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8/17) 교갱협 제3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사도행전 27장 9~26절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가우다 라는 작은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니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가장 작은 자를 사용하셔서 기적을 일으킨다고 이사야는 미리 예언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번 기회를 통해서 사람 보기에 가장 작은 자이지만 하나님이 큰 일을 이루시고, 사람 보기에 가장 약한 자이지만 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아름다운 비전을 성취시키는 위대한 도구로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사용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기쁘게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짐하고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한국교회 장래를 향해서 꿈을 꾸면서 이 아름다운 시간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이렇게 모이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또 우리가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다시한번 격려를 얻으며 소망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는 총체적 위기라는 말을 겁없이 자주 쓰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총체적 위기라는 말은 위기를 당하지 아니하는 영역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 말을 함부로 쓴다는 것 자체가 보통 위기가 아닙니다. 이만큼 오늘 우리의 상황이 심각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총체적 위기 가운데서 크게 우려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권위의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권위는 좋은 의미의 권위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권위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힘으로써 획일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그런 권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의미의 권위입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권위가 불신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공감을 합니다. 학생이 선생을 선생으로 봅니까?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존경을 합니까? 이 나라의 책임을 진 국정을 맡은 수반들이 쇠고랑을 차고 줄줄이 감옥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면서 최고 통수권자에 대한 권위가 다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지금 미국 대통령에게 일어나는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이야기를 우리가 보면서 이 세상에 권위는 완전히 다 끝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극상의 현상이 여기저기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이미 숨은 내면의 세계에서 권위를 부정하고 권위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그런 많은 심리와 정신적인 작용이 지금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이런 사회가 총체적인 위기를 맞았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권위에 대한 존중이나 존경 같은 것이 급격히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지도자의 권위

그러면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는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사회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는 말이 아닙니다. 88년도, 지금부터 10년 전 그때 벌써 갤럽조사에서 우리나라의 경우에 목사의 정직성을 논하면서 약사 다음에다 목사를 두었습니다. 우리는 약국에 가서 약을 사지 않습니까? 약사에게 속았다 하고 느낄 때가 자주 있지요? 분명히 좋은 약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마진이 많이 떨어지니까 최고라고 하면서 팔았습니다. 어떤 때는 상표를 믿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손님들을 우롱하는 경우를 우리는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 약사의 정직성은 어떤 면에서는 중하위권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목사를 약사보다 못한 사람으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예를 들려면 많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를 들어도 가슴이 답답하니까 더 이상 들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다 목사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교회 앞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합니다마는,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 우리의 권위가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생명과 능력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생명과 힘을 회복하려면 교역자가 영적 권위를 찾는 데에서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역자의 영적 권위를 회복하는 것은 통상적인 종교행위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남 보기에 기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교역자의 권위가 회복된다고 저는 생각치 않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 눈 앞에 십자가를 매고 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행진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교역자의 위상이 선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대형집회를 마련해서 많은 사람에게 선전을 한다고 해서 오늘날 교역자의 권위가 회복될 수 있겠느냐? 지금은 그렇게 해서 될 때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통상적인 종교행위로 우리의 권위를 회복할 수 없다고 저는 봅니다.

 

성경의 원칙으로 돌아가자

성경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권위를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원칙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백선엽 장군을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6.25 때 우리 국군의 심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추앙을 받았던 지휘관입니다. 그분이 최근에 모 월간잡지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무슨 고지 무슨 고지를 탈환하면서 전투한 경력을 되돌아 보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비상사태일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지를 향해서 진격을 했는데 실패를 했다. 그럴 때는 나는 항상 왜 실패했을까 그것을 따지기 위해서 원칙으로 돌아가곤 했다. 원칙으로 돌아가서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분명히 원칙대로 하지 아니한 부분들이 드러났다. 그래서 그것을 수정하고 다시 원칙대로 공격을 했더니 그 다음에는 성공을 했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위기상황에서 변칙은 실패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위기일수록 전술이면 전술원칙, 전략이면 전략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경제도 통일문제도 마찬가지다. 잔재주 부리는 조조 스타일은 안된다. 위기일수록 안된다.” 저는 그 말을 읽으면서 이게 어떻게 전술에만 해당되는 것이며 전투에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오늘 영적 권위가 말이 아닐 정도로 실추된 이 마당에 우리 교역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권위를 다시한번 회복하는 길도 재주 피워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권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 권위는 제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안수 받았다는 것으로 그 권위가 영원토록 존속되는 것이고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기관의 장을 맡았다든지 다른 사람 보기에 화려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인정받는 권위가 아닙니다. 대형교회를 목회한다고 해서 인정받는 권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권위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의 권위는 제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권위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맡기셨다고 하는 권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소중한 책임을 위임받았다는 거기에서 우리의 권위의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에 충성되지 못할 때에는 그 권위는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것이고, 또 실추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우리의 권위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느 교단에 소속된 목사라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불러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맡기셨습니까? 그리고 그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위해서, 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는 그 엄청난 명령에 우리가 충성된 종이 되어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의 권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의 권위

