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밖에서 바라본 목사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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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밖에서 바라본 목사란 누구인가
  • 김종희 기자
  • 승인 2004.02.02 09: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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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02) 청년연구위원회 포럼

가벼운(?) 사례 두 가지

오늘 발제와 관련해서 참고도서들을 살펴보기 위해 며칠 전 기독교서점에 갔습니다. 몇 권의 책을 골라 계산대 앞에서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앞에 손님이랑 직원이랑 나지막하게 티격태격하더니 잠시 후 제 순서가 왔습니다. 직원이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그 중에 "목사면 다야?" 하는 말이 귀에 꽂혔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죠. 4만원 짜리 성경책을 한 권 사면서, 자꾸 깎아달라는 것이랍니다. 이 서점을 오래 동안 다닌 목산데, 왜 안 깎아주느냐고 억지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를 깎아주었는데도, 계속 뭐라고 해서 엄청 짜증이 났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가끔 이런 손님이 있나 보죠?" 했더니, "목사가 더 해요. 돈을 휙휙 집어던지지 않나, 대부분은 반말을 해요. 자기 교회 교인들이라면 그렇게 대하겠어요?"

 

아주 특별한 경우일까요?

제 가족 중 한 사람이 10년 이상 신학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이든 신대원이든, 처음 1학년 때는 학생처럼 굴더니, 조금 지나면 이미 목사가 다 된 양 직원들에게 반말을 예사로 한다고 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서 학교를 찾아온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반인들이 보는 목사의 이미지입니다. 한 마디로, 무례하고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목사 입장에서야 왜 할 말이 없겠습니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목사를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면 정작 마실 물은 없어지는 것처럼

금천구에 큰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2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이고, 역사도 10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의 불륜사건을 계기로 담임목사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인들은 개혁위원회를 조직으로 이를 중심으로 교회정관을 만들었습니다. 목사와 장로의 임기를 정했고, 당회에 일반교인이 참석할 수 있게 했으며, 모든 회의는 물론 재정까지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 담임목사 청빙위원회를 구성해서 담임목사를 공모했습니다. 그런데 2년이 다 되도록 지원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3차 청빙공고 때 20여 명이 지원을 해서 지금 인선의 막바지 단계에 와 있습니다.

반대로 방배동에 있는 3백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공고를 냈더니 100장이 넘는 이력서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몇 차례나 거르고 걸러서 이곳도 인선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두 교회 모두 내분을 겪었습니다. 후자는 목사와 교인들이 적당히 타협해서 조용히 무마되었고, 후임자를 선정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자는 1년간 심한 갈등을 빚어서 교회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미지가 부정적 영향을 끼쳤겠지만, 이것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입지가 너무 강하고 목사의 입지를 좁혀 놓은 정관 내용 때문에 지원 자체를 꺼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 교회에서 분규를 겪다가 따로 나와서 교회를 개척하려는 교인들 모임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의사결정구조가 민주적인 교회, 재정이 건전하고 투명하게 운용되는 교회, 은혜로운 설교가 넘치는 교회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정관을 도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관을 갖고 함께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갈 목사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목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그나마 희망적이겠지요.

지도급에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몇몇 극소수 문제 있는 교회나 목사의 경우"일 뿐이고 대부분 교회는 건전하다고 얘기들 합니다. 진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교회의 현실은 심각합니다. 해마다 엄청난 숫자의 목회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좋은 목사와 좋은 교인이 만나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홍수 속에서 마실 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교회 일체론(?)

교인들이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와 건전한 재정 운용 및 은혜로운 설교를 원하고 있는데, 그것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문제가 발생한 대부분 교회가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의사결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 재정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대부분 당회가 전권을 갖고 있으며, 제직회와 공동의회는 거수기 역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한 경우는 당회에서도 한 두 명의 실세(?)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회구조가 민주적이 되고 교인들의 의식도 서서히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 변화를 읽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한 채 계속해서 소수 핵심끼리 모든 것들을 논의하고 결정한다면, 그런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질 것입니다.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시스템은 곧 재정, 인사, 행정에 있어서 건강한 운용을 방해합니다.

강릉에 있는 한 교회 목사는 1억 원 가까운 연봉을 받는데다가, 1년에 수천만 원의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집행합니다. 사전 승인은 물론 사후 보고가 없고, 영수증 처리를 안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장로들도 그 내용을 모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교회가 시끄러워지자, 수많은 동료 및 후배 목사들이 "왜 어려운 사람 잘 도와주는 목사를 괴롭히느냐"면서 교인들을 나무랍니다. 물론 그 목사는 많은 후배 목사들이나 가난한 교회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돕는 것이 아니라 교회 돈을 가지고 목사 개인이 돕는 것이 된 셈입니다. 교회가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니고 목사가 선한 일을 한 것이 됩니다. 주님이 받으셔야 할 공(功)을 목사가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구조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목사=교회 등식의 위험성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목사/교회 일체론의 대표적인 사례가 김홍도 목사의 공금횡령 사건입니다. 목사를 위해 쓰는 돈과 교회를 위해 쓰는 돈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옛날에는 당연했고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 변화를 수용해야 합니다.

