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한국교회 성장정체 현상의 신학적 교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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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한국교회 성장정체 현상의 신학적 교찰
  • 권성수 목사
  • 승인 1997.06.1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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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6/19) 교갱협/기독신보 공개포럼

1983년 미국 위튼에서 개최된 "교회의 속성과 사명에 관한 회의"(Conference on the Nature and the Mission of the Church)에서 노봉린 박사는 "매일 새로운 교회가 6개씩이나," "한국 : 아시아의 첫 번째 기독교 국가?", "무한정의 교회성장" 등으로 표현된 한국교회 성장에 대한 글들을 소개하면서 한국교회 성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된 사실을 강조했고 그 국제회의에서 한국교회 성장이 객관적으로 인정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성장이 1990년대에 가서도 계속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왔다. 교회성장 신학자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세계적으로 교회성장의 빛나는 예는 한국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백년 전에는 기독교인이 하나도 없었으나 "현재는 기독교인이 인구의 30% 정도에 달하며 1980년대 말에는 50%가 넘을 것이다"고 예측했다.

한편 한국교회가 한창 성장하고 있을 때 한국교회 성장의 문제점에 근거해서 경고가 발해지기도 했다. 이종윤 목사는 1982년 10월 28~30일 할렐루야 교회에서 한 강연에서 "1961년 GNP가 1인당 83달러이던 것이 1981년에는 1,696달러로 상승한, 경이적인 경제성장원리가 교회지도자의 뇌리에까지 은연 중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가시적으로 팽창 일변도의 성장만을 강조한 나머지, 현대 한국교회는 경제성장과 비례하여 외형적 성장만 하고 있어서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가 지적한 바와 같이 '텅 비고 깨진 조개껍질과 같이 그 원래의 특성을 상실한' 병든 교회로 진단이 내려진 채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고 경고한 바 있다.

10년 전만 해도 경이로운 성장에 대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던 한국교회가 피터 와그너의 예측과는 달리 1990년대에 들어와서 성장이 한계에 이른 것으로 드러났다. 전호진 박사는 "1980년대에는 하루 6개의 새 교회가 등장한다고 자랑하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하루에 6개씩 문을 닫는 지경"이라고 했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국제적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반대로 이제는 한국교회의 역성장이 외국인을 통해서도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루츠 드레숴(Lutz Drescher)는 1995년 "성장의 끝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한국교회 성장이 1990년대에 들어와서 그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5년 5월 횃불선교센타에서 개최된 GCOWEII에 모인 세계교회 4천 여명의 지도자들은 한국교회는 여전히 교회성장의 모델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제 세계 선교의 바톤은 한국교회가 이어받아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다. 한국교회가 실제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국의 개신교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왜 성장이 둔화 내지 정체되게 되었는가? 그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인가? 최근에 한국교회 성장 둔화/정체 현상에 대한 다각도의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본고는 최근에 제시된 통계들과 그 통계들에 나타난 성장 둔화/정체 현상에 대한 분석과 대책으로 나온 많은 사안들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그 핵심과 핵심의 표출현상 면에서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성장 정체/둔화 현상 통계 분석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교회수의 증가현상을 보면 1950년의 3,114개 교회가 1960년 5,011교회로 60.9%의 성장을 보였고, 1970년에는 12,866개의 교회로 1960년 대비 157%의 성장을 보였으며, 1980년에는 21,243개의 교회로 1970년 대비 65.1% 성장을 보였고, 1990년에는 35,819개의 교회로 1980년 대비 68.6% 성장을 보였으며 1993년에는 42,859개의 교회로 1990년 대비 18.9%의 성장을 보였다. 한국교회가 1993년에 1990년 대비 18.9%의 교회수 증가를 보였다는 것은 과거 10년을 주기로 하여 교회수 증가율을 분석한 것과 비교할 때 증가율이 아주 낮은 것이 사실이지만 2000년의 교회수를 보고 1990년 대비 몇 % 증가했는가를 분석한 후에 평가되어야 할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교인수 면에서 볼 때 1950년부터 최근까지의 증가율은 다음과 같다.

연도 1950 1960 1970 1977 1985 1991 1994
교인수 500,198 623,072 3,109,612 5.001,491 6,489,282 8,037,464 8,146,556
전체비율   24.6% 41.2% 56.7% 29.7% 23.9% 21.4%

위의 도표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교인수의 증가에 있어서 1960년에는 1950년 대비 24.6%의 성장을 보여 연평균 2.46% 성장했고, 1970년에는 1960년 대비 412.4%의 성장을 보여 연평균 41.2% 성장했으며, 1977년에는 1970년 대비 56.7%의 성장을 보여 연평균 8.1% 성장했으며, 1985년에는 1977년 대비 29.7%의 성장을 보여 연평균 3.7% 성장했으며 1991년에는 1985년 대비 23.8%의 성장을 보여 연평균 3.9% 성장했으며 1994년에는 1991년 대비 1.4%의 성장을 보여 연평균 0.4% 성장했다.

한국교회는 연평균 교인수 성장율 면에서 1950년대에 2.46%, 1960년대에 41.2%, 1970년대에 5.9% (1970~1977년 어간에 연평균 8.1%, 1977~1985년 어간에 연평균 3.7%이므로 8.1%와 3.8%의 평균치를 잡아), 1980년대에 3.75%(1977~1985년 어간에 연평균 3.7%, 1985~1991년 어간에 연평균 3.8%이므로 3.7%와 3.8%의 평균치를 잡아), 1990년대에는 연평균 0.4%의 성장을 보였다. 이것을 보면 한국교회는 1960년대에 연평균 41.2%라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으나 1970년대의 연평균 5.9%, 1980년대에 연평균 3.75%로 성장률이 비교적 둔화되다가 1990년대에는 연평균 0.4%로 성장률이 폭락한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통계는 한국종교사회연구소와 문화공보부 및 통계청의 자료에 근거한 것인데, 기독교교문사가 출판한 1993년 <기독교대연감>에 의하면 1990년에는 개신교 신자수가 11,427,485명으로 전년 대비 10.8% 성장하였고, 1991년에는 전년 대비 5.8%, 1992년에는 4%, 1993년에는 3% 성장했다. <기독교대연감>의 이런 통계에 의하면 1990년의 10.8%의 성장이 1991년의 5.8%로 떨어졌고 1992년의 4%, 1993년의 3%로 계속 성장률이 하락된 것으로 드러났다. <기독교대연감>의 통계에 의하면 또한 1990년부터 1993년까지 개신교의 연평균 성장률은 5.9%로 위에서 제시한 한국종교사회연구소/문공부/통계청의 통계에 의한 1990년대의 0.4%의 성장률과는 판이한 것을 볼 수 있다. 두 통계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있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 개신교 교인수의 성장이 둔화된 것은 두 통계에 다 같이 드러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교회 개신교의 교인수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것은 주요 교단별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1993~1996년 4년간 예장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감리(예수교대한감리회), 하나님의 성회의 총교인수는 다음 도표와 같다.

연도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감리교 기하성
1993 2,147,642 2,049,117 349,208 328,048 1,289,242  
1994 2,158,794 2,101,295   334,473 1,289,626 1,214,798
1995 2,158,908 2,103,295 373,498 334,473 1,294,330 1,266,569
1996 2,171,856   373,897   1,332,590  

위의 도표에 의하면 합동측은 1994년에는 전년 대비 0.5% 성장하였고 1995년에는 전년 대비 0.005% 성장하였으며 1996년에는 전년 대비 0.6% 성장하였다. 통합측은 1994년에는 전년 대비 2.4% 성장하였고 1995년에는 전년 대비 0.01% 성장하였다. 고신측은 1995년에 전년 대비 0.96% 성장하였고 1996년에는 전년 대비 0.001% 성장하였다. 기장측은 1994년에는 전년 대비 0.99% 성장하였고 1995년에는 전년 대비 0.99% 성장하였다. 감리교는 1994년에는 전년 대비 0.003% 성장하였고 1995년에는 전년 대비 0.07% 성장하였으며 1996년에는 전년 대비 0.03% 성장하였다. 하나님의 성회는 1995년에 전년 대비 0.4% 성장하였다. 이러한 성장률을 보면 이상의 6개 교단이 1994년과 1995년에 전년 대비 성장한 것은 극히 미미하여 "성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조차 부끄러울 지경이며, 모두 1% 미만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어서 이 기간에 어느 교단이 다른 교단보다 더 성장하였다고 비교하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개신교의 교인수 증가율이 1990년대에 와서 급격하게 둔화된 것은 인구 증가율과의 비교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구 및 주택 센서스> (1985) 및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지표>(1991,1995)에 의하면 1991년의 한국의 총인구수는 43,268,000명으로 1985년의 40,806,000명에 비해 6.0% 증가했고, 1994년의 총인구수는 44,851,000명으로 1991년 43,268,000명에 비해 3.7% 증가했다. 1985년 개신교의 총신자수는 6,489,282명으로 총인구비 15.9%이고 1991년 총신자수는 8,037,464명으로 총인구비 18.6%이며, 1994년 총신자수는 8,146,556명으로 총인구비 18.2%이다. 1985년 개신교의 총인구비가 15.9%이던 것이 1991년에는 18.6%로 교세 성장이 인구성장을 앞선 것을 볼 수 있으나, 1991년 총인구비 18.6%이던 것이 1994년 18.2%로 이 기간의 교세성장이 인구성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1994년 한국의 총인구가 1991년 대비 3.7% 성장했으나 개신교의 교세는 이 기간에 1.4% 밖에 성장하지 못한 것을 보아도 교세 성장이 인구 성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1991년에서 1994년 어간의 교세 성장이 인구 성장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은 이 기간의 교세 성장은 사실 성장이 아니라 교세 감소, 즉 마이너스 성장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1991~1994년 어간에 개신교는 불신자들을 전도하여 신자들이 되게 하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기존 교인들의 자녀들까지도 교회로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와 동일한 사회 지표에 의하면 1985년, 1991년, 1994년을 기준으로 가톨릭과 불교의 교세는 개신교의 교세 성장 둔화 내지 감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톨릭은 1985년 총신자수가 1,865,397명으로 총인구비 4.6%를 기록하였고, 1991년에는 총신자수 2,476,660명으로 총인구비 5.7%를 기록하였으며, 1994년에는 총신자수 2,640,916명으로 총인구비 5.9%를 기록하였다. 가톨릭은 총인구비에 있어서 1985년의 4.6%, 1991년 5.7%, 1994년 5.9%이므로 교세 성장이 1985~1991년 기간보다 1991~1994년 기간이 둔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교세 성장이 인구 성장을 앞질러 최소한 마이너스 성장은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불교는 1985년 총신자수 8,059,624명으로 총인구비 19.8%, 1991년 총신자수 11,729,089명으로 총인구비 27.1%, 1994년 총신자수 10,921,756명으로 총인구비 24.4%를 기록하였다. 불교는 1991년에는 1985년에 비해 총인구비가 7.3%의 급성장을 보였으나, 1994년은 1991년에 비해 총인구비 2.7%의 감소 현상을 보였다. 개신교와 가톨릭과 불교가 다 같이 1991년에는 1985년에 비해 총인구비에 있어서 상당한 성장을 보였으나 1994년에는 1991년에 비해 총인구비에 있어서 성장 둔화 내지 감소 현상을 보이고 있다. 특별히 1994년은 1991년에 비해 개신교와 불교는 교세가 감소되었으나 가톨릭은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점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개신교의 교세가 사실상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현상을 조금 더 뚫고 들어가서 어느 계층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를 다음 도표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종교인구 (단위 %)

  불교 기독교 천주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기타 종교有 종교無
전국 100.0 24.4 18.2 5.9 0.4 0.3 0.1 0.7 49.9 50.1
시부 100.0 23.7 19.5 6.7 0.3 0.3 0.1 0.7 51.3 48.7
군부 100.0 26.6 13.8 3.1 0.8 0.3 0.1 0.5 45.1 54.9
100.0 20.3 15.4 4.8 0.6 0.3 0.1 0.5 41.9 58.1
100.0 28.2 20.9 6.9 0.2 0.4 0.1 0.8 57.4 42.6
15~19 100.0 11.4 22.6 6.1 0.1 0.2 0.0 0.4 40.8 59.2
20~29 100.0 14.4 18.5 4.9 0.2 0.2 0.1 0.5 38.7 61.3
30~39 100.0 24.5 19.7 6.4 0.1 0.4 0.1 0.7 51.8 48.2
40~49 100.0 30.6 18.3 7.2 0.3 0.3 0.1 0.7 57.5 42.5
50~59 100.0 36.0 14.9 5.5 0.9 0.5 0.1 1.0 58.8 41.2
60~ 100.0 35.5 13.7 5.3 1.2 0.4 0.2 0.8 57.1 42.9
국졸 100.0 35.2 12.9 3.9 0.8 0.4 0.1 0.9 54.1 45.6
중졸 100.0 24.1 18.3 5.3 0.3 0.3 0.1 0.7 49.0 51.0
고졸 100.0 20.5 19.2 5.9 0.3 0.3 0.1 0.6 46.8 53.2
대졸 100.0 17.0 24.3 10.0 0.2 0.5 0.1 0.5 52.6 47.4
상류층 100.0 27.7 24.5 6.6 1.1 1.1 0.0 0.8 61.7 38.3
중산층 100.0 24.1 17.0 5.9 0.5 0.3 0.1 0.5 48.5 51.5
하류층 100.0 25.9 13.2 3.7 0.5 0.3 0.1 0.8 44.5 55.6

1991년 종교인구 (단위 %)

  불교 기독교 천주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기타 종교有 종교無
전국 100.0 27.6 18.6 5.7 1.0 0.3 0.2 0.6 54.0 46.0
시부 100.0 27.3 20.6 6.8 0.7 0.3 0.1 0.6 56.5 43.5
군부 100.0 28.6 12.6 2.8 1.6 0.4 0.2 0.6 46.7 53.3
100.0 24.0 15.8 4.8 1.3 0.3 0.1 0.5 46.8 53.2
100.0 31.0 21.1 6.6 0.7 0.4 0.1 0.7 60.5 39.5
15~19 100.0 13.3 24.2 5.6 0.3 0.3 0.1 0.5 44.4 55.6
20~29 100.0 17.4 19.3 5.3 0.3 0.3 0.1 0.5 43.4 56.6
30~39 100.0 29.5 20.3 6.4 0.8 0.3 0.1 0.6 58.0 42.0
40~49 100.0 36.0 18.3 6.8 1.1 0.4 0.1 0.6 63.3 36.7
50~59 100.0 38.7 13.8 4.8 1.7 0.4 0.2 0.8 60.4 39.6
60~ 100.0 37.5 12.9 5.0 2.2 0.5 0.2 0.7 59.1 40.9
국졸 100.0 36.9 12.7 3.6 1.5 0.4 0.1 0.9 56.1 43.9
중졸 100.0 26.2 19.7 4.9 0.9 0.3 0.1 0.6 52.7 47.3
고졸 100.0 23.7 20.3 6.6 0.7 0.3 0.1 0.5 52.2 47.8
대졸 100.0 20.2 26.0 10.4 0.6 0.3 0.1 0.5 52.2 47.8
상류층 100.0 33.1 16.5 9.0 0.9 0.4 0.2 0.8 60.9 39.1
중산층 100.0 29.5 17.3 5.7 1.2 0.3 0.2 0.5 54.7 45.3
하류층 100.0 27.0 15.0 3.8 1.5 0.3 0.2 0.8 48.6 51.4

1991년 대비 증감표 (단위 %)