저는 사도행전 27장을 언젠가 읽다가 이 끔찍한 조난사고를 눈 앞에서 읽어 내려가면서, 그리고 그 사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가를 제 나름대로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바닷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서 배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할 위기가 되면 사람이 얼마나 다급해진다는 것을 저는 한두번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사일 동안 하늘의 별을 볼 수가 없고, 주변에 지나가는 배도 발견할 수 없는 고해에서 당하는 이 무서운 재난사건을 조용히 읽으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한 가지 깊은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영적 권위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실추된 영적 권위를 회복하려면 적어도 원칙상 이것 이것은 회복해야 된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다시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역할을 하지,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빠져나갈 문이 없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하나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 정리를 해본 것입니다.이 말씀이 우리의 영적 권위의 회복을 위한 모든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몇 가지만은 분명히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정리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영적 권위는 제 때에 경고할 수 있는 영안과 용기를 가질 때 가능합니다.

경고할 수 있는 예언자적인 영안을 가질 때, 그리고 용기를 가질 때 우리의 영적 권위는 회복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배가 출항을 하기 전에 백부장과 선주와 선장 앞에서 경고를 한 일이 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는데 행선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좀 불편하지만 여기에서 겨울을 지내고 가도록 합시다.” 경고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떠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이나 그 배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말을 아예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출항을 했던 사실을 우리는 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끔찍한 재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특별계시를 받아서 이 경고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도 좀 있을 것 같습니다. 워낙 영성이 밝은 사람이니까 영적으로 아, 이번에 출항을 하면 분명히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무언가를 성령께서 그에게 알게 해주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특별계시보다도 오히려 바울은 일반계시에 더 의존해서 경고를 합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다. 바울은 그동안 열한차례나 지중해를 항해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거리는 줄잡아서 5천6백 킬로미터가 넘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산을 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느린 범선을 타고 열한번이나 그 장거리 여행을 이십년이 넘도록 했으니까 바울은 경험상 도사입니다. 금식일이 지나면 왜 위험한가, 속죄일이 지나면 왜 위험한가, ‘램제이’라고 하는 학자를 여러분이 기억합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던 그 해를 주후 59년이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해에 속죄일, 이 금식일은 10월 5일이라고 그는 계산을 했습니다. 그것이 맞는지는 차후의 문제이고, 그러나 비슷한 기간이 아니었나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동안 지중해를 다니면서 보니 10월 초순부터 11월 초순까지는 항해하기가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그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선주에 비해서, 선장에 비해서, 또 죄수로 묶여가는 입장에서 말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그는 대범하게 떠나지 맙시다, 떠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그는 경고를 했습니다. 이 경고 때문에 나중에 바울은 조난당한 배 안에서 최고의 권위자로서 군림을 합니다. 만약에 바울이 이 경고를 하지 아니했더라면 조난당한 그 배 안에서 바울이 권위의 주도권을 잡고 그 사람들의 영을 인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언자적 기능의 경고

경고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그 위험을 눈치 채지 못할 때 눈치를 채게 만드는 것이 경고 아닙니까? 일종의 예언자적인 기능입니다. 예언자적인 기능을 감당하려고 할 때는 무시당할 수도 있고, 핍박받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생명을 빼앗길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을 우리는 선지자를 통해서 많이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교회에서 얼마나 경고를 제대로 하는 지도자였습니까? 우리 한번 조용히 돌이켜 봅시다. 이십년 가까이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 그리고 그 성장의 열매를 나름대로 신나게 따먹으면서, 그래서 교회도 부흥하고 목사되는 것이 굉장한 프라이드 있는 직업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하는 일마다 웬만한 일은 다 잘되고, 이런 형통한 과정을 우리가 겪어오면서 얼마만큼 우리는 경고를 제대로 하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감당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한국교회가 말입니다.

