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드러낸 궁극적 진실

▲ 제럴드 슈뢰더 저, 손광호 역, 하늘곳간, 2006-04-29, 248쪽, 10000원
왜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생명의 기원이나 진화에는 흥미를 느끼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이 의문은 간과하고 있다.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회의론자 또는 신자를 막론하고 물질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힘이 우주가 생기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 세상이 그 힘 안에 존재한다는 데에는 이해를 같이하고 있다. 이것만큼은 모두가 확신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만든 그 초자연적인 힘을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빅뱅 당시에는 모든 것-당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이 하나의 점이었다. 작은 에너지 덩어리 하나가 전 우주였다.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진공의 공간인 그 점이 바로 우주 전체였다. 그 자체가 외부이자 내부이며, 창조의 전부였다. 그 공간과 에너지가 뻗어나가 오늘날 이 세상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물질의 근본은 에너지이며, 물질이란 실상 에너지가 응축된 것'이라는 황당하게 여겨지는 사실을 밝혀내기까지 인류는 천년이나 걸렸다. 이제 그 물질을 이루는 에너지의 근본에 아무 실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려면 앞으로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신학과 과학 모두 실체의 본질을 알아내고자 하며, 이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를 찾아내길 원한다. 신학은 모든 실체에 초월적이고도 영적인 것이 들어있다고 본다. 과학은 1900년대 초엽에 시작된 경이로운 발견들을 기점으로 하여, 우리 육신을 포함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물질이 실상은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과,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에너지의 밑바탕에는 전적으로 비물질적인 정보가 들어있다는 인식에 근접하게 되었다. 그 정보를 영적인 것과 결부시키지는 않지만, 과학은 물질과 영적인 것 사이의 간격을 많이 좁혀온 것이다.

존재가 존재함은 놀랍고도 경이롭다. 우리는 존재에 있어 기정사실로 여겨온 부분이 너무도 많다. 많은 사람들, 특히 서구 사회의 피상적이고 물질적인 면으로 인해 종교에 소원해졌거나,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종교관에 젖어있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단일체가 과학뿐 아니라 성경의 핵심 개념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러한 단일체를 체험하는 것이 과학과 종교의 공통된 목표다. 종교를 떠나 과학을 생각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과학을 떠나 종교를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다. 계시와 자연은 창조의 두 가지 측면이다. 신학과 과학은 각자의 고유한 관점을 가지고 하나의 실체를 두 가지 모습으로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실체는 물질에 뿌리를 둔다. 이는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것이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수확하기 위해 우리 역시 아래에서 위로 일해야 한다. 삶이 번성하기 전에 영적인 것이 먼저 육신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일주일 중 육신이 가장 즐거운 날이면서 동시에 영혼이 가장 충만해지는 날이기도 하다. 신성이라고 우리가 이름 붙인 빛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직접 계시이다. 그것은 예언자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부분은 자연의 지혜에 숨겨져 있다. 이제 그 숨겨진 지혜가 발견되는 시대에 들어섰다. 막연하게 인식되어 온 우주의 다양한 모습들이 새롭고도 상상을 초월한 조화로운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서의 ‘양자의 불가사의함’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준다. 무엇보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자연 세계를 피상적으로 보면 하늘의 별이나 바위, 물 그리고 심지어 삶과 죽음이 서로 이질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본질은 하나임을 알게 된다. 우주의 네 가지 기본 힘들(중력, 전자기력 그리고 강력, 약력으로 불리는 핵력) 그 자체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 힘들 덕분에 우리는 안정되고, 질서정연하며, 생명체에 대해 우호적인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이 세계는 경탄할 만큼 통일된 현상 그 자체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우주는 어쩌면 이토록 지혜롭고 일관성이 있는 것일까? 과학만으로는 답을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형이하학의 세계 안에서 형이상학을 만나는 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여러 모습의 내가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도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초자연의 세계일 것이며, 세상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지혜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과 초자연이 이 모두를 포괄하는 하나의 존재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생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마치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그 그림자를 만든 훨씬 큰 실체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과학은 그 더 큰 실체의 일부를 발견해 왔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통해 우리는 물질 안의 초자연적인 흔적을 발견하였다. 배가 지나간 흔적을 보듯이, 우리는 '신의 숨겨진 얼굴'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숨겨진 얼굴은 집합된 단순성에서도 정말로 위대하다. 마침내 우리는 행간에 숨어있는 문장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이 행간의 무장은 기록된 글들이 암시하고 있었던 비밀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비밀스럽고 일부에게만 열려진 과학의 세계를,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며 인도하는 사려깊은 유신론 과학자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슈뢰더 박사의 본서는 서두에는 과학으로 시작하여 말미에서는 인간의 마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책은 물리학과 생물학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창조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를 시도한 책으로 과학과 신앙은 창조주를 드러내고 밝히는 동역자로 보고 있다. 사실 이 책은 창조주에 대해서 집요하게 추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내를 가지고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분에 대해서 경의와 두려움으로 감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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