌만한 좋은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 하나님이 인정해줄 만한 무슨 근거가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도 보이셨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게도"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또 은혜의 다른 요소는 무엇입니까? "보이셨느니라"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 만왕의 왕이 되신 그 크고 광대하시고 거룩하신 그 분이 보이셨다는 겁니다. 내가 그를 찾아가서 만난 것이 아니고, 그가 나를 찾아와서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승리의 구원의 주님이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스톰스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 공로가 있어서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은혜가 아니요, 나에게 공로가 없다고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 은혜이다." 공로하고는 아무런 관계없이 우리 예수님이 나를 찾아와서 만나주셨다는 그 감격, 그것이 카리스입니다.

 

은혜의 감격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는 이 은혜는

(1) 첫째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셨다는 감격스런 은혜가 들어있습니다.

교역자에게 있어서 구원의 감격이 마르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김종렬 박사님도 오늘 특강을 하시면서 말씀을 하셨지만, 교회 안에서 영웅주의는 죽음이라고 했는데 교역자에게 구원의 감격이 주는 은혜가 마르면 죽음입니다. 공동묘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감격이 서서히 식어가는 줄 알면 비상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시한부생명이 되어간다는 신호이니까 비상대책을 세워야 됩니다.

(2) 이 본문이 주는 또 하나의 은혜는 많은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불러 소명(직분)을 주셨다는 은혜의 감격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을 할 때마다 자주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저는 도망 다니던 사람입니다. 정필도 목사님처럼 국민학교 때부터 나를 주의 종으로 써달라고 일편단심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좌우로 눈 하나 팔지 않고 준비한 동역자들 앞에서 저는 얼굴을 못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도망다닌 사람입니다. 왜 할 것이 없어서 목사를 하느냐? 왜 성도들이 가져다주는 성미로 끼니를 겨우 해결하는 일을 하느냐? 주의 일이 꼭 그것 밖에 없는가? 그러면서 도망다니던 사람인데 하나님이 강제차출을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울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나같은 죄인에게 직분까지 주신데 대한 은혜 이것이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는 은혜입니다.

(3)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소명을 받아서 주님 앞에 일을 한다고 열심히 합니다마는 거룩하신 예수님, 완전하신 예수님, 전능하신 예수님 앞에 우리의 행위가 눈에 들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만가지가 허물투성이이고, 잘한다고 했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불완전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것을 주님께서 충성되이 여기시고, 완전한 자처럼 여기시고 잘한다고 하면서 품어주신 은혜입니다. 이것이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는 말입니다.

한번 나를 찾아오신 주님은 떠나지 않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했을 때도 그 죄를 죄값대로 갚지 않으시고 무조건 싸주면서 참으시고, 정 안되면 징계를 해서라도 자기 손에 쓰임받을 수 있도록 오늘까지 붙들어 주신 주님의 은혜, 이것이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는 은혜입니다.

 

