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걸고 쓴 신앙고백서

 

▲ 테아 반 할세마 저, 강변교회도서위원회 역, 성약, 2006-06-30, 165쪽, 5000원

너무나 쉽게 이단설에 현혹되는 까닭이 너무나 얕은 우리의 교리 교육에 있지나 않을까. 이를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성마른 교리주의자'라며 교리교육을 무시하는 세태에 대고, '자세를 가다듬고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의 역사를 보라' 권하는, 짧지만 유익한 책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를 소개한다.

1566년 5월 14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회의장 한가운데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을 마주보고 섰다. 그를 증오하는 제후들과 그에게 소극적이나마 동감을 가지고 있는 제후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폐지하지 않으면 "제국의 평화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황제의 판결이 이미 내려진 뒤였다. 이제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선택만 남았다. 그가 답할 차례였다.

"황제 폐하, 저는 만주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오직 한 분의 주님만을 신앙과 양심으로 인정한다는 확신을 견지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다루고 있는 이 문제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과 영혼의 구원에 관한 문제, 곧 저의 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영혼의 구원에 관한 문제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저에게는 그분의 진리를 수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 이 요리문답은 저의 부인할 수 없는 믿음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1521년 4월 18일 마르틴 루터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섰다. 루터는 그가 쓴 신앙저술들과 가톨릭비판서들과 개인을 비판한 글들을 취소하라는 회유 또는 압력에 답할 순간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습니다. … 나는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요 또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막시밀리안 황제 앞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45년 전 카를 5세 황제 앞에 선 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외쳤던 사도 바울을 떠올리게도 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신학자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명을 받아 작성했음.'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설명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빠지지 않는 이 간단한 정보에 등장하는 세 사람에 대해, 우리는 역사의 무지에 기인한 편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도로 신학적인 학자 두 사람이 순전히 신학적인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용의주도하게 교리서를 작성한 다음, 관례에 따라 아니면 어쩌면 권력자에 대한 아부근성으로 선제후에게 헌정했겠거니…' 이렇게.

부끄럽게도, '문답형식의 딱딱하고 건조한 교리서'라는 요리문답에 대한 일반적 인상과 편견에 빠져 우리의 신앙고백서의 역사 뒤에, 살아 숨 쉰 경건한 인간들과 뜨거운 신앙의 열정들이 있었으리라곤 짐작도 못했다.

북미기독교개혁교회(CRC) 출판사에서 1963년에 나온 테아 반 할세마 여사의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어드만 출판사에서 1961년에 나온 같은 저자의 '영광스런 이단자 : 귀도 드 브레 이야기'가 우리말로 옮겨져 한 책으로 묶여 나왔다.

앞의 책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이 태어난 역사를, 이를 만든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와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 세 사람의 하나로 얽힌 삶을 중심으로 풀어간다. '경건한 사람'이라 불렸듯이, 프리드리히는 선제후로서의 권력과 호사를 마다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자신의 팔츠 영방의 교회를 개혁하려 했다. 프리드리히의 부름을 받아 팔츠의 수도 하이델베르크에 온 올레비아누스는 일찍이 개혁자 존 칼빈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제네바로 갔었고 그곳에서 칼빈의 동역자인 테오도르 베자와 윌리엄 파렐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고향 트리에르로 돌아와 설교로서 종교개혁을 주도하다가 그곳의 대주교에 의해 투옥된다. 감옥에 있는 그를 구해내 하이델베르크로 부른 이가 바로 프리드리히다. 또 한 사람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는 개혁시대의 또 한 사람 걸출한 인물인 필립 멜란히톤의 제자였다. 저자 할세마 여사는 이들 세 사람을 중심으로 당시 독일의 가톨릭-루터파-칼빈파 사이의 갈등과 그 이면에서 황제와 제후들 사이에 벌어진 복잡한 갈등의 역학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공교롭게도 북미기독교개혁교회가 올해 총회에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의 제80문답을 '괄호에 넣기로' 했다. 가톨릭 미사를 비판하는 이 문항은 더 이상 그네 교단의 신앙고백으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결정이었겠지만,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이 태어난 16세기 독일의 저 생생한 역사마저 너무나 쉽게 괄호 안에 묶여버리고 마는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남는다.

'귀도 드 브레 이야기'는 네덜란드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을 만든 귀도 드 브레의 삶과 이 신앙고백서 때문에 결국 교수형을 당하고 마는 그의 순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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