물론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욕심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정직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가치관이 점점 변질되니까 우리는 말씀에 가치관을 붙들고 살아야 된다고 누누이 외쳤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위한 설교였지 진정한 경고를 했느냐 그 말입니다. 대부분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형통과 부에, 형통과 건강에, 땅과 건강에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은근히 유혹하는 스타일에 타협적인 메시지를 얼마나 많이 전했느냐 그말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은 가급적 안하려고 했습니다. 경고는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불도 안났는데 불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합니까? 홍수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비도 안오는 마당에 비 온다고 하고 홍수 난다고 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할 겁니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강단에서 경고하는 예언자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대로 행사하지 않으려고 하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걷잡을 수 없는 정신적인 타락이 우리 주변을 포위하고,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도덕적인 부패현상이 우리의 숨통을 조여오는 이 무서운 환경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위기인가를 교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경고의 기능을 상실한 한국교회와 목회자

그래서, 목사는 목사대로 돈 좋아하고 즐기기에 바빴고, 진정한 경고를 하는 선지자들은 그 말과 함께 그의 행동과 삶이 거기에 부합되게 따라갔습니다. 엘리야는 분명히 국가에 멸망을 경고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의 경고는 눈물을 가지고 그 경고에 권위를 세웠습니다. 세례요한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 살았습니다. 경고를 하면 경고를 하는 사람다움이 무엇인가 보여야 그 경고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경고가 능력을 가집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목회하면서, 그는 유익한 말이면 무엇이든지 군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 이 경고의 말씀을 그가 할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항상 있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눈물, 눈물이라는 말을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했습니다. 이것이 경고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이나 또 한국교회를 볼 때 그동안 너무 긴장을 풀고 살았습니다. 설교도 긴장이 다 풀렸고 지금 눈 앞에 무엇이 오는지에 대해서 누구하나 제대로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IMF 구제금융 체제로 돌입을 하게 되었고 하루 아침에 국민소득 만불이 오천불로 곤두박질치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상황이 닥치기 전에 우리가 얼마만큼 경고자의 입장에서 교인들을 바로 가르쳤으며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향해 얼마만큼 다가오는 위기를 얼마만큼 우리가 이야기 했느냐 말입니다. 그렇게 못했으니 우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경고의 기능을 상실한 설교

저는 안식년을 맞아서 제 설교 테이프를 가끔 하나씩 듣습니다. 자기 설교를 듣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의로 듣습니다. 내가 무슨 설교를 했나?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한 목사인가? 강단에서 무슨 내용을 가지고 소리를 지른 사람인가? 저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기 위해서 테이프를 듣습니다. 들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에 가책이 옵니다. 이 성경본문은 이런 식으로 적당히 전할 말이 아니었는데... 똑같은 본문을 놓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은 쏙 빼버리고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본문만 뽑아가지고 설교를 했냐? 사실은 말하지 않은 그 본문이 더 중요한데… 저 자신이 그걸 느낍니다. 그건 뭘 의미하느냐? 나도 모르게 아부하는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 목사님 설교 좋더라, 은혜 받았다 하는 그 소리가 마귀소리인 줄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데 그런 소리에 끌려다니다 보니까 듣기 싫은 말은 가급적이면 안하려고 하는 자세를 취하다가 청소년이 타락하고 나라의 정신풍토가 완전히 병들어 버리는 상황을 놓고도 한마디 제대로 소리를 지르지 못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나라의 앞날이, 교회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너무나 뻔한대도 말하나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어려운 위기를 만나서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이 멈추었다고 해도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언자적 권위의 회복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는 예언자적인 권위를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용기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보다도 앞으로는 더 경고를 해야될 무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압니다. 지구가 점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은 이제 아무도 제동을 걸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습니다. 오늘 살다가 죽어도 자기들의 욕망을 절제할 수가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의 사람입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가지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멸을 막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이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할지라도 지금부터라도 “주여, 우리에게 앞날을 보는 분명한 영안을 주시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간에 예레미야처럼 얼굴이 철판을 깔고서라도 꼭 해야될 말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할 수 있는 권위있는 메신저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갱신이 뭡니까? 메시지가 살아나야 교회갱신이지, 메시지는 죽을 쑤고 있으면서 무슨 갱신이 일어납니까?

 

두번째, 풍랑 만난 배 속에 있어야 영적 권위는 회복되는 것입니다.

