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8/17) 교갱협 제3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마태복음 20장 1~16절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을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농장경영주 김사장

어느 날 이 말씀을 쉽게 풀어서 저희 성도들과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 근교에서 농장 경영을 해서 성공을 한 어떤 농장경영주가(김 사장이라고 합시다.) IMF시대가 접어들면서 주변에 직업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현재 처한 입장에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부담이 그에게 생겼습니다. 어느 날 새벽 그는 서울시내 노숙자들이 모여있다는 서울역 지하도를 찾았습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에 의하면 98년 말에는 수도권에만도 최소한 7천에서 8천 명의 노숙자들이 생길 거라고 합니다. 보건복지부 안에도 어떤 뚜렷한 대책이 없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그 중에 한 부분이라도 책임을 지면 나머지 부분을 각계 각층에 호소를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는데 역사적, 사회적으로 위기의 때에 한국교회가 침묵하지 않고 노숙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호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김 사장님이 서울역 지하도에 나왔습니다. 그중 한사람에게 접근을 했습니다. “혹시 제가 일자리를 제공하고 싶은데 와서 일을 하시겠습니까? 서울에서 멀지 않습니다. 하루에 8시간 일하시면 1시간에 1만원씩 하루 8만원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기로 했습니다. 김 사장님은 서울역에 나가 다른 사람에게도 접근하여 흥정을 하고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낮 12시에도 왔고, 오후 3시에도 왔습니다. 오후 3시라면 일군들이 일할 시간은 3~4시간 밖에 안되는데 말입니다. 김 사장님은 아직도 일을 찾지 못한 노숙자들에게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서 일해주기를 요구했고, 그렇다면 알아서 계산해주기로 했습니다. 더욱 이해가 안되는 것은 김 사장님이 오후 5시 쯤에도 서울역에 나타나서 사람을 찾았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에 있는 노숙자를 보고 농장의 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일군들이 온종일 일을 했습니다.

김 사장님은 오후 6시가 지나서 농장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종일토록 일을 한 일꾼들을 집합시켜놓고 일당을 지불하기 시작했습니다. 맨 나중에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부터 임금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한 시간 남짓 일을 했을까요? 그에게 8만원을 지급했습니다. 그러자 새벽부터 혹은 9시부터 일을 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눈에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들에게 8만원을 주면 우리는 더 많이 일을 했으니 임금도 더 주지 않겠는가?' 그러나 김 사장님은 12시부터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도 8만원, 아침 9시부터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도 8만원을 주었고, 아니 새벽부터 일을 시작한 친구에게도 8만원을 주자 이들로부터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나? 사람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우리가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항의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포도원 품군의 비유

오늘 본문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포도원 품군의 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이 집주인이 바로 누구입니까? 김사장님입니다.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예수님 당시에 품군들이 하루를 일하면 정상적으로 받는 보편적인 품이 하루 한 데나리온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들여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보니” 태인시간을 한국시간으로 환산하면 대충 6을 더하면 되겠지요? 그러면 한국시간으로 정확히 아침 9시가 됩니다.
"장터에 나가보니" 장터가 어디입니까? 서울역 지하도 광장이 아니겠습니까?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우리농장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그 다음 5절을 보면 제육시입니다. 육시면 우리시간으로 12시입니다. 또 구시, 구시면 현재 시간으로 얼마가 되겠습니까? 구시면 오후 3시입니다.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절에 보면 제 십일시, 한국시간으로 오후 5시가 되겠지요.

"나가보니 또 사람이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여기 섰느냐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의 김사장님이 일군에게 이르되 나중 온 자부터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지불하라 하니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10절 보십시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절에 보면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오늘 아침 서울역 광장 앞 지하도에서 만나서 우리 농장에 오셔서 하루 8시간쯤 일하시면 시간당 1만원씩 쳐드리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나요?”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할 말이 없었죠. “제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14절에 “여러분의 것이나 가지고 가시지요.” 한시간, 두시간, 혹은 세시간 밖에 일하지 못한 분들, 그러나 손에 아무것도 들고 가지 못하면 오늘도 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 서울역 지하도의 차가운 바닥에서 하룻밤을 자야 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여러분과 똑같은 대우를 해줄 그 권한이 나에게 없단 말입니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선을 베풀었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은 저를 악하게 보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포도원 품군의 비유는 16절에 이런 선언으로 마무리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흥정의식

우리가 이 비유를 풀고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군으로서 바른 의식을 가지고 한평생 건강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오늘 이 말씀 속에는 매우 중요한 어떤 메시지가 숨어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김사장이 잘못 처리했다.” 이런 전제를 둔다면 이건 풀릴 수 없는 본문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을 시작한 분들에게 어떤 오해가 있었다. 그들의 의식의 근저에 비뚤어진 발상이 있었다. 제가 그들의 잘못된 발상, 잘못된 의식구조를 주목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포도원에서 일군으로 일하는 저나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의식구조가 있을 수 있다는 까닭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좀 더 잘 풀기 위해서 본문설명의 전제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백그라운드를 같이 생각해 보면서, 먼저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잘못 가지고 있었던 의식의 구조를 세가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의식을 대체할 수 있는 건강한 바른 의식이 어떤 의식이어야 하는가를 함께 좀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로, 먼저 와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그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졌던 잘못된 의식하나가 존재합니다. 저는 이 잘못된 의식을 흥정의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교체해야 할 건강한 의식, 그들에게 꼭 필요한 또 하나의 의식이었다면 은총의 의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주께서 왜 이 말씀을 사랑하는 제자들과 더불어 나누게 되었을까요? 이 말씀을 주신 일차적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20장의 배경이 되는 19장의 마지막 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9장 27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물을 버려두고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번째 만남. 그 만남의 광경을 기억하시지요.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고 있었던 어부. 날이 밝으면 갈릴리 바다에 가서 그물을 내려 온종일 고기를 잡다가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 잠시 안식을 취하다가, 또 날이 밝으면 갈릴리 바다에 나가 어김없이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야만 했던 이 어부. 저녁이면 그물을 싣고 집에 돌아와 잠시 짧은 안식을 취한 후에 해가 뜨면 새벽. 그 어부는 그물을 매고 갈릴리 바다로 나갑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내려 다시 온종일 고기를 잡습니다. 일상적인 삶의 방법. 꼭 같은 방법.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지 특별한 삶이 없었던 어부 베드로.

