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1) 교갱협 제23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2)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어떻게 도와줄 것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사람들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볼 때 그 사람의 방에 가보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학자나 목회자의 서재에 가보면 그 분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 분이 관심을 갖고 있는 취향도 알 수 있고 성격도 깔끔한지 지저분한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서재나 방은 우리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탁 조지훈 선생님이 쓰신 수필 가운데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수필은 ‘개울물 소리가 들리는 산 밑에 4평 짜리 작은 초옥을 갖고 싶다’는 수필입니다. 이 초옥의 한 평은 장방형으로 된 서고를 두고, 나머지 3평에는 고풍스러운 문갑이나 사방탁자에 백자 항아리를 얹어두고, 그리고 서화 한 폭에 차 끓이는 도구만 있다면 자신은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잡한 세상사도 잊고 차도 마시면서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하고 방에 드러누워서 독서를 하는 것이 자신의 염원이라고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시골에 '소서가'라는 집이 한 채 있습니다. 고가에 '소서가'라고 한 것은 한 시 중에 많은 의성어와 의태어로 쓰입니다. 우리 집에 있으면 봄에는 비가 오면서 소설소설 내리고, 또 여름에는 달빛이 소서하게 비치고, 가을에는 바람이 솔솔 불고, 겨울에는 흰 눈이 솔솔솔솔 내립니다. 제가 시골만 아니라 도시에도 서재가 있는데 그 서재에는 아홉 가지 향기가 난다고 해서 '구향객사'라고 붙였습니다. 책에서 풍기는 책향, 도자기에서 나는 도향, 그리고 먹에서 풍기는 묵향, 이런 식으로 아홉 가지 향기가 나고 마지막 향기를 해야 완전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에게서 나야 해서 붙이지 않았고 저에게서도 향기가 나야 한다는 자기반성을 하면서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선비들 방에 가면 사방탁자나 고비나 찻잔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 외에 사랑방에서 선비 혼자 식사를 하니까 밥상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은 식탁으로가서 식사를 하지만, 과거에는 선비 혼자 하기에 식탁이 사랑방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상이 작아야 합니다. 밥상을 소반이라고 하는데 지역에 따라서 '통영반'도 있고 '해주반'도 있고 '나주반'도 '강원반'도 있습니다. 다리의 모양에 따라서 호랑이 다리를 닮았으면 '호족반'이고 강아지 다리를 닮았으면 '구족반'이고 마디가 있으면 '마족반'이라고 합니다.

선비들 방에는 이런 것도 있고 가끔 그림이 걸려있는데, 선비들 방에는 주로 '책가도(冊架圖)'가 걸려있습니다. '책가도'가 생긴 것은 조선의 르네상스인 정조가 '일원오봉도'를 치우고 '책가도'를 걸면서 조선의 선비들도 병풍이나 그림으로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거 외에도 선비들의 집에 가보면 '삼여도(三餘圖)'라 하고 '삼어도(三魚圖)'라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중국에서 물고기를 뜻하는 어(魚)와 여가를 뜻하는 여(餘)가 발음이 같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세 마리를 그려놓고 독서를 할 수 있는 세 여가를 말하는 선비의 멋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 책을 읽는 것입니다. 즉 농사철이 아닌 겨울에 책을 읽고, 낮 동안 일을 한 후 밤에 책을 읽고,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 책을 읽을 여유를 뜻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책을 읽는 것과 결부되어 있고 특별히 조선시대의 인문학은 독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의 시작도 독서이고 끝도 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책가도나 삼어도를 걸어놓고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책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방식이 다양합니다.

첫 번째 방식은 '와독(臥讀)'이라는 것입니다. '와독'이라는 것은 대청마루에서 편안하게 누워서 뒤척뒤척하면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청마루에서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냐 하면 우리나라의 집구조가 앞은 '전정(前庭)'이고 뒤는 '후원(後園)'이라고 합니다. 전정과 후원을 합해서 '정원(庭園)'이라는 말을 쓰는데 전정에는 일년초를 심고 후원에는 큰 나무를 심습니다.

햇빛은 전정에 비치니까 뜨거운 열기가 생기고, 뜨거운 열기가 공중으로 올라가니까 올라가는 빈 공간에 후원에 있던 시원한 바람이 전정으로 나오는 통로가 바로 '대청(大廳)'입니다. 그래서 대청은 시원합니다. 대청에 앉아서 멀리 보면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대청은 열려있는 공간으로 다듬이도 두드리고 먼 들판도 내려다고보 이웃과도 소통하는 좋은 공간입니다.

