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결 언택트 사회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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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 언택트 사회의 명암
  • 이재열 교수
  • 승인 2020.06.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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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포스트 코로나19 연구프로젝트 제1차 발표회 주제발제(2)
※ 이재열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한국의 과거를 진단하고 미래를 그리는 사회학자입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소장, 미래기획위원회 민간위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한국사회과학자료원 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2019), 공저 『커넥트 파워』(2019) 등 다수가 있습니다.
※ 이재열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한국의 과거를 진단하고 미래를 그리는 사회학자입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소장, 미래기획위원회 민간위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한국사회과학자료원 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2019), 공저 『커넥트 파워』(2019) 등 다수가 있습니다.

1. 들어가는 말 

공상 같은 현실이 시작됐다. 익숙했던 일상은 사라졌다. 판데믹이 가속한 ‘초연결 언택트 사회’는 오프라인의 거리 두기와 온라인의 초연결이라는 이중성이 어우러져 공상 같은 현실을 만들었다. 위계형 조직에서 끈끈하게 얽힌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언택트 사회는 충격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생활한 젊은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나홀로’지만 ‘더불어’를 즐긴다. 변화에 대한 적응속도는 세대에 따라 매우 다르다.

초연결은 이미 깊숙이 우리 안에 자리잡은 미래다. 다만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인터넷 보급률 96%, 스마트폰 보급률 94%인 한국은 세계 1위 초연결사회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우리 시대의 문제는 다가오는 미래가 더이상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오지 않는 데 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지난 100년간 인류가 경험한 변화는 지난 1만 년간 경험했던 변화의 폭을 능가한다. 아마도 다가올 미래 수십 년간 경험할 변화는 지나온 인류역사상 모든 변화의 폭과 깊이를 능가할 것이다.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정보 기술과 네트워킹 기술의 발달이다.

‘닫힌 위계’는 매우 빠르게 ‘열린 네트워크’로 대체되고 있다. 그러나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난 ‘디지털 이주민’들은 난감하다. 과거형 논리를 고수하는 정부 정책이 기술진보를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 지체’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초연결 언택트 사회에서 일자리를 잃은 실직자들이 급증한 반면,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쇼핑과 상호작용이 급속히 늘어났다. 전통적인 불평등에 보태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가 산업과 조직화, 그리고 직업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회도 이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어려워 보인다. 기술발전은 한계비용과 거래비용을 급속히 줄였고, 거대조직의 효율성도 급속히 줄었다. 조직화의 비용이 저렴해지자, 조직의 해체가 가속화되었다. 대륙은 섬으로 바뀌고, 조직은 액체화했다. 판데믹은 이미 진행되어 온 이런 변화를 가속했을 따름이다.

 

2. 코로나 19가 던지는 근본적 질문

미국의 사회학자 고프만(E. Goffman)은 사회를 연극무대라고 했다. 배우는 잘 꾸며진 무대장치 위에서 예쁘게 분장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배역을 한다. 평상시 사회는 이렇게 움직인다. 그런데 재난은 커튼을 갑자기 열어젖혀 숨겨진 무대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회적 취약성 이론’에 따르면, 재난은 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의 취약성과 결합해 피해를 극대화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사회 곳곳에 ‘은밀하게 닫힌 조직’들이 널려 있고, 이들을 통해 감염이 확산됐음을 알게 됐다. 신천지교회, 정신병원, 요양원, 콜센터, 이태원 클럽 등이 그렇다. 중국에서는 의사 리원량의 호소를 묵살하고 처벌까지 한, 일시에 천만명이 거주하는 도시를 봉쇄하기도 하는 국가주의 체제의 적나라한 권위주의적 속성이 드러났다. 미국은 전통적인 시장자유주의에 보태 트럼프 행정부가 보이는 극단적인 포퓰리즘의 어두운 모습을 드러냈다. 채용과 해고가 쉬운 고용제도로 인한 실업대란, 소수만을 위한 의료보험, 저축없는 사회의 빈부격차 등에 오래된 인종차별이 겹쳐져 사회갈등으로 폭발했다. 일본은 어떤가. 애국적 비밀주의와 매뉴얼사회의 경직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태리, 영국, 독일, 스웨덴 등 유럽의 전통적 선진국들 모두 심각한 위기증상을 드러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 여겼던 나라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은 ‘좋은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질문하게 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 환경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희생한 것이 정당한 것인지 묻는 것이다. 그동안 국가간 경쟁적 발전의 GDP 성장률로 표현되는 경제적 가치였다. 그러나 코로나 19는 성장의 그늘 속에 감추어졌던 경제적 불평등, 차별, 무분별한 자연파괴 등 사회적 통합과 생태적 책임성을 방기한 인류에게 몰아친 반격이란 점에서 앞으로 인류가 풀어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