어느날 그가 전혀 고기를 잡지 못하고 당황하고 고통스럽게 하루밤을 지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새벽녘 어떤 낯선 나그네가 그 앞에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이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왔던 어부 베드로. 바다에 관한 한 전문가였던 어부 베드로. 그러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허탈감 속에서 보내야만 했었던 이후의 새벽에 만났던 낯선 나그네. 그는 베드로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다가와서 “거기서 고기잡지 마시고, 좀 더 깊은 곳으로 나가보시지요. 그리고 한번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보시지요.” 틀림없이 어부 베드로는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권위를 그 분의 음성에서 느끼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래서 그물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물은 찢어졌습니다. 넘치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황당한 결과, 예상 못했던 이 놀라운 결과 앞에서 베드로의 입에서는 엉뚱한 고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당신은 놀랍군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바다를 아셨습니까?” 그런 고백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혀 다른 고백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저 바다의 깊은 곳을 알고 있고, 고기떼의 흐름과 행방을 알고 있는 저 분이 나를 모를까요? 내 마음을 모를까요? 내 좌절을 모를까요? 내 눈물을 모를까요? 내 고통을 모를까요?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무엇 때문에 방황하는지,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삶 속에 그 많은 방황의 자취를 그 분이 모를까요? 그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순간,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을 발견하는 그 순간, 자기 안에 있던 모든 더러운 것들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그의 입술에서 뛰쳐나온 그 고백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저를 떠나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이때 주께서 주셨던 명령이 어떤 명령이었습니까? “이제 네가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 나를 따르라. 이제부터는 네가 사람을 낚아야 해! 고기잡는 것도 귀한 일이지. 보람있는 일이야. 그러나 너는 그보다 더 위대한 소명이 있다. 사람을 낚아야 해. 사람을 변화시켜야 해.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그들을 세우고 섬겨야 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성경은 베드로가 그의 형제 안드레와 함께 어떻게 응답했다고 가르칩니까? “그물을 버려두고” 쉬운 결단이 아니지요. 어부에게 있어서 그물은 밥줄이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 그물을 버려두고 그것은 굉장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물을 버려두고, 대가를 지불하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이제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명령을 수종 들며, 그리고 그의 이상 앞에 자기의 삶을 바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바람이 났을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메시야로 자신을 선언하는 저분이 나를 부르셨단 말이야. 나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다.” 그것은 감격이었습니다.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바람나게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베드로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 아닙니까? 충동적이긴 하지만 감정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가장 다혈질의 제자가 베드로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19장 27절의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인간성을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어느날 주님 앞에 나와서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대표한 질문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처음에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에 감격도 있었고,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글쎄, 과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정말 내 삶에 있어서 의미있는 일일까? 혹시 손해만 보고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닌가? 짧디짧은 내 인생, 거기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이나 삶의 기쁨을 등져버리고 어쩌면 나는 손해만 보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닌가?’ 누구나 이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정직하게 그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했습니다. 그리고는 나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무엇을 얻으리이까?” 제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남들이 다 쉬는 휴일날, 주를 위해서 땀을 흘렸던 그 정성. 그러나 월요일도 내게는 안식일이 아니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다시 새벽을 열고 다시 성도들을 심방하고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서 내 삶을 드려야 하고, 그리고 나는 모함을 받고 오해도 받고 내 가슴은 찢어지고, 사람들 앞에 나는 인정받지 못하고 이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그런즉 무엇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면 베드로는 어느날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본전 생각이 나신 적이 없나요?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28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은 새로워지는 날이 온다.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온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리는 날이 온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29절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예수이름 때문에 복음 때문에 내가 무엇을 희생했던지 냉수한잔의 친절을 이름 모를 소자에게 베푼 것까지도 잊지 않고 상급을 주겠다고,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던 내가 그대의 수고를 모를까? 그대의 눈물을 모를까? 그대가 나를 위해서 참고 견딘 세월을 그 고통의 세월을 갚아주리라.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것은 19장의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끝납니까? 30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우리는 19장의 마지막 구절과 20장 포도원 품군의 비유에 마지막 16절이 정확하게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베드로, 너는 먼저 부르심을 받았다. 내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부르심을 받고, 너는 으뜸가는 제자로 세움을 받지 않았느냐? 너는 처음에 내가 너를 불러준 것을 은혜로 생각했다.” 나를 불러주셨다. 그것은 은혜였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것, 그리고 십자가의 핏값으로 나를 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그것이 주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이 은혜입니까?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심이 은혜라고 믿으십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그가 나를 부름심이 은혜였습니다. 그가 나를 구원한 것만 해도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일감까지 주셨습니다. 나를 주의 종으로 삼으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 사람들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주역으로 저와 여러분을 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프라이드였습니다. 그것은 감격이었습니다. 그것은 특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기쁘게 생각하고 주님을 따라온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계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얼마큼 가치 있는 인생일까? 보답받는 인생일까? 이 희생은 얼마만큼 가치있고 의미있는 희생일까? 우리는 이 질문을 주 앞에, 이웃들에게는 숨긴 채로, 내 내면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 흥정하는 의식을 가지고 주님 앞에 묻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너는 먼저 나에게 부름을 받았어. 그러나 너의 동기는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는 나중될 수가 있다. 먼저 부름받은 너여! 그러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마지막 자리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이 말씀 앞에서 너의 삶을 돌아볼 용의가 있느냐?” 이런 얘기가 아닙니까? 19장이 그렇게 끝납니다.