배가 출항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라굴로라고 하는 폭풍이 몰려왔습니다. 라틴어로 유로스, 동풍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킬로 하면 북풍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이 합해서 유라굴로, 그래서 북동풍입니다. 한참 순한 남풍을 받아 순항하던 배인데 갑자기 바람이 역류를 해서 거꾸로 부니까 정신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배가 무서운 위기에 빠졌습니다. 선체를 줄로 감고 연장을 버리고 짐을 버리고 나중에는 배의 기구까지 버렸다고 하니까 손들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 소망이 전혀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일 동안 그들은 먹지도 못하면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밀려가면서 언제 죽을지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바울의 영적 권위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선장도 필요없습니다. 백부장도 다 소용없습니다. 아무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바울만이 권위자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울만 쳐다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이 그 배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무서운 풍랑과 싸우며 하루에 몇번식 오고가는 생사의 기로에서 그 무서운 환경에 바울이 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로 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음을 나누는 권위

영적 권위는 조난당한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적 권위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동참의 원리라고도 말하고, 성육신의 원리라고도 말합니다. 나는 고생 안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습니까? 나는 싫어서 피하면서 너희들은 이렇게 해라 하고 말할 때 그 말이 권위가 있겠습니까? 아마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저는 봅니다. 여러분이 요즘에 많이 읽으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글 가운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영적 권위는 긍휼로부터 온다.”어떤 사람이 영적 권위를 가질 수 있느냐?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권위를 찾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깊은 내적인 연대의 의식에서 권위라는 것은 생긴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완전히 똑같은 사람들이다, 기쁨과 고난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깊이 서로 이해할 수 있고, 우리는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의사와 능력을 같이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하는 마음을 서로 가질 수 있을 때 영적 권위라는 것은 세워지는 것이다 말했습니다. 이 권위 앞에 사람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 당하는 자를 피합니까? 고난 당한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합니까? 너하고 나하고는 다르다 자꾸 나를 차별화 시킵니까? 그래서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서지 못하며, 그들의 신발을 신어보지 못하는 별개의 존재로 군림합니까? 사람들 보기에는 화려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권위를 잃어버린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마음 아픈 느낌을 받습니다. 분명히 그 목사님의 목회현장은 저소득층이 사는 곳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거의 70% 이상이 실직을 당한 사람이고 수입이 없어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입니다. 교인이 천여 명 모인다고 해서 목사는 너무나 좋은 자동차, 너무나 좋은 사택을 쓰는 것입니다. 저는 벌써 그것은 동참의 원리에서 떠난 권위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교회가 그만큼 자랐으니까 대우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목사님의 영적 권위를 앞세운다고 한다면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적당한 차를 가져야지요. 적당한 집을 가져야지요. 그래서 거기에 있는 모든 교인들이 ‘목사님, 목사님도 우리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갑니다.’ 하는 기분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목사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권위를 가지고 먹혀듭니다. 저 사람은 나하고는 다르다 하는 인식을 갖게 되면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것은 하늘에서 구름잡는 소리를 하는 것이나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권위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교역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조난당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역자입니다까? 전병욱 목사님이 타임지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목회와 신학에 좋은 글을 썼습니다. 최근 타임지에서 금세기 가장 영향력 있던 사람 백명을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연예계에 속한 사람 이십 명을 선정했다고 합니다. 그 이십명 가운데서 지금 현역에서 아주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한 흑인 여성이 선발이 되었습니다. 그 여자가 지금 TV 토크쇼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라고 하는 흑인 여성입니다. 얼마나 그 토크쇼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가 하면 매일 천사백만 명이 시청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132개국에 위성으로 중계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윈프리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영향력 있는 인사로 뽑혔느냐? 그에게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1954년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서 태어날 때부터 외할머니 밑에서, 어머니 밑에서, 아버지 밑에서 전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토크쇼 할 때 자기가 경험한 아픔이 그대로 스며나오는 것입니다. 말에서 스며나오고 행동에서 사람들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윈프리는 아픔을 가진 자의 친구다 하는 인식을 자기도 모르게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윈프리를 자기 친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하고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하고 거의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크쇼에서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여인을 만나서 윈프리는 뭐라고 그러느냐 "저도 과거에 코카인을 했던 적이 있어요. 당신만 조난당한 것이 아니고 나도 조난당한 일이 있어요. 그래서 당신 사정 너무나 잘 알아요. 절망하지 마세요." 바로 이런 스타일의 토크쇼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스타일의 토크쇼를 가지고 레포톡이라고 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전체를 하나의 가족 같은 친밀감으로 묶는 하나의 대화체입니다. 어떤 정보만 전해주는 리포트 토크가 아니고, 레포톡이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뭘 말하려는 것인가 하면 모두가 한배를 타고 가는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나와서 진행하는 쇼에 모든 사람의 귀가 기울여지고 모든 사람의 관심이 그녀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무언가 위로를 받기를 원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권위 아닙니까? 이런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조난당한 배에 내가 함께 있을 때에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바로 이런 권위 아닙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채우려는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저미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병을 감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 앞에 우리는 가슴이 녹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권위 아닙니까? 이 권위가 바로 우리 목사들에게 주어진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분담하는 지도자의 권위

