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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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가로등
  • 박영찬 목사
  • 승인 2020.08.1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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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월요일 아침, 교회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이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치던 가로등의 허리부분에 시커먼 액체가 찐득하게 응고되어 있었습니다. 전기 계통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누전에 의하여 가로등이 과열 되었고, 그 열기로 표면에 칠한 페인트가 녹아내리면서 생긴 현상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가로등에 똑같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순간 양심불량인 시공업체가 교회를 우습게 보고 가로등을 불량품으로 설치를 하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과열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주일학교 아이들이 가로등을 만진다면 인명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였습니다. 상상만 해도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관리집사 사택이었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들은 그는 망연자실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감전사고로부터 성도들의 생명을 구한 저의 공로를 온 교회에 널리 전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있었고, 말투에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제가 부임하기 직전에 교회의 모든 가로등을 교체했습니다. 붉게 녹슨 기존의 철제 가로등에 비하면 새로 설치한 주물 가로등은 디자인도 예쁘고 색깔도 고급스러워서 성도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가로등을 쳐다 볼 때마다 시험에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로등에 새겨진 정체불명의 꽃 때문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그 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 연꽃이 사시사철 만발하게 피어있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당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을 무시할 수도 없고, 새로 설치한 가로등을 뽑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어느 장로님의 지혜로 상황은 쉽게 종료가 되었습니다. 일명 ‘콜타르 작전’. 가로등 기둥을 시커먼 콜타르로 두껍게 덧칠해서 연꽃인지 접시꽃인지 모르게 한 것입니다.

그 이후 수상한 가로등은 새 성전 건축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위해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서로를 품어주던 마음까지도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많이 아쉽기만 합니다. 요즘도 비가 오는 날이면 수상한 가로등이 그리워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마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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