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아씨 아롱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목포의 눈물' 첫 절이다. 이 노랫말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향토가요 가사 당선작으로 발표된 1933년에도(문일석 지음), 이 노랫말에 곡을 붙인 대중가요가 발표된 1945년에도(손목인 작곡), 삼학도(三鶴島)는 아직 그 이름 그대로 섬이었다.

 

그러나 삼학도는 1968년 뭍과 이어지면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지금의 삼학도는 그 옛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진 것일 뿐이다. 남향교회는 삼학도에 있다. 시인이든 민초든, 목포 사람이면 모두 그 마음을 울렸던 삼학도의 옛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남향교회는 여전히 목포의 심중에 살아있는 그 어떤 정서의 한복판에 있다. 목포의 정서. '목포의 눈물'이 보여주듯 그 정서의 알갱이는 설움이 생성한 것이며 눈물이 굳어진 것이다. 이윤동 목사가 굳이 '목포의 눈물'을 끌어들여 남향교회 이야기를 풀어놓는 데는 그만한 깊은 속뜻이 있었다.

남향교회, 그리고 이 교회와 떼어놓을 수 없는 남도선교회에는 설움과 눈물의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이윤동 목사가 들려주는, 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은 하나같이 참으로 고단한 인생들이었다. 혹시나 당사자들에게 누가 될까 꼬치꼬치 전언하는 것은 삼가겠지만, 일부러 시나리오를 엮으려 해도 흔치 않을 만큼 그렇게 사연이 많은 이들이 모인 곳이 남향교회이다.

이윤동 목사가 목포의 거리를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보고서 그들을 끌어안아 남도선교회를 꾸린 해가 1988년 6월. 햇수로 치면 15년을 참 고단하게 넘겼다. 목포에서 삼학도에 산다는 것은 가다가다 더 이상 갈데 없어 눌러앉았다는 말이란다. 목포 그 자체가 이 나라 서남단의 항구 도시이며 열차의 종착역이 있는 '종착의 도시'라 부를 수 있다면, 삼학도는 끄트머리 목포에서도 또 끄트머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남 도청이 옮겨올 것이라며 요즘 한창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긴 하지만, 목포가 종착의 이미지를 씻기에는 인내가 더 필요할 듯하다. 갯벌을 메워 연륙도를 만들면서 형성됐던 무허가 판자촌의 흔적이 삼학도에는 여전했다.

 

정서적 종착은 지정학적 종착보다 더 무서울 것이다. 목포는 떠밀려 들어와 이제 더 이상 갈 데라곤 없는 막다른 곳이라는, 지정학적이고 사회심리학적인 종착의 개념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곳이다.

목포, 목포에서도 삼학도, 그리고 삼학도에서도 남향교회. 가난, 가정파탄, 이른바 신내림의 경험, 질병, 가족의 자살…. 남도교회 지체들의 기구한 삶들의 토막 토막을 구성하는 이런 단어들은 지정학적이고 사회심리학적인 '떠밀림'의 방향이 결국 이 교회에서 그 막다른 곳을 찾았다는 느낌이었다. 남향교회는 그렇게 모였다. 이 교회에 대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 운운하기에는 그 표현이 너무 밋밋할 정도이다. 치이고 떠밀린 이들, 기억과 마음과 몸에 잊고 씻어버리기에는 너무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이 그곳에 모여 산다.

그런데, 그 남향교회에서 치유가 일어난다. 상처 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 함께 살아가면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윤동 목사는 말한다. "은사로 치유되었다가는 재발하는 경우가 있다. 결국 치유는 말씀에 의해 함께 살아가면서 일어난다. 살아가면서 단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치유가 일어난다." 잠시 찾아들어 기적과 신유를 갈구하는 곳이기도원이라면 함께 살아가며 말씀으로 치유하는 남향교회는 그런 기도원과는 다르다.