  불교 기독교 천주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기타 종교有 종교無
전국 -3.2 -0.4 -0.2 -0.6 0.0 -0.1 0.1 -4.1 4.1
시부 -3.6 -1.1 -0.1 -0.4 0.0 0.0 -0.1 -5.2 5.2
군부 -2.0 1.2 0.3 -0.8 -0.1 -0.1 0.1 -1.6 1.6
-3.7 -0.4 0.0 -0.7 0.0 0.0 0.0 -4.9 4.9
-2.8 -0.2 0.3 -0.5 0.0 0.0 0.1 -3.6 3.6
15~19 -1.9 -1.6 0.5 -0.2 -0.1 -0.1 -0.1 -3.6 3.6
20~29 -3.0 -0.8 -0.4 -0.2 -0.1 0.0 0.0 -4.7 4.7
30~39 -5.0 -0.6 0.0 -0.7 -0.1 0.0 0.1 -6.2 6.2
40~49 -5.4 0.0 0.4 -0.8 -0.1 0.0 0.1 -5.8 5.8
50~59 -2.7 1.1 0.7 -0.8 -0.1 -0.1 0.2 -1.6 1.6
60~ -2.0 0.8 0.3 -1.0 -0.1 0.0 0.1 -2.0 2.0
국졸 -1.7 0.2 0.3 -0.7 0.0 0.0 0.0 -2.0 2.0
중졸 -2.1 -1.4 0.4 -0.6 0.0 0.0 0.1 -3.7 3.7
고졸 -3.2 -1.1 -0.7 -0.4 0.0 0.0 0.1 -5.4 5.4
대졸 -3.2 -1.7 -0.4 -0.4 0.2 0.0 0.2 -5.3 5.3
상류층 -5.4 8.0 -2.4 0.2 -0.7 -0.2 0.0 0.8 -0.8
중산층 -5.4 -0.3 0.2 -0.7 0.0 -0.1 0.0 -6.2 6.2
하류층 -1.1 -1.8 -0.1 -1.0 0.0 -0.1 0.0 -4.1 4.1

위의 도표들을 볼 때 1994년은 1991년에 비해 종교인구 전체가 총인구비에 있어서 4.1% 감소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종교별로 볼 때 1994년 종교인구는 1991년에 비해 천주교는 0.2%의 성장했고 원불교는 그대로(0.0% 성장)이며 나머지 종교들은 불교 3.2%, 기독교 0.4%, 유교 0.6%, 천도교 0.1%로 각기 감소한 것으로 드러난다. 기독교의 경우 총교인수가 총인구대비 1991년 18.6%에서 1994년 18.2%로 0.4% 감소한 것이 드러났는데, 연령별로 볼 때 10~30대가 특별히 줄어들었고, 50대와 60대 이상은 늘어난 것으로 드러난다. 학력별로 볼 때는 대졸 이상이 특별히 줄어들었고 중졸과 고졸도 약간 줄어든 것으로 드러난다. 생활정도 면에서 볼 때는 하층은 총인구대비 15.0%에서 13.2%로 떨어졌으나 상층은 16.5%에서 오히려 24.5%로 증가한 것으로 드러난다. 생활정도에 있어서 천주교의 1991년 대비 1994년의 총인구비는 하층이 3.8%에서 3.7%로 약간 떨어졌고 상층은 9.0%에서 6.6%로 많이 떨어졌으나 중간층이 5.7%에서 5.9%로 늘어난 것으로 드러난다. 이상에서 살펴본 통계자료와 그것에 대한 분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이 주목된다.

(1) 통계자료에 부정확성이 있다.

통계청의 "1995년도 인구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1995년말 우리나라 전체인구는 4천4백55만1천1백83명인데, 이 중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2천2백78만3백73명으로 전체 인구의 51.14%를 차지하고 불교가 1천38만7천8백61명으로 23.3%, 개신교가 8백81만8천9백64명으로 19.79%, 가톨릭이 2백98만8천1백2명으로 6.7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위에서 제시한 1994년 통계와 비교해 보면 불교는 1994년의 24.4%에서 1995년에 23.3%로 1.1% 마이너스 성장, 개신교는 1994년의 18.2%에서 1995년 19.8%로 1.7% 플러스 성장, 가톨릭은 1994년 5.9%에서 1995년 6.7%로 0.8% 플러스 성장을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실제 개신교가 1994년에 비해 1995년에 교인수 증가가 있었는가? 오히려 개신교 교세가 감소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통계자료의 부정확성을 드러낸다. 통계자료의 부정확성은 앞서 지적한 바대로 한국종교사회연구소/ 문공부/ 통계청의 통계자료와 기독교계의 통계자료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종교마다 교세를 늘여서 보고하는 경향도 있고 개신교의 경우 교인들의 교회 수평이동 현상 때문에 이중삼중으로 계산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불교의 경우 한 가족이 신자이면 모든 가족들을 신자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1992년 12월 31일 각 종교단체가 문화체육부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불교신자 2천 9백만, 개신교 신자 1천 4백 5십만, 가톨릭 신자 3백만, 유교 신자 1천만 등 한국의 종교 인구 전체가 무려 6천 6백만으로 당시 한국 전체 인구 4천 4백만보다 2천 2백만이 더 많은 기현상이 나타났다. 한국 교회 성장 둔화/정체 현상에 대한 신학적인 분석을 하는 마당에 통계 자료가 부정확하다는 사실은 이러한 분석 자체를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2) 이상의 통계자료들만으로는 미비한 점들이 많다.

가령 시기별, 교단별, 지역별, 대형/중형/소형 교회별, 계층별(학력, 남녀, 연령, 생활정도) 교세 분석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한국 교회 성장 정체/둔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의 다각도적인 특징분석과 성장이 정체/둔화, 혹은 역성장 하는 교회들의 특징 분석도 나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장 정체/둔화에 대한 목회자들의 설문조사와 평신도들의 설문조사가 다양한 질문들에 근거해서 나와야 하고, 교회를 떠난 자들이나 교회간에 수평이동하는 자들이 왜 떠났으며 왜 이동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나와야 한다. 또한 불신자들이 왜 교회로 나오지 않는지 그 이유도 분석되고 그것에 대한 통계가 나와야 한다.

(3) 위의 통계자료와 그것에 대한 분석이 위 (1)과 (2)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고 1970년대와 1980년대로 가면서 성장이 점차적으로 둔화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성장이 둔화 내지 정체되었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드러난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그래도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비교적 높은 성장을 계속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성장기세가 꺾였을 뿐 아니라 교세 성장이 인구 성장을 따라가지 못함으로 사실상의 마이너스 성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교회에 1990년대에 급성장을 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 일부 대형교회들과 서울 외곽 신도시 교회들의 경우 그 성장이 수평이동에 기인한 면이 많고, 도시교회들의 성장은 농촌교회로부터 이사온 교인들의 등록에 기인한 면이 많기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를 두고 볼 때 1990년대에 한국교회가 성장의 정체/ 둔화/ 역성장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회성장이 정체/둔화된 사실은 1990년대에 개척교회가 안되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 매년 3천여 개의 교회가 개척되는데, 이런 개척교회들이 잘 안된다는 것이다.

(4) 아이러니칼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교회가 성장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하고 교육하고 실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노력과 역행하는 마이너스 성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1990년에도 계속되는 현상은 신학교 커리큘럼에 교회성장학이 개설되고, 목회자 재교육 프로그램에 교회성장이 필수적인 과목으로 배정되며, 교사대학과 부흥회/수련회와 신앙강좌와 신학 세미나 등이 교회성장을 겨냥하여 다양하게 개설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민일보와 교계신문 하단 광고란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입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 성장은 둔화되거나 정체되었으며 교회의 마이너스 성장마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끄러움이고 아픔이다.

 

성장 정체/둔화 현상에 대한 분석

1. 별 문제가 아니라는 분석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교회 성장이 정체/ 둔화되거나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는 말이 통계자료가 나오기 전에는 실감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초에 필자가 개인적으로 만난 어떤 목회자는 "현재 한국교회가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말에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회는 생명적인 기관이기 때문에 성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극도의 역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교회 성장의 정체나 둔화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교회관이 잘못된 것이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인 것처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필자는 그 목회자의 "교회는 필연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고 반드시 성장한다"는 불같은 확신 앞에 무릎이 꿇어지는 심정이었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주님이 승리하셨고 승리하시고 계시며 앞으로 최종적으로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에 (계시록 전체; 특히 1:10~20; 5:5~6; 11:15; 19:11~21; 22:1) 교회의 역성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은 어디까지나 가시적 교회의 교인수 면에서 현상학적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이것은 현상을 사실대로 지적하는 것이다.

199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 정체 혹은 역성장은 위와 다른 각도에서도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1994년의 종교인구가 1991년의 종교인구에 비해 4.1% 줄어든 현상을 우리는 위에서 살펴보았다. 종교인구 전체가 4.1% 줄어든 데 비해 개신교는 0.4% 밖에 줄지 않았으니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인가 하는 반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가 1990년대에 특별히 무슨 잘못을 해서 인구증가에 미치지 못하는 사실상의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의 종교에 대한 관심 이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같은 기간에 가톨릭이 총인구 대비 0.2% 성장, 즉 인구 증가를 앞지르는 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나 종교 전반에 있어서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기 때문에 여러 종교들 중에 개신교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론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종교인구의 감소현상과 보조를 맞춘 교인수 감소문제를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것이다. 교세 성장이 인구 성장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기존 교인들이 자신들의 자녀들까지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는 데도 "이것은 일반적인 종교현상이니 별 문제가 아니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21세기에는 종교의 대부흥이 올 것이기 때문에 1990년대의 교회 성장 정체/ 둔화 현상은 지나가는 비 정도에 불과하다는 이론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첨단과학과 고도의 기술의 발전과는 정반대로 정신적인 고갈과 박탈과 소외를 느끼는 현대인들이 21세기에는 더욱 더 심한 정신적인 갈등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은 예측가능한 것이다. 또한 21세기에는 종교다원주의의 유행으로 온갖 종교들이 번창할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도 자연히 성장하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기대로 1990년대의 교회 성장 둔화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에도 경기가 변하는 것처럼 교회의 성장도 마이너스 성장의 시기도 있고 그러다가 플러스 성장의 시기로 돌아서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21세기의 플러스 성장을 내다보며 걱정할 것이 없다는 전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종교다원주의 현상은 개신교의 재성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전선이 넓어지고 다양해지고 치열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오늘의 성장 둔화 현상을 심각한 문제로 삼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21세기에는 더 심각한 마이너스 성장이 나타날 것이다.

199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 정체/둔화 현상은 교회관(불가시적 교회는 필연적으로 성장한다는 교회관)이나 같은 기간의 일반적인 종교인구 감소 현상이나 21세기의 종교부흥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의해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매도되어서는 안될 만큼 심각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국교회가 이 시점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다. 그렇다면 1990년대 한국교회 성장 정체/둔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가?

 

2. 문화 변화와 이에 대한 대처 실패

한국사회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안정의 열매를 자신과 가족을 위한 소비와 향락 쪽에서 따려고 하게 되었다. 웬만한 집은 다 자가용이 있어서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고속도로와 국도를 매우는 현상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어서 당연시되고 있다. 사람들은 과거보다 여유있게 살면서도 더 큰 집에서 더 좋은 자동차를 몰고 사회적인 명성과 권력과 존귀를 누리면서 대대로 "잘 살기" 위해서 무속적인 방편을 사용하고 명문대학 입학을 위한 자녀교육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한편으로 모더니즘의 이성 중심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감성 중심으로 축이 바뀌면서 감성을 해방시키고 마음껏 발산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청소년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순간영상들이 급속도로 바뀌는 가운데 자신들의 감성을 발산하는 영상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1996년 8월 26일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가 주최한 영성수련회에 참석한 예장합동측 목회자 4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1990년대 이후 사회적 변화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결정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으로 경제성장과 소득수준 향상에 따른 물질만능주의와 향락풍조의 만연을 지적한 응답이 82.4%, 세속적 대중문화의 강력한 확산이 28,8%로 나타났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여가문화, 향락문화, 무속문화, 입시문화, 감성문화, 청소년 문화 등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여가문화를 적절한 여가(recreation)와 함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재창조(re-creation)의 문화로 물꼬를 터주지 못했기 때문에 여가문화가 향락문화로 직결되었다. 자신과 가족들의 영달을 위한 미래예측의 욕구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일반원리의 생활적 적용을 통해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선 돈 내고 쉽게 알 수 있는 무속의 방법에 자신을 던지게 되었다. 입시지옥에서 신음하는 부모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교회가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인들은 그래서는 안될 줄 알면서도 자기 자식들만 바보 만들 것이 두려워서 입시문화의 쳇바퀴 속에 자식들을 넣고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성을 발산하는 문제도 교회가 하나님의 전인적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지정의 조화를 통한 감성의 발산을 하도록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특별히 입시지옥에서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나쁜 방향으로 감성을 발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대안문화를 개발하여 문화적 욕구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교인 개개인은 이 문제에 있어서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성숙한 인격자로서 오늘의 문화에 대한 성경적 대안으로서의 생활패턴을 성경에서 찾고 배워서 그것을 생활화하지 못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감신은 일찌기 한국의 전통문화와 기독교를 접목하려고 토착화 신학 내지 문화신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한국인의 심성과 문화와 전통 종교를 분석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왔다. 그러나 정치신학의 경우와 같이 문화신학이 기독교의 복음을 약화 내지 변질시키면서 기독교와 전통문화를 접목시키는 혼합주의적인 경향을 보임에 따라 기독교의 문화화 시도가 교회 성장을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변선환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와 홍정수 교수의 후현대주의적 상생신학은 기독교를 상대화시키고 타종교에 기독교적 규범성을 제공함으로써 타종교인들이 구태여 기독교로 개종할 필요를 신학적으로 제거해 버리는 오류를 범했다. 한편 보수 성향의 교회들은 기독교 복음을 수용하는 틀로서의 한국 문화와 한국인의 심성을 분석하는 일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 땅에 개신교가 들어온지 1세기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부정직(시험에서의 커닝과 정치와 사업의 관행으로서의 속임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민의 심성에 깊이 뿌리박힌 전통적 죄악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최근에 경배와 찬양 운동이 감성문화에 대응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나 보다 깊고 보다 넓은 차원에서 변하는 한국문화 속에 뚫고 들어가 한국문화를 기독교적으로 변화시키는 신학작업(요 17:14~19)이 아직도 강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 성장 정체/ 둔화와 기독교의 문화화를 연결해서 거론하는 것은 기독교의 사회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문화화하면 교회는 자동적으로 성장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기독교가 문화 속에 스며들어 유럽 문화는 기독교 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럽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1997년 4월 21~25일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최된 유럽 목회자 세미나 강사 중의 한 사람으로 가 있는 동안 목요일 저녁 그리스의 기독교 문화의 한 단편을 보게 되었다. 파스카라고 하는 부활절 축제 전야에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고 자동차 크락션을 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는 인사를 하는데 전인구의 98%나 되는 그리스 정교회 교인들이 평소에 교회에 나가는 비율은 극히 미미한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가 문화 속에 스며들었다고 하는 소위 기독교 문화권에서 여름 휴가철을 맞으면 교회가 철시를 할 정도인 것을 보면 기독교의 문화화가 문제의 유일한 해결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유럽의 기독교가 문화화했다고 하면서 교회는 텅텅 비는 것은 기독교의 문화화라는 것이 이기주의적인 쾌락을 정당화시키는 기독교적 면죄부 껍데기일 뿐 그 속에 기독교 복음의 알맹이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참된 기독교 복음은 그것을 수용하는 문화 속에 스며들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고후 10:5) 하는 의미에서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문화화를 여기서 거론하는 것이다.