 

3. 공공성이 좌우한 면역의 성패

코로나 19는 면역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공공성이라는 점을 잘 드러냈다. 블리스(Eula Bliss)에 의하면 면역의 요체는 ‘상호의존’이다. 협력적 집합행동을 통해서만 극복가능하다는 것이다. 첫째, 공동체와 개인 간 서로 협력해야 한다. 각 개인은 타인을 배려해야 공동체를 구하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안전도 확보할 수 있다. 한편 공동체는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기보다 다양한 개인들의 사정과 처지를 고려하고 배려해야 한다. 둘째, 민과 관이 협력해야 한다, 혹은 행정의 골간을 이루는 시스템과 시민들의 생활세계 사이에도 긴장과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정부의 신속한 정책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자원활용이 결정적이지만, 동시에 시민들의 참여와 공감, 그리고 자원봉사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문가와 일반 시민 사이에도 협력적 집합행동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며 확률론적인 정보를 토대로 정확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우려의 진정성을 가진 일반 시민은 자발적 헌신과 협조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방향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이러한 집단과 개인 간, 시스템과 생활세계 간 길항과 균형 관계가 만들어내는 것이 공공성이다. 조금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관계론적 시각에서 보면 공동체나 공공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생성과 재생산을 통해 지속해서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 공공성의 발현은 수평적 차원의 ‘상호작용의 장’과, 수직적 차원의 ‘구성/출현의 장’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체계와 생활세계를 가르는 것은 상호작용의 장이다. 행정이나 경제와 같은 공식적인 체계와 가족이나 공동체와 같은 비공식적 생활세계 간 긴장이나 갈등이 여기서 발생한다. 생활 속의 감정이나 소통, 그리고 가치들이 거대한 시스템의 효율성 논리에 의해 압도될 때 소외와 박탈감이 증대된다. 반대로 생활세계에서의 여러 갈등이나 개인들의 참여가 체계의 작동에 영향을 미쳐 제도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데, 이것이 ‘정치적 참여’나 ‘사회적 승인’의 과정이 된다. 또한, 체계와 제도가 일상생활 속에 수용되는 과정은 ‘이질성이 통합되고 타협되는 것’으로서, 체제의 정당성이 일상성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행위자와 구조를 가르는 수직축은 사회성이 구성되고 발현되는 장이다. 사회의 가치와 규범은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되지만, 동시에 개인들의 행위나 가치지향은 거시적 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개인에게만 방점이 찍힌 사회는 지나친 불평등이나 배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며, 사회의 안전이나 응집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반면에 강력한 집단주의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질식된다. 따라서 개인과 집단, 혹은 개인과 사회 간에 적절한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

공공성은 각 분면에서 일정한 원칙이 구현될 때 가능하다. ‘공익성’은 사적 이익이나 이윤보다 사회 전체 구성원에 대한 정의로운 자원 배분 시스템이 잘 작동할 때 가능하고, ‘공정성’은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바꿀 수 없는 피부색, 젠더, 권력, 재산과 무관하게 자원에 접근가능해야 확보되며, ‘시민성’은 공동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에 대한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공개성’은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어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코로나 19의 확산과정에서 방역에 성공적이었던 나라들은 이처럼 공익성, 공정성, 시민성, 공개성이 고루 갖추어진 사회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거시적 수준에서의 공동체 안위를 위해 강력한 국가주의적 통제를 가했다는 점에서 공익성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시민성과 공개성, 그리고 공정성의 관점에서는 실패했다. 미국은 시민성이나 공개성의 관점에서는 훌륭했으나, 열악한 의료보험으로 인해 공익성에서 실패했고, 인종 간 계층 간 격차로 인해 공정성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한국의 방역은 공공성을 구성하는 네 영역에서 모두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사례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전통적인 한국의 공공성에 대한 평가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직후 필자가 참여한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공동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공공성은 비교 대상 국가 33개국 중 최하위를 점한 바 있다. 즉, 낮은 공공성이 세월호와 같은 숙성형 재난을 잉태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진단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역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 이유를 성공적인 조직학습의 결과로 보고자 한다. 그동안 한국에는 빈발하는 인적 재난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책임자의 사표를 받고 안전결의대회를 하며, 조직의 이름을 바꾸는데 그친 경향이 있다. 그리고 ‘비난의 정치화’를 통해 정치적인 공방으로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재난은 다시 반복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은 질병관리본부는 조금 예외였다. 광범하게 실패사례를 공개하고, 외부의 전문가들까지 대거 참여하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방대한 분량의 백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재난을 낳은 원인에 내재한 가정이 잘못된 것이 없는지 검토하고,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조직학습으로 치면 이중순환학습(double loop learning)을 한 것이고 이는 성경의 거듭남(요 3:4~5)과 같은 이치다.

