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원 저, 살림, 2003-04-06, 306쪽, 10000원

이른 아침 상쾌한 대기와 즐거운 새 소리와 어울려 만나는 이들은 다들 착한 이웃이다. 도시 감이 안 오는 진짜 엄청난 돈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한 그 돈 잘 버는 미국 사람 투자가도 착한 마음을 가진 이일 게다. 아마도 인간(성)에 대한 가장 박한 평가를 내리는 캘빈주의자들도 일상의 삶에서는 참 많은 착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또 왜 이럴까? 아래윗집 사이에 소음이 다툼이 되고, 폭력마저 불러온다. 주차시비로 이웃이 낯을 붉힌다. 생명을 가꾸는 선량한 농부의 손에 때로는 쇠파이프가 들려진다. 열심히 일하는 보통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내 모는 자본주의의 냉혹함과 그 메커니즘을 기막히게 잘 간파해 상상 초월의 부자가 된 워렌 버핏이 겹쳐지는 순간, 우리 돈 수십 조 원을 선뜻 자선사업에 기부한 이 착한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잠시 머뭇거려진다.

착한 사람들이 사는 나쁜 세상이다. 선한 인간들이 만든 악한 사회이다. 이 부조화, 이 불균형, 이 불일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엄청난 간극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러한 인간관과 사회관이 요구하는 실천적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기독교 사회윤리학자로(만) 알고 있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먼저 탁월하고 힘 있는 설교자요 목회자였다. 니버의 윤리학은 사실 자동차 공업 도시 디트로이트의 목회현장에서 나온 것이다. 목사 니버가 목양한 이들은 누구였고, 그 도시 디트로이트는 어떤 곳이었던가? 산업사회로 치닫는 미국에서도 자동차 공업으로 더 한층 인구증가와 도시팽창의 속도가 급속했던 디트로이트는 실업자와 일용직 노동자와 정규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과 중간 간부들과 기업가들이 촘촘한 그물망을 엮어가던 도시였다. 그곳은 인간의 명멸과 부침이 끝없이 되풀이 되는 도시였다. 그의 교회에는 일자리를 잃어 낙담한 블루칼라도 있었을 테고, 막 승진해 행복에 겨워하는 소시민 블루칼라도 있었을 것이고, 신흥도시의 신흥부자들과 자본가의 편의를 봐주던 관리들도 보였을 것이다. 니버는 그 도시에서 목회했다. 그 도시의 그들을 목양했다.

그에게는 간단치 않은 문제가 있었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기업가 헨리 포드가 고안한, 포디즘으로 대표되는 대량생산방식은 부의 사회적 총량은 급증시켰지만, 그 그늘에는 대량해고와 공장폐쇄와 노조탄압이 있었다. 니버는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의 현실에서 산업사회의 비인간화를 목격했고, 이를 교정하기 위해 또한 실천했다. 실업자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고, 기업가들의 편을 들었던 디트로이트 상무부에 맞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했고, 파업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비상위원회를 주도했다.

우리가 머리로만 아는 그의 사상은 디트로이트에서의 목회 체험이라는 현실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목회와 설교는, 여성 흡연과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내면서도 부유한 청중들이 가진 경제적 편견들은 바꾸지 못하고 주식조작으로 부를 축적하는 부도덕성을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돈을 헌금으로 내도 이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목사들에 대한 실망과 비판(<길들여진 냉소주의자의 단상>, 1929)으로 스스로를 가다듬어 나온 것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서 그의 윤리학은 어느덧 사회복음주의의 피상성(naivete)을 비판했다. 그에게 사회복음의 주창자들은 "인간과 사회의 깊은 죄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채 산상수훈을 그저 실천하려 했고 이를 통해 불의한 사회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순진한' 이들로 보였다.

이러한 체험과 비판에 터한 것이 바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였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유럽에 끼친 영향에 필적하는 영향을 미국에 끼친 역작으로 평가되는" 이 책에서 니버는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개인의 도덕에는 사랑의 규범이 적용되지만 집단의 또는 집단 간의 도덕에는 정의의 규범, 곧 힘의 균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랑의 규범을 사회구조에 적용할 수 있다는 신념에 가득 찬 평화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로서는, 이런 주장을 하는 니버는 냉소주의자요 염세주의자요 패배주의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니버가 보기에는 그들이야말로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비현실주의자요 자기도취에 빠진 위선자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니버에게, 제국주의적 야심과 인종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혀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가고 유대인을 전멸시키려 드는 히틀러를 보면서도 미국의 참전을 사랑의 규범을 범하는 행동으로 비판하는 완전주의적 평화주의는 "잔인한 평화주의"일 뿐이었다("무도한 폭정이 승리하는 것을 위하여", 1940).

인간의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에 뿌리내려 가지를 뻗어간 니버의 사상은, 1939년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 가운데 했던 에든버러대학교 기포드 강연과 이를 책으로 엮어 기독교인간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게 되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 1941, 1943>으로,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이론을 다룬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 1944>로 열매를 맺었다.

이 두 권의 명저에서 니버는 하나님의 현상을 지닌 존재로서 자기초월을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도덕적 존재요 빛의 자녀들이기도 하지만 또한 교만에 빠지기도 하고 이기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어두움의 자녀들이기도 한 본성을 지닌 인간을 드러냈다. 인간은 정의를 실현해도 그것은 부분적이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늘 인간의 이러한 본성은 제도적으로 조절되고 견제될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 이 일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제도는 민주주의라고 그는 간파했다.

그의 사상을, 너무 서둘러, 자유주의니 신정통주의로 덮어버리고 말아, 알고 이해하고 또는 배울 기회마저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신학도이나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이상원 교수가, 사상적 편견에 기인한 '라인홀드 니버 몰이해'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 책을 썼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니버의 이해와 인간이 만든 사회에 대한 라인홀드 니버의 성찰은, 이상원 교수의 아주 절제된 평가에 준한다 하더라도, "성경과 종교개혁의 인간론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목소리 돋우면서도 기실 그 인간이해나 사회.문화관을 보면 천박한 낙관주의에 기댄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 성공과 행복만을 무차별 선포하는 이들에 견주면, 인간본성의 양면성에서 그 가능성과 한계성을 고민하고 실천했던 니버의 "부분적" 개혁주의가 외려 더 진실하게 울린다.

포드 자동차의 디트로이트의 목사 '라인홀드 니버'에 그와 동시대를 살며 포디즘의 노예요 부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현실을 풍자했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이 겹쳐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상원 교수가 쓴 평전 <정의를 추구한 현실주의 윤리학자 - 라인홀드 니버>를 읽고서 그와의 동감이 형성되었다면, 이제, 현대산업사회의 비인간화를 고발하는 채플린의 블랙 코미디 필름 '모던 타임스' 한 편 감상하고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인간>이나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을 읽어보자.

그런데, 니버의 디트로이트의 또 한 사람, 포디즘의 원조 헨리 포드 역시 말년에는 그의 재산을 사회복지 재단에 기부하지 않았던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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