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8/25) 교갱협 제2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다니엘 1장 8~17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동무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로 보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 하니라 환관장이 세워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제가 개인적으로 성경이해의 가장 좋아하는 말은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뜻이 있으면 방법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일반 사람들의 격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과 그 뜻에 합한 겸손한 순종으로 이 세상에서 펼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뜻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사실은 그 뜻 때문에 오늘 이 밤에 여러분들이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처럼 자기 앞에 여러 갈래의 길을 두고 뜻을 정해야 했던 한 젊은 청년의 이야기를 이 밤에 다시 한번 살펴 보면서 우리 주님께서 이 생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귀한 메시지를 겸손히 듣기를 원합니다.

다니엘의 갈등

소년 다니엘의 앞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금성철벽이라고 생각했던 저 거대한 성 예루살렘이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그것까지만 해도 괜찮은데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그 빛나는 성전에 이방인들의 말발굽이 유린하는 모습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저럴 수 있을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 원수들을 왜 깡그리 물리쳐주시지 않았을까? 어린 소년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있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찬란한 솔로몬의 영광으로 깃들어 있던 그 성전을 보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다가 이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원수들이 쳐들어 올 때 그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믿음의 스승들이 힘없이 무너지는 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 반항도 못한 채 원수의 창과 칼에 찔려 죽는 부지기수의 어른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또 그들에게 아부하며 변절한 수많은 자기 선배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지 않은 사태가 자기 앞에 연출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땅 예루살렘에 살지 못한 채 먼 바벨론에 붙잡혀 갔습니다. 그리고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왕궁에 거하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민주투사나 애국투사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 있다면 매를 맞고 고문 당하고 고통 당할 적에는 이를 악물고 참지만 자기가 그처럼 수모를 당하고 난 다음에 형무소 소장이 따뜻한 음식을 끓여놓고 친절한 말로 "얼마나 고생했는가?" 하면 그 말의 의도를 분명히 알면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그 품안에 뛰어들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매를 맞는 것보다 사람들이 쉽게 무너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호의라고 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 계속 부딪혔는데 원수의 나라의 왕이 왕궁에 자기를 초대했습니다. 그 어린 소년의 마음에 얼마나 큰 유혹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거기서 매일 먹는 음식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신앙적인 갈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두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첫째는 당시에 배화교도들은 하늘과 해와 달과 별에게 제사를 드리고 불의 신인 태양신을 섬기는 의미로 모든 백성들이 제사한 그 음식을 나눠먹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다니엘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그 마음에 '너는 여호와를 믿지 말고 조로아스터를 믿어라. 네가 조로아스터를 믿는다는 고백이 이 음식을 먹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소리가 들렸는지 모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소와 양을 잡는 규례는 엄격합니다. 언제든지 그 심장에 구멍을 뚫어서 피를 모두 뽑아낸 그 고기를 먹습니다. 지금도 유태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도축장이 따로 있습니다. 또 비행기를 탈 때에도 유태인들은 반드시 생선을 먹든지 그렇지 않으면 채소음식을 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도축장에서 잡는 소와 양은 그냥 피가 있는 채 도축을 합니다. 율법에서 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정통 유태인들은 오늘도 세계 어디를 가든지 자기들의 도축장에서 잡은 고기만을 먹습니다. 아마 그 문제가 그에게 걸렸을 것입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

피 있는 고기를 이 어린 소년 다니엘은 먹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에 순종하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여러분, 뜻을 정한 이 청년 다니엘이 그 뜻을 어떻게 펼치는 가를 우리가 보십시다. 착각하지 말 것은 내가 좋은 뜻을 가졌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뜻을 가진 나쁜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은 어떤 면에서 보면 히틀러도 좋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나에게 가장 크게 속는 것은 내가 좋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자세히 보십시오. 자신의 마음 속에 무수한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무수한 좋은 생각이 얼마나 쉽게 사라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쉽게 죽어버리고 있습니까? 현실 앞에 힘없이 무너져버리는 마음의 좋은 뜻들! 어린 소년 다니엘은 뜻을 정했을 뿐 아니라 그 뜻을 구체적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결심했습니다.