 

흥정의식의 치유

그리고 20장입니다. 포도원 품군의 비유 장입니다. 이것은 연속입니다. 베드로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포도원 품군의 비유는 주의 종들을 위한 것입니다. 포도원의 사역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주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을 때,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핏값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을 때, 우리는 구속의 은총을 소리높여 외쳤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뽑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풀타임으로 하나님의 사역의 장에서, 포도원에서 주를 섬기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이 찬송을 거침없이 불렀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는 이 소명의 즐거움, 구원의 기쁨을 잊어버리기 시작하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역의 기쁨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내 마음 속에 어떤 갈등이, 내 사역의 장에서 나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그 곤고함을, 그 방황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의 정체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 흥정의식을 치유할 수가 있습니까? 저는 그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은총의 의식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름을 받았던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우리 자신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20장을 들어가서 다시 한번 보십시다.“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절에 “또 나가보니 장터에...” 이 포도원 품군의 비유에 주님은 그들이 주인에 의해서 부름을 받을 때의 삶의 정황, 삶의 상태, 그들이 본래 부름받기 전의 삶의 정황을 묘사할 때 비유 속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합니다. “장터에 놀고 서있다” 우리는 그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7절에 보십시오.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는냐” 주님만나기 전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의 목회의 장이 아니라 내가 복음을 듣기 전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직면하기 전에 그 당시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 때 당신은 누구였습니까? 나는 누구였습니까? 십자가 앞에 서기 전에 우리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나. 주와 상관없이 살고 있었던 자. 본질상 진노의 자. 그의 심판, 그의 저주를 피할 수 없었던 나. 내 마음으로 내 생활의 장에 죄악을 쌓아두고, 그것을 내 삶의 훈장처럼 여겼던 나. 주앞에 서는 날 모든 것이 죄악임을 통감하고, 죄를 쏟아냈던 그 밤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십자가 앞에 섰던 그날 밤, 비로소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예수가 나의 구세주요, 주님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라는 찬송을 부르신 적이 없었나요? 내가 구원받은 것이 나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다. 아무것도 나를 주 앞에 세울 수가 없었다. 한 줌의 의도 없었다. 한 올의 의도 주앞에 주장할 수 없었다. 내가 의라고 주장했던 그 모든 의는 주님 보시기에 더러운 걸레 조각에 지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주께서 나를 받아주셨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그의 피로 씻어 주셨습니다. 나를 의롭다고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주앞에 이 찬양을 불렀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이것도 은혜인데… 이것도 은혜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주의 종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복음을 반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라고, 제자 중의 제자로 나를 뽑아 세우시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이 특권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불평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혹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내 의식의 깊은 곳에서 소명을 후회하고 이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가를 주님 앞에 흥정하고 계신 분은 안계십니까?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마음의 깊고 깊은 저 밑바닥에서 갈등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목회의 장에 서 있지만 불평하고, 그리고 회의하는 내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흥정의식의 정체입니다.

 

흔들리고 있는 주의 종들에게

저는 이 치유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로,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께서 오늘 밤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앞에 서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것은 은혜였습니다. 그가 나를 부르심 은혜였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은혜입니다. 나는 놀고 있습니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지옥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피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저주 대신,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심을 받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주님 앞에 불평할 거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벌써 그 은혜의 감격을, 그 은총의 의식을 망각한 채 기계적으로 목회의 장에서 우리에게 정해진 숙제를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오늘도 감당하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요? 여기 우리들의 좌절과, 우리들의 불평과, 또 목회의 장에서 흔들거리는 우리의 목회의 삶에 갈등의 원인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흥정의식이라는 이름의 정체입니다. 오오, 주께서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은총의 의식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주의 은혜가 다시 우리 속에 살아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주의 은혜를 다시 아는 자리에 세워주시옵소서.

 

나를 부르신 은혜

저는 먼저 와서 이 포도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또 하나의 잘못된 의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과 동료들의 관계에서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의식. 처음에는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인이 나를 부르심이 은혜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김사장께서 꼭 사람이 필요해서 서울역에 나가서 사람을 고용해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 고통받는 이웃들에 대한 그분의 배려였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호의였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전혀없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행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김사장님이 그들이 꼭 필요해서 고용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이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호의였고, 배려였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우리를 배려하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일군으로서 가지는 잘못된 의식구조 - 경쟁의식

또 하나 잘못된 의식, 그것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였습니다. 무엇이 지금 포도원에서 일한 일군들의 기쁨과 노래와 시를 빼앗았습니까? 저는 그것이 경쟁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의식을 섬김의 의식으로 혹은 비교의식, 같은 맥락에 서있습니다. 그와 꼭같은 의식이 오늘 우리의 목회의 현장에서 저를 피곤하게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주앞에서 발견했습니다. 내 목회를 제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경쟁의식입니다. 무엇으로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을 대치하는 치료하는 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섬김의 의식입니다.