 

3. 사회의 변화와 이에 대한 대처 실패

한국사회는 1970년대에는 군부독재와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정치적 경제적 대혼란(유신, 12.12 군사반란, 광주사태 등)을 겪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는 1970년대에 비해 비교적 개선된 환경을 맞게 되었고 1990년대에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혼란과 불안이 상당히 해소된 환경을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 만불 시대가 되어서 웬만한 가정이면 자가용 승용차가 있고 주택문제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1980년 중반까지의 군부독재가 문민정부의 상대적인 민주화로 바뀌면서 다양한 목소리들을 발하는 다원화 사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구가하면서 교회 외에서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능적인 대행물(여가산업의 발달, 유흥시설, 자가용, 텔레비전,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이데올로기, 다양한 종교들, 정신의학과 상담술의 발달 등)들이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변화 과정에서 상당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불신자들이 교회로 들어오지 않게 된 것이다.

1960~70년대의 정치 경제적 불안상황에서 교회가 심리적 안정과 함께 영혼과 범사와 건강의 축복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으며 산업화 도시화의 과정에서 고독한 군중이 된 사람들에게 정체성과 공동체성을 제공한 면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였으나, 그 이후 한국교회가 사회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교회성장의 둔화 내지 정체를 가져왔다는 분석이 있다. 한국교회는 사회가 1970~80년대의 보수/ 급진 대립 양상에서 합리화, 다양화 및 점진성의 시민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보수와 급진의 대립양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사회가 군사독재 하에서 정부의 소리 외에 다른 목소리들은 단죄되던 상황을 벗어나 사회 각계각층이 제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발하게 되고 이것이 신학과 종교의 다원화 현상과 맞물리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한국교회가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또한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도 별 수 없다는 식의 실망감 내지 불신감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앞서 통계에서 나타난 대로 개신교가 1990년대에 상류층이 교회로 많이 들어오는 현상을 보였는데, 사회의 부정 부패 비리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상류층 교인들이 연루되어 있는 모습이 불신사회에 드러나게 되었다.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통한 교회의 대사회적 공신력 상실은 비단 상류층 교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인 전체의 문제이다. 영업용 택시를 타고 복음을 전하면 택시 운전기사들이 "교회 나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나쁘다"는 식으로 열정적인 역복음을 전하는 경우를 흔히 체험한다. 사도행전에서 성장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행 2:47)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회의 지탄을 받는 모습이 되었다.

상류층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오면서 교회의 문턱이 높아지고 따라서 교회는 하층부의 정서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문제도 안게 되었다. 교회가 하층부의 정서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점은 노동자들과 농어민들과 도시빈민들 및 장애자들과 환자들과 매춘 여성들과 소년소녀 가장들 등 사회의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나눔과 돌봄의 사랑을 베푸는데 약했을 뿐 아니라, 소외계층에 대한 선교정책을 수립하지 못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소외계층에 대한 무관심과 무정책은 소외된 자들에게 "교회는 부자들이 가는 곳이고, 우리 같이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은 교회에 갈 수 없다"는 의식을 낳게 되었다. 초기의 한국교회는 애국과 애족의 요람이 되었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으며 병원, 학교, YMCA와 YWCA 등의 단체들을 통하여 여성해방운동과 청년 운동을 함으로써 국민 전체, 특히 하층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최근의 개신교는 소외된 자들이 교회 때문에도 소외감을 더 느끼게 만들게 된 것이다.

한편 개신교는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 같이 국가적인 혼란과 위기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국민적 염원을 담아 방향을 제시하는 사회적 지도자가 없었다. 가톨릭은 과거의 군사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왔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기 때문에 청년층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었으나, 개신교는 특별히 청년층의 사회정의 욕구를 수렴해서 방향을 잡아주는 향도 역할을 하지 못했다. 교회는 이와 아울러 인권유린에 대한 인권존중, 부정직에 대한 정직, 과소비와 사치에 대한 근검절약, 대립/ 반목에 대한 화해/ 협력, 독점과 불평등에 대한 분배와 평등, 억압과 소외에 대한 자유와 포용, 분단에 대한 통일 등의 가치관과 윤리를 불신사회에 전달해 주지 못했다. 교회는 사회 변화에 대한 대응과 미래 사회에로의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한국사회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급진적 진보적 교회들은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과 행동을 보여왔지만 기독교 복음의 알맹이(십자가, 부활, 성령 등)를 뺀 정치신학의 한계로 인하여 대다수의 교인들로부터 좌경의 의혹을 샀고 결국 한국사회에 기독교적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기장측 교회들이 정치 경제적인 이슈에 전향적인 관심을 보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못한 것이 이 점을 뒷받침한다. 한편 보수적 교회들은 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고 모든 사회적 이슈에 있어서 여권에 동조하는 인상을 줌으로 인하여 어용이라는 이미지와 사회 변화를 주도하기에 무기력하다는 이미지를 남겼다. 사회윤리를 배제하거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강조하지 못한 보수주의 신학의 한계가 한국사회에 대한 이런 소극적인 태도와 행동의 저변에 깔려 있다. 보수주의 신학은 하늘에서 인류의 역사 속으로 인간으로 성육하셔서 인간 구원작업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성육신 모델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사실상 수구주의적이고 탈세주의적인 수도원식 면모를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변화에 교회가 올바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개신교가 사회에 대한 예언자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은 물론 신정국가라는 사회에 대해서라지만, 어쨌건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철저한 회개를 촉구했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외국인 등 사회적인 소외자들에 대한 관심, 독재와 독점을 자행하는 사회 지도자들(왕들 포함)에 대한 비판과 회개 촉구, 안식년과 희년을 통한 노예와 빚진 자들에 대한 회복 등 하나님의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말씀이 구약 전체에 척추처럼 세워져 있고 피처럼 퍼져 있다(출 23:6~9,10; 레 19:33~34; 25:1~55; 신10:18~19; 15:12~18 등). 십계명의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가 사회적인 관심사를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제5~10계명은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라는 제1~4계명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참된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길은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적극적으로 편만하게 구현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이런 원리가 구약 예언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었고 예수님과 사도들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사 5:7~8).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암 5:15).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 1:27). 이런 구절들은 성경의 단편적인 사상을 말하는 구절들이 아니라 성경의 대원리(온세상의 창조자/ 통치자 하나님의 정의)를 지적하는 구절들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이런 의미에서 사회에 맛 잃은 소금과 광채 잃은 빛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사회화를 거론하는 것은 기독교가 정치 경제의 장으로 스며들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한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가톨릭의 경우 그 교세가 1991년에 비해 1994년에 인구대비 0.2% 성장한 것은 가톨릭이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믿을만한 발언권을 가졌다는 점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 한국교회 성장이 정체/둔화된 현상은 기독교를 한국의 정치경제적 맥락에 적극적으로 접목하려고 노력해왔던 기장측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1994년과 1995년에 각기 전년 대비 0.99% 성장하여 인구 증가율에도 못미치는 사실상의 마이너스 성장)이 앞서 통계에서 드러났다. 가톨릭과 기장측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가톨릭은 김수한 추기경 같은 국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통한 대사회적 영향이 컸지만 기장측은 그에 필적할만한 지도자를 통한 대중적 영향이 그다지 크지 못했다는 점과 기장의 문익환 목사와 같이 급진적인 지도자에 대해서는 국민 대중이 불안을 느꼈다는 점이 가톨릭의 교회성장과 기장의 성장둔화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회화 자체가 교회성장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며 성장둔화를 억제하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서구 기독교를 보면 알 수 있다. 서구 기독교는 철저하게 사회화되었지만 서구의 교세는 약화될 대로 약화되어 있다. 독일은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 대다수의 국민들이 소득세의 8~9%의 종교세를 내고 있을 정도이고 정치 경제가 한국보다 훨씬 더 기독교화(하나님의 정의 구현) 되었지만 재적 2천~4천명의 교회의 주일 예배 출석수가 노인 세대를 중심으로 20~50명에 이르는 처참한 지경이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사회화 자체가 1990년 한국교회의 성장 정체/ 둔화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뜻에서 기독교의 사회화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제아무리 사회화되어도 기독교 복음의 알맹이를 상실하면 그런 기독교는 생명을 상실한 기독교이기 때문에 교세가 성장할 수가 없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는 누룩과 같이 세상에 스며드는 본질(마 13:33)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세상에 들어가서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면에서 위에서 지적한 약점들을 보완해야 한다는 뜻에서 기독교의 사회화가 교회 성장 정체/둔화 문제 분석에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4. 교회의 구조와 전통과 분열의 문제

위에서 교회 성장의 정체/둔화 문제를 문화 및 사회와의 관계에서 다루었거니와 여기서는 그 문제를 교회 내적 문제, 즉 교회의 전통과 구조와 분열 문제와 연결시켜 다루고자 한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한국의 사회와 문화는 계속 변화하고 있는데 교회는 이런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런 변화에 대응해서 교회의 전통과 구조를 조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교회 성장이 정체 내지 둔화된 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젊은 세대는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교회가 보조를 맞출 것을 요구하지만 교회의 지도자층은 대체적으로 이런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옛 것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고집을 세우기 때문에 교회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구조상 교회의 모든 주요사안에 대해 당회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젊은 세대의 요구가 교회의 활동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당회의 최종결정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당회가 모든 교인들의 여론을 겸허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교회에서 장로가 되는 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벼슬을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교회 지도체제가 사실상 신분화와 계층화로 연결되어 있어서 지도체제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 중심의 구조 때문에 평신도들이 목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하는 면이 있고, 남성 중심의 구조 때문에 여성들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구조가 갈등과 분열과 투쟁을 유발하는 구조로 되어 있고 형식과 체면과 명분에 집착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도 교회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회의 이러한 구조 때문에 평신도와 여성들을 깨워 사역에 동참시키는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교회들의 경우 익명의 교인들이 증가하는 현상을 빚고 있다. 주일 대예배에 나와서 설교만 듣고 축도가 끝나기 바쁘게 교회를 떠나는 무참여, 무활동, 무헌신의 교인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각기 제나름대로의 은사를 가지고 그것을 교회를 세우는 데에 활용하는 은사활용 공동체가 되어야 할 교회가 은사은닉 공동체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지구촌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개교회 중심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한국 교회 전체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교회들은 대부분 형식적으로는 노회와 총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사역과 재정에 있어서 연대감을 살리지 못한 채 사실상의 개교회 주의에 빠져있다. 이러한 개교회 중심주의는 한국의 초대교회가 고난당하고 소외된 민초들의 울타리와 상담자와 피난처가 된 것과는 반대로 집단이기주의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개교회들이 총동원 전도주일을 통해서 성장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는 틀을 통해서 사실상의 교인쟁탈을 하는 면이 있고, 교회 재정을 자기 교회의 건물을 확장하고 교육관을 건립/ 확장하고 기도원과 공원묘지를 마련하는 등 개교회 교세확장에 거의 다 사용하고 있다.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면 교회당 건물과 교육관이 필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교인수 증가가 교회 건물 확장--교육관 확장--기도원 마련--공원묘지 구입 등으로 거의 정해진 틀에 따른 집단이기적인 과정을 밟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people)이 재산(property)보다 더 중요하다. 사실 교회는 건물 확장보다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 즉 추구자들(seekers)을 성도들(saints)로, 소비자들(consumers)을 공헌자들(contributors)로, 멤버들(members)을 사역자들(ministers)로, 청중(audience)을 군대(army)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교회의 집단이기주의가 일부 대형교회가 제2, 제3의 지점 교회(비데오 설교)를 건립하는 현상으로까지 확산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요즈음 교인들이 생명력 있는 설교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일부 유력한 목회자들의 설교를 선호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일부 대형교회들이 이런 식의 자기 교세 확장을 위한 대기업 식의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은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전반적인 성장에 결코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다.

한국교회의 개교회 중심주의적 구조는 한국교회가 선교를 개교회의 명예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하면서 체계적 전략적 선교를 하지 못하고, 장학금도 자기 교회 출신들에게만 줌으로써 참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놓쳐 버리고, 개교회 밖의 선교단체들을 지원하는 일에 인색하며, 학원 복음화와 군복음화에 등한시하는 결과를 빚었다. 한국교회가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재수학원, 대학교 등 "민족복음화의 온상"에 대한 복음화 정책과 그것을 위한 인력과 재정의 지원을 아끼지 말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면이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한국의 건강한 청년들이면 거의 다 통과하는 군대라는 황금어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불교에 비해 개신교 군목들의 군복음화에 대한 개교회들의 지원이 약해서 지금은 군복음화의 주도권을 불교와 가톨릭에 내어준 상황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1960년대의 폭발적 성장을 지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그나마 한창 성장하면서 개교회의 현재적 성장에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미래 한국교회 전체의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일에 등한시한 결과가 1990년대 성장둔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근시안적인 개교회 중심의 성장집착이 일부 개교회들을 대교회로 만들기는 하였지만 거시안적인 한국교회의 성장둔화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개혁교회는 특별히 말씀과 성례와 연대성과 십자가 신학과 역동적 성령 등을 전통적으로 강조해 왔는데, 최근에 토착화신학 민중신학 및 이단종파운동 확산과 교회 성장 신학이 유행하면서 교회의 전통보다는 그때 그때마다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따른 교회 성장 방법을 민첩하게 적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교회 성장 신학이 잠자는 교회들을 깨워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성장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사용하도록 한 점이 있는 반면 지나치게 인위적인 성장 추구의 결과로 교세가 성장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되는 현상을 빚어왔다. 교회성장신학이 양적 "기업적 성장"을 교회의 궁극적 목표인양 부추기는 인상을 주었고 교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적 성장을 추구하다 보니 교회가 일시적으로 외적인 성장을 했다가 결국 교회의 전통적인 정체성이 약화되면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기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제자훈련, 교사훈련, 제직훈련 등을 통해 평신도들을 많이 깨운 것이 사실이고, 평신도들이 작은 목자들로 교회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교회들은 마이너스 성장 추세를 타고 있는 한국교계에서 오히려 플러스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개혁교회의 전통을 살리면서도 찬양과 예배와 설교와 봉사에 있어서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교회들은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아직도 구조적 취약점 개선에 소극적이고, 교회 성장 테크닉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줄로 생각하여 유행하는 성장방법의 파도를 타다가 오히려 교회가 역성장 하는 결과를 맞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 성장둔화의 원인 중에는 위와 같이 교회의 구조와 전통의 문제도 있지만, 앞서 구조문제와 관련하여 조금 언급된 대로 교회 분열의 문제도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개교회도 주로 목회자와 장로들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많고 한국교회 전체도 부끄럽기 짝이 없을 정도의 분열상을 드러내고 있다. 1993년 기독교교문사가 발간한 <기독교연감>에 의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건 교단만 58개로 등록되어 있으나, 1994년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와 관련되어 일간신문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105개나 된다. 1907년에 조직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1950년에 고신측이 새로운 교단으로 세워졌고, 1953년에 기장측이 새로운 교단으로 세워졌을 뿐 아니라, 1959년에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되는 등 분열을 계속하다가 최근에 이렇게 105개로 분열되어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교회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며 교회의 대사회적인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교회분열은 지도자들 및 평신도들 간의 남보다 더 인정받고 존경받으려는 이기적인 야망에서 일어나는 반목과 질시의 결과, 즉 교회 안에 사랑이 결핍된 결과로 나타난다. 한국교회에서 새신자의 평균 41%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는데, 그 이유로 불명이 45%, 낙심이 25%, 이사가 21%, 타교로 이적이 7%로 되어 있다. 1990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비종교인들 중에 과거에 종교를 가졌던 사람들이 45.5%인데, 그 중에 과거의 종교가 개신교인 사람들이 74.5%(불교 23.2%, 가톨릭 10.0%)로서 개신교로 개종했다가 중도이탈 하는 비율이 타종교에 비해 훨씬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개신교 신자들은 타종교인들에 비해 정기적으로 모이는 회수가 잦아서 공동체 생활을 자주 체험하게 되는데 여기서 지도자와 교인들과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새신자들이 이렇게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이유 중에 기존 교인들의 사랑과 관심의 결여가 큰 이유로 보인다. 기존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대형교회로 수평이동하는 요인들 중에 중소교회의 교회 내분(주로 목회자로 장로 사이)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교회가 갈등 내지는 분열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 실증을 느낀 일반 교우들이 주변 중대형 교회에 익명의 교인으로 이동하는 수평이동 현상이 한국교회에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5. 교회 지도력의 결핍

이상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가 대외적으로는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대내적으로는 전통을 적실성 있게 살리고 구조를 신축성 있게 조정하지 못하고 추한 분열상을 드러낸 탓으로 교회 성장이 정체 내지 둔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을 했거니와, 이런 현상의 배후에 부적절한 지도자가 있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실패한 곳마다 부적절한 지도력이 있었다" (John R. Mott). "나는 일년에 30~40교회를 방문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목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Fred Smith).