그의 순종의 방향은 첫째로 자기가 뜻을 정하자마자 즉시 그 뜻을 펼칩니다. 환관장에게 말합니다. "환관장이여, 내가 왕의 진미로 내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뜻을 확고부동하게 전합니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많이 해도 그 좋은 생각이 쉽게 사라지는 것은 그 뜻만 정해놓고 첫걸음을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머뭇거리고 계속 지체하다가 내가 그 뜻을 순종할 첫 스텝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다음 스텝이 발전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의 순종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아도 그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명령합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네게 지시하는 땅에 데리고 가서 나에게 제사를 드려라." 하나님이 얄밉습니다. 그냥 "이삭 바쳐라." 그러면 좋겠는데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을"이라고 하거든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고 합니다. '일찍'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을 죽이러 가는 그 전날 밤 얼마나 많은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한 시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심청이가 인당수에 가기 전에 "닭아. 닭아. 울지 마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자기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100세에 낳은 그 아들, 이제는 커서 정말 사랑스러운 그 아들, 한 순간이라도 같이 있고 싶지만 하나님의 뜻을 확신한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장작을 팹니다. 장작은 원래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종이 되기로 맹세하면서 약속한 것입니다. 물을 긷고 장작을 패는 일, 그것이 높은 신분의 사람이 할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지도 않은 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장작을 패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을 봅니다. 스펄젼 목사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노족장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장작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 그 애비의 마음보다는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성경의 다른 순종은 실제적으로는 못합니다마는 상상으로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순종은 저는 정말 상상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믿음이 없는 게 확실한 것이 이 사건 앞에 서서 내가 이 명령을 받으면 순종하겠는가 하면 저는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는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고히 붙잡은 다음 순종하기 위해서 순종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합니다. 자기 아내와 의논하지 않습니다. 만약 아내와 의논했으면 다음 순간에 "나 죽이고 데려가!" 하는 금속성 괴성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순종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접어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순종하기 위해서 삼일을 걸어가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고하게 삼일을 견딥니다. 헤브론 광야를 삼일을 그는 지나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이 대목도 확실합니다. 우리 속담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한국 속담까지 아시는 것 같습니다. 삼일을 갑니다.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실 내게 명령하신 것이 옳을까? 아니 이 아들을 통해서 그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충만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약속의 자녀인데 이 아들을 죽여 바치면 하나님의 약속이 무너지지 않는가? 그런 저런 수많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뒤집어엎을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애를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삼일 동안 메마른 헤브론 광야를 지나갑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헤브론광야, 삭막했다. 황량했다. 적막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을 죽여야 되는 애비의 마음보다는 삭막하지 않았다." 그는 또 자기를 제거합니다. 모리아 산장이 보입니다. 그러자 그는 하인들에게 "얘들아, 너희들은 여기 있어. 내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한 다음에 다시 내려올게." 만약에 그 하인들을 데리고 올라갔다고 칩시다. 다른 행위가 모두 이루어질 때는 다 보고 있다가 마지막에 재물을 드려야 되는데 재물 대신에 자기 젊은 주인인 이삭을 묶어서 단에 올리고 거기까지는 봐줄 수 있는데 새파란 비수를 꺼내들고 그 가슴을 겨냥할 적에 노망들었다고 양쪽에서 붙잡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역시 사람은 신분이 있어야 되는 것 같습니다. 종으로는 안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데 저 무식한 종놈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붙잡았습니다. 나 같으면 그렇게 말려줄 사람이라도 데리고 가야 되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그 하인들을 밑에 둡니다. 그는 아들 이삭과 함께 산장에 올라갑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그의 생애가 참으로 성공했다는 부러운 그 신앙의 단면을 여기서 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부모의 신앙생활을 자식이 계승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갔던 것처럼 자기 아들도 동일선상에서 그 모리아 산장으로 같이 가게 했던 그 신앙! 나는 주님의 뜻을 알아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 크신 하나님의 축복을 내가 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 자녀들이 전승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제가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고 내 모든 헌신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주님 앞에 내 아들들이 동일한 신앙만 갖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줄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습니다. 제단을 만들고 묶어서 올렸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늙은 아브라함이 15살에서 18살 된 그 아들을 들어올리기는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죽이는 노족장의 마음보다는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올렸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열었습니다. 소련의 레닌그라드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페테르부르크에 에르미타슈미술관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루브르박물관 못지않게 소장품이 많은 곳입니다. 거기에 렘브란트가 그린 '모리아 산장의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제가 세계적인 거장들이 그린 이 그림을 곳곳에서 몇십 점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미켈란젤로와 라파엘과 카라치 것도 다 보았는데 이 렘브란트의 그림에 성경의 묘사가 그처럼 기이하게 그려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무단 위에 가슴을 벌려놓고 편안하게 묶여서 누워있는 이삭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죽이기 위해서 비장한 결의로 가득차 있는 칼을 든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화급한 얼굴로 아브라함의 손을 붙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이미 아들을 바치기로 결의가 끝난 그 얼굴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향해서 칼을 내리치는데도 가슴을 열어놓고 자기 아버지 앞에 심장을 편안하게 내맡기고 있는 이삭을 봅니다. 차마 자기 아들을 그 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가리면서 칼을 들고 있는 그 아브라함의 힘찬 모습. 화급하게 그 손을 붙잡고 있는 이 세 구도를 통해서 모리아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류 최대의 선물

