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죽지 않고 천국에 갔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죄가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받들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며 동행했다.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모시고 동행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과 연합된 동행의 삶을 살았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 성부 하나님과 동행하셨다(요 8:29). 

코로나 19로 위축된 성도가 살아날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나 혼자 살면 제한된 나 혼자의 힘으로 버티다가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돌파하고 승리할 수 있다. 노아가 살았던 시대는 경건한 셋의 후손들마저도 성적 타락에 빠지고 가정이 붕괴되는 시대였다. 네피림은 히브리어로 타락한 자들이라는 뜻이고,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에는 거인들(기간테스, 영어로는 자이언트)로 번역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체격과 힘을 가지고 약자에 대해 무차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한 자들이었다. 노아의 시대는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 사회 전체가 전적으로 부패했던 시대였다. 그 가운데서도 노아는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였다. 그가 의인이란 것은 절대적 의가 아니라, 상대적 의를 가졌다는 뜻이다. ‘완전한 자’는 히브리어 ‘타밈’인데 70인경에는 ‘텔레이오스’로 번역되었다. 즉 성숙한 자이다. 신앙이 성숙하고 인격이 성숙한 자였다.

온 세상이 죄로 오염된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그런 의로움과 성숙함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창세기 6장 9절에 나온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렇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죄악을 이기고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 이 시대는 목회자도 성도도 큰 위협 앞에 서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큰 위협이라 해도 노아시대 만큼이나 위협적일까? 그렇지 않다. 코로나19로 인한 종합적인 위기, 반기독교적 문화와 세력들에 의한 위기가 크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동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헨리 모리스 박사는 그의 <창세기 기록>이라는 주석 제157쪽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교통을 하는 것이다. 이 동행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가능한 특권이다”라고 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동행이다. 이것은 노아 시대만 아니라, 우리 시대 성도에게도 주신 특권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동행 질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지금 제 생각이 하나님 뜻에 맞습니까? 하나님, 지금 제가 하려는 말이 하나님 뜻에 맞습니까? 하나님, 지금 제가 하려는 행동이 하나님 뜻에 맞습니까?” 이 질문을 오전과 오후에 각각 20번 이상을 던지도록 해보라. 중요한 일 앞에서 꼭 던져보라. 하나님 뜻에 순종하므로 동행하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실천해 본 결과 내면세계가 더욱 성결해지고, 삶에 성화가 더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총회는 확장된 교회이다. 총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총회는 공교회로서 많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총회에서 일하는 모든 목사와 장로도 교회다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대안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동행 질문을 던져야 한다. 총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에 대한 정답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제106회 총회가 벌이고 있는 기도운동은 진지하고 간절하고 뜨겁다. 그 주제가 ‘은혜로운 동행’이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과 은혜로운 동행을 해야 하고, 그 은혜로 총회 안에서 섬기는 모든 목사, 장로, 직원들과도 은혜로운 동행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개혁신학을 개혁신앙으로 실천하게 될 것이다. 총회와 총신과의 문제에 대한 해답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며 대화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풀어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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