두 번째는, 탁독(濯讀)입니다. 탁족독(濯足讀)의 줄임말로 여름에 발을 시원한 물에 담그고 독서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휴독(休讀)인데 큰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에서 책을 읽으면 독서삼매경에 들어갈 수 있고 정신과 육체가 휴식을 하면서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문학이라는 것은 독서로 시작하고 독서로 마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인문학을 논하기 전에 독서를 많이 해야 하는데 한 폴란드 시인은 “책을 읽는 것은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아름다운 유희”라고 했습니다. 독서를 통해서 옛사람의 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인문학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 전의 고대사회로 들어가야 합니다. 인문학을 이야기할 때는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20세기에 와서 신화를 연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루마니아 사람들이 서유럽으로 와서 신화 연구에 많이 종사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에 의하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근원에 대한 동경심,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위스에서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언인가에 대한 책도 나오고 학회도 열립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고향’이라는 책을 내서 현재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고향의식이 강합니다. 제가 고향을 학문적으로 분석해 보았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영원한 실향민이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그것이 진정한 귀향이며, 하나님 없는 탕자의 삶은 진정한 고향을 잃은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는 삶은 소외감, 소통의 부재, 그리고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병리현상이 일어남을 말하고,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 책입니다.

동양에서 사상적으로 고향이라고 하면 인도를 의미합니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 이유는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것입니다. 중국으로 와서 선종을 만들어서 체계화하고 20세기에 와서는 일본의 가나자와 출신 스즈끼에 의해서 일본의 선불교가 나온 것입니다.

동양에서 사상적 고향으로 간다면 인도로 가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잘 알려진 문학가가 있는데 이 분은 매년 연초에는 인도의 히말라야에 간다고 합니다. 거기 가서 연초에 몇 주를 지내고 오면 1년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기 6개월 전에는 힘들어도 6개월이면 가는 것을 생각하며 견디고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삶이 피곤해도 얼마 전에 다녀온 여행지를 생각하며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동양 사상의 고향을 인도라고 한다면 서양 사상의 고향은 아테네이고 그리스입니다. 그리스는 서양문명뿐 아니라 세계문명의 초석이 되기도 합니다. 세계 4대 문명을 말할 때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황하, 인도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은 문명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세계 4대 문명이 구체적으로 영향을 준 것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비해서 그리스 문명은 문학적인 것은 물론이고 철학이나 학문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이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서양에서 제국주의 바람이 불고 동양에 대한 기대감과 자기들의 낭만 때문에 동양을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19세기 중엽부터 만나게 됩니다. 문화와 기술, 학문, 과학에 있어서 서양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인이고 동양인이지만 문화와 기술과 학문이 서양을 지향하고 있고, 가능하면 서양화 하려는 경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서양인가? 일반적으로 우랄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은 아시아고 서쪽은 유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이기게 되었을까? 교황 베네딕토 16세였던 ‘요제프 라칭거’가 어떻게 서양의 서양됨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4가지 중요한 요소를 지적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헬라의 학문입니다. 로마사람들은 ‘빛은 동방에서 오고 법은 서방에서 온다(Ex oriente lux, ex occidente lex)’고 했습니다. 이 말은 로마사람이 한 말입니다. 법과 사회적인 제도는 로마가 만들었지만 빛 다시 말해서 존재의 비밀을 파헤치는 철학이나 종교의 진리, 인간의 구원이나 해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빛은 헬라의 철학이나 메소포타미아나 인도같은데서 오는 종교라고 구분해서 말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철학같은 학문은 로마인이 볼 때 헬라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헬라의 학문이 서양문명의 초석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의 제도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헌법은 일제 강점기에 동경법대나 경성법대를 졸업한 사람들이 초안을 한 것인데, 일본의 메이지유신 때의 법을 참고했습니다. 일본의 헌법은 독일과의 동맹 때문에 독일의 비스마르크 헌법을 본받은 것입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법은 로마법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국회제도도 로마의 원로원 같은데서 나온 것이고 사통팔달의 도로 시스템, 상하수도 시스템, 우편시스템도 로마에서 발달한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의 법은 세계의 모법이고 라틴어는 세계의 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게르만 민족의 근면성입니다. 저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영국과 다른 나라도 있어보았는데, 독일인은 청결하고 정말 근면하고 노는 것보다 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라틴계의 사람들처럼 지중해에서 꼬냑을 즐기면서 멋진 여인들과 지내는 것을 꿈꾸기 보다 열심히 일하고 절약도 많이 하고 근면합니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과거에 우리의 사상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였는데 최근에는 다산학을 말합니다. 정약용은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물려줄 것은 논 한 마지기 밭 한 떼기 없지만 하나는 근면이고 하나는 검소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런 좋은 선비가 있습니다. 독일사람들의 근면함이 유럽문화의 초석이라고 라칭거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마지막으로 기독교 정신입니다. 기독교 정신에서 가족의 가치가 왔고, 인간의 인권이 왔고, 민주주의라는 아름다운 제도가 왔습니다. 따라서 헤겔은 말하기를 임금만 자유하고 모든 사람은 노예라고 볼 수 있는 동양은 한 사람이 자유하지만, 서양은 모든 사람이 자유한다. 그 한마디로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양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것은 기독교 정신에서 유래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Alles Gute kommt von oben.)" 이런 기독교에 기초해서 서양이 서양화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의 기초는 헬라의 학문입니다. 인문학을 이야기 하면 헬라의 학문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문학의 뿌리도 헬라이고 모든 학문도 헬라입니다. 헬라인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크게 두 가지로 봤습니다. 하나는 '테크네(Techne)'이고, 하나는 '에피스테메(Episteme)'입니다. 테크네는 사람이 손과 발로 하는 것입니다. 에피스테메는 두뇌로 하는 것입니다. 손과 발로 하는 것은 방법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고, 두뇌로 하는 것은 본질과 원인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테크네는 how의 문제이고 에피스테메는 why의 문제입니다.

