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11/26) 한목협 창립대회 헌신예배

아모스 3장 7~8절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로마서 13장 11~14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정체성에 있어서 위기를 맞게 되자 교단마다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이런 기류를 타고 뜻이 있는 목회자들이 교회갱신과 교회일치를 추구하는 모임을 결성하는 사례들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이들 그룹들이 신학과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합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이 집회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그 특징이 자생적이고 자발적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자발적으로 뭉치는 것이라면, 이것은 일종의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세기를 겨우 넘긴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13개 교파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례가 또 있었는지 저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모임은 '역사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 한국교회가 그만큼 성숙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봅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 어느 모임보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혜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세가지 당면과제

지금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은가 합니다.

첫째는, 일치(Un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겸손한 자리로 내려앉아 성서에 근거한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서 서로 용납하고 서로 배우는 자세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분열의 역사를 화해의 역사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갱신(Renewa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세속주의에 심하게 오염되어 버린 교회를 정화시키는 작업입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조금 나아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달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세상이 비슷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갱신이 얼마나 시급한 과제인가를 일깨우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세번째는, 책임(Diakonia)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들 대부분이 개교회 혹은 교단의 양적 성장에 매달리다 본의 아니게 등한히 다루었던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소명자의 자세를 가지고 새삼 강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이 세가지 당면한 과제를 가슴에 안고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저는 아모스서를 읽으면서 오늘의 교회 상황을 이해하는데 여러 가지로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왕국은 여로보암 2세의 치하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잃었던 영토도 얼마간 회복을 하였습니다. 긍지와 자신감이 나라 전체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경제적 번영은 종교의 세속화를 부채질하였고, 그 결과 교회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는 폭풍전야의 고요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모스서의 유명한 서너가지 죄 리스트를 보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탐욕, 거짓, 사치, 위선으로 그 영성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요셉의 환란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을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는 지도자들의 타락은 곧 이스라엘교회 전체의 타락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심판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회의 형편이 당시 이스라엘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이 그 당시의 제사장들처럼 부패하였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울삼아 우리들의 문제들을 점검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동안 누린 경제적인 번영과 함께 자신이 세속주의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양심선언을 할 수 있는 목사가 몇이나 될까요? 돈을 좋아하고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심지어 양떼들을 이용하여 자기 몫을 챙기는데 급급한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가슴 아픈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일이 성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왜 세상정치판에서도 보기 어려운 추태들이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납니까? 왜 진실과 정의와 하나님의 뜻을 표방하면서 거짓과 음해를 합니까? 한국교회의 조직적인 비리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와같은 우리의 현실을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고 계시는가를 우리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펴야 합니다. 얼굴을 찡그리고 계시는지, 채찍을 들고 계시는지, 진노의 잔을 준비하고 계시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르짖고 계시는 하나님

아모스서를 읽으면서 저의 주의를 끈 것은 아모스 선지자가 들었다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부르짖으신다는 말을 한 선지자는 요엘과 아모스 둘 뿐입니다. 구약에는 무려 28개의 '부르짖는다'는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짖음을 표현하는 말은 '샤아그' 하나 뿐입니다. 요엘 3:16/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암 1:2/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모스가 하나님의 부르짖음을 나타내는 동사 '샤아그'를 사자의 부르짖음에다 똑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암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사자의 부르짖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임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부패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사자가 부르짖듯이 말씀하고 계신 다는 말입니다. 아모스는 드고아라는 시골에서 양을 치고 농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인지 그 표효하는 소리가 얼마나 양떼들을 떨게 만드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이스라엘을 향해 부르짖고 계신다는 사실은 굉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자처럼 부르짖고 계시는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범하는 서너가지 죄를 보시고 얼마나 진노하고 계시는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자가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회개하지 않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아모스의 귀에 들리는 이 부르짖음이 그 나라 종교 지도자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면 세미한 음성까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있어야 합니다. 선지자가 아니어서 직접 듣지 못한다면 율법의 말씀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을 귀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귀가 막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사자처럼 외쳐도 들리지를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이 못들으면 백성들 역시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은 말씀의 기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8:11/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악하다고 하여 사자처럼 부르짖지 않습니다. 세상은 원래 악합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 부패하고 특히 교회지도자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하는 것을 보시면 사자처럼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아모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심각한 메시지 입니다. 신약 시대의 하나님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저는 여러날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는 듣고 있는가? 사자처럼 부르짖고 계시는 하나님을 내가 알고 있는가?" 한목협을 왜 만들어야 합니까? 사자처럼 부르짖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부터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우리를 통해 그 부르짖음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면 일치와 갱신과 책임은 사치스러운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으면 일치를 위해 겸손해질 것입니다. 들으면 갱신을 위해 옷을 찢고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들으면 병든 이 사회를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

성직자들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남달리 강경하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사자처럼 부르짖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일치하고 갱신되고 책임을 통감하면서 다시 일어서면 이 땅에 새로운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제가 애창하고 있는 고형원 형제의 '부흥'이라는 복음송의 가사와 같이 황홀한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한목협에 모인 우리를 통해 이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