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6/19) 교갱협/기독신보 공개포럼

이 글은 한국교회의 성장정체 현상의 원인과 문제점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사회변혁적 관점에서 교회의 현재 모습을 점검하고, 한국교회가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변혁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문제가 있다면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것이 성장정체의 원인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논하고자 한다.

통계적으로 허수가 많이 잡혀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현재 한국에는 많은 수의 교회와 교인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많지만 교회다운 교회는 적고, 교회의 목소리는 크지만 사회에 대해 별반 의미를 주지 못하는 꽹과리 소리만 가득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교회와 교인들은 서둘러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고, 사회변화를 위한 시대적 요구를 짐짓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불교와 유교를 가장 찬란하게 꽃피웠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려는 불교 때문에 망했다고 말하고 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종교가 그렇게 큰 역할을 했으면서도 한국사회로부터 왜 지탄을 받고 힘을 잃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더 이상 한국사회를 이끌고 그 사회를 변혁시킬만한 정신적 지주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한국사회 속에 뿌리를 내린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빠른 시간에 유래없는 기독교적 문화를 이뤄놓았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가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정신력, 변형능력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부패의 길로 들어선다면 불교와 유교가 겪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이 글은 크게 세 가지 점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첫째,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할 사회적 삶의 양식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삶의 양식은 본질로부터 이탈되어있다고 보며 그 원인의 추구와 함께 교회가 지향해야 할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둘째, 한국교회의 사회변형능력이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교회의 정체는 근본적으로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교회기능의 저하에 있다. 이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교회가 새로운 시대를 이끌 수 있다. 셋째, 한국교회 자체의 영적 갱신이다. 갱신은 구호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관계에 있어서 철저한 자기반성과 실질적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이 글은 이런 관심아래 교회의 진정한 성장동기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삶의 양식 및 본질적 속성 회복이 왜 필요한지, 교회의 사회변형능력은 왜 중요한지, 이 변환을 막는 한국교회의 내부적 요소들과 외부적 사조들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한국교회의 동태적 변환을 위해 나름대로 제언하는 순서로 이어질 것이다.

 

교회의 진정한 성장동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의 정체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성장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성장을 원하고 있는지, 그 동기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않된다. 윌리암스(C. Williams)에 따르면 교회가 성장을 원함에 있어서 크게 상반되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 하나는 모세적 동기요,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적 동기다. 전자는 교회기구적 확장, 곧 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후자는 신앙적인 것, 곧 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반된 두 동기를 통합하는 동기가 바로 바울적 동기다. 교회의 성장은 단지 양과 질의 문제에만 있지 않다. 교회의 성장은 삶의 신비성이 포괄하는 차원들의 얽힘, 특히 여러 동기들의 상호관련성과 그 과정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Williams, 28; Morikawa, 1979; 은준관, 122-133).

모세적 동기는 출애굽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경험은 모세에게 중요한 순례적 사건이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 법전, 그리고 종교법이  결국 이스라엘의 조직과 사회건설을 위한 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정착과 조직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교회성장을 조직, 기구, 그리고 수의 확장으로 보는 것은 모세적 동기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것은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일찍부터 내려온 것으로 교회성장에 관한 동기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중세 로마교회가 사도의 역사적 계승을 따라 교회에 위탁된 사역, 신조, 성례전, 그리고 의식의 전통을 중시한 것은 대표적 보기에 속한다. 우리는 현재 그 모습을 가톨릭에서 발견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가톨릭에 국한되지 않는다. 맥가브란(D. McGavran)의 ‘하나님의 선교’에는 작은 교회들이 최대한의 수로 증가하는 교회성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전도는 수의 확장을 의미한다. 맥가브란적 교회성장에 가장 영향을 받은 나라는 한국으로 양적 거대주의, 물량적 비만주의, 성공지향주의로 치닫고 있다. 교회가 양적으로 커지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그리스도와 세계, 전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이 주제가 되지 않고 그 대신 교회주의가 자리잡게 된다면 그리스도를 몰아낸 교회, 인본주의적 교회로 전락될 위험을 크게 안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아브라함적 동기는 안정과 과거를 포기하고 약속된 미래를 향해 순례를 결단한 신앙적 의미를 중시하는 동기이다. 이 동기의 초점은 조직이나 기구, 또는 정착을 뛰어넘는 초월적 구원사에 맞춰져있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기구나 조직이 아니라 신앙적 사건으로 받아들인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일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 나라와 세계가 만나는 종말론적 자리가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적 동기는 수보다 질을 중시한다. 웨버(H. Weber)에 따르면 교회의 선교는 통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희생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는 수적으로 어떻게 성장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은혜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많은 수보다는 은혜 안에서 선택되고 또 불리움받은 소수, 남은 자면 족하다. 그래서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운동도 전개되고 있다. 작은 것의 추구는 은혜와 희생 안에서의 소수의 성장이자 생동력있는 공동체의 모색이다. 아브라함적 동기는 교회로 하여금 물량주의와 기구주의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 나라와 세계를 만나게 했다는 점에서 기여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를 타락의 상징으로, 교회의 기구나 조직을 죄악시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바울적 동기는 그리스도와 교회기구를 동일시함으로써 구원과 신앙의 사건적 의미를 상실한 모세적 동기와 그리스도와 교회를 지나치게 분리시킴으로써 보이는 교회로 하여금 설 자리를 잃게 한 아브라함적 동기를 보완한 것이다. 윌리암스는 두 동기, 곧 신앙적 사건과 조직을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또는 긴장 속에 공존시키고 있다. 이 동기는 키도 자라고 아울러 지혜도 자라는 양면작전이다. 키가 자란다는 것은 양적 성장을 의미하며, 지혜가 자란다는 것은 교회의 질적 성숙을 의미한다. 성장과 성숙을 통해 모세적 동기와 아브라함적 동기를 통합하는 것이다. 키의 자람과 지혜의 자람(눅 1:52)은 분명히 대치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동기가 한꺼번에 성취될 때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간다. 모리가와(J. Morikawa)는 예수의 성장과정을 묘사한 두 동기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통해 교회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적 동기는 두 동기의 단순한 조화에 그치지 않는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모세적인 조직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갈 3:5-29). 기구와 조직은 언약적 사건에 봉사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앙적 사건이 항상 우선되어야 한다. 교회성장에는 모세적인 것과 아브라함적인 것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인 언약과 이에 응답하는 신앙적 사건이다. 그것은 증언과 봉사의 형태로 나타나며 조직과 기구는 뒤따라야 한다. 교회가 자신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교회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그 분에 의해 형성되는 공동체이다. 교회성장이 있다면 그것은 수나 양의 성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의 성장이며, 이 역사 속에서 새로운 존재이유와 존재양식을 찾아나서는 성장이어야 한다(은준관, 133). 모세적 동기에 빠져있는 한국교회는 이것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는 바울적 동기, 특히 그리스도와의 원숙한 관계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는 왜 삶의 양식과 본질적 속성 회복이 필요한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성장이 정체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을 말할 때 그 기준은 대부분 양적인 것에 맞춰져 있다. 교인의 수가 줄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양의 감축은 질적인 속성의 변화에 따른 결과로 보기 때문에 교회성장정체에 관한 논의는 자연 질적인 문제로 가지 않을 수 없다. 수에 관심을 집중시키다보면 본질을 놓치기 쉽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수보다는 질에 있어야 한다. 양을 따지고 그것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치중하는 것은 교회가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교인의 수에 관심이 크다. 그러나 교인의 수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인의 수가 늘어간 것은 아니며 명목교인의 확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자 제국에는 교인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명목적인 교인들이었다. 기독교가 숫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확장되었지만 그것이 질적인 확장이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다. 성찬의 의미도 퇴색되어 성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성찬의 의미를 먼저 새롭게 하고자 했던 것도 잃었던 교회의 본질적 형식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을 논함에 있어서 이것을 문제삼는 것은 교인의 수가 줄었다고 교회성장이 정체되었다고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에 있다. 수보다 더 심각한 본질적인 문제가 교회에 있었고, 그로 인해 교회가 이미 정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단순히 기독교가 얼마나 양적으로 확장되었는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기뻐하신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그 나라의 확장은 교회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교회를 비롯해서 가정과 사회 속에 파고들어 그 나라를 새롭게 세우는 것이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민족초월), 남자든 여자든(성초월), 교회든 교회가 아니든(교회초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존의 틀을 과감히 청산하고 그 나라의 삶의 모습으로 바꿔져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지나친 제도화나 기구화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고 있지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럴 경우 교회정체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교회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가 이런 문제를 초월하지 못하고 교회 안의 제도에만 묶어져 있다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양식(form of life)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substance)으로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이다. 그 속에는 십자가의 삶이 인격화되어 생명력있게 나타나 있어야 한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교인의 수가 많으며, 성가대가 고도로 숙련되고, 목회자의 설교가 현학적이라 해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살아있지 않으면,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못하면 삶의 양식이 잘못되어 있다.