오늘날 한국 교회 평신도들 뿐 아니라 지도자들의 문제들 중에 물량주의, 배금주의, 편협주의, 기회주의, 적당주의, 성공주의, 외형치장주의 등 세속화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물량적 성공을 편집광적으로 추구하다가 보니 자신의 인격과 윤리와 영성 관리에 등한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가짜 박사학위라도 돈으로 사온 다음 박사학위 취득 감사예배까지 드리는 일도 있을 정도로 목회자의 윤리의식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교회 지도자에게 적절한 운동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일부 목회자들이 건강과 운동에 지나친 시간과 재정을 투입하는 것, 선교시찰이나 국제회의 (최고의 호텔에서) 명목으로 지나친 해외여행을 하는 것, 극히 일부의 지도자들이 도시 교회의 과도한 보조를 받아 고급 승용차를 운행하는 것, 회장이 최고로 대우받는 세상에서 교회 지도자가 회장으로 군림하는 것, 총회장이 되기 위해서 금품을 사용하는 것 등이 성공문화와 레저문화에 세속화된 교회 지도자의 단적인 모습이다.

지도자의 세속화 문제는 지도자의 윤리의식 약화 내지 상실과 연결되어 있다. 교회 지도자들이 물질관계와 이성관계가 깨끗하지 못하고 정직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심지어 사회의 대형사건이 터질 때마다 상당수 연루되어 있다는 점들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면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성이 실추되어 있다. 한국갤럽이 1993년 5월 제주도를 뺀 전국의 20세 이상 성인 남녀 1,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직업인들에 대한 윤리수준 평가" 조사분석 결과를 보면 정직성과 윤리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은 비율은 천주교 신부가 52.7%, 텔레비전 기자 45.0%, 스님 38.2%, 신문기자 37.4%, 교사 31.2%, 목사 30.9%, 교수 30.1%, 판사 25.9%, 공무원 22.7%, 검사 21.5%, 은행원 21.3%, 의사 19.5%, 군인(고급장교) 17.6%, 변호사 16.9%, 약사 15.9%, 경찰 14.9%, 고급 공무원 9.3%, 대기업 사장/경영자 9.0%, 국회의원 7.9% 순으로 나타났다.

세속화된 지도자의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는 앞서 지적한 대로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지혜롭게 대응할 만한 목회정책과 비전이 없는 지도자의 문제도 심각하다. 21세기를 몇년 앞두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지도자 문제도 역시 심각하다. 사회와 문화의 변화 및 미래에 대한 대안적 비전이 없다가 보니 현재 사회와 교회와 교단의 문제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고, 문제들을 개혁하려는 의식이 약할 수밖에 없다. 비전이 없는 지도자에 대해서 교회 청년들은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결국 그런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성장제일주의에 매여 있거나 성장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 지도자는 교회를 성장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 성장을 무의식 중에 방해할 수 있다. 교회성장 제일주의에 빠진 지도자는 "꿩 잡는 게 매다"는 속담대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이웃 교회 교인들을 빼앗아오든 목회를 시장경제원리에 따른 소비자 중심의 경영으로 바꾸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수족관들의 고기들을 이리저리 옮겨 놓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낚는 어부들이 되도록 부르신 것이다." 한편 대형교회라고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지도자, 교회성장 자체에 대해서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지도자는 교회를 결코 성장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런 부정적 지도자에게 지도받는 교인들은 교회가 콱 막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것을 능력 있게 전하지 못하는 “비성경적 설교의 병리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한국 교회 강단의 문제는 목회자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측면만 살리고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고 불편해 하는 측면(책망과 바로 잡음)을 약화시킴으로써 소위 “은혜, 은혜” 하면서 양날 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현저하게 약화시켜 놓게 된 것이다. 설교자가 용서와 위로와 평안과 축복과 번영과 은혜를 설교의 주요 주제로 삼고 죄를 지적하고 회개와 결단과 헌신을 촉구하는 것은 설교의 주제에서 상당히 배제하는 실정이다. 셜교자가 삶의 적용되지 않는 추상적인 설교를 하는 것과 복음적인 내용을 설교에서 빼고 자유주의적인 설교를 하는 것도 교회 성장 약화의 한 요인이 된다. 또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은혜롭게, 재미있게 전해야만 은혜를 받는다는 회중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설교의 요령을 습득하고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을 동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키게 되었다. 지도자의 설교가 유흥문화에 영향을 받아 “신학유흥”("theotainment)의 일부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이런 태도를 가진 설교자가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의 궤도를 벗어나 울리고 웃기는 방향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고 본교회 목사님과 사전 협의 하에 돈을 우려내기 위해 교인들을 회유하고 협박하는 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경향이 있다. 지도자들이 외국의 성경교육 자료들과 설교집들과 컴퓨터로 제공하는 설교와 교육 자료들을 그냥 사용하면서 스스로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한국교회는 설교와 강의도 많이 하고 성경공부와 세미나도 많이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 같으나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는, “말씀충만” 중의 말씀고갈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 지도자의 설교에서 예언자적 면모가 약화된 것은 한국교회에서 권징이 거의 사라진 것과 직결되어 있다. 교회 지도자가 본인이 모범이 되지못하고 말로 책망을 못하는 판이니 심각한 범죄를 한 교인들을 권징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지도자가 교인들의 잘못된 언행에 대해 “노”(No)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은 결국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권위를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도자가 결국 교인들을 놓칠까봐 교인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지 못한 결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게 되고 권위를 상실한 지도자에게 지도를 받는 바른 교인들은 탄식하게 되고 그 밑에서 지도 받으려는 교인들이 적어지니 한국교회의 교인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자의 문제는 결국 이런 지도자들을 배출한 배출기관과 직결되어 있다. 1996년 8월 26일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가 주최한 영성수련회에 참석한 예장합동측 목회자 4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신학교육의 문제에 대해 군소신학교 난립으로 인한 신학교육의 질적 저하를 지적한 응답이 76.8% (복수응답가), 신학이론과 목회현장의 괴리를 지적한 응답이 48.8%, 수요를 초과한 과도한 신학생수를 지적한 응답이 45.8%, 기타 뒤떨어진 신학교의 교과과정, 자격을 갖춘 전문교수의 부족 등이 지적되었다.

이와 같이 교단의 목회자 수급계획과는 무관하게 정치적인 야심을 펴는 수단으로 신학교들을 무분별하게 만들고 무자격 교수들을 세워서 무자격 목회자들을 양산하는 문제는 한국 교회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1991년 교육부로부터 인가된 신학교는 50개교이고, 무인가 신학교는 270여 개나 되며 해마다 신학교에서 졸업하는 6,500명 중 인가된 신학교 졸업생은 불과 1,500명으로 나타나 있다. 무인가 신학교 중에 “총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학교만도 4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나 있다. 무인가 신학교들의 난립은 형편없는 교수진과 부실한 교육시설과 무계획한 학사운영 등으로 무자격 목회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무자격 목회자의 양산으로 교회수는 늘어났지만 신자수는 줄어드는 기현상을 빚게 되었다. 한국교회 전체를 놓고 볼 때 1990년 총 35,869개 교회가 1992년에는 42,589개 교회로 교회수에 있어서 18.7%의 성장을 보였으나 교인수에 있어서 같은 기간에 성장이 둔화되거나 정체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제대로 된 신학교에 정식 논문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들이 가르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신학과 목회현장을 접목시키지 못하고 인격과 영성이 부족한 신학자들이 신학생들의 인격과 영성을 제대로 연마시키지 못하는 교육을 함으로써 그럴듯한 교과과정에 따라 그럴듯한 교육을 시키고 그럴듯한 학위를 주지만 현실적으로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을 양산하게 되는 경우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성경과 기독교 사상과 역사, 그리고 목회와 사회 현장, 지구촌 선교 등에 대한 고도의 학문을 정립하지 못하는 보수주의 신학도 문제이지만, 학문의 이름으로 성경무오를 부인하고 성경의 주요교리들을 부인하거나 약화시키는 급진신학은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유럽 교회들이 지금처럼 쇠퇴하게 된 데는 자유주의 신학의 부정적 역할이 컸다는 것은 사실인데, 한국의 신학교들이 최근에 급진적 정치신학(민중, 해방, 여성신학)과 자유주의적 문화신학과 종교다원주의 및 후현대주의에 근거한 기독교를 상대화하는 신학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의 젊은 지도자들이 기독교 복음에 대한 감격과 기독교의 정체성 사수에 대한 의지 결핍증을 드러내고 있다.

 

6. 영성의 부족

한국 교회 성장 정체/둔화의 원인으로 지도력의 결핍 문제는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영성 결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이로니칼한 것은 지도자를 배출하는 신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그 수가 엄청나게 많고 매해 졸업하는 목회자 후보생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지도력 결핍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이 요즈음 상당히 강조되고, 영성신학이 신학교의 주요과목으로 개설되고 영성훈련이 목회자 재교육 훈련의 주요 부분으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영성 부족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 성장 신학자들은 오순절 은사운동을 하는 교단들과 교회들이 부흥한다는 이론을 발표했고 1990년 이전에 이런 운동을 하는 교단들과 교회들이 성장한 것이 사실이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런 운동을 하는 교단들과 교회들도 교회 성장이 둔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은사주의 운동이 영성을 함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은사운동이 능력과 은사에 집착하면서 인격과 생활과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강조하지 못한 점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시지만, 은사운동에서는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과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측면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하고 은사의 화끈한 능력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초기에는 그런 것이 먹혀들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난 오늘에 와서는 인격과 생활이 약화된 은사운동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교회의 역성장이라는 결과를 내게 괸 것이다.

전도와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가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최근에 전도와 선교를 종래 보다 강조할 뿐 아니라 전도운동과 선교사 파송이 교회들의 유행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국내외적으로 전하는 것은 마치 운동해서 몸이 튼튼해지는 것과 같아서 신자와 교회를 튼튼하게 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처럼 전도와 선교가 유행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반대로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가? 그것은 위에서 지적한 은사운동의 문제점처럼 전도/선교 운동이 진정한 영성을 수반하지 못하거나 진정한 영성에 약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성이 약하면 은사운동과 전도/선교 운동을 해도 그것이 소기의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영성이 결핍되면 인격과 생활의 거룩성이 상실되고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주님 없어도 살 수 있고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의 간절성이 약화되고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헌신과 사랑이 식어지고 성경을 가르치나 죽은 정통을 만들어 버리고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이단과 사이비의 침투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영성이 약화되면 신자의 신자다운 모습이 약화되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문화적인 이유로 교회에 다니거나 주요절기에만 교회에 참석하거나 교회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지만 정서적 가족적 혹은 전통상의 이유로 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와 연관을 맺지 않으면서 자신이 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많아지게 된다. 진정한 영성이 약화되면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 즉 교회의 정체성이 전반적으로 약화된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세속적인 성공과 번영에 집착하여 대사회, 대문화, 대세계적인 복음전파와 생활변화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진정한 영성이 약화되면 교회의 지도자 역시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기보다 단순히 성경적인 정보를 전달하며 각종 교육자료를 자기 스스로 씨름하여 소화시키기보다 인기 있는 교회의 자료를 그대로 모방하여 시행하게 됨으로써 자신도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하지 못하고 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지 못한다. 영성이 없으면 심지어 성경 강해 설교도 냉랭하고 생명력이 없다. “학력이 높은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식, 즉 유능하고 유식하고 무기력하다(able, learned, and powerless)."

그렇다면 진정한 영성이란 무엇인가? 브루스 니콜스(Bruce Nicholls)는 기독교적 영성의 4요소를, (1)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직접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기도/명상/회개, (2)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일상생활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개인적인 삶에의 적용, (3) 하나님의 백성과의 연합과 교제 속에서 살려는 부단한 노력으로서의 교회적 삶에 적용, (4) “영성을 선교로 가시화 되고 선교는 참된 영성에 의해 유발되고 유지된다”는 말에 나타난 대로 세속사회와의 관계에서의 적용에서 찾아내었다. 여기서 영성의 4대 요소가 보여주는 대로 진정한 영성이란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과의 생동적인 생명관계가 영혼과 인격과 삶의 모든 분야에 체험적 실존적 각성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오성춘 교수는 영성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우고 하나님의 계획으로 가득 채워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영성은 삶이다”고 했다. 오성춘 교수는 다른 곳에서 기독교 영성은 삼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여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 경험을 역사현장에서 현장화 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영성은 이렇게 개인과 사회의 삶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건덕의 능력도 동반하고 국내외적으로 기독교 복음을 퍼뜨리는 파급의 능력도 동반한다.

한국교회가 참된 영성을 진작시키지 못한 것은 한편으로 민중신학과 토착화 신학이 혼합주의적 영성을 주장하고 교육한 방면과 다른 한편으로 보수주의 교회들이 사회와 문화와 민족과 지구촌과 미래라는 넓은 틀을 놓치고 개인의 중생과 성결 생활과 교회 부흥 등으로 축소된 영성을 가르친 방면으로 나타났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는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을 민중을 위한 메시아라고 하고, 민중신학자 김용복 교수도 역시 동학운동을 한국의 메시아 운동이라고 하고 3.1운동을 불교와 동학교 기독교의 메시아 전통들의 연합운동으로 보며 천도교의 최제우를 “최메시아” 내지 “최예수”라고까지 한다. 토착화 신학자 변선환 교수는 세계 종교 속에 숨어 있는 보편적/우주적 그리스도를 신학화하여 포괄적인 기독론을 만들자고 하며, 기독교가 타종교들과 동일한 위치에서 태양을 도는 위성들과 같이 “신중심적”이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화와 우상화를 버리자고 제의했다. 김경재 교수도 “깊은 좌선의 삼매경에서 홀연히 깨우쳐 청청한 참된 자기, 진인...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던 자기를 알게 된다”고 함으로써 불교적 자기실현을 통한 범신론적 영성개념을 전개했다.

민중신학과 토착화 신학이 영성을 종교다원주의적 혹은 범신록적 혼합주의로 끌고 간 것과는 달리 보수주의 교회들은 개인화된 영성 내지 기도원적 영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물론 최근의 영성신학과 영성에 대한 관심이 전인적 총포괄적 본질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지만, 아직 이런 총괄적 관심이 보수주의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신학과 문화신학이 영성을 한국의 사회와 문화와 접목시키려는 것은 좋았으나 기독교의 복음으로 사회와 문화를 구속하는(redeem) 뱡향을 잡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의 재래사상과 종교에 기독교를 두들겨 맞추는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기독교로 이끌기보다 기독교에서 떠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수주의 교회들의 비사회적/비문화적 영성은 영성을 개인과 교회에만 가둠으로써 교인들을 답답하게 만들었고 불신자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게 함으로써 그것이 결과적으로 교세 성장의 둔화로 나타나게 만든 것이다.