작은 예수

저는 이 은혜의 감격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대한다는 것은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크신 주님이 나같은 것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셨고, 그래서 구원을 주시고, 소명을 주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이 놀라운 은혜를 어떤 때는 진하게 감동을 받고 느끼지마는, 어떤 때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느끼지 못하고 마음에 와 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감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작은 예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 작은 예수에 대한 감동이 나이가 들수록 더 진해집니다. 그 작은 예수를 볼 때마다 은혜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 정말 예수그리스도가 나에게 베푸신 그 은혜에 대해서 내 가슴에 다시 한 번 새로운 충만을 체험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좀 듣기 거북할지 모르지만 동역자끼리니까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한 번도 설교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저의 아내입니다. 제가 왜 작은 예수라고 하느냐 하면 결혼하고 한 동안은 몰랐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나에게 주신 작은 예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을 늦게 들어갔습니다. 못 들어갈 대학을 들어갔죠. 공부를 할 수 없는 처지이니까 헤매고 헤매다가 늦게 들어갔는데, 나이가 찼으니 들어가고 얼마되지 않아서 저 자신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대학 2학년 때 휴학을 했습니다. 그럴 때 목회를 하고 계신 외삼촌이 중매로 지방에 있는 집사람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있을 틈이 없었지요. 소개만 받은 겁니다. 저의 입장이 여자의 흥미를 끌만한 아무런 요소도 없었습니다. 대학 2학년생, 거기다 가장 인기없는 목사지망생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목사지망생이 장가 가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상상을 못할 겁니다. 가장 인기없는 사람, 그리고 고학생이었습니다. 또 대학 들어가서 얼마되지 않아서 연애를 했는데 하필이면 가톨릭의 열성분자였습니다. 이 여자는 죽어도 가톨릭을 버리지 않는답니다. 그 다음에 폐결핵이 걸려서 계속 약을 먹는 처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집사람하고 사랑에 푹 빠질만한 사랑의 교제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삼촌이 잘 말을 했는지, 아내가 눈에 뭐가 씌었는지 오직 일편단심입니다. 의사들 중매도 들어오고, 보라고 하는데도 도무지 요지부동이고, 자기오빠랑 동생이 다 서울대학에 다니고 자기는 부산에서 이름난 여고에서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형편 때문에 대학을 못 갔지만 나같은 사람을 쳐다볼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 한번 마음을 주고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3년 후에 결혼을 했습니다.

여기 여자분들이 계시지만 이것은 희한한 일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는 조건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신학대학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전도사 일을 하고 부목사일을 하고, 유학을 다녀오고 하면서 고생을 무지무지하게 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떠나지 아니하고 33년 동안 내 옆에 아직도 있습니다. 내가 병이 나서 어려움을 당할 때 내 옆에 24시간 떠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새벽마다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 명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 사람입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 작은 예수이구나.' 그래서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촉촉이 젖어옵니다.

'아,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만삭되지 못한 나를 위해서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는 아내가 주는 것과는 비교 안될 정도로 큰 것이겠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체험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경지를 저는 자주 발견합니다. 사람을 보면서, 그 다음에 예수님을 보면서.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것은 저의 고백 중의 고백입니다.

 

은혜를 아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도전하고 싶습니다. 은혜를 아십니까? 교역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진짜 은혜를 아는 교역자와 은혜를 모르는 교역자입니다. 머리로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마음으로 젖어 들어와야 됩니다. 나의 전 인격이 흔들릴 정도의 강한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교역자가 있고 모르는 교역자가 있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아십니까? 정말 은혜 앞에 자신이 깨어지는 체험을 하십니까? 은혜 앞에 눈물이 솟는 경험을 가집니까? 자신을 볼 때마다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다는 고백을 계속 계속 합니까? 그리고 나 같은 것을 위하여, 나 같은 것을 사랑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영광의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사실, 만나주셨다는 사실 앞에,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염없이 감격하는 체험이 있습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머리는 돌아가는데 마음은 냉랭한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지요.

이번 수련회에 귀한 종들을 통해서 참 적절한 말씀을 많이 주셨는데, 결국 이 받은 말씀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은혜라는 단비가 우리 심령에 촉촉이 내려야 합니다. 먼지가 펄펄 나는 땅에 아무리 씨를 뿌려보십시오. 다 없어집니다. 은혜,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

은혜를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 은혜를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를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늘 이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4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 또 은혜를 알아도 익사할 정도로 빠진 사람인가, 아니면 몇 방울 입에 넣어본 사람인가? 이것을 테스트하기 위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은혜를 진짜 체험하고 감격하는 사람은 첫째로, 죄책감에서 자유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때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말년에 가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딤전 1:13에 "나는 해방자였고, 핍박자였고, 나는 폭행자였고, 그래서 죄인 중 괴수였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걸 가만히 보면 사도바울은 자기의 죄에서 완전히 자유함을 받은 사람이고, 죄책감이 그를 괴롭힌다든지, 그를 해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잊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용서받았다고 해도 자기의 죄는 잊지 못합니다. 큰 죄를 잊었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늘 자기가 누구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책감에서 자유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신 자유를 평생동안 마음껏 누리면서 산 사람입니다. 왜? 만삭되지 못한 자기를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범한 죄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그렇게 많이 갖지 않습니다. 바울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지요. "내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 지은 죄를 주님이 용서해주신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특별히 신학교를 들어가고 목사로 부름받은 다음에 자신이 어쩌다가 범한 죄에 대해서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절대 쉽지 않습니다. 강단에서는 주님이 나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하고 뜨겁게 외쳐도 가슴은 냉랭한 냉기가 돌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따라오고 그러니까 마귀가 그 약한 부분을 계속 공격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 은혜 받으면 다 되는 줄 알아도 쉽지 않습니다. 특히 교역자들에게 그렇습니다.