고통은 분담할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분담하는 것도 모자라면 교역자는 고통을 전담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역자가 권위를 갖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매일 앉아서 대접받을 생각이나 하고, 사람들 앞에 외적인 권위나 세우려고 목에 힘주고, 우리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사람 보기에 권위가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권위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도 너무너무 이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목사가 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의교회라고 해서 다 잘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너무 어려운 상황에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큰 교회 목사라고 해서 50평 넘는 아파트에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별로 걱정하지 아니하고 잠자고 일어나는 것을 가끔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픕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통받는 사람이 제가 설교할 때 얼마나 가슴에 와닿겠습니까? 왜냐하면 너무 다르니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다 걷어치우고 내려앉을 수도 없고. 그러나 저의 고민이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노력해야 합니다. 핑계하지 말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권위를 회복하려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톨릭의 신부들이 무슨 갤럽조사에서 항상 상위권에 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조난당한 배에 함께 있는 삶을 삽니다. 대부분이. 그러나 개신교 지도자들은 그러지를 못합니다. 마치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 정도로, 교회를 이용해서 너무 자신만의 요구를 채우려고 하는 인상이 많습니다. 대부분이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래서는 권위있는 지도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좀더 낮아질 수 없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파도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같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없는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지, 분담해도 모자라면 전담할 수 있는지 그 정도의 용기와 그 정도의 열린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교회 앞에 선다면, 우리의 권위는 다시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우리의 자세를 바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영적 권위가 회복되어야 교회가 살고, 갱신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권위가 세워지지 아니하면 아무리 잔재주를 피워도 생명이 변화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한가지 더, 비전이 분명해야 권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열흘이 넘도록 파도에 시달려서 모두가 초죽음이 되어있는 자리에 가서 이런 말을 합니다. “어젯밤에 내 곁에 하나님의 사자가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다.” 여러분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 말을 알 아들었을까요? 바울하고 같이 동행하는 소위 우리라고 하는 그룹 사람들을 빼고는 가이사 앞에 서야 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배 안에 있는 이백 몇십명이 알아들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나는 가이사랴 앞에 서야될 사람이다 하는 것을 그 자리에서 다시한번 공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뭘 의미합니까? 바울은 사람들의 눈에 남다른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자로 비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곡물을 수입해서 이익을 남기려고 일에 몰두하는 선주도 아니요, 상관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백부장하고도 다른 사람이었고, 이제 끌려가면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사람들의 노리개감이 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임을 당한 숱한 죄수들 하고도 다른 몸이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야, 저 사람은 뭔가 다르다. 황제 앞에 서야 된다는 꿈을 가지고 지금 배를 탄 사람이구나. 뭔가 다르구나. 하나님이 가이사랴 앞에 서도록 하겠다고 밤에 이야기를 했다니 저 사람은 분명히 황제 앞에 가서 서겠구나. 저 사람은 뭔가 뜻이 있어. 우리하고 뭔가 좀 틀려. 좀 주목해서 보아야 되겠어.' 하는 생각이 저절로 마음에서 일어나도록 바울은 처신하고 있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전을 가진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이 비전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23장 11절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25장 12절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27장 24절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28장 14절 로마로 가니라 바울은 오직 한가지 푯대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부각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비전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목표만 쳐다보고 나아가는 지도자

바울은 하나님 앞에 “왜?” 라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가이사 앞에 가길 원하고 로마에 가기를 원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호된 시련을 당해야 합니까? 왜?” 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가이사에서 2년 동안 복음생활을 할 때에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왜 2년 동안 사람을 붙잡아 놓고 답답하게 만듭니까? 제가 지금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 이렇게 만듭니까? 왜?"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섯번이나 심문을 받고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왜?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6개월 동안의 긴 항해를 하면서 2주간을 파도와 싸우면서 사경을 헤매는 고통을 겪을 때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왜?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가이사 앞에 서야 하고 로마에 가야 하는 그 목표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소명을 가진 지도자, 비전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왜? 라고 묻지 않습니다. 오직 목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영적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신자들 앞에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어떤 지도자로 비치고 있습니까?

