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이 무슨 신학에 다시 주목하느냐,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신학교에서 다 배웠다고 자신해서이거나, 신학교에서 신학 책 놓고 씨름하면서 질려버린(?)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대부분 목회가 바빠서일 것이다. 심방하고 설교준비하고 교회 건축하며 교회 성장 세미나에 참석하느라 바쁘고 지쳐있는데, 신학 논문이나 신학적 글을 대하는 것, 신학적 주제를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가 주창한 평생 교육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배우며 살아간다. 목회자들이 계속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학생 때 배운 것 모두가 지금 쓸모없게 되어버렸다고 해서가 아니다. 어떤 것은 물론 완전히 뒤바뀐 것도 있지만, 수정된 것도 있고 업데이트 된 것도 있어서이다. 아니면 몇 년,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그 본질을 되새겨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이다. 또 아니면 오늘과 십 수 년 뒤, 혹은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 통찰력을 제시하는 미래학적 지식도 제공하기도 해서이다.



여기서는 엘빈 토플러처럼 예언자적인 통찰력을 제시하지는 않아도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그 신학적 본질을 다시 한 번 주목하고자 한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의 목회자들에게 아마도 좀 '여유의 목회'가 될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다음의 신학적 아이디어는 성도들과 '함께' 목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그동안 우리는 너무 바쁘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었다. '내'가 없어지면 쉬운데, 우리는 그 방법을 몰랐던지, 아니면 못 배웠던지 이다.
신학적 원리는 간단하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라는 의식이 그것이다.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면 실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많은 한국의 목회자들에게는 '실제로' 정말 새로운 것이다. 또한 한국의 성도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우리의 습관적 의식 때문이다. 공동체는 개성을 온전하게 인정하면서도 전체 구성원과 친밀한 소통을 하도록 하게 하는 것인데, 우리 민족은 전체 안에서만 개인을 찾는 '집단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다. 최근(2007년 4월 16일) 미국 영주권자인 조승희 씨가 저지른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대량 살상 사건을 놓고 미국의 교포들이 상당한 죄책감을 느낀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심지어 한국의 우리도, 범인이 다른 나라 국적의 사람이길 바랐던 점에서 우리가 민족주의적 집단주의 성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던 한 사람의 행동이지 전체 한인들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다른 정상적인 개인들은 범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단순히 혈연이나 지연, 학연으로 하나의 느낌과 행동을 하면서 구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철저하게 개인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권리와 능력을 보장한다. 물론 이는 개인주의처럼, 다른 사람과의 친밀한 사회적 행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공동체는 개인의 인권과 독특한 은사를 존중하면서도 각각의 개인은 한 모임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사랑 안에서 상부상조하며 상호 의존적 관계를 통해 자아를 성취하는 것이다.
교회가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개 교회 안에서 등록된 성도들 모두는 각 개인의 고유성과 그 은사를 존중하면서 이들 모두가 사랑 안에서 상호 의존적 교제를 나누며 하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교회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는 위계적 구조가 일반적이어서 각 성도들의 은사가 주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는 자연적으로 권위주의적 목회가 자리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개인이 속한 그룹 안에서 상호의존적 관계를 중시하였다.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어떤 연유에서 발생되었든)파산한 개인에게 책임이 주어져서 가난 혹은 종살이를 겪는 것을 허용하였던 동시에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통해 이들을 하나의 '가족' 구조 아래에서 해방시켜주거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들의 공동체적 삶은 신약 시대에 더 분명하게 된다. 신약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러한 공동체적 교회의 구조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코이노니아 교회가 그것이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나타난 유무상통의 구조(공산주의가 아님은 이미 상식이어서 언급을 절제함), 그리고 인종적 성적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는 하나의 교회(갈 3:28)를 명령한 것에서 드러난다. 특히 바울이 교회를 '몸'으로 비유한 것은 공동체 교회를 가장 잘 제시한다. 신체의 각 기관이 고유한 기능을 온전하게 하면서도 다른 기관과 유기체적으로 연합되어 있듯이 교회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공동체적 교회를 가장 잘 이해하는데 하나님의 인간 창조 이야기가 큰 도움을 준다. 창조 사건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였을 때(창 1:26) 이는 인격적이고 상호의존적 공동체로서의 삶을 기원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인격적이라 함은 (스코틀란드의 철학자인 존 멕머레이가 제시한 바와 같이) 관계성을 전제한다. 사람이 혼자여서는 참 인격과 자아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통해 그의 진정한 고유한 자아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더불어 교제하는 관계를 통해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는 점에서 인간에게서 공동체적 본질이 발견된다. 이를 하나님은 '부부 관계'를 통해 구체화 하셨다. 아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였다(창 2:18). 그래서 남녀 부부로 만들어 '한' 몸이 되게 하셨다(창 2:24). 아담과 하와는 각각 '평등한' 존재이면서도(각각의 존재는 고유한 인권과 능력을 가졌기에),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상호의존적 존재임을 보여준 것이다. 바울의 몸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창세기에 나타난 인류의 공동체적 본질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죄로 인해 이러한 공동체적 본질을 상실하였고, 이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위계적 관계로 만들고 서로를 필요로 하기 보다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어 자기중심적 삶을 살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왜곡된 우리 삶을 다시 창조 당시의 상태로 원위치 시키고자 하였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는 없어도 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이를 증거한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들도 하나'가(요 17:11, 21) 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에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 우리 피조물이 가져야할 모델임을 알게 된다.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각 고유한 권한과 능력을 지니면서도(그러나 독립적으로 계시지 않고) 무한한 사랑 안에서 상호 의존적으로 서로를 인정하며 용납하며 존중하는 삶을 사신 것이 그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 모델이다. 공동체적 하나님 말이다.
이를 우리 교회에 적용한다면 이것이다. 첫째로, 교회(목회자)는 평신도들을 존중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이들과 동역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들로서 고유한 능력과 은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자기 자리를 찾도록 목회자들은 도와주어야 한다. 둘째로,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상호 의존적 관계를 훈련하여야 한다. 개인적 축복 지상주의로 나아가게 하는 기복신앙을 버리고 공동체적 축복 의식을 진정으로 구가시킬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바람직한 교회 구조는 많은 소그룹들로 구성된 교회이고, 그리고 그것들이 '가족교회'(졸저인, 부흥, 어게인 1907:유교적 가족주의를 극복할 공동체 교회가 답이다’를 참조) 형식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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