여러분, 우리는 모리아산에서 인간 최대의 순종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모리아 산장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남의 아들을 죽일 때는 정지시켰던 그 하나님께서 갈보리언덕의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그 모진 모독을 다 보셨습니다. 아들은 외칩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께서 귀를 막으십니다. 마지막 순간에 가시관을 쓴 채로 가슴을 피로 물들인 채 다 이루었다며 고개가 숙여질 때까지 우리 하나님은 끝까지 가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했던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인류최대의 선물! 하나님의 뜻을 가장 분명하게 털어놨던 저 갈보리의 놀라운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왜 여기 모세가 아니고 다윗이 아닙니까? 그것은 자식을 죽이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은 아브라함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리아 산장에서 갈보리언덕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마지막까지 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보다 더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영광의 순종의 첫 스텝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것이 분명하자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즉시 순종합니다. 유황불이 쏟아지는 소돔을 도피하라는 천사의 권고 앞에 롯은 지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뜻,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귀한 축복과 은혜가 내가 즉시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멈추고 후회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때 순종했다면 오늘은 달라질 수많은 기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곳에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모였습니다. 여기서 감동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환상도 볼 수 있습니다. 큰 기쁨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즉시 행동하지 않으면 주께서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내 마음 속에 주신 그 놀라운 축복을 즉시 한 발 내딛지 않으면 앞에 흐르는 요단강을 향해서 주께서 가라고 하실 적에 즉시 내딛을 때에 흐르던 요단강이 멈추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번 기회에 주시고자 하시는 그 은혜 앞에 즉시 순종할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은총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지체하지 마십시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지체는 다른 종류의 불순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뜻을 주실 것입니다. 이번에도 많은 감동과 결심을 주실 것이고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은혜도 주실 것입니다. 첫발을 내딛으십시오. 즉시입니다.



다니엘의 지혜

두번째로 지혜롭게 그 뜻을 행하십시오. 환관장이 그 말을 듣고 지금 왕이 지정한 음식을 먹지 못해서 내 얼굴이 초췌해질 때 왕의 명령을 불순종했다는 그 이유로 너와 내가 위태롭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믿음을 가졌기에 쉽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은 사람입니다. 당신처럼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상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해 보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리셔서 내 얼굴을 윤택하게 하시면 내 말을 따라 주시오." 창조적으로 제안합니다.

제가 지금도 귀엽게 생각하는 저희 교회 청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를 믿자마자 중학교 때부터 교회에 와서 남다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학교에서 워낙 성실하고 공부를 잘하니까 가족들이 놔두다가 고3이 되니까 주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오는 것을 신앙이 없는 그 아버지가 얼마나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 학생의 마음 속에 주일은 공부를 않겠다고 작정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일날은 새벽부터 교회에 나와서 하루종일 있다가 밤 12시가 다 되어서 집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집 아버지가 밤 두 세시에 술이 취해서 "홍목사야, 내 아들 대학 못가면 책임질래?" 하면서 밤마다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얘기를 그 아들이 들었습니다.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자신이 주일에 공부하지 않고 성적이 올라가면 자신의 생각대로 맡겨달라고 했습니다. 자식 성적이 올라가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이 학생이 매일 모의고사를 보는데 토요일 학교에서 숙제를 많이 주고 월요일에 시험을 보니까 월요일은 조금 떨어집니다. 그런데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계속 전교1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학에 입학해서 지금은 코넬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학생이 제게 말하기를 공부라는 것은 사실 집중력이 더 중요한데 내가 주일 하루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약속한 그 다음부터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 굉장히 집중을 했답니다. 그 아버지도 감동을 받고 지금은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뜻을 펼칠 때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지혜가 부족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펼쳐질 때 필요한 지혜를 우리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다니엘의 겸손한 태도