 

7. 교회의 일반적인 병리현상과 1990년대 성장 둔화의 핵심 원인

이상에서 한국교회 성장 정체/둔화 원인들을 사회의 변화에 대한 대응 부족, 문화의 변화에 대한 대응 부족, 교회 내부의 전통과 구조와 분열의 문제, 교회 지도자의 문제, 영성의 부족 등으로 정리했거니와 사실 이상의 내용들은 현재 한국교회의 병리현상을 포괄적으로 개관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위에서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교회가 성장이 둔화 내지 정체되거나 심지어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요인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는가를 꼬집어 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상의 병리현상을 놓고 그런 병리현상이 1960년대와 1970년대 및 1980년대에 한국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한국교회가 성장하던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에도 그런 현상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하필 1990년에 와서 교회성장이 둔화 내지 정체되었는가?

사람의 신체적 건강을 두고 한번 생각해 보라. 하루 아침에 건강에 위기를 맞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평소에 겉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속에 알게 모르게 병이 있으면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것이 커져서 결국 건강의 위기상황을 몰고 오게 된다. 우리 나라의 경제성장을 생각해 보라. 우리 나라의 경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경이로운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하는 과정에 소위 거품 성장의 요인들을 안고 성장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 고도의 성장에서 거품이 빠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경제의 위기를 느끼고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 폭발적인 성장에서부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비교적 높은 성장의 과정에서 이미 한국교회는 후에 드러날 병리적 요인들 내지 거품 요인들을 안고 있었다. 그러한 요인들이 1990년대에 와서 마이너스 성장 현상을 유발한 것이다. 비유를 바꾸어 말한다면 과거 한국교회의 고도의 성장은 성숙의 뒷받침이 약한 사춘기적 성장이었다. 한국교회는 몸은 어른인데 정신은 어린아이 상태로 성장한 것이다. 1990년대 한국교회는 어른-아이들(adult children)의 미숙한 현상들이 표출되면서 성장추세가 둔화 내지 정체된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병리요인들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사야 시대에 악행과 억압과 뇌물과 사치와 탈취와 폭행 등 온갖 사회적인 문제들이 나타났는데, 하나님은 그 문제를 뿌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자신을 버린 데서 찾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 1:4).

한국교회는 또한 신명기 6장 10-15절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기 직전에 모세를 통하여 주는 엄숙한 경고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에 이만한 정치적 경제적 안정과 풍요를 주시고 세계 교회사상 찾아보기 힘든 교회 성장을 주신 것은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난 점이 많아서라 아니라 (물론 신앙의 선조들이 일제시대에 순교의 피를 흘리고 다른 나라에 없었던 새벽기도를 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헌신한 것 등 하나님을 특별히 섬겼던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한 많은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우리 나라를 세계 복음화의 도구로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축복을 받은 우리 민족이 그 축복을 누리면서 본문의 경고대로 “조심하여...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겨”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마치 우리의 공로로 받은 댓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다른 나라 교회들 앞에 한국 교회의 성장을 자랑하고 과시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조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길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호 13:6). 한국교회는 1985년 개신교 선교 100주년에 한국교회의 경이로운 성장을 자축하면서 세계에 과시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통해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세계 앞에 자랑스럽게 전시했다. 한국교회는 말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축복에 묻혀 하나님을 망각하고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너무 일찍 자축 삼페인을 터뜨린 것이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배불리 먹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려 가는 과정은 교회의 외부적인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활동들이 외형화 형식화 대량화 전시화의 함정에 걸려들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마 22:37-37-40) “다함”의 차원을 떠난 것이 문제이다. 주님의 분석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 (마 15:8). 에베소 교회와 같이 정통교리와 정통행위는 다소 있으나 첫사랑이 식어져 (계 2:1-7) 가고 있으며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계3:14-22)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첫사랑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나 주님이 토하여 낼 정도로 미지근한 상태에 빠져 있는 정도는 아니나 바야흐로 그런 상태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위에서 영성을 언급했지만 사실 한국교회의 성장 정체/둔화의 문제는 그 뿌리가 하나님과의 생동적 생명관계의 약화에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영성은 사회와 문화와 교회 내부의 전통과 구조 및 지도력 등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과 혈관처럼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의 핵심으로서의 영성이다. 이런 영성이 약화되면 성경이 100% 오류가 없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이 약화되어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지는 않아도 그것에 대해 너그럽게 용인하는 태도를 갖게 되고, 정통신학을 해도 그것을 죽은 정통으로 만들며, 교회의 모든 활동을 형식화 외식화 하게 되고, 교회의 사회문화적인 책임에 있어서 무관심이나 파행적 참여의 양극의 오류를 범하게 되고, 지도자로서의 외적 권위는 강조하면서 인격과 생활과 말씀의 권위는 상실하게 된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교회 성장의 정체나 둔화에 직면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에 있어서 가슴의 맥박이 약화되어 가고 있는 상태에 있다. 심장의 고동이 박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체현상에 대한 대책

위에서 199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정체 현상에 대한 분석을 제시할 때에 문화 변화에 이에 대한 대응 실패, 사회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 실패, 교회 내적 문제 (구조, 전통, 분열), 교회 지도력의 결핍, 영성의 부족 등의 순서로 제시했다. 필자가 이런 순서로 제시한 데는 이유가 있다. 교회성장 둔화/정체에 대한 교회 외적 요인으로부터 출발하여 교회 내적 요인으로, 그리고 교외 내적 요인에서 특별히 지도자 문제와 영성 문제로 제시 순서를 잡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 성장 둔화/정체현상에 대한 분석을 할 때에 멀리 있는 문제로부터 가까이 있는 문제로 접근하되 마지막에는 문제의 핵심으로 접근해 들어간 것이다.

이제 정체현상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으니 그것에 대한 대책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대책 제시는 문제의 핵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한국교회 성장 둔화/정체 문제의 핵심이 영성 결핍의 문제이므로 이 문제를 영성과 성숙 함양으로 해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교회 지도력 강화로, 거기서 교회다운 교회 형성과 이것에 근거한 교회 성장학 재정립,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대응, 변화하는 문화에 대한 대응, 미래에 대한 대응 순으로, 그 대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문화 변화와 대응 실패
사회 변화와 대응 실패
교회의 구조/전통/분열
교회 지도력의 결핍
영성의 부족
영성과 성숙
교회 지도력 강화
교회다운 교회 형성
교회성장학 재정립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
변화하는 문화에 대응
21세기 미래사회에 대한 대응

 

1. 영성과 성숙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의 언약에 항상 신실하신 분이시다. 언약이행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시되 (갈 3:14) 아브라함의 후손들에 포함된 우리 나라 교회에도 복음과 교회성장을 축복으로 주셨다. 그런데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장축복을 누린 한국교회가 그 축복 때문에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려가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겸허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온갖 죄악들을 범하면서 자기 왕국을 확장하는 데 사용한 죄악을 회개하고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 성장 정체 문제 해결을 위해서 호세아 5:14-6:3의 말씀에서 출발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 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 없으리라 내가 내 속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조금씩 멀리 떠나가는 상황에서 위에서 지적한 죄들을 구체적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을 실존적으로 아는 데서부터 문제를 풀어 가면 하나님께서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복을 다시 받게 될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구함으로써 새언약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생동적인 교제를 회복한 후 21세기에 문화와 사회가 아무리 바뀌고 풍요로와 지더라도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개인과 교회의 자원을 활용하는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인격에 성령의 열매를 맺고(갈 5:22-23) 대인관계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점진적 통상충만(엡 5:18-6:9)과 확신과 봉사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획기적 비상충만(주로 사도행전)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영성이라고 하면 얼른 성령을 떠올리는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게 하시고 (고전 13:4-7)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는 일을 하신다(고전 12-14장). 성령은 인격을 성숙하게 하시고 공동체를 견고하게 하신다. 한국교회에서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들이 한동안 성장하다가 요즈음 성장을 멈춘 것은 성령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인격과 생활의 변화를 화끈한 은사들보다 더 강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신앙의 병리현상으로서의 무속화, 율법화, 세속화, 형식화, 세상적 축복개념 등 은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롬 8:9; 갈 5:16) 삶의 성숙으로 고쳐져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숙하지 못한 점은 번영의 복음(죄용서, 건강, 사업형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고통의 복음도 있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밝혀주지 못한 점으로도 드러났다. 히브리서 11장은 고통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의 삶도 신앙생활이라고 하지만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고통 중에 그대로 살아가거나 순교한 자들의 삶도 신앙생활(히 11:32-40)이라고 한다. 후자는 믿음이 너무 좋아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다. 중국 등 박해받는 지역에 있는 교회는 고통의 복음을 가르친다. 번영의 복음만을 설교하면 고통이 올 때 생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한국교회는 교인들이 받아들이기 좋아하는 번영의 복음만을 편중되게 가르쳐 왔으나 고통의 복음도 가르쳐 신자들의 성숙을 도모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성령에 순종하는 삶의 성숙은 성경공부에도 나타나야 한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지만 죄에 대한 아픔과 눈물을 쏟는 회개와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헌신이 없을 경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범했던 오류를 범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 전문가들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성경공부를 많이 하여 성경에 대한 정보적 지식을 많이 가진다고 해서 삶이 성숙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되 성령께서 성경대로 살도록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에 순종할 때에 신앙과 생활이 성숙해지는 것이다 (빌 2:12-13).

한국교회가 성장 정체/둔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격과 생활의 성숙 뿐 아니라 확신과 능력의 봉사를 하기 위해서 앞서 말한 성령의 비상충만을 체험해야 한다. 성령의 비상충만을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의 전유물로 생각하거나 그것을 무조건 비판하는 교회는 성장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오순절 교단만이 아니라 모든 교단과 교파의 신자들이 성령의 생동적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 특별히 설교자들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는 설교는 인본주의적인 설교가 되는 것을 기억하고 불같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하고 성경에 있는 대로 성령의 내적 확신과 신유 은사 등 은사들을 인정하고 활용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성령에 의한 개인과 공동체의 성숙과 아울러 건전한 기도원과 은사운동을 장려해야 한다.

은사운동을 장려할 때 주의할 점은 앞서 말한 성숙의 관점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인격과 삶의 성숙이 없는 은사운동이 교회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1996년 8월 26일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가 주최한 영성수련회에 참석한 예장합동측 목회자 4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은사활용이 교회성장에 필수적이라는 응답은 15.6%에 불과했고 약간의 도움을 준다는 응답이 53%이나 일시적으로는 양적 성장에 도움을 주나 장기적으로는 저해요소라는 응답이 19% 정도 나왔다. 성령에 순종하여 일어난 진정한 성장이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데, 사도행전이 말하는 양적 성장은 바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이 불어난 것이었다. 변종길 박사는 사도행전이 말하는 교회성장의 일반원리를 제시할 때 (1) 교회성장의 질적 측면과 양적 측면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2) 교회성장은 복음전파에 종속된다는 것, (3) 교회성장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결과라는 것, (4) 교회의 성결유지가 교회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 (5) 합당한 제도와 규례는 교회성장을 촉진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변 박사는 이어서 교회성장을 위한 인간의 준비와 노력으로는 (1)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2) 전혀 기도에 힘쓰고, (3) 기회 있는 대로 말씀을 전파하되, (4)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삶을 살았다고 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에 의한 교회성장은 신앙과 인격과 삶의 성숙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영성과 성숙을 말할 때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참된 영성은 성경대로의 영성이라는 점이다. 서구교회 쇠퇴의 원인 중에 신앙의 뿌리가 되는 성경을 허물어 버린 신학을 우선적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허문 신학에서 잘못된 선교개념(전도 소홀하면서 지나친 사회 참여)이 나오고 이에 따라 교회는 본래적 사명을 상실하고 성직자는 세속화된 것이다. 미국에서도 성경을 영감 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학교들과 교회들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지만,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복음주의 교단들은 성장했다. 1965-75년 남침례교회는 1백만명 이상 증가했고, 하나님의 교회(클리블랜드)는 67% 성장했으며, 하나님의 성회는 33% 성장했고 나사렛 교회는 29% 성장했다. 한마디로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의 교회 개척을 무디게 해서 교회성장을 둔화시켰지만 복음주의 신학을 교회성장을 촉진시킨 것이다.

김영한 박사는 목회자가 주일 5부 예배 드리는 것이 소원이라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이 커질 때에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세포분열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국교회는 성장지향에서 성숙지향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한국교회는 성장지향을 포기할 필요가 없고 포기해서도 안된다. 한국교회는 성숙이 없는 외형 성장 일변도에서 하나님과의 생동적 관계에 근거한 성숙을 겸한 성장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사춘기 기간에 배운 성장의 아픔을 극복하고 성숙한 성장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2. 교회 지도력의 함양

앞에서 제시한 대로 한국교회 성장 둔화/정체 현상의 한 요인으로 지적된 교회의 지도력 결핍 문제는 결국 교회 지도자가 영성과 인격에 바탕을 둔 지도력 개발에 노력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 김영한 박사는 목회자는 신앙인격, 자신이 애쓰는 목회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목회,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한 윤리성 제고, 영성개발,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 전달, 설교와 일치하는 삶 면에서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고 했다. 김 박사의 제안 중에 자신이 애쓰는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중심의 목회라는 부분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중심으로 하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면에서 애를 쓰는 목회라는 관점, 즉 양자택일(either/or)이 아니라 양자포함(both/and)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목회자가 자신의 지도력을 스스로 키워나가야 할 부분들로 잘 지적되었다.

교회 지도자는 특별히 경제적 여유에 따른 세속화를 경계해야 한다. 독일에서는 국민들이 소득세 및 재산세의 8-9%를 종교세로 납부하는데, 개신교의 종교세는 연 100억 마르크(5조2천8백억원) 정도이고 가톨릭의 종교세를 포함하면 종교세 총액은 연 170억 마르크 정도라고 한다. 독일의 교인들은 유아세례와 결혼식과 자신의 장례식---이렇게 평생 3회 교회에 출석하는 예가 허다하지만 헌금은 평생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가깝지만 교회는 멀다는 말이 나온다. 독일 교회는 이렇게 국민들의 종교세로 운영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가 얘를 쓰든 안쓰든 생활에 지장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독일 목회자들로 안일과 세속에 쉽게 빠지게 하는 요인이라고 한다. 김승연 목사는 유럽의 교회가 국교화 하지 않고 독일의 경우 종교세만 없었더라도 교회가 지금과 같이 쇠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독일교회 지도자들이 안일과 세속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독일 교회들을 다시 부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승연 목사는 “독일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그들의 교회를 20년만 한국교회 목사들에게 맡기면 독일교회는 분명히 부흥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가 안일하면 교회가 쇠퇴하지만 지도자가 깨어 있으면 교회를 성장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독일 교회 지도자들의 경우를 거울로 삼아 과거에 비해 경제적 여유를 누리게 된 오늘의 상황에서 자신이 세속적인 여가/향락문화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중표 목사는 목회자가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 교회를 키워 부와 영예를 얻겠다는 사고방식을 끊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와 함께 죽고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을 누리는 면에서 “별세”해야 교회가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쾌락을 사랑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기 때문에 (딤전 5:6) 교회 지도자가 일락에 자신을 던지면 교회를 활력 있게 지도할 수 없게 된다.