잘못된 삶의 양식은 본질적 삶의 모습을 벗어난 디포메이션(deformation)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탈본질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람직한 삶의 양식으로부터 거리가 먼 엑스포메이션(exformation) 형태를 띤다. 본질 밖의 삶의 양식은 이기주의적 삶, 물질주의에 얽매인 삶의 모습을 보인다. 본질적 삶의 모습이 영적으로 살아있는 모습(modus vivendi)이라면 디포메이션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모습(modus moriendi)이다.

이 시대는 고도로 기술화되어 있고, 무감각하며, 상품숭배주의가 만연되어 있고, 인간이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는 자만으로 가득차 있다. 인간복제마저 가능해진 현실에서 신적 능력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말할 것 없고 무신론적 사고가 만연되어 있다. 니이체가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후 신학자들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터져나왔다. 비신학자는 이제 자연스럽게 반하나님적 언사를 사용하고 있다. 해링턴(M. Harrington)은 「신의 죽음에서의 정치학」(The Politics at God's Funeral)에서 우주론을 드러내기보다 인간이 구성해낸 부재의 공간을 채우려는 인간의 노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없고 인간의 것만 존재한다. 그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구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비전이 없다.

본질이 무시된 삶의 현재와 미래가 밝을 수 없다. 따라서 본질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다익스트라(C. Dykstra)는 비전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비전 속에는 상상과 계시 뿐 아니라 회개, 기도, 봉사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는 콜버그의 윤리학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가운데서도 교회 내에서 그러한 도덕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대교회가 지금 필요한 것은 본질적 삶의 양식의 회복이다. 이것은 형식의 재구성이자 삶의 개혁(reformation)이다. 이것은 본질로의 회귀이자 본질적 삶의 양식의 회복을 의미한다. 무어(M. Moore)는 전통화(traditioning)를 주장한다. 전통이라는 단어는 그리 새로운 감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전통화개념은 전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달리하게 만든다. 그에 따르면 전통화는 폐쇄적인 전통주의(traditionalism)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통화는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다. 전통화에 따르면 전통은 변화되고 개혁되어야 한다(Moore, 105). 우리의 실천을 변형하기 위해 과거를 지속하고 미래를 바라보도록 한다. 이에 반해 전통주의는 어떤 변화도 없이 그리스도를 자신들이 만든 교리 속 갇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바리새주의가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현대 속에는 여러 모양의 바리새주의가 존재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히고자 하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마저 자신의 틀 속에 묶어 두려 한다. 그리스도를 그 속에 갇혀 죽게 하는 것은 예수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틀에 묶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사회 속에서 힘있게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로마서 8장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면서 그 때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지금은 하나님이 전 피조세계를 위해 일을 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새로운 미래, 열려진 세계, 희망의 새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일을 막아서는 안된다. 교회가 이러한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장애물(skandalon)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나라 삶의 양식을 다시금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살 수 있다.

 

한국교회는 사회변혁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사회는 여러 상징의 복합체계로 구성되어 있다(Perkins, 1987). 그 상징들은 사회를 통합하고 이끌고 변화시킨다. 교회는 사회와 격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의미있는 상징으로 존재한다. 교회의 상징성은 무엇보다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에 부정적 상징성을 가져다 준다면 사회에 대한 변형능력은 그만큼 축소된다. 따라서 교회는 언제나 새로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트뢸취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크게 소종파형(sect type)과 교회형(church type)으로 구분하였다. 전자는 교회가 종교의 순수성을 고집하여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유형식이라면 후자는 교회가 세상 속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형이다. 전자는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사회변화에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음에 비해 후자는 사회 속에 복음을 적용하고 확장시켜 종교의 사회적 영향을 최대한도로 성취할 수 있지만 세상과 타협하여 종교의 순수성을 상실할 위험성이 있다(Troeltsch, 1931).

초대교회는 사회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중세 수도원주의는 피세적 삶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와 담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의 담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세상 속에 들여보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했다. 일부 소종파형은 끝까지 세속화된 교회에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에만 복종한다는 것을 표방했다.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 위해 세상에 대한 모든 책임을 포기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교회는 결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저버릴 수 없다.

현대에 들어서 세상에 대해 교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이른바 세속화 신학이다. 세속화 신학은 보수적 교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에 미친 영향은 크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속화와 세속주의를 구별하지 않고 한 가지로 이해한다. 그러나 콕스는 이 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세속주의는 이 세상을 중심으로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살 것을 강조하는 폐쇄된 인간관이므로 비성경적인 것임에 반하여 세속화는 기독교의 진리가 세속에 전진적으로 들어가 활동함으로써 얻은 복음의 열매로 간주된다. 그에 따르면 세속화는 성경적이다. 그는 세속 속에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세상을 향한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강조한다. 그러나 세속화 신학은 교회의 독특한 표지, 곧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고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질을 무시하고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위해 봉사자로서의 기능만을 담당하도록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화는 콕스의 표현대로 현대의 자식중 가장 심한 꾸중을 받고 자란 자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속화 신학이 기여한 점도 있다. 그것은 그동안 세상에 대해 무관심해왔던 교회로 하여금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더 이상 십자가 첨탑만 가진 건물이 아니라 세상 속에 나아가는 그리스도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다.