본문의 10절을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절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먼저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왜 불평하며, 원망하고 있습니까? 1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받을 줄 알았더니” 누구보다도? 나중에 온 자들보다도. 나는 저들보다 더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 응분의 보상이 내게 없다. 비교하는 그 순간 비교의식이 그를 지배하고 경쟁의식이 그를 지배하는 그 순간, 그는 갑자기 그 아침에 김사장이 부른 것이 하나도 기쁨이 아니었고, 하나도 배려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불평객으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이 완전한 변절을 보십시오. 아침에 그가 나를 부르실 때, 그는 휘파람을 불며 버스에 타서 김사장의 농장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해가 저무는 이 저녁에 그는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김사장을 향해 데모를 하자고 충동거리면서, 손을 높이 들고 있는 이 완전한 변질의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하루만의 변절입니다. 그것은 예외일수 없는 목회의 장에서 우리들의 변질의 가능성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 모두 함께 놀라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그 기쁨, 주께서 나를 부르시고, 그리고 나를 주의 종으로 부르셨을 때, 그 프라이드가 그리고 그 당당한 특권으로 말미암은 눈물겨운 그 감사가 주님 이 순간 나를 불러주셔도 아무런 불평이 없고, 할렐루야! 천국으로 가도 나는 주 앞에 이의가 없는 사람이요, 이 감격이 지배했던 그 때의 기쁨, 그 흥분, 그 감격이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을까요? 조금은 어깨가 처져있고, 이웃들에게 어설픈 미소로, 그리고 우리 이웃 목회자들에 관해서, 나보다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이웃들에 관해서 얄미워하면서 그들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저주하고 정죄하고, 혹은 내가 조금 성공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보다 성공하지 못했다고 믿어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보내고 있는 그들을 향한 과소평가와, 그리고 꼬여진 자부심과 의식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 속에 순수한 기쁨이 사라질 때, 뭔가 그 정체를 헤아릴 수 없는 까마득한 안개 같은 것이 나를 감싸고 있는 나의 변질된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저는 어느날 이 변질의 정체가 비교의식, 혹은 경쟁의식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뿌리깊은 계급의식

그것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도 그런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가 그런 기쁨을 잃어버린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먼저 도착한 사람과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의 갈등. 창립멤버와 나중에 온 사람들의 갈등.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이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이 조금 더 지나치면 저는 계급의식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피곤하게 억누르고 있는 가장 무서운 의식구조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계급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갱신되려면 어떻게 이 직분의식이 계급의식에서 자유할 수 있는가? 이것이 계급이 아니라 어떻게 종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직분이 하나씩 주어질 때마다 벼슬을 하나씩 단다고 생각하는 이 오해가 언제나 한국교회에서 바뀔 수 있을지… 그리고 직분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흥분하고 고발하고 언제 우리 교회에서 이런 상처들이 치유될 수 있을지…

똑같은 맥락입니다. 경쟁의식 아닙니까? 비교의식 아닙니까? 이것이 계급의식을 낳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도 언젠가부터는 사람들이 저를 주의 종님으로 대접해주는데 쾌감을 느끼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직분이 계급일 수가 있습니까? 집사는 종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을 줄 때마다 가르치지 않습니까? 겸손하게 서야 한다. 집사님만 종입니까? 장로님은 종이 아닙니까? 목사는 종이 아닌가요? 저는 목사도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턴가 종이라는 단어 자체도 한국교회에서는 계급화가 된 것 같아요.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즐기고 있는 이 칭호. 주의 종.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앞의 ‘주’ 자에는 ‘님’ 자가 안붙어요. 세상에, 세계교회 가운데 종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계급화시킨 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바뀌어야 되겠습니까? “주님의 종놈”이지요. 종놈입니다. 그게 무슨 벼슬입니까? 종의 권위는 그가 가진 인격의 권위이어야 하고, 성실함에서 오는 그 성실성이 가져다주는 인격의 권위와 능력이어야 하지, 어떻게 종이라는 계급과 벼슬과 명칭이 주는 것이 우리들의 권위를 어떻게 대신할 수가 있을까요?

 

종은 다 주는 것

저도 언제부턴가 그 칭호를 즐기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언젠가 한 교인 때문에 제가 무척 속이 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풀어놓을 때가 있어야죠. 속상하면... 얘기할 때가 있어야지. 그래서 제가 아내 앞에서 그 집사님 욕을 한 10분 동안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무슨 소리를 해도 다 들어주는 제 아내가 있다는 것에 저는 항상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 아내 앞에서 한 10분 동안 그 인간에 대한 제 좌절, 제 분노를 털어놓고 욕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 소리 안하고 잘 들어주더라구요. 들어주더니 다 끝난 다음에 제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하는 소리가 “당신 상처 깊이 받았군요. 왜 그렇게 상처를 받으셨어요?” 그래요. 그래서 제가 “아니 몰라서 그러느냐? 지금까지 다 얘기했는데 말이지” 그랬더니 제 아내가 무슨 말을 한마디 해요.