목회자는 항상 말씀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설교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평소의 삶이 하나님과 성도들을 향해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현실 속에 생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지평과 현실 생활의 지평을 녹여서 하나 되게 하여야 한다. 텍사스 타일러에 있는 급성장하는 그린 에이커 침례교회의 폴 파웰(Paul W. Powell) 목사는 설교에 대해서 적절한 말을 했다. “설교는 항상 목사의 가장 큰 기회요 책임이다. 설교하는 것은 교회 생활의 기압계이다. 설교가 동적이고 힘이 있을 때 그 교회는 강해진다. 설교가 김빠진 것처럼 된다면 교회는 약하다. 나는 설교가 교회성장을 좌우한다는 과도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설교에 주의를 기울이라. 잘 준비되고 성경에 근거를 두며 잘 예를 들어 힘있게 전달될 수 있도록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옥한흠 목사도 땅에 떨어진 신뢰감 회복을 위해 목회자가 깨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교회의 성장은 목회자가 설교와 행정과 기도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나 깨끗하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요즈음 유행하는 프로그램 공해를 탈피하기 위해 영성을 회복하고, 남북통일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옥한흠 목사는 특별히 목회자가 평신도들을 예배군중으로 만들지 말고 평신도들과 함께 사역해야 한다는 면에서도 의식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대형교회 설교단의 연기자와 구경하는 관객이 되면 안된다. 회중이 모두 사역에 참여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수퍼스타로서 원맨 쇼를 할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활성화하여 팀사역을 해야 한다. 사역팀을 구성할 때는 인맥이나 돈보다는 그 분야의 전문적인 실력이 있는 자들로 구성해야 한다. 한 사람이 설교, 상담, 교육, 행정, 전도, 사회봉사 등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사역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목회자는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신자들을 사역자들로 훈련시키는 훈련자(enabler)와 촉진자(facilitator)가 되어야 한다 (엡 4:11-16).

피터 와그너는 교회성장을 위해서 목회자가 치러야 할 대가를 (1) 성장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하나님, 교인들, 임원들 등에 대해서), (2)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 (3) 평신도 및 다른 스텝들과 함께 일하는 것, (4) 자신이 돌볼 수 없는 교인을 갖는 것 (200명까지는 돌볼 수 있으나 2백명이 넘어가면 목회자가 목장 경영자가 되어야), (5) 성장을 저해하는 신학(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신학, 성장이 아니라 성실이 대성공이라는 신학, 자유주의 신학)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와그너의 이런 지적은 뒤에서 교회성장신학을 다룰 때에 논의가 되겠지만 그의 핵심은 목회자가 교회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사역을 같이하게 하면서도 겸손하고 강력한 지도자로서 책임을 감당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지도자가 충분히 헌신하기만 하면 교회가 성장한다는 신화를 깨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화에 의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지도자가 헌신이 부족한 데 있기 때문에 지도자가 교리적으로 순수한 설교를 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헌신하면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사실 지도자가 더 이상 헌신할 수 없을 정도로 헌신하는 교회인데도 성장하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지도자가 헌신하는 데도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은 지도자의 연장(skill)이 무디어 있기 때문이다. “무딘 철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전 10:10). 릭 워랜은 자신의 새들백 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에 주요 항공사들의 전문 조종사들이 여러 명 출석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무리 오랜 비행경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기술을 늘이기 위해서 매해 2회씩의 재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릭 워랜 목사가 그들에게 왜 재훈련이 필요하냐고 물으니 그들은 “사람들의 생명이 우리가 얼마나 유능하냐(how skilled we are)에 달려 있습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종사도 사람들의 육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연장의 날을 간다면 하물며 영혼의 생명을 맡은 목회자들은 얼마나 더 날을 갈아야 하겠는가. 설교를 잘 하고 교육을 잘 하고 조직을 잘 하며 관리를 잘 하고, 평신도들을 사역자들로 잘 훈련시키는 등 목회를 “잘 하는” 기술(skill)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가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신학교 교육수준이 향상되어야 한다. 신학교들이 비전과 교과과정과 교수진과 도서관과 시설 등 교육환경 면에서 자체 정비를 하여 교육의 질을 높이도록 노력하고 기준 미달 학교는 컨소시엄 형태로 서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신학교 교수들이 인격과 영성 면에서 성숙한 자들로서 학생들을 성숙한 지도자들로 길러야 하고 강의실과 목회현장의 괴리를 좁히는 방향으로 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3. 교회다운 교회상 정립

앞에서 교회성장 둔화/정체의 요인 중에 교회의 구조와 전통과 분열 문제를 거론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다운 교회상이 정립되어야 한다. 배가 존재하는 이유는 항구에 안전하게 정박해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폭풍우 치는 바다로 나가기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묘비에는 “30세에 죽고 60세에 묻히다”라고 써야 할 것이라고 조지 쇼(George B. Show)가 말했는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항구에 정박되어 죽어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성장이 둔화/정체된 것이므로 성장 정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장정체 현상을 대증요법으로 치료할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개혁주의 교회 전통을 다시 다지고 비효율적 구조를 갱신하는 방식으로 치료해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대로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고 성례의 의미를 재인식하며 말씀과 성례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을 회복하며 무엇보다 십자가 신학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자기 정체성 확립에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체성은 성경대로의 정체성으로서 세속주의로도 치우치지 말고 신비주의로도 치우치지 않으며 자유주의 이단과 신비주의 이단을 경계하고 인본주의와 편의주의와 물량주의의 누룩을 제거한 교회의 참모습을 말한다. 옥한흠 목사는 한국 교회는 “은과 금은 많은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할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어 버린 것 같다고 했다. 옥 목사는 따라서 교회는 허수(虛數)를 실수(實數)로, 허세는 실세로, 허상을 실상으로---“너나 나나 매한가지”라는 사회적 이미지에서 삶이 곧 신앙이라는 실상으로---바꾸어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들의 공동체로서의 본질을 강화해야 한다. 현대 교인들은 흔히 도시적 사고방식(“도시의 사람들은 사람이 꽉 찬 큰 강당이 있는 교회에 가곤 하는데, 그것은 눈에 띄지 않으며 관계를 맺지 않고 지내기 위해서이다.”)을 가지고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교인들을 공동체 속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

교회는 레이투르기아(예배), 케리그마(선포), 코이노니아(친교), 디다케(교육), 디아코니아(봉사)가 있는 사랑방공동체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사랑방 공동체를 회복 발전시키기 위해서 평신도들의 의식개혁이 필요하다. 오래 다닌 사람, 돈을 많이 낸 사람, 창립 멤버 등이 교회는 자기 것이라는 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아울러 대형교회 출석하는 교인들의 우월의식, 교회 안의 지역감정, 교회 안의 파벌, 목회자와 장로의 반목과 갈등, 교회간 교단간 교파간 단죄와 비협조 등을 극복하고 주님의 보편적인 한 교회로 모든 교파 모든 신자들이 사역 공동체로 협력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개교회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농어촌 벽지 교회, 북한교회 및 지구촌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인들은 앞서 말한 대로 자칫 큰 강당이 있는 교회에 가면서 자신을 숨겨버리는 도시적 사고방식에 따라 움직인다.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설보다 사람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수와 건물에 있어서 교회의 대형화가 자칫 가진 자들의 교회를 만들기 쉽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는 명목상의 신자들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서구처럼 교인들의 재복음화(re-evangelization)가 필요한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또한 기복신앙 등 근시안적 태도를 시정해야 한다. 1996년 8월 26일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가 주최한 영성수련회에 참석한 예장합동측 목회자 4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기복신앙이 교회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 67.3%는 양적 성장에 도움은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저해요소라는 부정적인 답을 하였고 교회성장에 크게 기여한다는 답은 겨우 3%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복신앙의 문제점은 번영신학적 바탕과 개인주의적 반사회적인 시각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반사회적 기복신앙을 극복하고 불신사회를 향한 복음화와 사회봉사의 손을 뻗어야 한다. 전주 안디옥 교회는 교회 예산의 60%를 전도와 선교에 쓴다고 하느데, 성장하는 개교회의 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피터 와그너는 건전한 교회의 7대 표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목회자와 교회성장의 촉매작용을 하는 목회자의 영적 지도력, (2) 성장을 위해 모든 영적 은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고 활용하고 있는 평신도, (3) 교인들의 요구와 기대에 맞는 모든 것을 제공할 만큼 큰 교회, (4) 축제로서의 집회와 소규모 모임 사이의 역동적이고 적절한 균형, (5) 동질구성 단위로 이루어진 회중, (6) 제자를 만드는 것을 입증하는, 자기교회에 맞는 전도방법, (7) 성경적인 우선순위 (복음화가 문화명령보다 우선).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는 상태에서 복음화와 사회봉사의 본질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정훈택 교수는 한국교회는 주기적으로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위와 같은 정체성을 명확하게 알려야 한다고 했다.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고 약화된 세례의식을 강화하며 (체면 치례로 세례를 받거나 주지 말고 교인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세례규칙 강화) 믿음을 계속 확인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규칙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규칙 강화가 신바리새주의로 가지 않도록 영성과 성숙을 전제로 한 교회의 본질의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4. 교회 성장학의 정립

한국교회와 교회성장학은 서로 영향을 미쳐왔다. 교회성장학자들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교회성장학 정립에 자료로 사용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성장이 교회성장학에 영향을 미치고 또 교회성장학이 한국교회에 소개됨으로써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앞서 교회성장 둔화/정체 분석에서 제시한 대로 교회성장학이 그 자체가 교회성장을 저해한 면보다는 그것이 교회 지도자들의 의식과 구체적인 목회전략 수립에 있어서 한국교회에 성장제일주의를 결과적으로 부추김으로써 장기적인 면에서 한국교회의 성장둔화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것은 교회성장학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성장학이 교회의 본질에 맞게 바른 방향으로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건전한 교회성장 신학은 반드시 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성장학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미국의 도날드 맥가브란과 한국의 명성훈 박사의 교회성장학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아써 글래서(Arthur F.Glasser)는 교회성장학의 아버지 도날드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을 설명할 때 “그는 그리스도께 충성을 고백하며 성경의 귀중성에 복종한다고 하면서 전도와 선교에 대해 관심이 없는 자들을 참지 못한다”고 했다. 맥가브란은 이렇게 성경의 진리와 전도에 초점을 두고 교회성장신학을 전개했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은 (1)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 (2) 교회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불신자들로 회개하도록 부르는 것을 최고의 대치할 수 없는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 (3) 교회는 잃어버리는 자들을 찾는 복음전도를 위한 구조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 (4) 교회는 전도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 (5) 전도할 때는 반응하는 곳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는 것 (마 9:13; 눅 9:5), (6) 동일집단을 특성화해서 특성을 규정한 후에는 그것이 토착화되기까지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명성훈 박사는 정체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새로운 목회전략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영혼에 대한 사랑이라는 목회동기와 소명의식을 분명히 하라. (2) 비전을 새롭게 하고 믿음을 증진시키라. 비전이 크면 하나님의 능력도 크게 받는다. 산을 옮기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믿음의 책들을 읽고 교회를 성장시킨 생생한 체험담들을 들어야 한다.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또 성령의 능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이른바 want, must, can mentality로 무장되어야 한다.” (3) 성령의 역사를 환영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라. 1990년 전세계 6백만개 교회 중에서 5만명 이상 출석하는 교회 6개가 모두 성령충만을 기조로 삼는 오순절 교회이다. 매일 하루 아침에 10시간 이상 기도해서 3년 안에 10배의 성장을 기록한 교회가 있다. (4) 목회철학을 재정비하라. 교회가 장례식장이나 박물관이 되어서는 안되고 인생의 고장을 고쳐주는 서비스센타와 영육간의 질병을 고쳐주는 병원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즐거움의 전당이 되어야 한다.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업이 상품을 차별화 하듯 교회도 비신자들을 적극 받아들이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5병2어 기적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교회는 사람들의 욕구(felt need, real need)를 분석하고 문화적으로 적실하게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5)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라. 과대계획/과소계획(overplan, underplan)이 아니라 재정, 시설, 스텝, 후원그룹 면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워야 한다. (6) 리더십을 개발하라.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역이요 리더십은 사람들에 향한 사역인데 목회자는 정직성, 일을 잘 하는 능력, 비전, 감화력, 은사, 평신도 훈련능력을 키워야 한다. (7) 구역조직을 활성화하라. 구역은 교회 속의 교회요, 세포단위로서 복제와 재생산이 되어야 하고, 평신도 전체를 사역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8) 결정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새신자를 잡으라. 그 지역 불신자 사회를 향해 융단폭격 하고, 앞문으로 들어와 뒷문으로 나가는 자들이 많으니 새신자 전담 특공대를 조직하여야 한다., (9) 역동적인 예배를 개발하라. 문제의식에서 하나님 의식으로 전환되는 예배, 하나님을 향한 축제와 함께 인간의 죄를 향한 통회가 이루어지는 예배를 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목회자 자신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목회대상에 맞는 예배 스타일을 개발하고, 효과적인 예배팀을 조직해야 한다. (10) 재생산하는 교회, 주는 교회가 되라. 제2의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 종의 생명체로 세포분열 하며, 초대형교회들은 지교회로 떼어 나누어 주어야 한다. 교회를 개척한 이후 3년 이내에 새 교회 개척을 계획해야 한다.

위와 같은 교회성장학이 전도를 교회의 필수적인 과제로 강조하고 이를 위한 믿음, 비전, 기도, 목회철학, 지도력, 조직과 훈련, 교회의 세포분열적 성장을 강조한 것은 교회성장에 도움을 준 면이다. 그러나 교회성장학이 비판되어온 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전의 교회성장학은 수단과 목적을 바꾸었다는 비판이 강하다. 성장 자체가 교회의 궁극적 목표가 되다가 보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의 외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교회성장학이 수단과 목적을 바꾸었다는 비판은 구체적으로 여러가지 형태로 제기되어 있고, 이런 비판에 대해서 교회성장학 쪽에서의 반응도 나와 있다.

교회성장학에 대해서 성경이 숫적인 성장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피터 와그너는 롬 16:25-26의 전도명령으로 답변했다. 주님은 양떼를 먹이라고 했지 숫자를 세라고 하시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도 그는 주의 깊은 목동은 양떼들이 모두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숫자를 센다고 답변하면서 신앙은 고백하면서 생활변화가 없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으나 중생한 자들의 숫자는 중요하며 (눅 15:7) 이것은 삶과 죽음의 게임이며 순간과 영원의 게임이라고 했다. 회심의 숫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사람들의 숫자이다. 릭 워랜(Rick Warren)은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한다고 하면서 사도행전의 건강한 교회(행 2:42-47)는 “날마다”, 즉 365일 회심의 성장을 거듭했다고 지적했다.