서양에서는 지금까지도 이 두 가지 전통이 학제에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성악을 하는 사람들은 음악전문대학을 다닙니다. 유럽의 대학은 기술로 하는 것은 구분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인식으로 공부하는 음악사나 미학을 공부하려면 에피스테메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것은 대학에서 하는 것입니다. 테크네는 나중에 장인이 되는 것이고, 에피스테메는 박사가 되고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에피스테메는 학문의 시작입니다. 학문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했지만 ‘놀람’에서 시작됩니다. 왜 놀람에서 시작될까? 사람들은 지진이나 해일, 화산폭발같은 것을 보면 놀랐습니다. 왜 일어나는지 원인을 모르기에 놀랐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놀람에서 형이상학, 철학의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놀라고 난 뒤에는 무엇을 해야 됩니까? 놀란 다음 원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질(Arche), 원인을 말합니다. 창세기 1:1과 요한복음 1:1에 나오는데 '태초'라는 말입니다. 처음 학문이 시작할 때는 인간의 정신이 유아기 단계입니다. 이 유아기 단계에서는 동양에서는 도깨비가 통하고 서양에서는 산타클로스가 통합니다. 도깨비가 허구이고 산타클로스가 부모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간이 계몽되는 것입니다.

계몽되기 전의 유아기 단계에서는 만물의 원질을 상상으로 찾습니다. 본래 고대에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던 것이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온 자연만물 속에 영혼이 있고 신이 있다는 일종의 범신론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해일과 지진등 자연재해의 원인을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신화를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놀라서 원질을 찾는데 학문으로 바로 간 것이 아니라 'Mythos'로 갔습니다. 이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Logos'로 갔는가? 'Mythos'에서 'Logos'로 간 것이 계몽이고 이렇게 간 사람이 탈레스(Thales)라는 사람입니다.

탈레스는 말하기를 우리 자신을 알기는 제일 쉽고 그 다음에 자연을 알 수 있는데, 삼라만상을 살펴보면서 학문에 대한 욕구가 있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식을 어떻게 얻었겠습니까? 옛날 사람들이 지식을 얻는 방식은 그 중에 하나가 광장을 거니는 것입니다.