일본에 어느 목사님이 계십니다. 여러분, 일본교회에서 100명을 넘어서는 것은 한국교회의 1만 명을 넘는 것과 같을 정도로 정말 목회를 위해서는 박토 중에 박토이고, 동토 중에 동토입니다. 10~20명 데리고 30년, 40년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저희교회의 제자훈련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제자훈련만이 우리가 살길이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달은 다음 제자훈련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제자훈련을 하면서 평신도들이 변하고, 변화된 평신도들의 가슴에 불길이 치솟고 그들을 통해서 안믿는 사람들이 전도를 받아서 돌아와 거의 100명 가까이 몇 년 사이에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평신도들이 똘똘 뭉쳐서 목사님을 보좌하면서 그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씨름을 하는지 가서 보는 사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평소에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적으로 조금 잘못되게 그 사람의 개성이 길들여진다든지, 이상한 버릇이 그 사람을 괴롭히면 언젠가는 터질 때가 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용서받았습니다. 자기도 용서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을 통해서 은혜받고 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자 마귀가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쁜 주일학교 애들이나, 예쁜 여자아이들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치마 밑으로 손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 한두 번 생기고 결국 그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온 교인들이 눈물바다가 되고 목사님의 사임을 받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 한 양로원에 들어가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거기서 괭이 들고 삽 들고 중노동 하면서 다시 쓰임받기를 위해 회개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숨은 죄들이 있으면 죄책감이 금방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제 이동원 목사님도 잠깐 지나가면서 이야기했지요? 교역자들 중에서 성적으로 문제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저도 밤중에 사모들로부터 목사님의 문제 때문에 전화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내가 연약해서 이런 치명적인 실수나 죄를 범했다면 그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와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도 한계도 없습니다. 진정 회개하고 주의 은혜에 매달리면 어떤 죄라도 용서받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비로소 은혜의 그 높은 경지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나는 교역자가 되어서 이런 죄를 지었기에 주님께서 늘 기분 나빠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회개해도 소용이 없고, 내가 아무리 죄용서 받았다고 춤을 춰도 결국은 나는 그 덫에 매어있는 사람입니다." 하는 의식이 계속 남아 있으면 그 사람은 아직 그 주님의 그 무한하신 은혜에 죄인이고, 세리이고, 창녀이고, 무조건 모든 사람들을 다 받으시는 용서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4절에 자기를 죄인중의 괴수다, 포행자다, 폭행자다 라고 고백하고 나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그 다음에 중요한 말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되 넘치도록 주십니다. 넘치는 은혜 안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호우가 내려서 싹 쓸어갈 때 가만히 보면, 밑에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넘치도록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혹 신학교 들어가고 나서 목사가 되고 나서 본의 아니게 끌려들어 간 죄가 있다 해도, 철저하게 회개하면 우리는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계속 끌려 다니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죄에서 해방된 환희가 있는 사람은 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진짜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죄를 반복하지 못합니다. 진짜 용서받은 축복을 누린 사람은 절대 죄를 의도적으로 반복하지 못합니다.

(2) 두 번째 테스트는 열등감에서 자유했는가, 못했는가를 보면 압니다.