그 결과 2020년 코로나 19 상황에서 질병관리본부는 이미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감염자를 추적하고, 그 동선을 투명하게 공개하며, 확진자를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기폭제로 광범한 시민 참여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공공성의 틀을 한국 교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난립한 교단들, 극단적인 개교회주의, 수백개의 대형교회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자립하기 어려운 미자립교회라는 현실은 공공성으로부터 멀어진 모습으로 비친다. 개별교회들이 개성 있게 지역에 뿌리내리되, 전제 교회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상호 배려, 정제되었지만 유연하게 혁신을 수용하는 교단시스템과, 다양성을 추구하되 공통의 목표를 위해 양보하고 협조할 수 있는 일반 신도들 간의 균형과 협력 없이 한국 교회가 지속가능할 것인가.

 

4. 초연결 언택트 사회의 특성

초연결사회는 열린 시스템의 전형이다. 연결된 노드들은 클러스터를 이루고, 연결이 끊긴 곳에서 경계가 만들어진다. 고정적 경계를 갖는 것이 닫힌 시스템이라면, 유동적 경계를 갖는 것이 열린 시스템이다.

열린 시스템은 유동적인 경계를 통해 정보와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이 작동할 때, 외부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닫힌 시스템은 실체론적 사고와, 열린 시스템은 관계론적 사고와 맥이 통한다. 열린 시스템은 기계적이기보다는 유기체적이다. 열린 시스템은 구조가 복잡하고, 구성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구조’보다는 내부의 ‘과정’이 중요하며, 조직의 경계가 비정형적이고, 또한 목적이 끊임없이 전환되는 집단들에 의해 발전되는 경향이 있다.

초연결사회는 극단적 형태의 열린 시스템이자 복잡적응시스템이다. 복잡적응시스템이란 신호를 주고받는 관계의 망 속에서 경계가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체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세포, 열대 우림, 시장, 언어, 인터넷 등은 모두 신호를 주고받는 주체와 신호의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구성 요소로 환원되지 않는 복잡적응시스템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관계론적 사고의 틀에서 생각하면, 네트워크는 서로 구별되는 세 가지 색깔을 띤다. 그리고 그 효과는 코로나 19의 시대를 맞아 서로 상이하다.

첫 번째 네트워크의 색깔은 연결하는 사람들이 가진 접속과 연결의 ‘사회문법’이다. 이는 문화적으로 전승되고 재생산된다. 유럽에서 시작된 프로테스탄티즘은 ‘신 앞에 선 단독자’인 개인의 주체성과 판단력, 그리고 이들 간의 계약으로 만들어지는 조직과 사회 질서를 강조한다. 반면에 한국의 개신교인은 위계화된 관계에 익숙하고, 직관적이며 총체적으로 사유한다. 개인보다는 가족, 친구, 교회, 공동체를 중시한다. 끈끈함을 강조하는 한국의 연고주의, 혹은 인격주의도 마찬가지다. 권력거리(power distance)도 크다. 그래서 ‘위계적 인격주의’라는 문화적 특징으로 인해 기업이나 정치조직 못지않게 교회도 ‘닫힌 위계’ 구조를 가지기 쉽다. 임기를 가진 이사회의 성격을 가진 미국 교회의 거버넌스 대신,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가 조선 시대 향반과 같은 신분제가 됐다. 서양에서는 신앙의 조언자이자 전문직인 목사가, 한국에서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능력자, 다시 말해 왕도정치의 군주와 유사하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코로나 19가 갑자기 불러온 거리두기는 이러한 위계적이고 인격주의적인 조직문화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언택트 사회에서 초연결의 여부는 불평등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사회학자 처지에서는 잘못된 용어라 생각한다. 본래 ‘사회적 거리’는 소수자에 대한 따돌림이나 사회적 편견을 측정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대신에 ‘물리적 거리두기’라고 표현해야 맞다. 물리적 거리는 유지하되 사회적 거리는 줄일수록 좋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거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 끈끈했던 사회가 갑자기 그 끈끈함을 없애버리고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도록 하는 초유의 실험에 들어간 것이다. 사회적 친밀성에 대한 결핍증이 생기고 다양한 연결구조를 자랑했던 이들이 오히려 위험해지는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기존의 익숙했던 관계가 사회적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새로운 연결구조를 맺으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질 것이다.