끝은 출발이기도 하다. 떠밀려 들어온 이들이 끄트머리 남향교회에서 새로운 출발을 한다. 치유가 일어난 그곳은 이제 그 치유의 근원, 복음을 전파하는 강한 용사들의 전초 기지가 된다. 그러고 보니, 교회 이름이 ‘남향’이다. 종착의 땅에 세워진 이 교회는, 그럼에도,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도선교회는 이름 그대로 남도의 외진 섬들과 농어촌에 복음을 전하는 훈련받은 전사들의 공동체이다. 지난 1월 14일부터 나흘 남도선교회는 두 번째 '강한 용사 훈련학교'를 열었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바로 그 섬들로 이제 복음을 들고 다시 들어가기 위해 청년들은 무장을 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남향교회가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윤동 목사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남향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다가도 결국 남도선교회와 청년들로 돌아가고 만다." 그만큼 청년 복음 전도에 빠져있으니 남향교회 성도들이 푸념도 할만하다. 사실 처음에는 적잖은 "푸념"이 있었지만 지금은 성도들이 남도선교회의 사역을 이해하고 적극 후원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의 물자를 실어 내갔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의 현장, 목포항. 한국전쟁이 쏟아낸 난민들과 전쟁 고아들을 싣고 들어온 민족사 최대 불행의 목격지, 목포역. 그 절절한 '한'을 달랠 길 찾아 목포의 영혼들은 유달산을 찾고, 갓바위를 찾아 빌고 또 빌었다. 이윤동 목사는 목포의 '영적 도해(圖解)'를 "아직도 일제시대 신사까지 남아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만큼 목포는 치열한 "영적 전투"를 해야 하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목포의 눈물'을 '목포의 환의'로 바꾸어야 합니다." '목포의 눈물'로 에둘러 시작한 이윤동 목사의 목포와 삼학도와 남향교회 이야기는 '환희'로 마감됐다. 역사와 시대가 만든 목포의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고 그 한의 눈물 샘을 매울 것은 복음밖에 없다는 확신이었다. 그 확신은 15년 세월 목포의 상처받은 영혼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목포의 눈물'의 그 진한 맛을 제대로 보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윤동 목사는 대화 내내 "우리 애들"이었다. 그가 말하는 '우리 애들'은 남도선교회에서 훈련받아 낙도와 농어촌 외진 곳으로 복음을 들고 떠날 채비가 갖추어진 회원들이며, 남향교회 아래층 남도선교회 숙소에서 지내거나 그곳에 찾아들어 쉼을 얻어가는 청년들을 말한다. 함께 부대끼며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의 친밀감을 알 수 있는 말이다.

이 목사의 목회는 세련돼 보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거칠어 보였다. 이 목사의 표현대로 "떠오르는 대로, 이끄시는 대로, 화도 내고, 짜증도 내는" 목회이다. 그렇지만, 남향교회 성도들과 그의 '애들'은 실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사님의 화에도 짜증에도 관심과 사랑이 들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목사는 전직이 교사이다. 섬 마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밤하늘 아래 드러누워 별자리를 관찰하며 산 교육을 실천했던 교사였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산 교육자였다. 교사 시절의 그의 교육법은 선교회를 이끌면서도 그대로 발휘되는 듯 보였다. 훈련의 주제가 '그리스도인의 빛'이면 아이들을 홍도로 데려가 등대의 불빛을 보여주는 식이다.

대화에 동석했던 박혜원양(22)은 "목사님이 화를 내면 무섭다"면서도 "남향교회 지붕이 하나님의 품안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 역시 사연이 많은 청년인 박양은 지금 선교회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선교회 주방 전기밭솥 뚜껑을 이 목사가 열어보였다. 따뜻한 밥이 있었다. "누구든 와서 먹어라. 대신, 다음 사람을 위해 꼭 밥을 지어둬라." "설거지 잘해라"와 함께 이 목사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명령이다. 그래서 그의 '애들은' 하나님의 품안을 그곳에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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