교회성장학이 숫자를 강조하다가 보니 결국 숫자숭배(numerolatry)로 나갔고, 이것은 통계적 성공철학(르네 빠디야)과 교회성장의 우상화(W. 마이클슨)와 연결된다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 피터 와그너는 이런 비판이 주로 문화명령을 강조하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면서 교회성장학이 문화명령을 전도명령만큼 강조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와그너는 값싼 은혜와 상업화의 비판은 받아들이면서도 숫자와 통계 사용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교회성장학에 대해서 교회관이 하나님의 나라 중심이거나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지나치게 교회 중심이라는 비판이 있는데 이런 비판에 대해 피터 와그너는 사실 그런 점이 있었으며 하나님 나라 성장이 궁극적인 과제이며 교회성장은 전도명령에 따른 그 이전 단계의 과제라는 비판자의 견해를 수용한다고 했다. 또한 와그너는 교회성장 운동이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무시하면 안된다는 비판도 수용하면서도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전도 사명을 약화시키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교회성장학이 교파의 교세확장과 인격적 개인을 소외시키는 성장,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성장과 선교사역의 결과를 양적 개념으로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있다. 이런 비판은 교회성장학에서는 교회의 사회에 대한 책임이 성장기준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이것은 결국 성공과 능률을 숭배하는 미국문화의 소산(사무엘 에스코바)이라는 비판과 맞물려 있다. 이런 비판에 대해 피터 와그너는 이제까지 교회 성장학에 이런 면이 있었던 것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본질적인 속성이 무엇이든 잴 수 있다(measurability)는 미국인의 속성이고, 미국적 가치관이 어느 문화의 가치관보다 우월하다는 민족중심주의가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와그너는 동시에 양으로 모든 것을 재는 경향이 양을 무조건 무시하는 경향보다 무조건 낫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교회성장신학자들 중에 양질의 교회(high-quality, 질적 성장)를 부인할 사람은 없다. 교회의 수준 평가가 어렵고 무슨 기준인가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양적 평가가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교회성장운동이 전도명령에 치중하는 이유는 왕께 대한 복종이라는 하나님 나라 원리에 의한 것으로서 실제로 결과를 가져오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실용주의적인 것이다. 바울은 복음전파의 동기 문제를 말하면서도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것으로 기뻐한다고 했다 (빌 1:12-18). 느헤매야도 실용주의적으로 성벽을 건축했고 예수님도 세상의 죄 때문에 죽으러 오신 목표를 십자가를 통해서 달성하신 면에서 실용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교회성장학에 대해 성공보다 성실 혹은 충성(고전 4:2)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피터 와그너는 이런 비판에 대해 신약의 청지기직에 대한 일관적인 견해는 성공과 성실이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답변했다. 달란트 비유에서 2달란트와 5달란트를 남긴 종들이 충성과 성실 면에서 칭찬을 받았다. 달란트 비유애서 충성은 하나님이 주신 자원(달란트)을 가지고 최대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릭 워랜은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요 15:16),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골 1:10)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며 (요 15:8), 주님은 열매없는 나무를 가장 심하게 저주하셨으며 (마 21:19),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않아서 그 특권을 상실했다(마 21:43)는 점을 지적하면서 교회의 숫적인 성장도 열매 중의 하나라고 했다 (골 1:6). 릭 워랜은 또한 주님에게 참으로 충성하는 자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하게 되어 있다고 했다. “지상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는 무슨 다른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목적을 이루지 않는 교회이다.”

교회성장학이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들고 신자들로 하여금 제자들로서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을 뒷전으로 미루게 했다는 비판이 있다. 피터 와그너는 이런 비판이 복음의 사회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자들에게서 나오는데 일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이 값싼 은혜를 반대하면서 터무니없이 비싼 은혜를 주장하게 함으로써 영적 착취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 복음전도를 어떤 정치적 견해를 선전하는 유용한 도구로 삼음으로써 복음을 이데올로기로 만들 수 있다는 점, 복음전도와 제자화는 불가분리라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 28:19-20).

문화사회적 동질집단이 교회성장을 가져온다는 수용적 동질집단원리가 성경적인가 하는 비판이 있는데 피터 와그너는 이런 비판에 대해 동질집단원리는 전도명령을 성취하는 도구일 뿐 그것이 교회성장의 목표가 아니라고 했다. 전호진 교수도 교회성장은 우선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높은 지역에 우선해야 한다고 하면서 고신이 기독교가 어려운 경남 지역에 집중함으로써 성장을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 맥가브란의 원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싶어한다”는 현상학적 원리를 기술한 것이지 꼭 그래야 한다는 규범적인 것이 아니고, (2) 맥가브란의 진술은 복음전도에 관한 원리이지 양육에 관한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는 동질집단원리가 (1) 인종차별이나 계급제도를 은연 중에 승인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고, (2) 복음전도에 효과적인 이 원리가 문화명령 수행에 있어서 이미 세상에 만연한 차별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인정했다. 이것을 해소하는 방법은 그리스도 안의 연합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회성장이 하나님 나라 성장인가 하는 비판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피터 와그너는 교회성장의 4대 영역을 지적함으로써 답변했다. (1) 숫자적인 성장 (회심에 의한 성장 + 자녀생산을 통한 성장 + 수평이동을 통한 성장), (2) 유기적인 성장, (3) 관념적인 성장, (4) 성육신적인 성장--- 이중에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방면은 교회가 빈곤, 착취, 기아, 범죄 및 절망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해방행위의 촉매자가 되는 성육신적 성장 부분이라는 것이다.

교회성장학이 비판받는 또다른 부분은 교회성장학이 시장경제(church marketing)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지 바나(George Barna)가 말하는 마케팅은 “상품과 용역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유통되게 하는 비지니스 활동을 하되 소비자의 필요와 욕구 및 생산자의 목표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소비 지향적이고, 섹스에 열광하며, 자기 자신에 몰두해 있고,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며, 과학 기술은 고도로 발전되어 있고, 심성이 경박하며, 오락 중심적인 이 문화에 그리스도를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명망있는 교회 전문가들은...시장에서처럼 갖가지 상품으로 진열된 선반을 만들고, 목표가 되는 청중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그들이 느끼는 다양한 필요들을 충족시켜 주고, 일반 기업체들이 그러는 것처럼 탁월함을 추구하며, 활동적이고 품위있는 지도자를 세우며, 적극적으로 낙관적이고 흥미진진한 교회 분위기를 조성할 것을 촉구하는 전략들을 제시한다.” 더글라스 웹스터는 이런 것이 쳐치 마케팅이라고 하면서 그 단적인 예로 “파워 팀”(The Power Team)이라는 전도단을 소개한다. 300파운드(135킬로) 이상 나가는 6명의 청년들이 매일 총 8천 칼로리의 다섯끼 식사를 하고 이마로 얼음을 깨뜨리며, 등으로 냉장고를 져올리며, 맨손으로 야구 방망이를 부셔뜨리고, 수갑을 끊는 등 신체를 이용한 여러가지 묘기를 선사한 다음 이런 종류의 힘, 인생에서 승리하는 힘을 원한다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라는 식으로 전도한다는 것이다. 더글라스 웹스터는 쳐치 마케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판과 대안을 제시한다.

"히브리서는 삶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맞추라고 강력한 신학적인 호소를 함으로써 전통 교회의 문제를 교정시킨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공동체가 오직 그리스도께만 꾸준히 헌신함으로써 영적으로 새롭게 될 것을 촉구한다. 이것을 교회성장 마케팅 전문가들이 전통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들과 비교해 보라. 그들은 전통교회의 영적 허약함보다는 전통교회가 시장정보에 둔감하다는 것을 비난한다. 그들은 전통교회의 문제를 죽은 정통신앙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과거에 얾매여 사는 세대 탓으로 돌린다. 그들은 영적 갱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의 변화를 촉구한다."

교회성장학이 마케팅 원리에 따라 사람들의 필요(felt needs)를 충족시켜 줄 것을 주장할 때에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제쳐놓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전제한 상태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성장학은 교회성장에 모든 것을 맞춘 결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마케팅의 기본원리와 통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셨으나 (오병이어의 예) 육신적인 필요에만 멈추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참된 만나와 음료이신 예수님 자신을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육신적 필요에만 관심을 두는 군중을 책망하시면서 영생의 도리를 제시하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 6:16-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3).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고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갔을 때 예수님은 12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질문하셨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고 반응했다 (요 6:66-68).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고 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대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데서 멈추지 말고 주님이 보시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욕구, 영생에의 욕구를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충족시켜 주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성장학자들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5병2어 기적 후에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물러가는 것을 감수할 각오와 사람들의 죄악을 과감하게 지적하는 주님의 영생의 말씀에 집중할 각오가 있는가?

더글라스 웹스터는 처치 마케팅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과정에서 매우 비싼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 사람들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정서적 물질적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세계선교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도외시하게 될 것이다. (2) 종교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다 보니 교회의 주인이 소비자인가, 그리스도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3) 복음은 그저 인기있는 어떤 것 정도로 가치가 격하되고 신앙공동체는 종교적 쇼핑 센타에 가깝게 될 것이다. (4) 교회를 욕망의 횡포에 대한 볼모로 만들 것이다. 찰스 콜슨이 말한 대로 “교회는 더이상 진리의 창고나 도덕적 권위의 원천으로 여겨지지 않고 그저 영적으로 한 바탕 해 보기 위해서 가는 곳”이 될 것이다.

교회성장학에 대한 이상과 같은 비판들은 교회성장학이 교회성장이 교회다운 교회로서의 균형을 잡기보다 교회의 어느 한 면을 편향되게 강조하는 데 대한 것들이다. 1980년대에 한 가정으로 시작하여 1995년에 주일 출석 1만명 교회로 급성장한 새들백 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의 릭 워랜(Rick Warren) 목사는 지속적인 교회성장은 다 차원적 균형에서 온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참된 교회성장에 대한 나의 정의는 5대 국면을 가지고 있다. 모든 교회는 교제를 통하여 더 따뜻하게, 제자도를 통하여 더 깊게, 예배를 통하여 더 강하게, 사역을 통하여 더 넓게, 전도를 통하여 더 크게 자랄 필요가 있다.” "교회건강과 교회성장에 단 하나의 열쇠란 없고 많은 열쇠들이 있다. 교회는 한 가지 일을 하도록 소명을 받지 않았고 많은 일들을 하도록 소명을 받았다. 균형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나의 스탭에게 ‘균형을 잡은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갈 것이다’는 것이 제9복이라고 말한다.“ 릭 워랜은 교회가 어느 한 목적이 아니라 교회의 총체적 목적에 균형을 맞추어 나갈 때에 진정한 건강과 성장이 온다고 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신학을 재정립할 때에 교회가 그 총체적인 목적을 균형있게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기존 교회성장학의 장점들을 그대로 살리되 (1) 교회성장 둔화요인을 분석할 때 지적된 현재 한국교회의 병리현상을 치료하는 방향을 잡을 뿐 아니라, (2) 과거 한국교회의 성장에서 거품을 뺀 부분들을 성장교훈으로 삼고, (3) 현재도 성장하는 교회들을 연구 검토하며, (4) 바로 위에서 지적된 비판들을 정당하게 받아 해소하며, (5) 한국교회가 현재 전국민의 70여%에 달하는 불신자들을 상대로 개척교회를 할 수 있는 개척전략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개척교회 목회전략도 함께 정립되어야 할 현실적인 이유로 매년 280여 신학교육 기관에서 11,000여명의 졸업생들이 배출되는데 기성교회가 이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개척을 해야 하는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이 생계유지 수단으로 개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국민의 70여 퍼센트나 되는 불신자들을 상대한 복음화 전략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한경철 교수는 개척교회가 안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신학교육이 교회 유지에 집중되어 있어서 확장 파급 성장에 약하다. (2) 교회개척의 성경적 근거 이해와 신앙적 자세가 결핍되어 있다. (3) 해당지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4) 사회적 상황적 요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5) 개척교회 교인들에게 긍지를 주지 못한다. (6) 개척 사역자가 앉아서 교인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 (7) 지역토양에 맞지 않는 목회도 문제다. (8) 개척교회에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이 전무하다. (9) 개척교회가 너무 많다. (10) 교회 간의 수평이동이 심하다. (11) 지역사회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12) 준비없이 개척을 시작한다. 한국교회를 정체의 늪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교회성장학이 개척교회가 안되는 이런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고 비복음화된 70여%의 국민들을 복음화 하는 구체적인 전도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성장학에 대해서 지나치게 비판적인 것은 오히려 교회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특별히 “하나님의 선교” 입장에서 복음화 자체를 약화시키는 신학은 경계되어야 한다. 또한 성공보다 충성이 더 중요하다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대형교회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작은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상에 매여 달란트를 남기지 못하는 자신의 고뇌를 달래고 사실상 충성하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사상은 한국교회를 정체의 늪으로 더 깊이 몰고가는 것이므로 경계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신학이 기여한 부분들을 인정하고 살리며 교회다운 교회의 본질 확립에 약했던 부분들은 개선하는 방향에서 교회의 본질적이고 총체적 성장, 성숙을 겸한 성장 면에서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5. 사회 변화에 대한 대응

한국교회는 건전한 교회성장학을 재정립하여 성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속사회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바로 감당할 수 있는가?

한국교회는 우선 교회가 어두운 사회를 밝히고 맛 잃은 사회에 맛을 줄 정도의 윤리성을 가지고 교회의 대사회적 공신력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1996년 8월 26일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가 주최한 영성수련회에 참석한 예장합동측 목회자 4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변화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교회가 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할 일은 응답자의 56.5%가 기독교적 윤리적 실천강조를 지적했다. 한국교회는 부패한 사회에 윤리적인 청량제 역할을 감당하면서 이런 기초 위에 한국사회에 정신적인 지도이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또한 정치경제적 안정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덜 느끼는 문제에 대한 대응해야 한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수행해 왔던 정치적 불안상황에서 심리적 안정 기능, 경제적 박탈감 상황에서 보상의 기능, 도시화 산업화 정보화에 따른 공동체 상실에서의 연대감 제공 기능이 여가산업과 이데올로기, 사회적 결사단체들의 발달, 정신의학과 상담술의 발달, 취미와 오락 집단의 발달, 스포츠의 활성화 등 교회의 기능을 대치할만한 기능적 대행물에 빼앗기는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오히려 교회가 민주화, 평등화, 복지화 실현에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참된 공동체의 회복, 안정과 휴식, 긴장과 갈등의 해소, 소외감과 박탈감 해소, 사회에 대한 관심의 회복과 사회 참여 등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교회의 대사회적 기능을 전향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교회간 교파간의 분열과 적대시를 청산하고 상호 협력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민족화해의 선도자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정부 정당 노사 학원 남북 갈등과 반목의 사회에 화해의 복음을 전하고 특히 북한의 기아문제 해결에 앞장설 뿐 아니라 통일후 북한교회 재건과 북한 복음화 개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대사회적 공신력을 상실하고 대사회적 책임을 기피함으로써 청년층을 잃은 것을 생각하면서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 이성교제, 결론, 직장, 사회개혁, 생태계 파괴와 환경문제, 부의 분배 문제, 이데올로기 문제, 노사관계 문제, 남북 통일에 대한 문제 등에 청년들의 사회참여를 위한 방향과 지침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의 대사회적 소극성과 폐쇄성에 실망한 청년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한국교회를 보면 청년의 봉사비중은 높은 반면 예산 지원은 전체 예산의 1% 미만인데, 교회는 청년들의 교육과 활동에 상당한 인력과 재정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대사회적 봉사기능을 거론할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우선 사회봉사(social service)에 치중하는 교회가 사회행동(social action)에 치중하는 교회보다 새로운 신자들을 더 많이 끌여들었다는 점을 교회는 명심해야 한다. 피터 와그너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주님은 제자 파송시 사회봉사를 명령하셨으나 사회행동을 구체적으로 명령하신 적이 없다. (2) 사회행동에 치중하는 교회들이 사회 정치적인 해방과 구원(예: 모택동의 업적을 주님의 구속사역에 비김)을 구별하지 못했다. (3) 지역교회가 사회봉사를 할 수는 있으나 사회행동의 지역교회의 차원을 넘어서는 더 큰 구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가 집단적인 사회행동을 통해 사회참여를 하려고 할 때 어느 정당이나 단체의 어떤 정책에 따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경우 교인들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회참여 방향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분쟁과 분열에 휘말릴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참여 과정에서 구원을 민중해방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 것은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자들이 죄, 심판, 구원을 가르치지 않고 이 땅에서 삶을 개선시키는 것을 추구하도록 가르치는 데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참여를 말할 때에 또하나 주의할 점은 정치적인 구조만 바꾸어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구조결정론적 사고방식의 문제이다. 손봉호 교수는 구조결정론적 사고방식이 한국 사람들의 책임의식을 망가뜨려 놓았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이 길가에 침을 뱉고 버스를 탈 때 줄을 서지 않는 것을 줄을 서지 않는 구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구조결정론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개인의 선행과 윤리적인 선함을 부르짖는 것은 부르조아적 개인주의적 낭만주의적 감상주의적 사고구조라며 비판하는데 이것은 막스주의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고 할 때 서구교회의 예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서구교회는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쳤지만 과거에 가졌던 부흥의 불길은 사실상 사라졌다. 독일의 경우 교회의 사회참여로 교회는 점점 작아지고 사회구제기관은 점점 더 비대해졌다. 사회참여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본래적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무려 80만명의 유급직원을 가진 구제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개신교의 디아코니세 베르크(Diakonisches Werk)와 가톨릭의 카리타스(Caritas)라는 구제봉사기구는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두번째로 많은 직원을 거느린 거대한 고용주인데, 교회는 텅텅 비어 가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 인도 남부 마르자푸르에서 선교활동을 벌인 맥밀란(A.W. McMillan), 로버트 애쉬랜드(Robert Ashland), 존 그랜트(John Grant)는 카마르라는 하류계층에서 복음에 대한 갈증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카마르인들은 힌두교에 실증이 나서 집단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되기를 원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 선교사들이 모여 논의한 끝에 카마르인들은 비천한 사회적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려는 세속적 동기에서 기독교로 돌아오려고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교사들은 그 결론에 따라 학교를 세워 카마르인들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진료소를 세워 진료행위를 하고 신용협동조합을 세워 빚을 지지 않게 해 주었다. 이런 사회적인 필요성을 다 채워준 후에 카마르인들이 순수하게 영적인 동기로 기독교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던 선교사들은 카마르인들이 사회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에는 뜻밖에 복음에 대해 마음의 문이 닫히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봉사와 사회참여를 한다고 할 때 복음화를 등한시하는 것은 이런 쓰라린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6. 문화 변화에 대한 대응

