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존슨 저, 김한성 역, 포이에마, 2014-08-04, 1064쪽, 45000원

아리엘 샤론이 뇌출혈로 의식불명에 빠졌다. 통곡의 벽에서는 총리의 완쾌를 비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이들까지도 적국 우두머리의 불행에 환호하고 있다. 외신의 한 장 사진이 보여주는 현실의 이 극명한 괴리에, 영 마음이 불편하다. '불구대천의 원수라 수없이 되풀이 교육 받았겠지만, 아이들까지….'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 현실의 밑바닥엔 저 깊은, '원한'이라는 이름의 역사의 퇴적층이 미동 없이 엄연하다.

팔레스타인 인민들이여, 차라리 '망각'이 낫지 않을까? '당한' 역사를 기억하여 '되갚아' 줄 날만 심중에 꼽고 있을 바에는.

이스라엘 시민들이여, 역사의 기억을 그 어느 민족보다 막중히 여기라, 가르치는 당신들의 '토라'가 갑자기 섬뜩하다. 이름하여 '기억과 이름'(야드바셈)이라 했던가. 나치에 학살당한 동족의 이름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들려주던 그대들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오늘은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복수를 부추기는 게 기억 아닌가?' '누대에 원한의 씨앗을 심는 게 기억 아닌가?'

▲ 폴 존슨 저, 김한성 역, 포이에마, 2013-07-30, 892쪽, 35000원

두 권의 역사서를 앞에 두고 있다. '유대인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이다. 아브라함부터 대략 4000년이라는 장구한 유대인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2000년을 지나온 유구한 기독교의 역사가 내 앞에 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깊은 '회의'의 감정이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다. 더 정확히는, 역사를 다루는 우리, 역사를 다루어 온 인류의 방식에 나는 지금 질문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 짐짓 잊어버린 역사가 있고 자못 강조한 역사가 있다. 역사가, 역사가 아니라 정치가 되었다. 유대인의 역사는 이스라엘 극우 정당엔 정치 이데올로기로 더 가치 있고, 아랍 세계에는 유대인의 역사란 조작된 역사, 마침 요 얼마 전 이슬람 근본주의자 이란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딘이 그렇게 말했듯이, 신화에 불과할 터이다.

가해자로서 분명 부끄러운 '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며 반성할 수는 없을까? 피해자로서 실로 억울한 '나'의 역사를 기억하되 용서할 수는 없을까? 어떤 이데올로기나 편견도 내리누르고, 심지어는 신학이나 교리의 창도 잠시 열어젖히고, 정직한 지성과 투명한 영성으로, 역사를 역사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나는 지금 이 질문을, 오늘의 유대인들, 가자지구 유대인 정착촌에서 강제 퇴거되면서 '시온'을 부르짖던, 왜곡된 피해의 역사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저 이스라엘 '시오니스트' 시민들에게 던지며, 그들에게 호소한다.

나는 이 질문을, 오늘의 아랍인들,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과 여성들까지 동원하여 자살 테러를 서슴지 않는 저 팔레스타인 인민들에게 던지며, 호소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나는, 현실 이스라엘 국가와 성서의 이스라엘을 등치하여 중동문제에 관한 한 공정한 잣대를 쓰지 않고, 맹목의 이스라엘 편들기에 나서는 '크리스천 시오니스트들'에게 던지고, 또 호소한다.

어떤 역사 담고 있나

인문, 종교, 역사에 관한 30종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폴 존슨은 '기독교의 역사'를 집필하다가 '유대인의 역사'를 알아야 함을 절감했다 한다. 그만큼 시차를 두고 따로 나온 책들이지만 그의 두 책은 하나의 큰 틀을 가지고 있다.

'성경속의 유대인' -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의 부제를 달아 이어지는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는 여느 '시온주의' 역사서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그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괴팍한 가설을 들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서 유대인에 대한 동감과 그 만행의 가해자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그의 태도는, 이설이나 새로운 해석 취향을 가진 이들의 기대에는 못 미치겠지만, 확실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이면을, 아니 이것은 이면이 아니라 가려놓고 잘 보지 않던 역사 그 자체일 것인데, 역사의 피해자가 또한 역사의 오류자가 되기도 한 진실의 역사를 기록한다.

'유대인 대학살 - 홀로코스트'가 앞의 것이라면, 시온주의에 대한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려는 그의 애씀이 느껴지는 제7부 '시온'은 뒤의 것에 해당한다. 이쯤에서 자기성찰의 역량을 갖춘 유대인이라면, 아랍인들만을 마냥 테러리스트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종교의 탄생' - '유럽의 문명을 만들다' - '세계의 정신이 된 기독교'라는 부제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역사'에 이르러, 폴 존슨의 역사를 대하는 냉정함은 앞서의 '유대인의 역사'보다 더 강해진다. 특히 세계 기독교회의 최근세사라 할 수 있는 이 역사서의 마지막, 제3권의 제8부에서 그의 시각은 날선 검이 된다. 교황 또는 교황청의 권위에 집착한 로마가톨릭이나, 세계대전 앞에서 무기력하고 이기심 가득한 추한 모습을 보여준 기독교회를 그는 조금도 봐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쯤에서 막을 내려야 할 기독교의 역사가 그의 말대로 2000년 "세계의 정신"으로서 그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까닭을, 아마도 폴 존슨은, 미약했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했던 저 '나치에 저항했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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