콕스에 따르면 세속화는 종교적으로 묵인되는 불의에 대해 항거함에 있어서 어떤 반교권주의자보다 더한 열정을 가졌던 여러 예언자들의 축복받지 못한 탄생을 의미한다. 세속화는 전성시절에 인간자유의 역사 속에서 강건한 가지였을 때도 있었다. 그것은 비열한 목적을 위해 신성을 부정하게 사용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Cox, 1984). 지금 우리가 세속화에 대해 주목하는 것도 세상에 대한 교회의 비판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세상의 비판이다. 세상 못지 않게 교회 속에 문제가 있고, 이러한 비판을 통해 교회가 거듭나야 사회가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화 신학은 이런 점에서 교회와 세상을 서로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

최근 사회 일각에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이 되자는 의미에서 메타맨(metaman)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 운동은 개체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공동체의 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웨스터호프는 인간을 알파인간, 베타인간, 감마인간, 델타인간으로 나눴다. 알파인간은 합리적인 인간이다. 교조주의적이고 현재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베타인간은 이상주의자로 명상적 기도를 하지만 그의 관심은 현재적인 것에서 떠나있지 않다. 감마인간은 미래적인 것에 관심이 크다. 내적 의미와 변화에 관심이 크며 논리적 분석과 사유도 한다. 델타인간은 직관적 이상주의자로 고독과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가고자 한다(Westerhoff, 1992). 이런 인간상 모두는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변혁적 측면에서 볼 때 감마인간이 바람직한 모형으로 제시된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서는 델타인간적 경지도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미래지향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양식을 회복하지 못한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내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도 달라져야 한다. 교회가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transformative potentials)를 갖추어야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달리 보게 된다. 교회 속에서 사회를 움티울 수 있는 생명력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변혁성이 높은 트랜스교회(transchurch) 그리고 현재의 차원을 뛰어넘는 메타교회(metachurch)가 되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메가교회가 아니라 메타교회가 되어야 한다. 메가교회란 숫자와 성장과 성공에 강조를 두는 교회이다. 이에 비해 메타교회는 질과 성숙과 헌신에 강조를 두는 교회이다. 메가교회가 대형교회라면 메타교회는 열린 교회, 스스로 갱신하는 교회이다(김영한, 34). 변화를 이루어 가는 교회가 살아있는 신앙공동체이다. 변화에는 예배뿐 아니라 삶 전체의 갱신이 필요하다(Westerhoff, 1992).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사회변형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그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특히 교회는 여러 차원에서 지켜나가야 할 성스러움(numinose)마저 잃어감으로써 존립의 근거를 잃고 있다. 일부러 성스러움을 지키려 애쓰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버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스러움은 단지 이분법적 발상에서 성과 속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거룩한 영역으로, 사회를 속된 영역으로 구분하여 교회가 사회를 적대시하는 한 교회문제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은 어려울 뿐 아니라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이원규, 10). 여기서 말하는 성스러움은 사회변혁을 위해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지켜 나가야 할 의미있는 것들을 말한다. 이제는 지킬 가치가 있는 성스러운 것이 교회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많은 교회는 성스러움을 웅장한 교회건물이나 중세교회를 방불케 하는 강단, 그리고 목회자의 복장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현대교회가 그런 것에서 성스러움을 찾고자 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어떤 시대에서나 외면적 거룩은 오래갈 수 없다. 예수는 교회를 웅장하게 짓지도 않았고, 위엄있는 옷을 입지 않았지만 그를 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 보이지 않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거룩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의 친구가 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교회는 예수의 거룩함을 보여줄 책임있는 존재다. 그러나 어느 누구고 현대교회에서 거룩함을 찾을 수 없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책임은 성스러움을 지켜나가지 못한 우리에게 있다. 이런 와중에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교회의 허구성이 파헤쳐 지면서 교회에 대한 신비나 기대도 약해지고 있다. 결국 종교가 상대화되는 가운데 기독교도 상대화된 다른 종교의 선상에서 이해되고 있다. 교회는 더 이상 신비롭지 않고, 목회자 또한 거룩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은지 오래다. 이것은 교회가 얼마나 힘을 잃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현재 교회는 정체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만큼 교회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는 양적 성장은 물론 질적인 발전을 원한다. 그러나 성장이든 발전이든 지금의 상태로는 회복이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카톨릭교회는 교세가 증가되고 있음에도 사제지망자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이에 비해 개신교 신학교에는 신학생들로 넘쳐나고 있지만 교회는 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깊은 성찰이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야 한다. 그런 모습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스스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교회의 갱신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보다 성숙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21세기에도 힘있는 교회로서 존재하기를 바란다면 구성원들의 의식구조에 전환적 개혁이 필요하다. 제도나 관습, 제도와 행정기구들이 개혁되었다고 해도 구성원들의 의식전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교회의 갱신과 개혁이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각종 제도․관습․전통․기구․법 등을 바꿔나가야 한다. 교회는 변화를 이뤄가는 삶의 공동체이지 정체된 공동체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질적 변환을 막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여러 사회문화적 특징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를 보면 한국을 알 수 있고, 사회를 보면 교회를 알 수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사회적 속성으로서 가족주의, 개교회주의, 물량주의 가치관, 자기기만적 삶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요소들이 한국교회로 잠시 성장을 촉진시키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질적 변환을 막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가족주의와 개교회주의

한국교회의 사회적 특성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가족주의를 꼽는다. 한국기독교의 가족주의적 특수주의(familial particularism)는 강한 유교적 전통을 이은 것이며 지연․학연․혈연의 강조와 함께 교회 속에 깊게 그리고 넓게 터를 잡고 있다고 인식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나 지역주의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박영신은 이를 유사가족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교회의 성장 초기에 가족주의는 쉽게 결집력을 가질 수 있다는 기능적 장점이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것을 바탕으로 성장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계속해서 이 점을 강조한다면 오히려 교회의 발전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교회의 특수주의적 배타성은 교회를 모든 사람에게 열린 장소로 만들려는 노력을 무너뜨린다. 보편적 삶의 공동체가 확립되기 어렵다는 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어렵다는 것과 연결된다. 만일 한국교회가 파당화된 하나님의 나라로 불린다면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당히 잃었다 할 것이다.

베버나 파슨스에 따르면 유교사회의 가족적 특수주의는 서양의 보편윤리와 대조된다. 특수주의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특수한 인간관계가 우선되며 가치나 규범을 추상화하거나 보편화하려는 노력이 배제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유교 속에 보편적인 가치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회고 특수관계가 중시되면 보편적 가치는 함몰할 수 밖에 없다. 범인이라도 그 사람이 자기 가족이거나 특수관계에 있을 경우 고발보다 숨겨주는 것이 관습화되는 것은 그 보기이다. 이 경우 정의를 추구하기보다 특수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의리로 간주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에서 특수주의적 성향은 특수한 개인․가족․당파에 기초한 인간관계가 고도로 발달된 형태로 형성되어왔으며 이러한 사회적 성향이 교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교회가 문제가 발생해도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는 노력보다 인간의 특수한 관계유지에 손상이 가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려 한다. 교회의 가족주의적 성향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세우기보다 인간의 나라를 세우는 역할을 함으로써 결국 교회의 발전을 막는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공동체적으로 실현하는 곳이다. 교회가 이 윤리를 공동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걸림돌 역할을 하게 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가족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고 바람직한 삶의 공동체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혈연이나 지연을 근거로 하는 공동체보다 하나님 나라 윤리에 입각한 기독교적 이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한다. 서양에서는 스토아주의와 기독교가 보편적 공동체에 대한 이념적 근거를 제공해왔다. 스토아주의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법과 사해동포적 사상이 있었고, 기독교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평등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주적 형제우애사상이 있다. 이 두 이념이 혈연과 지연으로 결속된 특수 공동체를 초월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데 기여했고, 이 새로운 공동체 형성에 교회가 역할을 담당했다(박봉배, 238).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교회도 혈연과 지연을 초월한 새로운 공동체 건설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하는 현상을 노출시킴으로써 사회적으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교회가 특수주의적인 가족의 이익을 높이는 수단적 도구로 전락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개교회주의를 통해 강한 집단이기성을 표출시키고 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기주의성을 버려야 한다. 개교회주의는 한 교회의 숫적 성장을 돕는 촉매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연합을 막고, 공동작업을 방해한다. 개교회의 선전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벨라(R. Bellah) 등은 우리 문화가 개인적 관심사를 초월하는 가치체계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공동의 신념이나 경험에 기반한 보다 큰 의미성을 추구하는 투쟁에서 패배했다고 적고 있다(Bellah et al., 150-151). 우리는 자존과 자율의 가치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지탱해주는 다른 존재 없이는 삶의 공허를 깊게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서기를 원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는 자신을 분명하게 인정하기를 주저한다. 그 이유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독립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이렇듯 고립적 개인주의 편향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다른 교회 뿐 아니라 사회를 향해 문을 닫음으로써 우리 삶 속에 긴장을 증폭시키게 될 것이다.