열등감 이야기는 전병욱 목사도 여러 번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와 자신을 비교해 볼 때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같은 사도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직접 불러 3년간 훈련시킨 정말로 제자다운 제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사도직 때문에 자기를 불신하는 그런 사람들이 자기를 괴롭힐 때 열등감이 작용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주님이 나를 만나주셨다. 나에게 직분을 주셨다. 그리고 오늘까지 불쌍히 여기시며 나를 사용하신다." 이 은혜를 바울이 누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등감은 인간됨의 실존"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바꾸면 인간치고 열등감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옳은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비교의식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환경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래도 저래도 비교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를 안 다음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고 20년, 그 이전에 대학생들과의 사역을 합해 30년 가까이 사역하면서 한번도 저는 누구와 비교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분은 저분이고 나는 나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개척할 때만 해도 강남에 기라성 같은 몇 분들이 교회가 불꽃이 튀듯이 부흥하는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상하게도 비교하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나의 분수에 지나친 일은 시키지 마세요.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은 입히지 마세요. 내가 앉기 거북한 의자에 앉히지 마세요. 내 분수는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시니까 주님의 종으로서 잘못되지 않게만 일 시켜주세요."라는 것이 저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러니 몇 사람을 놓고 제자훈련하든, 아무 것도 없이 매일매일 어려움 속에서 사역을 하든, 하나님께서 나의 분수에 맞게 주시는 은혜라고 믿으니까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비교하지 않으니까 나에게 열등감이 생기지 않지요. 왜 열등감이 생깁니까?

제가 좋아하는 후배들이 몇 명 있습니다. 저는 떳떳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시골에 박혀서 목회를 하든, 장애인들하고 목회를 하든, 부목사로 일을 하든, 떳떳하게 목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만나도 비실비실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는 사람을 저는 좋아합니다. 심지어 제가 뭐 대교회 목사라고 해서 어려워하거나 하는 것보다는 어떤 때는 인사도 하지 않고 쓱 지나가는 도도한 사람을 저는 좋아합니다. 왜 비교합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불렀으면 나에게만 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을 이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비교하지 않으니까 열등감이 없고 자유합니다. 여러분에게 열등감 때문에 힘들어지는 순간순간들이 있으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만삭되지 못한 자 같이 태어난 나를 찾아와 주신 부활의 주님의 그 은혜를 여러분이 다시 회복하세요. 그러면 열등감이 사라집니다.

(3) 세번째로는 은혜를 아는 사람은 정말 충성합니다. 은혜는 충성하게 만듭니다.

바울이 10절에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합니다. 죽자고 자기 몸을 던져서 사역하는 것입니다.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사역하는 것입니다.

가끔 강사들이 이야기할 때 들으면 가정을 중시하라, 건강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은혜에 확 사로잡히니까 가정도 눈에 안보이고 건강도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 위해서 나 자신이 젊었을 때, 아직 힘이 있을 때 더 최선을 다해서 헌신할까? 이것만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아내의 눈에 눈물을 빼고, 자녀들로부터 불평을 듣고, 어떤 때는 건강도 헤치고 ... 잘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은혜가 이렇게 강하다는 겁니다.

은혜는 강합니다. 은혜는 나를 완전히 불태우도록 만드는 아주 신비스러운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순교자가 될 정도로 수고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더 수고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에게 그만큼 은혜가 넘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신문을 통해서 보셨을 것입니다. 사랑의교회에서 5,000여 명이 장기기증을 했다고 해서 신문에도 나왔습니다. 참 저도 속으로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박진탁 목사님이 5년 전에도 오셔서 같은 설교를 했는데 그 당시에는 600명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신청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7~8월 강단을 비우고 있었고, 교인들은 그 주간에 박 목사님이 오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어요. 제가 테이프로 들었는데 5년 전의 설교와 똑같았습니다. "나는 너무나 너무나 피가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다 못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피를 뽑자고 이렇게 말을 한 사람인데 삼사십년 동안 그렇게 뛰다보니까 자식을 낳아도 이름을 박뽑기라고 지었다. 그리고 나이가 60을 바라보고 있지만 지금도 3개월마다 한번씩 피를 뽑는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나는 신장 하나를 떼어서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이식해 가지고 살렸다."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교인들이 마음이 뜨거워졌나 봅니다. 그래서 그날 여름이어서 1만 3천명 정도 모였는데 그 가운데서 5,400명인지 5,200명인지 거의 50%에 가까운 사람들이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써낸 것입니다.