유럽의 옛 청사가 있는 곳을 가보면, 광장이 있고 광장에 교회와 시청, 시장이 있고 '아고라'라고 하는데 장이 열립니다. 이 장을 통해서 각국의 물건들도 들어오고 때로는 동물들도 들어와서 팔고 많은 우리가 모르는 나라의 소식도 가져오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이 광장을 다니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예 먼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남자들은 ‘독만권서 행만리로(讀万卷書 行万里路)’라고 책을 만권 읽고 만리를 걸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온 세상에 두루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탈레스는 터키지역에 태어난 그리스 사람인데 육로로 동쪽 바벨론까지 여행을 했습니다. 바벨론은 점성술이 발달했습니다. 중국도 삼국지에 보면 제갈공명이 죽을 때 큰 별이 오장원에 떨어진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별이 바벨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바벨론과 중국은 점성술이 많이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탈레스가 바벨론에가서 별자리 토판을 연구해보고 깜짝 놀란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들의 장난이라고 여겼던 일식과 월식이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점성술에서 신화의 요소를 제거하고 천문학이 되었기 때문에 점성술이 천문학으로 바뀐 것입니다.

애굽 바벨론에 가보니 나일강의 범람을 통해서 농사를 짓습니다. 나일강은 다른 강과 달리 북으로 흐릅니다. 범람으로 인해서 땅의 경계가 사라지고 홍수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 사이에서 땅 문제가 발생해서 바벨론에서 땅의 면적을 측량하도록 한 것을 배워와서 바다에 떠 있는 배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탈레스의 학문은 서양학문의 초석을 이뤘습니다.

대부분의 서양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체계화 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세에는 교과목으로 나오는데 중세에서도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20세가 되면 남자들은 집을 떠납니다. 20살에 집을 떠나면 대개 3가지 경우의 하나가 됩니다. 수사가 되든지, 아니면 기사가 되든지, 아니면 객사를 합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도 일곱 가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말타기, 창던지기, 칼쓰기, 사냥하기, 수영하기, 체스하기, 시 쓰기입니다. 학자가 되려면 일곱 학문을 배워야 하는데 초급 3과 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고급 4과 음악, 천문학, 산술학, 기하학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일곱 학과를 공부한 다음 신학을 공부하든지 법학이나 의학을 하는 것입니다.

서양은 머리의 기능과 몸의 기능을 나누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동양은 학문을 과로 쓰는데 하나의 학문을 하고 그 다음으로 나아갑니다.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고 치국(治國)한 다음 평천하(平天下)를 합니다. 처음에는 소학을 하고 다음에 명신보감, 논어, 맹자, 중용, 대학으로 유교 경전을 읽습니다. 동양에서도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쓰기도 하고, 서예와 수묵화를 하기도 합니다. 동양에서 이렇게 학문을 열심히 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해서 뭐가 되려고 합니까? 과거에 급제해야 합니다. 처음에 소과를 통과한 다음 대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잉어가 용이 되는 것처럼 등용문(登龍門)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종교개혁과 르네상스가 등장해서 루터와 단테로부터 에라스무스까지 등장했습니다. 중세에 인문학이 등장했습니다. 중세에는 '권위'를 무시하고 '이성'을 내세우는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권위'가 맞는게 아니라 맞는게 '권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해도 맞으면 그게 권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적인게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것이 권위라고 하면서 칸트에 와서 절정에 달합니다.

칸트는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사람인데 종교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종교를 이성의 한계 내에서 말하라고 하며 합리주의, 이성주의로 귀착합니다. 중세에서는 이성이 권세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성이 아닌 것은 다 배격하고 물리쳤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보들은 '배'라는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그림을 보면 바보들을 배에 태워 떠나보냈습니다. 이 그림은 근세에 바보들을 잡아서 추방하는 그림입니다. 바보들은 착각을 해서 자기들은 지금 천국에 간다고 착각하고 좋아했지만, 사실은 마을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배에 태워 떠나보낸 것입니다. 바보들을 왜 추방했는가? 근세에 바보들은 얼간이들이고 이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서 광기에 빠진 사람들도 감옥에 가뒀습니다. 광기도 하나의 인식이며 광기는 이성을 넘어선 것입니다. 바보는 이성에 못미치고 광기는 이성을 넘어섰습니다.

세 번째는, 마녀사냥입니다. 유럽과 미국까지도 근세초에 마녀사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성과 상관없는 영적인 것에 사로잡혔다 해서 여자는 마녀로, 남자는 마인으로 그들을 추방했습니다.