2) 물량주의 가치관

한국교회가 물량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일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교회가 사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힘을 잃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물질주의적 가치에 함몰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기독교가 이 세상 안에 자리를 잡고 이 세상을 활동의 무대로 삼는다고 해서 교회가 이 세상의 가치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거센 바람에 맞서 진정한 가치관을 심어야 주어야 종교로서 바른 태도이다.

한국교회가 물량주의에 빠지게 된 것은 한국의 경제성장과정과 깊게 연관된다. 사회를 선도해야 할 한국교회가 오히려 경제적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1970년대부터 교회 안에 축복은 물질화 내지 현금화로 바꿔지고, 많은 교회들이 교회성장주의에 압도당하면서 성장의 척도를 외형적인 것에서 찾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의 풍요화 현상에 교회가 가장 빨리 그리고 치명적으로 감염되어 성직자들의 귀족화 현상이 사회적으로 문제되기도 했다. 강단에서 물질주의와 물량주의를 경계하는 소리가 이따금 들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외치는 사람들이 거기에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한다(이만열, 1981). 아울러 한국교회가 그토록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신앙보다는 물량주의에 근거한 십일조주의라고 비판한다.

교회가 사회보다 더 물량주의적 가치관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면 사회는 당연히 그런 교회에 대한 기대를 져버릴 것이다. 기성 종교의 기득권적 집단이익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사회에 대한 교회의 기여가능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이런 평판을 강하게 받고 있다. 기독교 본연의 정신이 점차적으로 퇴색하고 물량주의에 현혹되어 종말론적 기운을 잃고 세속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기독교의 사회변형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게 일고 있다(박영신, 370).

3) 기구화

교회는 인종․지연․신분 등을 초월해 발생한 예수운동체(Jesus movement)였다. 종말론적 의식 속에서 이 세상을 순하고 무욕한 심정으로 순례자처럼 살아가는 집단이었다. 가난했고 정치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했으며 끊임없는 박해까지 겪었지만 사회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증인들로서 살았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서 비록 유랑하듯 보이지만 그들 속에 성령이 힘있게 역사하는 역동적인 공동체를 유지했다. 그들은 전체적인 통제가 최소한으로 유지된 상태에서 자립․자치․자력전도하는 예수운동체로서 살았다.

이런 공동체가 한국에서 현저히 기구화된 현상을 보이고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차별과 위계를 비롯한 경직된 직분의식, 전통과 교리(신조)에 대한 형식적이고 무반성적인 맹종, 새것과 변화에 대한 강한 폐쇄성, 때로는 이른바 콘스탄틴주의(Constantinism)라 불리는 정교유착사례, 교회 안에서조차 사회계층간의 갈등과 반목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인격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에서부터 유능한 사무적 관리와 업무처리가 중시되는 기구로 변화되어감에 따라 목회자의 영성이나 성실성보다 효율성이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서정운, 125).

사회학적으로 볼 때 교회의 기구화는 계층간에 불화를 낳는 심각성이 있다. 한국교회에서도 교회간 그리고 교회안의 계층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교회 간의 계층화는 교회예산이나 교역자의 대우 면에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 대교회와 중소교회 사이에 심한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이 계층성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도 일어난다. 교회는 대부분 공동의회라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장로나 집사를 택하고 교회의 중요사항을 의결한다. 하지만 교회직책의 등급과 계급의식, 또 남성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체제는 구조적으로 여성과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게 만든다. 이것은 사회의 주변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다시금  주변그룹으로 몰리게 되는 경험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김병서, 341). 한국교회는 교회로부터 소외된 교인들이 이곳저곳으로 유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로 알려져 있다. 등록신자가운데는 새신자보다 다른 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 현상을 입증한다. 대교회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운데 하나도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이다.
거존(J.F. Girzone)은 그가 쓴 소설 「조슈아」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기구화된 교회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Girzone, 111). 이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전도했어요.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인생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즐거워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교구를 기업체처럼 운영하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유혹을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업을 시작할 작정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아끼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가깝게 밀착된 가족이 되도록 주춧돌을 놓을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실상은 교회가 사람들을 위에서 누르는 조직이 되었고 한 식구가 되게 하질 않아요. 그들의 역할은 단지 그 조직을 부양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기독교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그 사회의 중심입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살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계획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구축하도록 허락됩니다. 성직자는 필요할 때 충고와 조언과 방향을 제시하는 친절한 안내자죠. 이 같은 사회를 격려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의도했던 바입니다.’

한국교회의 기구화는 구약시대의 제사장중심주의․제사주의․성전주의․예전주의, 바리새적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중세의 교권주의․권위주의․조직주의로의 회귀라는 비판이 강하게 일고 있다. 실험적이기는 하지만 새길교회처럼 교파, 목회자, 그리고 교회건물이 없는 이른바 삼무(三無)의 교회가 발생한 것이나 독립교회들이 늘어나는 것은 기구화된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교인이나 교직자의 저항적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반론이나 염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현상은 한국교회가 왜 구조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생각케 해준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한국교회가 문을 닫고 순례자처럼 유랑하자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순수성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되었던 도나티스트나 ‘기구나 조직은 항시 죄악적이어서 기구적 교회는 참 에클레시아가 될 수 없다’고 말한 브루너의 영성주의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기구화로 인해 인간중심으로 변질된 한국교회를 진정한 예수운동체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4) 자기기만과 이중성

싸르트르는 자기기만이야말로 나쁜 신앙(bad faith)이라 했다. 신학자 브루그만(W. Breuggemann)은 아주 진실하고 용기있게 자기기만을 폭로하고 있다. 그는 성직생활을 생각하면서 문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이해력이나 수용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고함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의 표현대로 ‘나는 부르주아인 나를 발견하고, 다른 누구보다 성직에 있는 내가 완고하게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배고프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다른 공동체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미래의 물결임을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는 진실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제들이다’(Purpel, 111). 그의 이 고백은 자기기만이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문제가 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이중성을 띠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맹용길 교수가 신학생들에게 ‘전도사라 부르는 것이 좋은가 목사라 부르는 것이 좋은가’ 물었다. 대답은 모두들 목사가 좋다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목사가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얼마나 기구화되고 이중적이 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한국교회가 썩어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는 ‘봉사하라,’ ‘순종하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높은 데 앉기를 바라고 그렇게 행동한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교회가 갱신되기는 어렵다. 목사가 먼저 완전히 깨어지기 전에는 교회는 새롭게 되지 않는다(맹용길, 124-125). 목회자의 이러한 이중성이 크게 드러날수록 한국교회는 신뢰성을 잃게 된다. 성직자의 자기기만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윤리적 생활을 강조하는 자기와 그것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자기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흔히 목회자에게 목회윤리가 결핍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에서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저항을 느낄 수 있다.