목사가 앞에서 "여러분, 이렇게 합시다." 하고 권면을 한다든지 약간 푸쉬를 했다면 이해가 갑니다. 담임목사도 없는 주일날 그들이 그렇게 써낸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평생을 장기기증, 헌혈에 헌신하는 사람의 말에도 감동해서 장기를 기증하는데,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만삭되지 못하고 난 자 같은 나를 찾아와 구원해주시고 영광스런 직분을 맡겨주셨다는 그 은혜 앞에 자기를 불태우고 싶은 헌신의 마음이 안 생긴다면,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리겠다는 충성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가 자기의 장기를 떼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감동을 받고 나도 장기를 떼어주겠다고 나오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분이 나를 사람 대우 해주셔서, 그 분이 나를 정말로 크게 보셔서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의 양떼들을 맡기면서 내 양을 치라고 사명까지 주셨다고 할 때 여러분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깁니까? 옆 교회 목사가 3을 충성하면 나는 5만큼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생기지 않습니까? 안 생기면 비정상이지요.

젊은 목사님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좀 아셔야 합니다. 우리 후배 목사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아셔야 합니다. 너무 계산적이에요. 벌써 목사직이 직업화 된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자기 직업에 생명 거는 사람은 없어요. 소명에 생명 거는 사람은 있어도, 직업에 생명을 거는 사람은 없어요.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던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행히도 요즈음 젊은이들을 보면 이상합니다. 오늘 같은 뜻을 가지고 이 수련회에 참석하신 여러분! 앞으로의 세대는 과거보다 더 큰 희생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우리의 피를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의 땀을, 아마 우리의 생명까지도 요구할 것입니다. 무서운 세대가 불과 몇 달 뒤에는 우리 앞에 문을 엽니다.

과연 누가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을까? 누가 이 어두움의 세대를 밝히는 등불이 될까? 누가 이 병든 사회를 치유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주의 통치하심이 이 땅에 임하게 할까? 누구입니까? 계산적으로 일하는 사람입니까?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을 망각하고 주님의 제단에 자신을 올려놓는 헌신된 충성자, 그 사람만이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은혜를 모르면 하던 일 다 집어치우고 어디를 가십시오. 가서 은혜를 알 때까지 주님 앞에 기다리십시오. 은혜를 모르면 안됩니다.

(4) 끝으로, 진짜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망각해버립니다.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모든 사도보다도 더 많이 수고했지만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자기는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습니까? 그러나 자기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아요. 오직 주님이 하셨다, 오직 은혜가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저도 이런 면에서는 아직도 완전히 때가 씻겨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자랑하는 듯한 투가 나타나면 벌써 아직도 은혜의 깊은 강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주 그래요. 자기가 살아 있으면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안했는데 왜 자랑을 합니까?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인데, 왜 내가 거기에 끼이고 자랑합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기를 내놓지 않습니다. 자기를 잃어버려요.

 

은혜의 감격을 체험하라

오늘 이 자리에 부활의 주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이 팔삭둥이 같은 나를 구원해주시고 소명주시고, 지금까지도 기다리며 용납해주시며, 불쌍히 여겨주시는 주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나를 찾아와 주신 이 주님의 은혜, 우리 다시 한번 체험합시다.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의 옷자락을 거머쥐고 "하필이면 왜 나입니까?" 라며, 흐느끼고 주님 앞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내 생명도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기 바랍니다. 이럴 때 우리가 살아납니다. 은혜가 우리를 살립니다. 죄책감에서 자유케 합니다. 자기자랑하지 않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충성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을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은혜를 충만히 채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 충만해서 우리의 갈릴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채워주시는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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