문제는 물리적 거리 두기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집단과 그로 인해 극도로 위험해진 집단이 나뉜다는 점이다.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는 코로나 19가 새로운 계급의 분화와 그 안의 불평등을 보여준다고 한 바 있는데, 그의 구분에 의하면 전문직, 경영직, 기술직 등에 종사하는 약 35%의 노동자들은 온라인 회의나 자택근무 등으로 코로나19 위기 전과 거의 동일한 임금을 유지하는 집단(The Remotes)이다. 두번째는 전체 노동자의 약 30%인 의료인, 트럭운전기사, 창고 운수 노동자, 경찰, 소방관 등의 필수적 일을 해내는 노동자들 (The Essentials)인데, 이들에게는 적절한 보호장비, 유급병가, 건강보험이 필요하지만 부족한 상태다. 세 번째는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The Unpaid)인데, 소매업, 식당, 접대업무 같이 직접적으로 대면접촉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지출을 자제함에 따라 해고되는 이들이다. 네 번째는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로서,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교도소, 불법이민자 수용소, 노숙자 쉼터, 요양원 등에 속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취약한 조건에서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기 어려운 이들이다. 이처럼 급격히 확장되는 새로운 불평등은 한국교회에도 새로운 선교의 대상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네트워크의 색깔은 ‘관계의 기하학’인데, 이는 통계 물리학자들의 분석에서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전 세계 사람들은 여섯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된다고 한다. 그런데 연세대 김용학 총장의 실험에 따르면 한국 사람은 세 다리만 건너도 모두 연결된다. 훨씬 ‘좁은 세상’인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코로나 19가 세계적 판데믹이 된 이유도 이처럼 세상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다 보니, 검색엔진으로 대상을 찾기가 쉽지만, 위험이나 생각도 모두 빠르게 전파된다. 특히 한국의 초연결성은 감정조차 순간적으로 전파한다. 그래서 유럽에 비하면 여덟 배 이상 빠르게 분노가 전파된다고 심리학자들은 분석한 바 있다. 이러한 초연결성으로 인해 여론과 인식이 순식간에 바뀌고 민심은 들끓다가 갑자기 식어버리곤 한다. 혹자는 ‘냄비근성’이라 폄하하기도 하는데, 열전도율이 높은 양은냄비 못지않게 전파력이 빠른 초연결사회의 특성이 한국 사회를 매우 역동적으로 만든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소수의 행위자나 노드로 연결이 집중되는 쏠림현상을 티핑포인트 (tipping point)라 부른다. 코로나 19의 확산이 매우 돌발적이지만, 한국인은 돌발적 위기에 직면하면 급속히 결속하는 장점도 가졌다. 마치 국난기 분연히 일어선 의병처럼, 자원봉사를 위해 줄을 선 의사와 간호사의 긴 행렬, 마스크를 나누려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등은 좁은 세상 한국에서 어떻게 참여의 에너지가 분출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 교회는 긍정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원천으로 작용하는가, 혹은 분노와 불신의 대상으로 더 자주 분출되는가.

셋째는 초연결이 낳은 정치·경제적 효과다. 초연결 사회에서 개인의 활동은 플랫폼상에 방대한 흔적을 남기는데, 이것이 빅데이터다. 마치 20세기 초 전기의 보급이 생산시스템을 바꾸고 자본축적을 가속한 것처럼, 21세기 인터넷의 확장과 데이터 경제의 확대는 부가가치의 의미와 효과도 바꾸고 있다. 네트워크의 외부성은 전통 경제학의 명제인 ‘수확체감의 법칙’ 대신 ‘수확체증’을 새로운 명제로 부각시켰다. 더 많이 연결될수록 그 효과는 증대된다. 이러한 수확체증의 외부성을 극대화한 것이 미국의 Google, Amazon, Facebook, Apple (GAFA)이나 중국의 Baidu, Alibaba, Tencent (BAT)라 불리는 플랫폼 기업들이다. 이들은 초연결 시대 물질적 토대인 ‘흐름’을 장악하여 시가총액으로는 전 세계 최상위 기업으로 도약했다. 정보의 흐름은 비대칭적이며, 또한 흐름 자체가 영향력의 원천이 됐다. 금융, 정보, 기술, 이미지 등의 흐름은 전통적인 권력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네트워크형 사고방식은 전통적인 위계형 사고방식과 많은 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전통적이고 위계적인 사고방식은 강력한 통제, 계획, 집중된 의사결정, 개별 전문가의 통찰력, 구체적 결과에 관한 관심 등을 중시한다. 반대로 네트워크 사고방식은 통제의 소멸, 자발적 참여, 집단지성 등을 중시한다. 네트워크의 효과성은 손에 잡히지 않는 신뢰나 정보의 흐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5. 메타 가치를 구현하려면