소설가 김재진은 종교계에서 일하는 바람에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도 종교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어 많을 땐 열댓명가량 성직이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성직자를 만났다는 기억이 별로 없다. 그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은 안하무인의 독선과 위선에 대한 씁쓰레한 기억뿐이다. 그는 성직자라는 신분을 빌려 제 인격의 결핍을 감추려 하거나 성직자를 가장해 각종 비리를 저질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보고 있다. 이것이 교회와 사회 사이를 갈라놓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성직자만이 공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김재진, 1997).

자기기만과 이중성은 목회자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한국기독교인 전체에 관한 문제이다. 한 기독교정치인은 ‘한국에 기독교인이 많지만 기독교윤리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한국기독교가 이중성으로 인해 이 땅에서 얼마나 기독교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지고 생명을 잃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5) 교파주의

한국교회는 현재 세포분열보다 심한 교파분열로 인해 교회에 대한 사회인의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다. 교파의 분열은 하나님의 뜻보다 교권주의, 권위주의, 감정대립, 신학교의 난립 등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을 앞세운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재 장로교를 표방하는 교단만도 한국에 120여개에 달하고 있다. 교단마다 자기가 정통이라고 말하고 있고, 다른 교단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기 때문에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연합과 일치보다는 분열과 질시와 냉대가 더 심하다. 어거스틴은 ‘분노가 갈대라면 미워하는 것은 나무와 같다’고 하였다. 한국교회가 미움과 질시의 나무로 가득차 있다면 그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기 어렵다. 믿지 않는 사람치고 이렇듯 갈라져 싸우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고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 지역에 교회에 서면 그 지역을 그 교회에 맡기고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마땅한 데도 한국에서는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여러 교회가 한 빌딩 또는 한 지역에 경쟁적으로 세워지고 있다. 교파가 다르면 백안시하려 든다. 이것은 목회자든 교인이든 도덕의식이 얼마나 상실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복음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일로 보기보다 목사들이 먹고살기 위한 상업주의적 발상으로 간주할 정도이다. 교회를 향한 사회의 시선이 그만큼 곱지 않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교단의 분열이 한국교회에 사이비종파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사이비종교가운데 상당수가 예수교 장로회 간판을 내걸고 있는 것은 그 보기이다. 이러한 모든 점들이 교회에 대한 사회인들의 인식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전도의 길을 막고 있다. 한국교회가 정체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비생산적 분열에도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앞으로 적어도 한국장로교회가 하나되지 않으면 안된다.

 

질적 변환을 막는 범세계적 사조들은 무엇인가

1) 대중문화의 확산

대중문화의 세계적 확산에 따라 종래의 영적인 가치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성과 속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거룩함이나 신성함은 사라지고 세속적 향락문화가 기존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도시는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변질되고 종교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현재 종교관은 대중문화가 주는 쾌락처럼 인스탄트식으로 변하고 있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관에 싫증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욕구를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그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보다는 재미나 매력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환생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보기이다. 종교는 교회가 아니라 대중매체에 의해 좌우되고, 목회자의 말보다 유명 배우나 예술인의 말들이 더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하는 욕망은 환각적 심령과학이나 사이비 종교의 출현을 몰고 온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39명의 집단자살을 몰고온 천국의 문(Heaven's Gate)과 같은 사이비종교집단은 자살을 유도하는 웹사이트에서 그들이 가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라 할지라도 사이비종교에 의해 영적으로 얼마나 세속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세속적 대중문화는 우리의 영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도덕적 책임감마저 상실하게 만든다. 이런 사회적 현상의 원인을 종교사회학자인 다니엘 에르비에는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라 보았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복음으로 사람을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사교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2) 상대주의와 종교다원주의의 확산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되면서 상대주의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만 인식해왔던 우리에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주고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상대주의적 인식확산은 종교에도 변화를 주어 특히 종교다원주의적 사고를 확산시키고 있다. 현재 구미교회는 엄청난 힘으로 밀려오는 여러 종교의 세력을 막을 수 없자 종교다원주의라는 신학을 개발하여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을가 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종교다원주의를 이단시하는 것으로 끝을 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거대한 흐름이 종식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종교다원주의는 한국기독교인들에게 종교적 차별성을 누그러 뜨리는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예측된다. 한국사회는 기본적으로 다종교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독교인이 불교도를 사탄이라 하고, 불교도가 기독교 신자를 망상교도라 말함으로써 서로 그 존재를 말살하려 한다면 법적의미의 신앙의 자유가 성립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국토 안에서 지방색으로 찟겨져 있는데 다시금 종교전쟁을 해야 한다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런 때일수록 기독교인은 더욱 더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하고 다른 종교인에게 적극적으로 바른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가 과연 무엇이 다른가를 인식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관념적인 종교가 아니라 생활의 종교로서 기독교의 참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종교다원주의 시대가 되면 전도가 어려워진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고,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에도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무조건 무시하고 거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이른바 대안신학(alternative theology)이 정립되어야 한다. 교역자들이 이 흐름을 외면한다 해도 교인들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이 흐름과 부딪히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신학이 제시해야 할 최종대안은  그리스도이다. 그분이 우리의 삶에서 궁극적 선택이 되도록 해야 한다.

3) 과학기술에 대한 맹종과 무종교 의식의 확산

우리는 논리적으로 완고한 사람들이다. 과학과 논리 그리고 철저한 사고의 길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과학적으로 논리를 정연하게 한다해도 과학과 기술을 넘어서는 가치와 도덕적 판단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과학의 많은 부분이 사실로서 증명되지 않은, 또는 증명될 수 없는 수많은 가정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대폭발(big bang)로 끝날 블랙홀(black holes)과 가설적 입자(quarks)와 같은 팽창하는 우주에 존재하는 신비한 힘들에 대한 논의로 현대의 신비주의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바로 현대의 물리학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 과학기술에 대한 맹종은 여전하다. 과학적 사고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에의 맹종이 때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과학기술로서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만연되고 있다. 이같은 생각은 과학기술을 숭상하고 또 기술만으로 행복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서서히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끝내는 하나님의 존재나 영원세계를 거부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보다 보이는 세계에 비중을 둔다. 현세적 가치관이나 편의주의적 가치관에 빠져들면 사회는 무종교적으로 전환되기 쉽다.