그런데 제가 지금도 그 말을 잊어버리지를 못해요. “여보, 제가 생각하기에는 당신이 받으려고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받으려고 해서. 인정받고, 대접받고. 여보, 당신과 나는 이 길에 들어섰을 때 주기로 작정하지 않았나요? 다 주고 가기로. 주면 되지 왜 받으려고 해요.” 갑자기 저는 제 아내의 음성이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오고, 정신이 바짝 낫습니다. 주면 되지, 종이 주는 거죠. 종이 주는 것 아닙니까?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2장에 그 유명한 케노시스 텍스트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그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이시니” 쉽게 말할까요? 우리 주님 그분은 얼마나 높으신 분입니까? “그 분은 하나님만큼 높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셨다. 종이 되셨다. 그리고 다 내어주셨다.” 우리가 그 분을 따라서 가기로 결정하였다면 다 주는 거지 뭘 받으려고 그래요? 저는 그 날의 제 아내의 음성을 통해서 들은 주님의 음성을 지금도 살아있는 충고처럼 제 가슴에 간직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교회와 교회 사이에서 요즘 목회자들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교회와 교회의 비교에서 오는 눌림과 열등감, 목회자들 안에 있는 열등감의 문제라고 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그러더라구요.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보통이 아니라 보통 이상의 치료를 요구하는 심각한 열등감의 질병을 앓고 있다.” 그 심리학자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여기서도 입증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한 번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자, 우선 여러분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한 번 쳐다보세요. 한 번 관상을 보세요. 병적인 열등감의 징후가 그 분에게 있는가 잘 보세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면 왼쪽에 있는 사람을 한 번 쳐다보세요. 그 분에게 병적 열등감의 사인이 있는가 한 번 잘 보세요. 아니죠. 그렇다면 틀림없이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목회자들이 이 열등감에서 자유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저는 옥 목사님 쳐다보기만 해도 열등감이 생깁니다. 옥 목사님이 태어나지 않은 한국교회에서 목회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열등감에서 자유해지는 목회

제가 부끄러운 얘기를 하겠습니다. 미국의 워싱턴 지역에서 목회를 했는데, 이 워싱턴이라는 도시에 포토맥이라는 강이 있습니다. 강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으로는 메릴랜드주라고 부르고 남쪽으로는 버지니아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이 워싱턴은 그 워싱턴D.C. 서울로 말하면 서울특별시를 중심으로 해서 남쪽으로는 버지니아주가 있고, 북쪽으로는 메릴랜드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버지니아주, 워싱턴 D.C., 메릴랜드주 세개가 이렇게 연달아 있습니다. 저는 메릴랜드주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가 메릴랜드주에서는 제일 큰 교회였습니다. 10년 동안 아주 잘 성장을 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려는 그 사건은 거기서 목회한 지 한 6, 7년 경과한 뒤의 일입니다. 6, 7년 목회하고 나니까, 교회가 아주 잘 자랐습니다. 지금까지 목회했던 목회의 장에서는 제일 행복한 목회, 즐거운 목회, 보람있는 목회였습니다. 제가 그 교회 두번째 목사로 갔습니다. 첫번째 목사님이 어떤 큰 것을 남기지 못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저에게는 거기서 제자훈련도 잘하고, 교육목회도 하면서, 또 전임목회도 하면서 이민목회로서는 비교적 모델이 되는, 제가 생각하는 만큼의 어느 정도의 성취가 가능했던 목회를 했습니다. 저희 교회가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가 잘 자라나고 있는데 저쪽 강 건너편의 버지니아 주에 장로교회가 하나 있어요. 중앙장로교회라고. 그런데 그 교회가 잘 자란다는 소식이 자꾸만 들려와요. 이 소식이 들려오는데 하나도 즐겁지가 않더라구요. 괴로워요. 자꾸만. 그러던 어느날 결정타를 맞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워싱턴 중앙장로교회가 건축을 시작한다는 소식이었어요. 아주 멋있게 교회건축을 한대요. 그런데 이상하게 배가 아프더라구요. 근데 배가 아픈 나를 보고서 이거 환장하겠어요. 내가 동료목회자의 성공을 보고서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그거 가지고 다시 생각하는 내 모습이 너무 치사하고 옹졸해 보이는 거 있죠. 내가 나에 대해서 고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어느날 그것 때문에 괴로워서 새벽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이 열등감에서 자유하고 비교에서 자유해지는 목회를 할 수가 없을까요.” 그래서 제가 막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중앙장로교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그리고 속으로는 질투하는 목사님.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축복하시고, 목회가 잘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요즘 건축의 소식이 들리는데 건축프로젝트가 잘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와요. “너 입에 발린 소리 하지 말아라.” 아, 환장하겠더라구요. 더 깊이 기도하는데 그날 무슨 음성이 들려와요. 어떻게 해야 이 병을 치료합니까? 두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너 그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라. 그리고 건축한다고 하니까 너희 교회에서 헌금 좀 해라.”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그 음성이 자꾸 지워지지 않아요. 머리 속에서. 들려오고, 또 들려오고, 막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주신 음성이로구나.’

그 다음 주일날 저희 교회에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제가 저희 제직들 앞에서 솔직한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같은데, 강건너 우리의 이웃 장로교회가 건축을 하는데 주님께서 그를 위해서 헌금을 하라는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교인들이 할렐루야! 그래요. 듣고 보니까 기분이 안좋더라구요. 아, 이 인생들이 그럴 수가 있느냐 말이죠.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습니다. 내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짓을 하고 있나? 그리고는 제 마음을 다스리고 진정하고는 정성껏 한 두 주간 광고를 해서 건축헌금을 해가지고 잘 봉투에 넣어서 이원삼 목사님께 가서 진상을 했습니다. “건축헌금입니다. 하나님이 제 마음 속에 부담을 주셔서 우리교회가 건축헌금을 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그 목사님이 멍하니 앉아 계세요. “이목사, 참 고마우이. 같이 기도합시다.” 같이 기도하면서 울었습니다. 그 순간이예요. 기도하는 그 순간 제 속에 있던 열등감이 다 씻겨나가요. 제 마음이 그렇게 깨끗함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아, 이거였구나.’ 하나님이 저희 교회를 계속 축복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저희 교회가 중앙장로교회보다 조금 더 큰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중앙장로교회가 기쁨으로 온 교회가 헌금을 해서 저희가 드렸던 헌금보다 조금 더 많이 해서 보내주셨습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

