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밥맛이 없어요. 먹고 싶지도 않고, 그냥 묵는 둥 마는 둥 해요.”

코로나19 난리 통에, 못 만난 장인심 권사님(소록도 신성교회)의 전화 목소리가 힘이 없다. 팔순 고령이라 기력이 쇠했을 것이지만 어쩐지 짠한 생각에 마음이 시려온다.

성탄절에 서울 광염교회(조현삼 목사)가 보낸 떡을 가지고 갔을 때, 두 손 붙잡고 “따뜻할 때 잡수셔요” 하고 싶었던 인사를 못한 것이 목에 걸려 있었다. 동리에 못 들어가서 교회 차에 옮겨 주었다.

1952년 8월 어느 날, 장인심이 입원했던 때는 열여섯 살이었다. 열한 살 때 병을 얻으면서부터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갇히듯 골방살이를 했다. 처음 소록도 생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바라보며 수군대는 이들도 없었다. 자유스러웠다. 처음 간 교회는 세상과 달랐다. 친절하게 감싸주려는 교인들이 그냥 어머니이고 아버지였다. 언니고 오빠이고, 삼촌이고 이모였다.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려는 예수 사랑이 강물처럼, 샘물처럼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도 느끼지 못하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세상에서, 또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인 슬픈 섬에서 자기를 찾아오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복음,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받는 은혜가 임한 것이다. 유교 집안에서 자란 그가 버림받듯 홀로되어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피로 속죄함 받은 신자”가 된 것이다.

교회에 나가면서 학교도 다녔다. 찬양대도 하고, 나중에는 같은 형편의 신랑을 만나 결혼도 했다. 자식은 없으나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믿음 안에서 평생을 행복하게 동행하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인심 권사는 여러 해 여전도회장을 맡았다. 날마다 12시면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는 ’정오 기도팀‘을 인도하였는데,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선교헌금을 드려 외국에 교회 세우는 일을 지원하고, 남북통일 때 드릴 ’통일 헌금‘도 모으고 있다. 성경 책 구입비로, 구제비로 바칠 것이다.

10대 소녀들로 만나 5~60년을 함께 살았던 분들이 몸이 노쇠하여 살던 집을 정리하고 요양병동에 들어갔다. 찾아가 기도하고,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하늘나라 소망을 말하며 손을 잡아준다. 믿음 안에서 ‘노년의 동행’, 봄꽃향기 같은 소록도 사람들의 동행 이야기이다.

<광주밀알 202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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