잠실에 있는 한 교회 목사는 교인들과 상의하지 않고 교회 건물을 처음에는 부동산 업자에게, 두 번째는 다른 교회에 팔아 넘겼습니다. 50억 원이 넘는 돈을 목사가 갖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극심하게 반대하자, 목사는 저 멀리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기도원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교인들을 다 떼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예외적인 특별한 경우로 볼 수 없습니다. 목사/교회 일체론에 젖어 있는 한 이러한 사건은 빈번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상당수 목사들은 최저 생활비에 못 미치는 봉급을 받으면서 힘겹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형편이 어려워서 그러는 것이지, 만약 교회의 규모가 커진다면 얼마든지 권력 독점, 권력 남용 등의 잘못을 범할 여지가 있습니다. 지금 문제를 일으키는 대형교회들의 목사들은 하나 같이 그 교회를 개척하면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개척 시절에 누가 오늘날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견했겠습니까? 교회가 성장하고 안정된 길로 접어들면서, 초심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처럼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전에 의사결정구조를 민주적인 구조로 바꾸고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자신을 미리 미리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교인들, 어찌할거나

물론 미성숙한 교인들이 목사의 비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무조건 반대할 수 있습니다. 속이 타는 노릇입니다. 그럴 때 목사에게 필요한 것이 '기다림'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다리셨듯이 말입니다. 기다림의 미학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이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기다리고, 그들을 세워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가 눈에 보이는 사업을 하고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서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권력의 집중과 전횡은 목사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교회들이 목사보다 오히려 한 두 명의 장로들에 휘둘려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따질 수는 없겠지만, 교인들의 미성숙함이나 장로들의 문제도 결국은 목사가 떠안고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목사를 괴롭히는 교인과 장로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만 충성을 다 하는 교인들은 목사에게 매달리거나 목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목사에게 충성을 다 했던 사람들이 등에 칼을 꽂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대가를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에 갈등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안수집사 때까지는 너무나도 겸손히 열심히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장로가 되는 순간부터 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병든 신앙을 갖도록 만든 책임이 목사에게 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충성을 다해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 목사에게 충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기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갈등을 빚을 수 있고, 충족되고 나면 교만의 극치에 이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목사를 의존하게 되고, 잘못된 목사는 또 이런 왜곡된 신앙을 이용합니다. 마치 자신이 교인들에 대해 축복권과 저주권을 다 이양 받은 것처럼 합니다. 그것이 설교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날 설교가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설교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청중들은 먹을 것을 원했고, 예수님이 왕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때 청중들은 하나 둘 떠나갔고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그는 혼자였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그런 설교를 원하지 않습니다.

귀에 달콤한 설교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을 때 가슴을 찢으며 회개했던 그런 설교는 싫어합니다. 그러니 목사들도 그런 설교를 잘 안 합니다. 사이가 좋을 때는 축복의 말씀, 달콤한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사이가 틀어지면 저주를 쏟아냅니다. 설교를 갖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하거나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지나치게 교회에서 모든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교인,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잘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교회에 몰두합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충성이 아니고 자기만족입니다. 목사가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목사가 그것을 이용하거나 부채질하면 나중에 오히려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오직 주님께 충성해야 하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지친 영혼이 위로 받고 세상에서 살아갈 새로운 힘을 공급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인들의 잘못된 신앙도 크게 비판되어야 할 점입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을 지적할 때 교인들은 목사를 거부하거나 배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으로 인해 받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고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참된 고난과 거짓된 고난을 구분할 수 있는 눈도 가져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신본주의의 반대라고?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민주주의를 신본주의가 반대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정서 속에서 민주주의는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말, 은혜롭지 않은 제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정말 교인을 동역자라고 생각한다면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불편하고 더디더라도, 민주적으로 대화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법을 피차 배워야 합니다. 또 그것이 사람을 귀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제가 아는 많은 교회들이 목사나 장로, 당회가 전권을 갖지 않고, 목사, 장로, 집사, 청년 등이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 운영에 참여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장로와 어린 청년 사이에 충돌이 왜 빚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요인입니다. 충돌이 빚어질 때야말로 목사가 영적 지도력을 발휘할 때입니다.