이 사건은 저에게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부터 저는 이원삼 목사님을 형님으로 모시고 워싱턴 안에서 모든 미션프로젝트를 늘 같이 하고, 선교도 같이 하고, 제 평생에 교단의 장벽이 무너지고, 자유함으로 함께 일할 수가 있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파주의와 교단주의의 무거운 벽들이 언제 무너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그의 자유함 속에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는 새 날은 올 수 없을까요? 우리가 좁은 땅덩어리에서 태어나서 그럴까요? 왜 그리 우리 한국인들은 인색한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질투하고, 제가 이민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교인들도 그래요. 한국인 특유의 심성인지도 모르죠. 어떤 날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와서 “목사님, 아무개 집사 있죠. 세상에 그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왜요?” “아, 글쎄 그 친구 처음에 미국에 도착했을 때,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한 것 알죠? 그런데 그 친구가 제가 경영하는 식품가게를 한 블록 차이에 두고 거기에 가게를 차렸어요.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집사님 그분이 그곳에 가게를 차려서 집사님께 크게 손해가 있나요?” 그랬더니, “손해 없어요.” 라고 하더군요. 아니 손해가 없으면 됐지 왜 그래요? 함께 잘살 수 없나요? 함께 잘할 수 없나요? 함께 축복하고. 또 형님가게가 더 크면 어때요? 아우가게가 적으면 어떻구요.

저는 이규태씨가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쓰는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본래 그렇지 않은데 한국인들이 특별히 이조시대 이후 산업사회의 과정을 겪으면서, 마음이 아주 옹졸해졌다. 독 속의 게와 같다. 독 속에 게들을 집어넣으면 한 마리 한 마리는 항아리 밖으로 다 기어나올수 있는데, 함께 있으면 어떤 게도 항아리 밖으로 기어나오지 못한다. 왜 그럴까요? 하나가 올라가면, 또 하나가 뒷다리 잡고, 잡아당기고. 그래서, 게의 철학이 있다면, 나죽고, 이판사판 둘다 다 죽자. 정확하게 그것이 현대 한국인들의 모습이고, 심지어는 우리 삶의 주변, 목회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목회의 현장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군대에 갔을 때, 미군부대에 차출이 되어서 통역으로 근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미군들하고 친구로 사시는 한 여자 분이 저하고 잘 아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이병장님, 내가 그이하고 싸웠어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데 싸우는데 갑자기 영어가 잘 생각이 안나요.” “뭐가요?” “너 죽고 나 죽고 둘다 죽자.” 제가 영어는 조금 합니다만, 저도 이 말이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쉬운 영어일수록 생각이 안나거든요.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데, “모르면 관둬요. 집어치워요.” 하고 신경질을 내고는 자기가 가서는 다짜고짜, 그 미국병사의 멱살을 잡더니, “You die. me die. 가부시키 die. OK?” 이러더라구요.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목회

그런데 저는 오랜세월이 지나간 지금도, 그 말이 잊어버려지지가 않아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추한 모습들. 목회의 장에서도, 여전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말이죠. 교인들이 한 두명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에 괜히 흥분하고, 뭐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나라의 장에서 교인들이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는게 뭐가 그렇게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조금 자기의 교회 성도가 많다고 해서 그것을 성공으로 치부하는 오만한 허위의식이 제 속에도 그것이 있는 것을 봤습니다. 비교의식, 상대적 비교의식에서 자유하려면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오셨는가? 하나님과 동등이신 그가, 하나님 만큼 높으신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고 종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자신이 앉아있어야 할 그 자리에 제자들을 앉혀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주님 설교를 얼마나 많이 합니까? 목회의 현장에서 우리가 진짜 교인들의 발을 씻길까요? 또 이웃목회자들의 피곤과 탈진과 아픔과 눈물과 원망의 발들을 우리가 서로 씻어주고 있습니까?

지금은 한국교회 안에서 이런 습관들이 많이 유행하고 있습니다마는, 오래 전 70년대 초에 처음 미국에 유학을 가서 여름방학이 되어 여행을 하다가 인디아나주의 교회에 가서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냥 예배 드리려고 들어갔습니다. 이단 교회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개신교 교파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성찬식을 하더라구요. 그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식을 하는 교회였던 것 같아요. 나쁠 것 없죠. 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는 Foot Washing Service를 하도록 발씻는 예배를 하는데 성경에서만 봤지 그 당시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목사님이 성찬식이 끝난 다음에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그 찬송을 부르면서 다 지하실로 내려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갔더니 남녀 반으로 나눠놓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쭉 앉으라고 하더군요. 내 앞에는 털보 형제 하나가 앉았습니다. 서로 자기 소개하고, 그리고는 저더러 짧막한 간증을 하나 해달라고 해서 이러저러 해서 예수를 믿었다. 라고 했더니, 형제님 하면서 저를 끌어안더군요. 그러더니 “오늘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제 양말을 벗겼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처음 보는 거니까, 그리고 그런 것을 예비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무안하기도 하고 그러더군요. 그러더니 같이 기도하자고 하면서 제 팔을 붙들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뜨면서 “형제님, 제가 할말이 있습니다.” 하면서 신앙고백 비슷한 것을 합니다. “당신의 간증을 듣고 나의 형제인 것을 알았는데,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모범을 닮아 당신을 섬기고 싶습니다. 나의 섬김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면서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면서 제 발을 씻기더라구요. 내 발 아래 무릎 꿇고 앉아서 구렛나루 수염의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이 친구가 내 발을 씻겨주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한 순간 제가 착각을 일으켰어요. 주님이 제 발을 씻겨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제 눈에 흘렀습니다. 전혀 모르는 나를 언제부터 알았다고 예수 때문에 내 발을 씻겨주는 그를 보는 순간, 주님이 나를 이렇게 섬겨주셨구나! 그것은 너무나 굉장한 감동이었습니다.