드러커는 컴퓨터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가 지나치다고 말한다. 컴퓨터 때문에 경영자들의 관심이 너무 회사 안으로만 쏠리는 경향이 있다. 기업의 중역들이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내부 데이터에 푹 빠져있다. 그들은 외부에는 신경 쓸 겨를도 마음도 없다. 그러나 항상 결과는 외부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중역들은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정보만이 최고라고 생각해 점점 바깥 정보에 대해 둔감해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중역들로 하여금 한 해에 몇 주씩은 외부로 나가 시장이나 대학연구소 등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권한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철학자도 등장하고 있다. 과학에 대한 맹신, 컴퓨터에 대한 맹신은 자칫 우리가 정작 신뢰하고 믿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 누가 과연 어두운 우리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둔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의 염려도 만만치 않다. 교회가 과학기술을 멀리해서는 안된다. 과학기술도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발견하고 만들어 낸 것에 대한 지나친 맹신으로 인간 자신을 과신하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4) 레저문화의 확산

한국 뿐 아니라 온 세계 교회가 레저문화의 확산으로 위기에 처해있다. 레저문화의 확산은 교인들의 관심을 교회보다는 자연이나 여행, 그리고 운동으로 바꿔놓고 있다. 과거 대부분의 교회들은 비록 교인들이 가난했지만 열심있는 참여와 합심기도로 놀랍게 성장했다. 엄청난 교회들이 많은 헌금으로 교회를 우뚝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교인들은 교회에 대한 관심보다 레저에 대한 관심에 집중되고 있다. 구미의 교회들이 쇠퇴하게 된 것은 주 5일 근무제 실시와 무관하지 않다. 직장이든 학교든 금요일만 되면 주말분위기에 휩싸이고 모두 며칠씩 여행갈 계획으로 마음이 분주하게 되면서 교회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영국의 경우 매주 교회를 찾던 사람들도 배에다 차를 싣고 프랑스나 스페인으로 가서 2-3주일씩 즐기다 오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교회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구미는 주 4일 근무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것은 교회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근무제도의 변경으로 휴일이 점차 확산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5) 탈교회화 사회의 도래

학교, 은행, 교회 등은 꼭 건물로 존재해야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지금 탈학교화(deschooling), 탈은행화(debanking), 탈교회화(dechuching)의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정보화사회가 빠르게 진척되고 가상사회가 도래하면서 그 움직임은 빨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학교나 은행, 그리고 교회의 기능조차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모습과 기능이 크게 달라질 뿐이다.

일찌기 일리치(I. Illich)는 탈학교화 사회(deschooling society)를 주장했다. 형식화된 학교교육으로는 인간된 삶을 실현시킬 수 없으므로 차라리 학교를 폐지하고 그대신 비형식적 자발적 교육체제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Illich, 1971). 기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폐쇄적인 학교교육에 대한 위기론과 함께 교육의 인간화를 주장하던 때였다. 라이머(Reimer)는 「학교는 죽었다」는 저서를 통하여 학교교육 사망론을 펴기도 했다. 그 때만해도 그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었다. 그러나 드러커(P. Drucker)는 대학은 사라질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30년 뒤 대학교는 유물로 남을 것으로 보았다. 현재 각 가정의 대학교육의 비용은 의료비용 만큼 올라가고 있으나 질적인 만족이나 향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등교육은 현재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우리는 벌써 위성과 쌍방향 비디오를 통해 더 많은 강의와 수업을 캠퍼스 밖으로 전달하고 있다. 인터넷이나 정보고속도로의 확산은 학교의 기능과 역할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교회도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C&C) 시대와 함께 놀랍게 변화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현재 인터넷에 이어 인터넷 II, 그리고 정보고속도로를 잇는 작업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고 있다. 현재의 웹싸이트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술들이 탈교회화를 재촉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것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술은 문제점을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빠르게 보완하면서 교회의 기능을 다양하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비하지 않는 교회는 그만큼 밀려날 수밖에 없다.

6) 사회구조의 노쇠화와 교회의 노쇠화

교회의 성장둔화는 한국교회만이 아니다. 드러커에 따르면 현재 유럽은 사회구조가 노쇠해 생동감을 잃었다. 유럽의 큰 문제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생률은 증가하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유럽교회도 노쇠현상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의 나라로 알려진 영국의 경우 1994년도 기독교인은 전 인구의 14%에 불과하다. 이가운데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는 교인은 10%를 밑돌고 있다. 가톨릭국가로 알려진 프랑스의 경우 전 인구의 7%만이 주일 미사에 참석한다. 벨기에의 복음적 기독교인은 인구의 0.5%에 불과하며 오히려 회교도가 더 많다.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은 이보다 낫기는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현재 유럽은 복음에 대해 저항적인 지역(resistant belt)으로 분류되고 있을 정도이다.

뉴질랜드는 10여전부터 교인의 감소로 교회운영이 어려워 대도시를 제외한 중소도시 교회가 교파와 상관없이 공동목회로 협력교회화되고 있다. 장로교인이 감리교인과 한 교인으로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 두 세 교파의 합동예배는 물론이고 네 다섯 교파와도 연합한다. 이런 현상은 호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교회가 교파주의를 초월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사회구조가 노쇠구조로 바뀌면서 교회도 노쇠현상을 보인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게 되면 이런 현상은 더 빨라질 전망이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는 바람에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교회가 소수의 노령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은 교회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구미 교회 상당수가 해마다 문을 닫는 현상은 우리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회가 상가로 변하고, 도서관으로 모습을 바꾸며, 첨탑에서 십자가상이 제거된지 오래다. 우리는 그런 현상이 구미에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보면 400여 한국교회가 해마다 문을 닫고 있다. 우리는 교회가 왜 외면당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고 그 문제를 근원에서부터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변환되어야 하는가

한국교회는 현재 사회에 힘을 주고 그 사회를 변형시키는 별난 집단이 아니라 수많은 종교집단가운데 하나일뿐인, 그리고 속인과 다름없는 물질적 욕심으로 가득찬 평범한 집단으로 전락하였다. 교회도, 목회자도, 교인도 신성함을 잃어버린지 오래며 교회에 대한 사회의 기대마저 사그러진지 오래다. 그 많은 교회와 교인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가치관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더 이상 변혁을 위한 에너지의 원천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교인도 그 실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태에서 한국교회의 정체는 당연하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면 사회발전에 다시 한번 그 변형적 가능성의 에너지를 투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이것에 집중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몇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자기중심적 가치의 과감한 상대화

한국교회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려면 지금까지 변형을 막고 있던 자기중심적 가치의식을 과감하게 상대화할 필요가 있다. 이 상대화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가치를 절대화하며 살아온 이중적 삶의 모습을 벗고 그것을 과감히 상대화함으로써 우리가 찾아야 할 원형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지금까지 제한된 특수집단의 이익에 신앙적 관심을 축소시켜 왔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내 교회만 잘되면 되었다. 교인들도 자연 나와 나의 집안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축소되었다. 교파는 교파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자기 이익을 위한 집단으로 전락되었다. 이것은 자기이익을 높이기 위해 기독교의 보편주의적 가치를 상대화시키고 이기적 가치만 절대화한 결과였다. 이제는 반대로 이기적 가치관을 상대화하고 보편적 가치관을 회복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이웃관을 보다 넓게 확장하고 기독교의 초월적 가치관을 확산시켜야 한다.