세번째로 지혜롭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겸손한 태도로 일을 수행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주장이 틀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가 건방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좋은 뜻을 가질 적에 그 좋은 뜻을 가지는 태도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지금 이 다니엘은 자신만이 하나님의 뜻과 신비를 깨달은 제자라는 교만이 아니라 원래는 자신이 환관장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당신과 내가 똑같이 순종해야 하는 더 높은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그런 자세였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태도는 언제나 겸손했습니다. 다윗이 사울 앞에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하나님이 주신 올바른 뜻을 따라 그대로 살기위해서 그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순종했으며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뜻을 정해서 나갔던 걸음들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그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그 얼굴이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윤택해졌습니다. 채식은 한 두달 지난 다음에 결과가 나올까 말까 하는 것입니다. 열흘 동안에는 될 수 없습니다. 물만 마셔도, 그리고 채소만 먹어도 그 얼굴이 윤택하도록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축복하신 결과입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채워주시는 우리 하나님, 구하는 자에게 넉넉하게 주시는 우리 하나님, 그 얼굴이 왕의 진미를 먹는 자보다 더 빛나는 얼굴로 주께서 더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두번째로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환관장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환관장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저도 하나님의 뜻일까 아닐까 그렇게 망설이면서 일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최종 결정을 하고 할 때는 제가 하도 부족하고 또 게으르니까 그 분야의 합당한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예를 들면 남북나눔운동을 처음에 시작할 때 저는 처음에 참석하지 않았고, 복음주의계통과 NCC계통이 모여서 몇 분들이 통일문제를 놓고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주도세력이 당시 충현교회 신성종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신성종 목사님이 어느날 저한테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하는 겁니다. 하도 졸라서 참석을 한번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있다가 구체적으로 사람을 뽑는데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신성종 목사님을 선임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당회가 반대해서 그 다음주일에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돌아가면서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이사람 저사람을 거론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어렵다가 반농담으로 홍정길은 어떠냐고 하니까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저는 교단일에 나가본 적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하고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몇 어른이 저에게 그 일을 맡으라고 해서 저는 거절하기 위해서 기도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장애인학교를 세우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을 안 맡기로 그때부터 결심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를 해서는 안기부의 한기총을 담당한 사람인데 남북나눔운동을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하지 마라고 하니까 안할 수가 없더라구요. 목사가 양심의 문제를 가지고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적에는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 제가 몇몇 분에게 전화를 하니까 남북나눔의 모임에 안나간다고 하고는 다 빠져나갔습니다. 나만 멍청하게 서 있었습니다.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을 보내주시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일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이문식 목사가 자기가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두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하지 말라는 안기부의 요구와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분야의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 나갈 적에 동지를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같이 세워주십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여기 보니까 지혜와 명철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학문도 더해주셨습니다. 왕의 왕궁에 모여서 천하의 영재들과 함께 공부를 같이 합니다. 이 다니엘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명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자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분야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내몰았으면 반드시 하늘에서는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들판으로 내모셨을 때에는 반석에서 샘물을 공급해주십니다. 반드시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함께 갈 적에 하나님은 그 간구를 직접적으로 응답해 주실 뿐 아니라 동지를 붙여주시고 그 길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상과 몽조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이 외의 것까지 덤으로 더 주십니다.



뜻을 정한 인생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셨습니까? 믿음으로 순종하고 가십니까?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돕는 자도 주실 것이고, 응답해 주실 것이고, 내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함께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더 놀라운 축복으로 더해주십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더하시는 전능하시고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소년 다니엘이 뜻을 정할 적에 그가 믿음으로 걸어갔던 그 걸음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셨습니다. 한국 교단이 정말 갱신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수가 너무 많은 지도 모릅니다.

뜻을 정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으로 나가면 그 길이 고단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그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공급하심이 계속될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심으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외로운 내 인생길에 믿음의 동지들을 주셔서 내 행보를 든든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구하지 않았지만 내 삶에 있어서 필요한 것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더 높은 축복으로 계속 인도해 주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이렇게 넘치게 축복하셔도 됩니까?"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내게 넘칩니다. 의외의 축복! 뜻을 정하고 모인 이 모임 위에 뜻을 정한 주의 종들을 통해서 이 땅에 주의 역사가 드러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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