 

더 섬겨야 해

제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나와서 그 감동이 생각이 나서 어느 수난 주간에 세수대야 300개만 사달라고 교회 사무국에 부탁을 했습니다. 발씻는 예배가 뭔지 모르는 그들은 깜짝 놀라더군요. 그래서 제가 미국에서 봤던 것처럼 그대로 행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산 위에”를 부르며 다 아래로 내려가서 둘씩둘씩 다 짝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집사님 하나가 돌아다니다가 짝을 못짓고 저하고 짝을 지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평소에 저하고 유감이 많은 집사님이예요. 어쩌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지 피할 길이 없쟎아요. 그 교회가 상당히 전통적인 교회라 제가 마음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많이 울었어요. 저에게 눈물을 준 장본인 중에 한사람이었습니다. 피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양말을 벗기고 제가 저 인디아나주 교회에서 보았던 그대로 고백을 시작했습니다. 할 말이 있어야죠. “집사님, 제가 집사님 발을 씻겨드리려고 곰곰히 생각을 해 보니까 사실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했구요. 집사님을 많이 사랑해 드리지 못했구요. 때로는 집사님을 향해서 섭섭하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까 목회자가 집사님을 위해서 더 기도하고 사랑해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요.” 제가 거기까지 얘기를 했어요. 상당히 의지적으로 했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이 분이 큰 소리 울더니 저를 껴안고는 “목사님, 미안해요. 저는 그날 그 발씻는 예배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저는 그 분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그 날부터 그 분하고 저 사이에 다른 교회로 떠날 때까지 다른 분하고는 아픔이 있어도 그 분하고는 아픔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그 다음부터 저를 섬겨주시더군요. 병은 저에게 있었습니다. 제가 더 섬겨드리지 못한 것. 저는 지금도 어떤 교인들하고 갈등이 있으면 그 사건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더 섬겨야 해. 더 섬겨야 해.”

 

빚지고 사는 자의 공로의식

하나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흥정하고 싶어했던 의식, 비교하고 경쟁했던 의식,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배하고 있었던 진한 의식 하나가 있는데 병든 의식입니다. 저는 이 병든 의식의 정체를 공로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0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먼저 온 사람들이 더 받을 것을 기대했다. 더 많이 일했으니까 이만한 보상과 상급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 의식의 정체가 뭐겠습니까? 이게 공로의식 아닙니까? 저는 이것도 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공로의식을 치유할 강력한 의식이 필요하다면 “빚진자의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출발했던 주님과의 만남의 신앙의 첫자리를 생각해 보세요.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우리는 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거스리고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내어 있었습니다.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구원하신 것만 해도 우리는 한평생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빚지고 사는 자.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안에 공로의식이 쌓이는 것을 봤습니다. 교회가 조금 성장하고 나면 그래도 내가 노력하고 내가 설교하고 이만큼 내 교회를 키웠는데...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도 공로의식이 아닙니까? 저는 지금 그 기도가 많이 없어졌는데 여전히 저는 그 기도가 성서적 기도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청년시절에 교회에 가끔씩 나가보면 장로님과 목사님들 가운데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분이 많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교회 안에서 그 기도가 없어진 것 같아요. 생각나실지 몰라요. “공로없는 이 죄인” 혹시 아직도 그런 기도하시는 분이 계신지 몰라요.

저는 어느날 옛 선배들의 기도가 감격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살아계신 주님 앞에, 거룩하신 주님 앞에 섰을 때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공로가 있겠어요? 바울사도의 고백 로마서 1장에서 나는 빚진 자라 헬라인에게도 야만인에게도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빚진 자의 의식을 망각하는 순간, 주의 은혜에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사는 나. 우리 한평생을 드려서 사역을 하고 우리의 목숨을 순교의 재물로 드려도 여전히 갚을 수 없는 그 은혜에 빚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라면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행여나 이 공로의식이 우리를 지배할까 봐 우리를 그렇게 가르치셨나요? “너희가 곁에 있는 형제를 구제하고 도와줄 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록에도 남기지 말아라 수를 세지 말아라” 그래야 주 앞에 서는 날 제대로 떳떳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 안하십니까? 빚진자의 의식입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이솝우화가 생각납니다. 연못가의 개구리들이 그 연못 위를 나르는 새를 보고는 새처럼 날기 위해서 꾀를 내었습니다. 새에게 제안을 하기를 “나무가지가 하나 있는데 그 끝을 네가 물고 또 한쪽 끝은 내가 물고 나로 하여금 하늘을 날도록 해주렴.” 그 기발한 아이디어를 새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나무가지 양쪽을 서로 물고 연못 위를 비상하는 신기한 개구리의 묘기가 벌어졌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는 이 광경을 바라보던 연못가의 멍청한 개구리들이 부러워서 “야, 너 그 기발한 아이디어를 어디서 냈니?” 그러자 이 개구리가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했다.” 하고는 입을 벌리는 순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그것이 최후입니다.