교회는 세속적 가치의 상대화를 통해 교회의 속성인 개방적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성경 속의 교회는 기본적으로 개방공동체(open community)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교회는 ‘나’라는 개념으로부터 형성되지 않았고 ‘우리’라는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동체였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동등이 되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유대인만의 공동체가 아니다. 인종과 성과 계층을 뛰어넘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이 가진 모든 이기성을 뛰어넘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자신의 것을 상대화함으로써 가능하다. 한국교회가 필요한 것은 바로 자기중심 가치의 상대화를 통한 그리스도 공동체의식의 회복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공동체 정신을 오늘에 실현해야 한다.

2) 교회의 갱신과 생명력의 회복

한국교회가 정체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원한다면 보다 성숙되고 갱신되며, 보다 역동적일 필요가 있다. 그 속에서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영국의 경우 교회에 열심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복음의 전성기에 영국인들은 교회에의 참여는 물론 매일 저녁 7시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설교자들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퇴근을 서두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썰물처럼 교회를 빠져나가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 교회가 대응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영국교회가 오랜 전통과 체제 위에서 매우 정교하고 전문화된 집단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교회가 자기도취에 빠져 있으며, 기존의  굳어진 틀을 깨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적은 한국교회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자기도취에 빠져 생명력을 잃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생명의 에너지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 철저히 자신을 낮춤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아니라 새롭게 거듭남으로 얻어질 수 있다. 이를 위해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공급하는 교회갱신운동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일어나야 할 이 운동잉 현재 제 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각성운동과 함께 말씀에 대한 갈증도 높다. 어떤이는 이것을 마지막 부흥의 물결로 간주하기도 한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 37)고 물으신 말씀이 이 세대를 향해 던져져야 한다(프래트니, 1997).

3) 사회문제를 치유하는 교회

생명의 복음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이므로 우리 사회에 드리우고 있는 죽음의 문화부터 제거하지 안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사회를 향해 보다 넓게 문을 열어놓을 뿐 아니라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치유하기 위해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교회가 치유하는 교회로서 이른바 동적 참여, 동적 지원을 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관심과 역할은 깊다. 초기에는 시민교육과 폐풍혁신으로 사회에 도움을 주었다. 교회내 교육활동은 물론 YMCA, YWCA, 태화기독교사회관,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가나안농군학교 등의 역할도 컸다(박영복, 1995).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를 보는 사회의 눈은 다르다. 오히려 사회적 역할에 있어서 천주교보다 뒤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변혁의 에너지원으로서 한국교회의 역할이 그만큼 축소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고 썩어져가는 사회를 다시 건강하게 할 사명과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사회문제에 대한 치유는 교회나 교인들 자신의 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세상이 이처럼 어둡고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돌아가 사회 속에서 소금의 짠 맛을 내는 일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 만연상과 관련하여 여러 교회에서 평신도성결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성도들부터 법과 원칙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올바른 가치관에 따라 성실한 노동을 통해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누리는 사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자연보호도 중시해야 한다. 가난한 자의 권익을 중시하고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 나아가 빈곤, 질병, 사회악, 전쟁 등 여러 세계문제가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기독교가 이룩한 성장은 큰 축복이고 장점도 많다. 하지만 교회가 사회에 대해 스스로 자만하여 안주하면 축복은 언제나 반대로 바뀔 수도 있다.

4) 열린 교회상의 정립

한국교회의 믿음체계는 대체로 보수성이 강하다. 믿음에 있어서 보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폐쇄성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보수성은 자칫 선민의식을 갖고 타집단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배타적이기 쉽다. 나아가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도 쉽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한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미래지향적이고 변혁적이며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볼 때 보수적 교회일수록 더욱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아무리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해도 교회의 본질을 잃거나 교회의 특성을 상실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즉, 교회가 하나의 세속기구로 전락하거나 세상과 쉽게 타협하는 교회가 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Berger, 22).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맹점을 깊이 인식하고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이원규, 86-90).

앞으로의 사회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화가 심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그 변화의 속도도 빠르다. 이런 속에서 교회는 보다 빨빠른 변화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교회는 무엇보다 변화를 창조적으로 창출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은 물론 구조적 변화가 잇따라야 한다. 교회의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말씀이 살아있으며, 예배는 더 이상 형식성을 탈피해야 하고, 교회활동 전체가 보다 생동감이 넘쳐야 한다. 사회관계에서도 적극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교회를 보는 시선들이 달라지도록 해야 한다.

변화하는 모든 과정에서 교회는 생명을 보전하는 이른바 복지목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을 말하며 복지목회는 그 생명력이 사회 속에 확산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으로 인해 사회환경이 변하고 가치체계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이 요청된다. 복지목회는 3순세기에 대한 비전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21세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염두에 둔 미래지향적 목회가 되어야 한다. 과거지향적이고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비전을 담은 목회가 힘있게 개발되어야 한다(맹용길, 127).

5) 진취적 가치관의 확립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 여러 형태로 사회참여를 하고 사회발전에 공헌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달라졌다. 한국교회는 사회를 향한 복음전파는 물론 사회의 부족과 필요를 채우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이 교육과 의료사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억압받는 자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억압받는 자의 이웃이 되어준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 땅에 이어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다.

사회참여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유교는 기독교보다 앞섰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교는 뚜렷한 역사의식, 적극적인 정치참여, 그리고 현실중심으로 기독교보다 앞서 나갔다. 그러나 이런 유교가 사회변혁의 이념적 배경이 되지 못하고 보수와 복고주의로 낙인받게 된 것은 과거지향적 태도 때문이다. 유교는 과거의 황금시대를 강조한 나머지 미래를 향한 돌파구를 마련해주지 못했다. 기독교는 유교보다 아주 늦게 뿌리를 내렸지만 역사에 대한 동적인 이해,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태도,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진취적 개념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 세 가지는 사회변혁에 큰 자극제가 되었으며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안겨주었다. 더구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침체된 한국사회에 새로운 변혁바람을 불러 일으켰다(박봉배, 242).

그러나 지금 이런 진취성을 교회가 잃어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적극적이기보다 소극적이 되어가고 있으며, 사회에 대해 어떤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동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과거역사에 안주하러 들고, 삶에 대한 적극성보다 현재에 만족하며, 미래에 대한 진취적 기상보다는 묵종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사회변화에 대한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며 사회변화에 따른 실천적 에토스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가 보다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면 교회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6) 예언자적 의식의 확산

교회 비판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인식이 목회자들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교회발전을 위한 목회자들의 여망과는 어긋나는 태도이다. 교회는 끊임없는 자성과 개혁을 통해 성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루그만은 문화의식을 크게 왕조의식(royal consciousness)과 예언자적 의식(prophetic consciousness)으로 나눈다(Brueggemann, 1978).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자만에 빠진 왕조의식보다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는 예언자적 의식이다.

왕조의식은 바로왕들의 집권기, 솔로몬시대, 미국의 현대문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선적이고 자기만족적인 타성에 빠진 정적인 교리의 절대화라는 특색이 있다. 왕조문화를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 경건한 척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정통성과 보호막을 제공하는 것으로 끌어들인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소수가 풍요로움을 누리고 다수가 억압과 착취를 받는다. 왕조의식은 지금 언제라도 비판을 멈추게 하기 위해 어떤 짓도 서슴치 않을 정도로 무력적이고 비판과 단절한다.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문화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약속에 의해 진지하게 힘을 얻을 수 없는 지친 문화이다. 왕조의식은 지나친 자신감과 자만으로 인해 변화할 수 없으며, 변화가 필요하다 해도 변화의 가능성조차 생각을 할 수 없다.