 

비전을 가진 지도자의 모습

어느 조사에서 기분나쁜 결과가 나왔더군요. "당신은 목사를 어떻게 봅니까?" 69.6%가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명예를 추구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불신자들의 대답입니다. 그러니까 열명 중에 일곱명은 속으로 웃는 것입니다. 목사를 볼 때마다 웃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로마에 가야 되고 가이사 앞에 서야 되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우리 모두는 교인들에게도 다른 사람으로 비춰야겠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도 다른 사람으로 비춰야 할 것 아닙니까? 선장 앞에서도 다른 사람으로 비춰야 되고, 백부장 앞에서도 분명히 다른 존재로 부각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모두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면에서 퍽 실망스럽다고 가끔 생각을 합니다. 그저 교회라는 하나의 조직을 가지고, 평생 먹고사는 하나의 직업으로 삼고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 우리를 본다면 우리의 권위는 다시 찾을 길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1,044명의 목사를 대상으로 해서 조사를 한 것이 있는데, 그 목회자들에게 사역에 대한 비전을 명확하게 표현해 달라고 하는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하려고 하는 사역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그걸 명확하게 표현해 주십시오." 했더니 정학하게 자기사역의 비전을 표현한 사역자는 1,044명 중에서 4% 밖에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들 소명 받았다는 소리는 요란하게 떠드는데, 소명 받은 자로서 지금 로마로 가고 있는지, 그리스로 가고 있는지 도대체 목표가 정확하지 않은 사람이 96%에 해당하고 있다고 하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교인들 앞에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그저 당회장입니다. 교회를 책임진 지도자지 그 이상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더욱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뭡니까? 그저 목사도 하나의 직업 아닙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가지는 직업 그이상 그들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의 비극입니다. 차라리 가톨릭 신부처럼 결혼이라도 하지 않고 있으면 그것 하나라도 인정을 받을만한 조건이 되겠는데, 결혼해서 아내와 아이를 낳고 다니면서 자기 아들, 딸 자랑하면서 할 짓은 다하는데 뭐가 다르냐 그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비쳐서 우리의 영적 권위가 사람들에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어려운 문제를 우리 모두가 극복할 수 있도록 이번 기회에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때, 영적 권위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벌떡 일어나서 "안심하라 너희 중에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다"고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합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그리고 일어나 음식을 먹으라 여러분 가운데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는 메시지를 가진 자가 영적 권위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데 이럴 때에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받은 메시지라고 자신있게 전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까? 설교니까 하는 메시지 말고, 목사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메시지 말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 하는 메시지가 없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기다리는 자세가 좀 부족합니다. 너무 성급합니다. 바울은 이 메시지를 하나님으로 직접 듣기 위해서 파도와 싸우며 10일 이상을 기다렸습니다. 바울이 기도 외에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렇게 기다리고 하나님 앞에 끈질기게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자신의 음성을 바울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너는 일어나서 이렇게 전하라.

오늘 우리는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음성을 듣기 위해서 값을 치루지를 못합니다. 설교가 너무 쉽게 준비됩니다. 설교를 할 수 있는 자료들이 너무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시간을 들이지 아니하고 카피만 해도 멋지게 설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가 다 남의 것을 카피하는 메시지가 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내가 직접 들은 메시지는 안되는 것입니다. 저의 문제이고, 여러분의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적 권위의 회복

우리 모두 말이 아닐 정도로 실추된 목사, 전도사의 영적 권위를 다시 회복합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불신자들 10명 중에 7명은 속으로 '웃기네' 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본다는 사실입니다. 교인들 가운데서도 좀 비판적인 사람들은 목사를 아니꼽게 쳐다보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가까이 와서 은혜받았습니다 하고 아부하는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여러분의 눈이 어두워지면 안됩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자리에 서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라도 위기고, 교회도 위기고, 우리의 영성도 위기를 맞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적 권위를 회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땅에 펼 수 있겠습니까? 원칙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원칙으로 돌아갑시다. 예언자적인 경고를 할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갑시다. 풍랑만난 배 속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원리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의 나라 비전에 몸을 던지는 소명자적인 원리를 다시 회복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들려주시는 메시지를 가진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만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전하는 영적 지도자가 됩시다. 이게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교회갱신협의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와같은 영적 권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이 한국교회가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도적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이 나라에 이것이 살 길이다 하고 분명히 자신있게 제시할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은 귀한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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