우리가 수고한 것을 누가 모르겠어요. 우리 교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분의 수고, 그 분의 눈물겨운 봉사를 누가 몰라요. 그러나 그 분이 내가 했다고 소리칠 때 그것이 추하지 않던가요? 나는 똑같은 추함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봤어요. 조금 목회해 놓고 이것이 굉장한 성공인 것처럼 과시하고 나를 드러내고 싶은 똑같은 추함과 똑같은 유혹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건 공로의식입니다.

 

무너진 바벨탑

간증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공로의식이라는 것을 제가 사역을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아주 혼쭐나게 가르치신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모시고 있던 어떤 목사님이 부산에서 큰 집회에 통역을 하시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미국에서 날짜를 맞춰서 오시지를 못해서 제가 대신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선명회 총재이신 스텐 무니엔 박사가 부산에 오셔서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아주 큰 집회를 가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직접 내려가셔서 그 집회를 친히 주관하셨습니다. 통역을 제가 다른 분 대신하게 되었는데 저는 그렇게 많은 관중 앞에 서본 것이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굉장히 떨리더군요.

결사적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호소하고 마음을 잘 준비하고 스텐 무니엔 박사 옆에 서서 첫날 밤을 꽉찬 관중들 앞에서 뒤에는 한경직 목사님, 김준곤 목사님, 다 계셨습니다. 막 떨리더라구요. 이 분들은 다 유명하신 분인데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날 첫날 밤 통역을 너무너무 잘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잘했는지 나도 모를 일이예요. 은혜의 도가니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저도 신기하도록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무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하다가 이름없는 어떤 도사 하나가 그때만 해도 제가 전도사였는데 너무너무 집회를 좋게 했다고 했습니다.

집회 뒤에 해운대에 있는 호텔에 갔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 저보고 한국교회에 인재가 났다고 너무 통역을 잘한다고 하셨고, 저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부산 시내의 많은 장로님과 권사님들이 오셨는데 손을 만지면서 얼굴은 왜 이렇게 또 미남이냐고, 목소리는 왜 이렇게 시원하게 좋으냐고, 저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좋더라구요. 나도 이제 한국교회에 스타가 되었구나. 정말 내 평생에 그렇게 기뻤던 날이 없습니다. 호텔방에서 그날 밤 잠도 안오더군요. 한경직 목사님한테까지 칭찬받고 인정받고 하니까 한 시 두 시까지 이상하게 잠이 안오더라구요. 거의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튿날 결심을 하고 더 명통역을 하려고 바짝 긴장을 하고 통역을 하는데 5분쯤 했는데 목소리가 나가요. 완전히 나갔어요. 완전히 꽉 막혀서 할 수가 있어야죠. 이상해요. 물을 마셔도 소용이 없어요. 안돼요. 칵칵 거리다가 할 수 없이 그 때 다행히 CCC의 윤두현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 분의 도움을 받고 저는 빠져나갔어요. 그 자리에 앉아있을 용기가 없어요.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는 혼자 호텔로 왔습니다. 분했습니다. 내가 어젯밤에 쌓아놓았던 바벨탑이 다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무안하고, 설자리가 없고, 막 통분해요. 이상하게 분하니까 또 잠이 안 와요. 12시가 지나도록 잠이 안 오고 가슴을 치도록 속상하더군요.

 

빚진자의 의식

그런데 갑자기 새벽1시쯤 되었는데 침대 옆에서 뒤적뒤적 잠을 청하는데 조용한 음성이 저를 찾아와요. “통역할 수 있는 게 너의 능력이냐? 네 음성이야? 내 것을 가지고 일하면서 내 영광을 도적질하려고 그래?” 소스라쳐서 놀랐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침대 한 모서리에 제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죄송해요. 주님이 내게 주신 은사, 주님이 내게 주신 기회, 주님이 내게 주신 건강, 주님이 내게 주신 목소리 가지고 주님 섬기면서 굉장한 성취와 굉장한 어떤 무엇을 해낸 것처럼 자랑하고 뽑내고 싶어했던 내 교만과 아집과 나타냄과 프라이드가 있었어요. 하나님, 그것만이 아니예요.” 내 속에 쌓이고 쌓였던 모든 더러운 것들이 막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면서 저는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모릅니다.

그날 새벽이 밝아오면서 조금 진정이 되었습니다. 찬송하다가 기도하다가 제 몸이 좀 지쳐서 성경을 펼쳤습니다. 우연일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폈는데 시편 115편 1절이 나왔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하나님, 죄송합니다. 안 그럴께요. 당신의 영광을 도적질 안할께요.”

그래서 지금도 제 삶의 장에서 사역의 장에서 그분의 영광을 도적질하고 싶은 유혹이 제 마음에 닥쳐올 때마다 저는 해운대의 호텔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기도의 공간 안에서 그 호텔과 똑같은 자리에 저는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도적질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그날 밤 밝아오는 새벽과 함께 목놓아 불렀던 그 찬송을 지금도 부릅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이 없어도 좋아요. 빛이 없어도 좋아요. 주님이 나를 쓰신 것, 나를 구원하신 것, 나를 쓰신 것, 이거 하나를 프라이드처럼 내 평생에 갚을 수 없는 은혜의 특권으로 알고 섬기다가 가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빚진 자의 의식”이다. 그날 밤 그렇게 정의했습니다. 한평생 빚진 자의 의식으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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