이에 반해 예언자적 의식에는 근본적으로 평등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에서의 정의와 애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의식에서 인간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의미있는 삶을 창조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새롭게 창조될 세계의 가능성에 의해 힘을 얻는다. 예언자적 이미지는 히브리인에 대해 지도력을 발휘한 모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사회, 곧 하나님이 약속한 정의에 기반한 삶의 방식이 통하는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길고 험난한 과정에 동참했다. 모세는 영감을 받아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곧 해방의 비전을 실현했다. 예언자로서의 그의 임무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민족에게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는 완고하고 강력한 통치자 뿐 아니라 오랫동안 압제로 인해 생각이 마비되어 이러한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려움과 회의로 가득찬 히브리 사회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적 상상력과 꿈을 과감하게 주장함으로써 자기민족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모세나 위대한 예언자들의 공헌은 비판과 정열을 공유함으로써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언자들은 우리의 결함, 좌절, 죄악들을 들춰내지만 그들 관심사의 신성함, 상상한 변혁의 아름다움, 비판의 예리함은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의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생각이나 그러한 삶의 창조와 관련된 참신한 통찰력, 열정, 그리고 강한 실천의지는 지배문화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이다(Purpel, 142-145).

한국교회가 보다 날카로운 비판, 눈부신 상상력, 거룩한 전망, 정의와 연민, 희망, 가능성, 실천에 기준을 두고자 한다면 왕조의식보다 예언자적 의식을 가져야 한다. 예언자적 의식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세계는 도덕적 비판과 도덕적 상상력이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미래에 보다 성숙한 교회가 되고자 한다면 타성보다 비판을 사랑하고, 안일보다 변화를 추구함으로써 삶의 양식에 대변환을 추구해야 한다.

7) 교회문화의 적극적 창조

기독교의 강력한 신념체계가 기존질서 안에서 변동을 유도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갈등을 야기시키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그동안 복음의 순수성이 변질될 것을 염려하여 한국 문화의 유기체적 생명 속에 아직 연결되지 못하고 문화초월적 입장에서 참된 만남을 이루지 못해왔다(김경재, 100). 이것은 교회가 문화 속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한국교회가 세속문화와 단절된채 복음의 순수성을 그대로 유지했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교회는 문화를 걸림돌로만 인식하지 말고, 비록 잠시 갈등을 빚는다 해도 성경적 문화를 세상 속에 바로 정립한다는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사회성원으로서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종합적으로 가르쳐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따라서 바른 교회문화의 확립은 미래 한국사회의 길을 닦는다는 것과 같다.

게츠(G. Getz)에 따르면 미국은 초기에 문화적 가치를 중시했다. 이 때 문화적 가치란 세속적 삶의 가치를 말한다. 그러나 문화적 가치가 성경적 가치에 눈을 돌려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 영적으로 큰 부흥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문화적 가치가 성경적 가치와 맞물리는 영역이 축소됨으로써 영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Getz, 367-370). 60년대는 개인주의, 실존주의, 독립주의가 맹위를 떨쳤고 그 뒤로도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 사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지금은 뉴에이지운동를 비롯한 온갖 대중문화들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게 한다.

교회적인 면에서 볼 때 환생신드롬 등 여러 사조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교회가 현대인들에게 꿈과 내세의 소망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문화의 탈종교화현상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에 주력하면서 문화적 사명을 게을리 해왔다. 그 결과 대중문화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잃고 있다. 이젠 성경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영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해 주는 활성운동이 필요하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제껏 우리 스스로 주역을 맡고자 했던 인간적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일하도록 자신을 맡기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프래트니, 285).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이라는 신조아래 성령을 갈구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한다. 교회가 먼저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 문화의 축을 삼을 때 사회전체가 변할 수 있다.

8) 통합적 인식과 변혁적 주체로서의 삶

웨스터호프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통합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경험적 길(experiential way)과 성찰의 길(reflective way)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통합의 길(integrating way)로 나아갈 것을 강조한다(Westerhoff, 109). 통합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게츠는 성경적 전망과 현대전략을 연결시키고 대사명, 역사로부터의 교훈, 문화적 함축관계, 현재적 필요를 유기적으로 엮는 모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Getz, 411). 이 모형은 기본적으로 교회에 주어진 대사명을 성경적 전망 속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역사와 문화의 전망을 통해 현대적 전략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사명       역사적 전망     문화전망      현재적 필요


원리와     성경적    활동과                    평가     현대    목표와
목적         전망      결과                             전략    목표대상

                                                                형식과 조직

         명령과 목적                                    자원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경험을 해왔다. 세계 어느 곳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을 이뤄왔다. 교인수, 교회수, 선교사 파견수 등 그 어느 것에서도 앞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사회와 분리되어 있고, 사회 속에 어떤 생명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교회는 정체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문제의 발생원인을 발견하고 활성을 찾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거론된 모든 문제들에 대한 통합적 인식과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3순세기는 많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교회는 이 변화에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서서 주된 변혁적 세력으로서 시대정신을 이끌어 가야 한다.

지금까지 극심한 문화변동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유지해야 할 삶의 형식과 본질적 속성이 있으며 특히 사회변형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구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것을 지키고 사회를 변혁시킬만한 힘을 잃고 있다. 이 능력의 상실은 교회의 정체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 스스로 영성을 회복하고 개혁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교회는 성장을 원한다. 그러나 성장을 위한 교회의 방법을 살펴보면 인간적인 방법이 대부분이다. 말로는 하나님의 방법을 택한다 하면서도 물질공세를 비롯해서 각종 회유와 인간적 자랑 등 세상적인 방법이 동원된다. 교회가 진정으로 성장하려면 인간적인 방법 모두를 버리고 성령이 일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열려져 있는 교회로 변혁되어야 한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세울 것을 바로 세워나가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를 주목하고 있다.

챈들러(R. Chandler)는 교회가 메인라이너스(main liners)와 사이드라이너스(side liners)로 구분되는 과정을 겪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프런라이너스(front liners)와 헤드라이너스(head liners)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다(Chandler, 1992).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면 앞으로 교회는 더욱 핵심교회(core church)와 주변교회(non-core church)로 나뉘어진다. 무사안일한 교회는 주변교회로 떨어져 나가고 보다 창의적 삶을 창출하는 교회는 핵심교회로 등장하게 된다. 주변부교회나 위성교회들이 언제나 중심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교회라 할지라도 새로 깨어나 사회를 이끌면 중심부로 이동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중심교회는 대형교회이며 그 교회의 지도자가 사회를 리드한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정신이 바르고 삶의 양식이 바르게 실천되면 중심적 역할을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사회관계의 모든 면에서 신선함과 성스러움을 회복해야 한다. 신선함과 성스러움은 유사가족주의나 물량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르고, 구조적으로 개혁되며, 우리의 삶에서 실천적으로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 능력을 회복하지 않는 이상 교회의 정체는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교회는 단지 역사를 이어가는 단선적 사고를 벗어나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거룩한 역사, 곧 독특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를 창조적으로, 힘있게 이어가야 한다. 이 성스러움이 한국사회에 빛을 발할 때 교회는 더 이상 정체의 늪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전진의 길을 달리게 되고 사회도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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