세상은 빠르게 초연결 언택트 사회를 뉴노멀로 간주하기 시작했는데, 한국 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매우 둔감한 것으로 보인다. 언택트 사회에서 기존의 행위가 바뀐 것은 아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강의실을 닫았다 해서 교수들이 가르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슈퍼마켓에 가지 않는다고 쇼핑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가지 않는다고 신앙이 없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회중 예배가 없어서 신앙이 없어지는 것을 걱정한다면, 그 신앙은 과연 무엇인지 진지한 되물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액체화하는 사회’에서 교회도 큰 도전에 직면했다. 교회 안팎의 경계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한 교회에만 출석하는 평생 교인이 줄고, 다양한 메시지와 영상을 통해 온라인으로 종교를 경험하는 이들이 늘었다. 전통적 교회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자발적 가나안 교인’과 ‘강제된 가나안 교인’이 뒤섞였다. 그러나 한편 ‘교회를 떠난 이’들이 종교적 체험을 공유하기는 쉬워졌다. 한 교회에 ‘갇혀있던’ 교인들은 여러 교회를 드나드는 ‘열린 온라인 교인’이 됐다. 

그런데도 여전히 회중 예배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 전체의 사회적 영향력보다는 개교회의 성장과 구체적 성과에 여전히 매달리기 때문이다. 더 많은 참여를 촉진할 공동의 플랫폼을 만들기보다는 개교회의 노력이 중요하고, 연결과 연계보다는 독자적 노선이 주를 이룬다. 여전히 ‘닫혀 있는 위계화된 교회’ 모델에 안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일과 평일을 나누고, 교회 안과 교회 밖을 나누다 보니, 일상은 없고, 영적 구원을 지향하며, 신학과 과학을 무시하는 반지성주의적인 풍토가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일예배에 집착하는 이유도 이처럼 성장주의적 유산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적 풍토에서 공교회성은 약화되고, 사적 이해를 극대화하다 보니 교회 세습이 빈번해졌다.

이제는 교적부의 교인 목록보다, 다양한 SNS 플랫폼을 방문하는 이들의 흔적이 남긴 데이터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다. 교회의 영향력은 교인수와 헌금액보다는 흔적을 남긴 플랫폼의 데이터에 의해 가늠이 될 것이다. ‘닫힌 위계적 교회’의 시대는 가고, ‘열린 연결망으로서의 교회’가 오고 있다. 연결망은 개인을 역능화한다. 압도적 영향력으로 개인을 지배하던 교회의 영향력은 줄어드는 반면, 온라인 영향력이 커진 교회와 목회자로의 쏠림이나, 공감과 참여가 끌어내는 메시지의 사회적 임팩트는 점점 커질 것이다. 

반면에 일상의 제자리 찾기도 중요해질 것이다. 가정이 얼마나 교회의 기능을 담아내는지, 직장과 일터가 얼마나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모범으로 하여 영향력을 미치는 선교의 장이 될 것인가가 훨씬 중요해질 것이다. 교회와 일상을 가르는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일시적인가, 지속적인가. 수평적 연결망이 확장되어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공생과 협력이 선순환하는 유토피아를 낳을 것인가, 소수에의 쏠림과 치우침, 그리고 감시와 독점이 일상화되는 디스토피아를 낳을 것인가. 정답은 없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작동하는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정보 격차가 커지고, 배제되는 세대와 인구집단의 불이익은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반면에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의 중요성이 커질 것이고, 그 해답에 대한 공감력이 가지는 파급효과도 커질 것이다. 새로운 교회의 구상과 실행, 공유와 협업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적극적인 변화가 교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개교회주의의 틀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복음의 메타 가치를 구현하여야 한다. 개교회 중심주의 대신, 변화의 촉진자로서의 기독교의 역할, 솔선수범하는 교회의 노력, 양적 성장을 넘어 근본적 복음의 가치를 전파하는 혁신적 교회모델의 확산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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