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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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기독교
  • 김성근 목사
  • 승인 2007.09.15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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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 리처드 마우 저, 홍병룡 역, 2014-06-25(확대개정판), 194쪽, 10000원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이미 오셨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에 겪어야 하는 신자들의 긴장된 삶이 있다. 리처드 마우(풀러신학교)는 이 과제에 천착해 온 저자다. 그는 현재의 문화가 미래에 어떤 성격을 갖게 될까에 대해 관심이 있다. 신자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의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저서 중 국내에 소개된 <미래의 천국과 현재의 문화>에서 그는 현재의 문화의 기능이 변혁되어 미래의 천국에서 만날 것을 논했다. 후에 나온 <무례한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그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면서도 현재의 문화가 갖는 2차적 성격을 언급함으로(33면) 좀 더 분석된 입장을 취한다. 과연 신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

파편화된 세상 속에서 공손하게

알라스데어 맥킨타이어(듀크대)가 논증한 대로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파편화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마우는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파편화된 세상에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어떻게 신앙이 좋으면서도 불신사회에서도 존경받을 수 있나? 2007년의 한국교회는 말로만 사랑한다는 지독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신자들이 결코 쉽게 얻을 수 없지만 그런 만큼 쉽게 저버릴 수 없는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마우는 인내, 관용, 선의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이란 답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보이라는 파편화된 세상에게, 교회가 이 성품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신앙도 좋고 세상에서 존경도 받을 길은 교회가 교회되는 데 있다. 스탠리 하우어워즈(듀크대)의 교회론과 형식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의 최우선적이며 제일 목적은 바로 교회되는 데 있다.

여기까지는 비슷하다. 하지만 하우어워즈는 마우보다 조금 더 나간다. 교회가 바르게 살면 세상이 바르게 된다. 신자들이 옳고 선하면 세상이 그만큼 좋아진다. 문제는 신자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교회도 피해가는데 있다. 교회가 자기 자신을 바로 보면 세상도 바로 본다. 결국 교회의 할 일은 스스로 교회답게 하는 것이다. 마우는 교회의 교회됨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 가운데 지혜롭게 사는데 있다고 본다. 이 지혜롭게 사는 것을 마우는 온유하고 겸손하게, 공손하게 산다고 말한다. 파편화된 세상을 살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항상 떠오르는 예수님의 이미지가 있다. 호산나 찬송 받으며 입성하고, 채찍을 휘둘러, 성전(곧 그분 자신)을 청결하게 하신 모습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래서 교양있게

온유하고 겸손하게 공손하게 사는 태도를 마우는 교양이라 부른다. 혼동하지 말 것은 '모든 이에게 교양있게 대하라'가, '모든 이를 좋아하라'는 뜻은 아니다. 신자는 이렇게 살 수 없고 성경도 그것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동시에 마우는 신자가 공공영역(인도, 고속도로, 축구장, 공원, 백화점, 국회 등)에서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신자처럼 세상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신자들은 타자로서 타인, 심지어 세상 사람도 교양있게 대하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래서 온유한 관용의 자세로, 타인을 존중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신중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며 세상을 살아갈 때 신자로서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여기에 마우의 공식이 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에서 신실한 태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하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45)'

이 공식으로 살기 위해서 정책론이 제기된다. 하나님나라의 국내정책은 신자들 사이에서의 삶을 규정하고, 비신자들에게는 외교정책이 필요하다. 이 외교정책의 핵심이 교양을 지닌 시민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근거는 확실하다. 하나님의 창조물 아닌 것이 없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물을 그 주인을 생각하며 대할 때 무엇보다 말조심해야 한다. 심지어 예배시간에도 상소리가 오가기에 세상을 살면서 말조심하라는 마우의 지적은 뜨겁게 다가온다. 분노의 무서운 말의 성찬들을 규제할 지침을 교회는 경험해야 한다. 무조건 이기고 보려는 것이 교회의 태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야 말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살기 위해 마우 규칙이 있다. '자신의 동기를 엄격하게 점검하고 반대편의 진정한 인도주의적 관심에 대해 민감성을 개발한다(65)'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만연한 무례한 태도를 교정하려면 좀 더 정직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교양은 말보다 더 깊은 차원이며 이는 결국 실재를 보는 방식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결국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분의 임재, 곧 '품위있는 자리'를 의식한다(69). 이것이 지혜이고 율법이며 복음이다. 그래서 교양 있는 신자의 태도는 결국 마음에 달려 있다. 교양을 성화의 수단으로 보라. 그리고 세상 사람에 대해 감정이입하여 그들의 감성을 느끼도록 하라. 상당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 하기 보다, 하나님을 알듯이 타인을 알려고 하라.

너무 많다!