한국교회는 문화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한국교회는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 준 하나님 망각형 향락문화를 치유해야 한다. 유럽교회가 휴가를 가다가도 예배시간이 되면 예배를 드리고 가도록 하기 위하여 고속도로와 국도변에 그 지역교회의 예배시간과 예배장소 안내하는 팻말을 내걸고, 여름에는 지중해나 아드리아해로, 겨울에는 알프스 스키장으로 대형버스를 이동식 교회로 개조하여 사용하는 데도 여가/향락 문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이제는 아예 휴가 철에 한 달 정도 교회문을 걸어 잠그고 평신도들과 목회자가 모두 휴가를 떠나는 교회가 점차 는다고 한다. 평소에 교인들이 나오지 않아 교회당을 유지할 수 없어서 런던의 전통적인 교회들이 팔려 술집이나 수퍼마켓이나 누드 화실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도 이미 여가/향락 문화는 교인들의 교회출석과 신앙생활에 심각한 위험요소로 등장하였기 때문에 소위 전원교회라는 이름으로 주일에 예배도 드리고 휴식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전원교회를 세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전원교회를 세워 운영할 때에 교인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초점이 있는가, 아니면 교인들이 스스로 즐기는 것에 초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일에 야외예배를 나갈 때에 예배를 안 드리고 놀 수는 없어서 예배를 요식행위로 간단히 드리고 노는 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전원교회가 이런 주객전도의 문제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여가문화 못지 않게 그것과 아울러 세속문화가 영적인 관심을 앗아가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있다. 사람들이 대중매체의 그늘 아래 하루를 보낸다. 대중매체가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며 다양한 오락을 제공하여 영적인 관심을 앗아가는 문제를 안고 있다. 스포츠 중계나 인기 있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이 교회예배와 겹치는 경우 교인들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을 포기하는 문제가 바로 단적인 예이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말한 대로 광고, 텔레비전, 그리고 팝 문화는 “무엇보다도 말에서 이미지로, 행동에서 구경으로, 설명에서 오락으로, 진리에서 느낌으로, 확신에서 감정으로, 권위 있는 발언에서 토론과 의견교환으로” 대중문화를 바꾸어 버릴 것이다.

교회는 이런 문화 속에서 영적인 자양분을 제공하는 대신에 오락이라는 규정식단을 제공하는데 골몰하고, 리더십이라는 명목으로 무대중앙으로 나아가서 쇼맨십을 부리며, 말 잘 듣게 하려고 아이들을 달래고 어르고 갖가지 약속을 하는 것처럼 달콤하고 감상적인 설교를 하고, 대중의 배척을 받을 위험을 무릅쓰기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려는 편을 택하는 것은 현대의 유흥문화에 동화되는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빌립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미끼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으로 먹을 것을 주고, 사람들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억지로 왕을 삼으려는 자들을 뒤로하고 인기무대에서 철수하여 (요 6:15) 대중으로 하여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도록 도전하며 (요 6:27), 복음 메시지를 더욱 분명하고 강렬하게 전하여 대중의 욕망에 역류하며, 진지한 사고가 시장터에서 야유를 받는 풍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가 자아의 찬양과 애통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느낌을 쏟아 붓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자아의 정서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계기가 되기 쉬운 감성문화 속에서 교회는 이기주의적 감성문화의 횡포를 말씀을 통한 영적 자양분 공급으로 도전하여 감성문화를 이기는 지정의 전인적 영성문화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기독교가 감성문화에 빠져 “지성면역결핍증”(intellectual immune deficiency syndrome, 정서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기독교의 내용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한편, 기독교 문화가 세속문화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 교회 외부의 문화에 대한 대응책과 함께 교회 안의 교회문화 형성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교회 안의 문화를 형성할 때 독일교회가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테크노 음악 축제를 열어 교회에 남은 영혼들마저 죽이는 일을 한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1996년 7월 14일 베를린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주제로 “디 러브 파라데”(die LOVE Parade)라는 테크노 음악 축제가 개최되었는데 무려 75만명이 몰려 들었다. 행사에 참가한 자들은 혹시 그 분위기에 도취되지 못하고 소외될까봐 미리 마약 성분이 함유된 흥분제를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거의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여자들은 옷을 벗어 던지고 발가벗고 춤을 춘다. 행사가 끝난 후 베를린 시청에서 쓰레기를 치우려는데 지금까지 행사 중에서 가장 많은 쓰레기가 나와서 시청은 주최측에 쓰레기를 치우라는 책임을 넘겨 결국 정치문제로 비화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여호수아 다음 다음 세대, 즉 여호수아로부터 제3세대(삿 2:6-15)는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렸을 뿐 아니라 우상문화와 타협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안주하여 가는 곳마다 괴로움을 당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한국교회도 세속문화 뿐 아니라 그 속에 뿌리박고 있는 우상문화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것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계시에 근거한 신(神)지식과 영성을 강조하여 종교다원주의적 혼합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교회 성장의 참된 방법은 회개운동이다. 교회는 재래종교와의 혼합이나 종교다원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종교로부터의 회개를 통해서 성장해야 한다. 재래종교의 범신론과 인간의 신격화를 수용하면 회개를 잃어버리고 말씀을 떠나고 성화되지 못하며 성령의 역사는 소멸되고 교회는 병들어 간다. 한국교회는 비진리와 불의에 타협하는 생활을 청산하고 회심과 그것으로 인한 성령의 활발한 사역이 있도록 해야 한다.

 

7. 21세기 미래사회에 대한 대응

한국교회는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함과 동시에 문 앞에 들이닥친 21세기에 대비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21세기에 대비하는 목회전략을 수립하는 데 무관심하면 일기가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파멸한 공룡이나 가마솥의 물이 달아오르는 것을 모르고 사우나를 즐기다가 삼켜 죽는 개구리처럼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정보, 하이테크, 지구촌 경제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정보와 기술이 첨단에 이르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인공위성, 컴퓨터, 위성 텔레비전, 논문 폭발, 베스트 셀러의 홍수, 장기이식, 인간복제, 해저 및 우주개발, 통신위성, 제트기, 고속전철 등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발달되어 21세기인들은 최고의 정보와 기술과 교통/통신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단 12:4). 이런 변화는 전문화와 그룹화를 부채질할 것이다. 21세기는 정보/기술/통신의 발달과는 정반대로 인간성의 파괴현상을 겪게 될 것이다 (마 24; 계 6-8). 지구촌 시대에 사람들은 역으로 중앙화에서 탈중앙화로, 제도의 도움에서 자기도움(건강, 교육, 방범, 소비구조에 있어서)으로, 대표민주주의에서 참여민주주의로, 양자택일에서 다자택일로---이런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지구촌 시대에 국가 공동체, 사회 공동체, 교회 공동체, 가정 공동체, 심지어 개인의 인성 자체까지 파괴되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조립인간 임대인간의 문제가 등장하고 교우/친구 관계가 붕괴하며 동성애 부모와 불량배 가정(마약, 포르노,정보 알선 마피아)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에서는 여성들과 평신도들의 목소리가 점차 더 커질 것이다. 노인들과 청소년들과 소외계층이 생겨날 것이며, 동시에 과잉자극과 감각의 충격과 정보의 과부하와 결정의 스트레스 등으로 미래 쇼크 환자와 미래 쇼크 사회가 새로운 문제로 등장할 것이다. 21세기는 이렇게 인간성의 파괴 뿐 아니라 인간의 주변환경이 파괴되는 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계 8-9,16장). 지구의 온실화, 오존층의 구멍, 생물종의 파멸, 탈수림화, 사막화, 산업/농업 폐기물, 공장의 유독가스, 핵폐기물, 대양의 황폐화, 공기오염 등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21세기는 또한 현대주의가 후현대주의로 바뀌면서 활짝 열린 뉴에이지 운동과 종교다원주의와 이단/사이비의 도전 등 영성의 대혼란을 겪을 것이다.

1893년 미국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출품된 20세기 도시의 설계에서 교회가 빠져 있었다. 편도 8차선 고속도로가 거미줄처럼 도시를 관통하고 고층 빌딩 옥상에는 헬기 착륙장이 있고, 거기에 내린 쇼핑객들이 안내 방송을 따라 쇼핑몰을 찾아 이러저리 다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교회만 없었던 것이다. 박람회의 어떤 관람객이 의아해서 “왜 이 도시에 교회가 없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안내자는 “그 때에도 교회가 필요할까요?”라고 반문하더라는 것이다. 20세기에 유럽 교회들이 쇠퇴하고 미국 교회도 뒤를 이어 부분적으로 쇠퇴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21세기에도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21세기에 뉴에이지와 종교다원주의와 이단/사이비의 극성으로 기독교가 위기에 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21세기의 이러한 시대를 내다보면서 어떻게 사역해야 하겠는가? 옥한흠 목사는 21세기의 시대적 전망에 근거해서 21세기에 목회자들이 상대해야 할 청중은 전쟁과 가난을 모르고 고통을 이해하고 감내하지 못하는 세대, 산아제한과 핵가족의 우산 아래서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세대, 지성보다 감성을 더 앞세우고 객관적인 진리보다 자신의 느낌을 더 중시하는 세대, 잡다한 영적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세대, 급속도로 변화하는 문명 앞에서 방향감각을 잃어가고 있는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시대적 전망과 목회대상 청중을 내다보면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이치를 발견하여 개발한 정보와 기술을 바로 활용하고, 하이테크 사회에 파괴되기 쉬운 인간관계를 하이터치로 치유하며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영성의 대혼란을 대추수의 기회로 보고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으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생명의 복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특별히 통일조국의 복음화와 지구촌 선교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가정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를 견고하게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젊은이들에게 21세기에 대한 비전과 도전을 제시하고 미래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서 오늘의 주일학교 교육에 신경 써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겸손한 지도자의 강력한 지도력 하에 복음사역에 함께 기여하고 소외된 계층을 배려하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지구촌 시대에 깨어지는 공동체를 치료하기 위해서 공동체들 간의 화해사역과 깨어지는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전인적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이런 사역을 위해 한국과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대동단결을 통한 대협력의 지구촌적 팀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옥한흠 목사는 선교와 봉사를 위해서, 또 사회적 이슈를 풀어나가고 정부를 상대하여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교파간의 벽을 헐고 공동보조를 맞추되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가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중표 목사는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해서(“별세”하지 못해서) 교권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별세”하여 교파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교회가 성장의 둔화/정체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통계를 두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정체요인들을 분석하고 정체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논의한 본고는 다 논의한 후에 보니 현재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들을 개관하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21세기 미래사회를 대비하는 종합적인 대책을 세우는 형식을 띠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현상이 한국교회의 어떤 특수한 하나의 문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들에 기인한 것이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대책도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전반적인 방향을 제의하는 방식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교회가 성장정체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고 다각도적으로 활발하게 논의한 것은 역성장의 불행 중 고치려는 의지 면에서 다행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마이너스 성장현상을 직시하게 하시고 이 현상의 원인을 캐는 노력을 하게 하셨다는 면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한국교회가 그 동안 세계 교회 앞에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역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선교지에 가서도 “당신들 교회는 왜 이 모양이냐? 한국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하는 식의 오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제 이런 오만을 버릴 수 있는 계기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교회성장 정체’라는 부끄러운 사실을 통해서 한 때 부흥했던 북아프리카 교회나 유럽교회나 미국교회처럼 언제든지 쇠퇴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되었다. 이런 계기에 한국교회는 우리 나라 교회만은 쇠퇴일로에 있는 유럽교회의 전철을 결코 밟지 않을 것이라는 교만을 버리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겸손을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한다.

본래 교회 성장과 부흥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성장하게 하셔야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다 (고전 3:7). 한국교회는 마치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자력으로 성장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성장하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절대의존 하여 하나님의 얼굴 빛을 구해야 한다. 이제 살만하게 되었으니 주셔도 좋고 안주셔도 좋다는 식으로 배부른 자의 기도를 드릴 것이 아니라 아직도 생명의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채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70여%의 동포들과 세계의 미전도종족들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벧후 3:9)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굶주림으로 기도해야 한다. 나의 야망 실현에 혈안이 되었던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 구현에 열정을 가지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교회성장이 둔화된 지금 차분하게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향해 전망하면서 하나님의 미소를 다시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한국교회를 볼 때 한국교회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실질적인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된 원인은 문화 변화와 이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사회 변화에 이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교회의 신축성이 결여된 전통과 구조 및 분열 문제, 교회 지도력의 결핍, 영성의 부족 등에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런 분석에서 필자는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생동적 관계의 약화에 있는 것으로 지적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언약적 축복을 내려주셨는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 축복에 빠져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을 두고 병리현상이니 성장의 고통이니 하는 말을 썼지만 사실상 가장 적절한 표현은 은총과 축복으로 한국교회를 권고하신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불복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위에서 열거한 구체적인 죄악들을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생동적 언약관계를 회복 유지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성장정체의 근본원인이 하나님과의 생동적 관계의 약화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의 생동적인 관계를 회복하여 강화할 뿐 아니라 앞서 지적한 대로 과거에 범한 죄악을 21세기에는 다시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교회는 하나님과의 생동적 관계에서 오는 생명을 개인과 교회에 국한된 좁은 것으로 축소시키지 말고 그것을 영육을 포함하는 면에서 전인적인 생명과 개인과 사회/문화/지구촌을 포괄하는 면에서 총포괄적인 생명으로 이해함으로써 개인과 교회와 사회와 민족과 지구촌을 치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우주의 1평방 센티미터도 삼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지 않으므로, 한국교회는 21세기에 교회다운 교회의 포괄적 본질을 회복 활성화 하고 하나님의 영육간의 모든 언약적 축복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게 활용하여 통일조국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향도 역할을 겸허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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