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 때 방영된 가수 나훈아 콘서트를 1시간 정도 시청을 했다. 노래 가락에 담긴 그의 삶과 철학에 마음이 끌려 들어갔다. 공연 중 그의 노랫말, 몸짓 하나, 멘트 한마디는 목회자인 나를 깊은 사색의 공간으로 인도하는 것 같았다. 코로나19와 맞물려 트롯 열풍이 광풍으로 바뀌어 트롯의 재발견이라고 즐기고 있을 때, 나훈아의 노래는 자신의 예술 세계와 철학이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삶에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이라며 “꿈이 고갈되는 것 같아서 11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사람도 꿈이 고갈되는 꿈을 좇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뇌했는데, 과연 영광스런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에게 확실히 붙들 수 있는 복음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예수는 과연 나에게 누구인가? 그 십자가 복음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는가?

예수의 복음은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규정하는 중심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도 무너지게 된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허락하신 유일한 해답인데, 이 복음이 너무나 변질되고 왜곡된 조국 교회는 이 땅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세속의 가치에 덧붙여진 값싼 복음에 마음을 빼앗기고 유사 복음들이 이 땅을 뒤덮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어 은혜를 누리는 영적 부요함을 누리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오늘 조국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조롱을 넘어 기피의 대상, 적폐의 대상이 된 안타까운 현실의 원인은 무엇일까?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의 변질과 왜곡이다. 기독교 신앙은 감성의 자극, 개인의 성공과 성취가 아니다. 오직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반드시 인격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 세상의 가치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와 외형적 성장, 종교적 성공을 이룬 연금술사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의 눈속임에 환호를 보낸다. 그러나 복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교성을 통해 세속의 욕망을 탐하는 자들에게 은과 금을 주는 곳이 아니다. 세속의 성공과 축복을 약속하는 곳도 아니다. 오직 예수의 구원이 절박하게 필요한 자들에게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곳이어야 한다. 복음을 재발견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 선포할 수 있는 영적인 고집과, 오직 성경적인 설교를 통해서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복음은 다시 재발견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젖어 영적 자양분을 얻을 수 없다면 회중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이제는 종교장사꾼 놀이를 멈추고 다시 복음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목회현장을 떠나 잠시나마 십자가 앞에 겸손히 무릎 꿇어 자기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으로 무너지는 교회와 교단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낡은 교리에 갇힌 해묵은 복음이 아니라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전했던 십자가의 복음을 다시 발견할 때, 각종 훈장을 달고 총회를 드나드는 목사와 장로들의 영혼은 다시 살아 날 것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신실한 종들이 있다면 주님의 교회는 다시 건강하게 세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