마우도 파편화된 다원주의의 포스트모던 세상을 살아가는 어려움을 안다. 그가 제시하는 기준이 있다. 첫째 세계관에서 다원주의 채택 불가, 둘째 문화관의 차이는 가능이다. 인종, 성, 지위 어느 것도 '본래' 우상인 것 이 없기에 신자는 문화상의 차이라는 실타래를 풀어가야 할 입장이다.

마우는 하나님께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그런 만큼 신자는 문화적 차이 자체로 인해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차이는 없애야 되는 것이 아니라 성화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타자된 현실은 좁혀진다. 하지만 이를 오용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현대의 문란한 각종 다양함에 대해서 마우는 멋진 말을 한다. '쓰레기가 무엇인지 알려고 도시 쓰레기통을 뒤지며 냄새 맡을 필요는 없다!'

타종교도 문화냐?

결국 거쳐야 할 질문이 있다. 왜냐하면 마우의 어린 시절 저 멀리 있던 선교지가 지금은 옆집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불선과 오천년을 어우러져 살아온 우리랴! 마우는 전도할 것이냐 대화할 것이냐를 대립시키기보다 상호보완적으로 통합하기를 원한다. 이를 가리켜 비기독교인과 정중한 대화에 열려 있는 전도지향적 기독교(114)로 규정한다.

마우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을 믿고 어디든지 두려워 말고 따라가는 차원에서 종교간의 대화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활동으로 간주된다. 번즈의 이론을 차용하여 마우는 이러한 대화를 타종교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일터에서도 적용하는 이를 '변혁해가는 지도자'로 부른다. 변혁적 리더십의 요건은 진심으로 타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가장 깊은 관심사에 대한 관점의 감정이입을 통한 열린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127). 진정한 마음으로 대화에 임하면 나도 변화된다.

공공영역의 중간지대에서

그리스도인이 타인에 의해 변화되고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치려는 열린 자세에는 고려해야 할 지대가 있다. 대화하며 동시에 법과 정책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우리의 비전에 순응하도록 강요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사적인' 확신을 우리 가운데서만 품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그 사이에는 '설득, 동기유발, 더 나은 삶을 위한 비강제적인 격려 등으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영역'이 존재한다(조지 윌). 중간지대다.

마우는 모든 것을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세상 논리에 휘둘려, 자신의 믿음을 '사적인' 영역으로 격하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세상이기에 그만큼 자신은 이 중간 지대에 서서 공공영역을 살아가는 신자임을 주장한다. 지치지 않고 심지어 교양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순간, 모든 대안을 숙고해 보았지만 우리 신념의 한계 상황에 봉착한 순간에도, 경청하고 갈등을 관리하고 집단적 의사결정을 하고 싶어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공동체의 분별력이다. 그러기에 주의깊게, 그리고 기도하는 자세로 공동체의 분별력을 구하지도 않고 '다른 한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대화를 중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란, 그들이 타인의 삶을 해치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대화단절을 요청하는 경우에 한한다. 그래도 모든 것이 은혜다. 정통 기독교의 신념이 강한 자는 더욱 공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생지옥을 자초하지 말고 하나님의 명예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옳다. 이때 마더 테레사의 관점이 중요하다.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점령군이 아닌, 오히려 애써 고난당하고 계신 주님과 동행하려는 태도이다. 그것이 신자의 승리이다. 내 이익을 내려 놓으라는 뜻이다. 그러면 존경을 받는다.

종말을 사는 삶에서

마우는 자신이 너무 많은, 지엽적인 하나님과 살아왔음을 안다. 너무 작은, 너무 흰, 너무 미국적인, 너무 서구적인, 너무 남성적인, 그리고 뭐든지 빠르게 처리해 버리는 하나님과 살아왔다. <무례한 기독교>를 쓴 때는 어느 가톨릭 여성학자의 지적에 따라 천천히 일하시기 좋아하시는 하나님을 알았다. 그것이 자신이 종말을 살면서도 공공영역에서 교양을 강조하면서 믿고 있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다. 굳이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메노나이트들의 신관을 따르지 않더라도, 느린 하나님의 관점은 하나님의 섭리의 중요성에 대한 강한 의식과 맥을 같이하며,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건전한 의식은 신념 있고 교양 있는 신자들의 삶에 필수적이라고 마우는 주장한다.

그래서…

맥스 스택하우스(프린스턴신학교)의 공공신학적 입장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마우의 저술을 읽으니 다시 공공신학을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 재벌기업에서 선정한 사원용 필독추천서 명단에 한 권의 기독교관련 서적도 없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공공영역에서 우리가 할 교양있는 소리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온유하고 겸손하게 세상 사람들의 외침을 듣고 우리의 소리도 들려줘야겠다. 동시에 한가지 계속 맴도는 질문이 있다. 그런데 (보이는) 교회는 공공영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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