 

목사, 날마다 유혹 앞에 직면해 있는 존재

목사는 유혹 앞에 직면해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처럼, 그런 시험이 목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를 키워야 한다는 유혹, 이성과의 관계와 관련한 유혹, 학벌에 대한 유혹,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유혹. 그러면서도 아내와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어려움, 교회성장에 대한 교인이나 중직들의 압박, 물질적 곤란으로 인한 고통. 유혹과 고통은 항상 동전의 앞 뒤 면처럼 따라 붙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좋은 씨앗)는 책에서 "목회자들이 말로는 목회가 거룩한 소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 성공과 출세를 더 간절히 추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유혹 앞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목사의 자리는 영광과 고난의 자리입니다.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혹이 즐비한 자리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비와 긍휼을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비대해졌다고 해서 그것을 성장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성장은 건강함입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건강한 교회'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남을 돕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몸이 아프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습니다.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기초가 건강하기 때문에 금세 훌훌 털고 일어납니다. 교회도 갈등을 빚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그런 갈등을 잘 치유하고 해결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따라서 양적 성장에 매몰되어 버리면 위험합니다. 그것을 교인들에게 바로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교인들은 목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목사 가정은 항상 은혜로울 거라고 믿고 기대합니다. 목사에게 어떤 신비스러움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목사 가정만큼 스트레스가 많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아내와 자녀들은 교회에서는 과도한 대접을 받지만 바깥에 나가면 "목사 사모가 그럴 수가, 목사 자식이 왜 그러나" 하면서 억울하게 공격을 합니다. 그 스트레스는 목사 가족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 자녀 중에 비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갈등을 숨기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거나 억누를 때 언젠가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교인과 불륜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꾸리지 못하는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목사 가정의 취약점을 교인들도 알아야 합니다. 목사 가정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교인들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 하는 모습을 목사가 모범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왜 경제적 어려움이 없습니까. 일부분을 빼고 대부분 목사들은 경제적으로 열악합니다. 그것을 교인들이 알아야 합니다. 목사의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 교인들도 함께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그런 경제적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M. J. 안토니도 [병든 세상 건강한 목회](예찬사)라는 책에서 "대부분 교인들은 자신의 담임목사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적인 기준을 세워놓고, 목사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러다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사정없이 비판의 화살을 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깨어야만 목사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려면 먼저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한 다음 그것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존재로 바로 서는 것,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일 것입니다.

어윈 루처도 [목사가 목사에게](진흥)라는 책에서, (1) 사람들이 만든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군중이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넘어갔다면 구원사역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교인들에게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2) 비판에서도 유익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지도자는 비판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특히 부당한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오해도 받았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격 훈련이 필요합니다. (3) 인간적 속성을 교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겁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가는 말

내 아버지. 꼭 2개월 전인 작년 12월 2일 72세의 일기로 소천하실 때까지 아버지는 목사로서의 40년 삶을 너무나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평생 자가용 한 대 없었고, 은퇴하면서 가까스로 집 한 채 장만했습니다. 돌아가실 때 통장 하나 안 남겨주셨습니다. 신학교에 장학금 보내실 때 다섯 자녀들은 등록금이 없어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왜 없었겠습니까.

암수술을 받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2년간 190여 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마지막 설교는 2003년 10월 31일 평소 그토록 사랑했던 총신대 신대원 채플 설교였습니다. 그 설교는 사실상 예비 목회자들에게 남기는 유언이었습니다. 돌아가시는 전날까지 하루에 50장의 성경을 읽으셨고, 돌아가시는 날도 성경묵상 테이프를 들으시면서 주무시듯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는 "평생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사람 여기 잠들다"라는 비문이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의 책들은 모두 총신대 신대원에 기증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조의금을 장학금으로 기증할 예정입니다.

저는 30여 년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 같은 목사가 될 자신이 없어서 언론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세습하는 부자지간 목사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는 교회의 목회자로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너무 딱딱한 설교, 무뚝뚝한 표정, 자주 교회를 비우는 모습을 교인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60세 조금 넘어서 강제로 조기은퇴를 당했습니다. 교인들이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는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섯 자녀의 사랑과 존경을 뜨겁게 받았고, 지금도 자녀들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런 점에서 목사로서는 성공적인 인생을 사셨습니다. 저의 눈높이가 거기에 있다 보니까 오늘날 목사들을 보면서 비판을 많이 합니다.

목사의 자리는 고난의 자리입니다. 영광의 자리입니다. 유혹의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절히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모습은 겉으로도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에 대해서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한없는 사랑을 쏟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을 믿어선 안 됩니다. 교인들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목사들의 어려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을 믿고 복음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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