이렇게 근세에는 이성절대주의였기 때문에 이성이 아닌 것은 사회에서 다 배격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포스트모던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과거에는 이성이 절대적이었다면 포스트모던시대에는 '파토스(pathos)'가 중심입니다. 이 시대는 니체나 프로이드를 더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욕망의 시대, 감성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미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니체에 의하면 원초적인 것이 더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의 시대에서는 과학이 절대였습니다. 그 과학의 거대한 아성을 무너뜨린 논리가 기독교에서 나오지 않고 학문 자체 내에서 나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칼레이먼드 포파’입니다. 포파에 의하면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과학 지식을 만드는데, 경험을 통해서는 어떤 것도 진리로 확증할 수 없고, 어떤 것이든 간에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반증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반증을 하다보면 진리로 가까워지기는 가까워지는데, 어떤 경우든지 경험에 의해서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독단을 만드는 것이고, 독단은 폐쇄사회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로 가는 과학은 과정 중에 있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토머스 쿤’도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저서를 통해 과학자가 선입견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영향을 받고 객관적으로 독립적이고 중립적이지 않다며 패러다임이론을 말합니다.

‘노우드 러셀 핸선’의 ‘과학적 발견의 패턴’이라는 책에 보면 과학도 경험에서 나오는데, 그 경험도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이론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티코 브라헤'와 부소장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같이 덴마크의 동해에 앉아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면을 보고 있는데, 티코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하고 캐플러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국 과학자들이 지식을 통해 과학을 만들지만 경험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이론에 기초했다고 해서 경험의 이론, 의존성을 이야기합니다.

‘마이클 폴란’은 ‘인격적 지식’이라는 저서를 통해 과학적 지식도 퍼스널한 것으로 개인 인격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이성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통해 오늘 우리가 너무 이성적이 되어서 학문도 딱딱해지고 삶도 딱딱해져서 천편일률적으로 재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대학과 학문의 영역에서도 이성에 기초한 것만 가르치지 말고, 신화와 점성술과 마술 등 신비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사고가 다양해지고 삶도 재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왜 과학이 국가 권력과 결탁해서 카이스트 사람들은 군에도 안 가고, 왜 과학자들은 더 우대를 하고 왜 국가는 과학을 우상화 하는가? 이러다 보니까 우리 사회가 재미가 없고 인간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발휘가 안되는 것이라고 과학주의, 이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없다고 종교와 과학을 비판합니다.

짧게 2000년의 서양역사를 돌아봤습니다. 결국 2000년의 서양역사는 어떤 면에서는 진리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독일과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는데 옥스퍼드의 중앙도서관에 가보면 ‘주는 우리의 빛이로다(Dominus illuminatio mea)'라고 써 있습니다. 세계 유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온갖 학문을 닦습니다. 그들이 책에서 정보는 얻겠지만 최종적 궁극적인 진리는 발견하지 못합니다. 과연 이 세계는 어디서 와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생명은 어디에서 왔고, 내 생명의 가치는 무엇이며,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이고,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죽고 나면 어디로 가는가? 여러분,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타락으로 인해 어두워진 우리의 지성을 가지고 인체의 신비를 연구하고 우주를 연구할지는 몰라도,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빛으로 비출 때 비로소 진정한 계몽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알고 내 존재의 의미를 알고 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문학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인문학은 첫째로, 사유를 깊게 해주게 되고 사유와 반성을 가져다 줍니다. 특별히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고 말하고 글을 쓰는데에 논리적이게 해줍니다. 또 좋은 의미에서 많은 상상력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기술에 관심이 많아서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하고 어떻게 하면 목회에 성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크게 할 것인가 하는 know How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데 근본적으로 인문학이 던지는 것은 ‘과연 내가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참된 모습인가?’ ‘ 내가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자로 걸 맞는가?’ ‘나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내가 은혜받고 전하고 있는가?’ ‘이 땅에서 나의 목적은 무엇이며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인문학은 자기에 대한 물음이며 발견과 깨달음입니다. 불교는 윤회사상으로 범생명주의를 주장하고 동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이 등가입니다. 유교는 인간의 존엄성은 이야기하지만 차별하기 때문에 평등성이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여성의 존재가 매우 취약합니다. 이슬람에는 인간 혐오사상도 있지만 이슬람 어느 경전에도 여성의 구원에 대한 말이 전혀 없습니다.

종교뿐만 아니라 현대 자연주의 대표적인 사람이 '칼 막스'입니다. 현대 정치, 사회의 대표적인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인데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물질로 이해합니다. 코소보 사태 때 알바니아계 40만 명을 왜 죽였습니까? 왜 21세기에 들어와서 유럽의 한 복판에서 세르비아의 수상과 지도자들이 추방을 안 시키고 40만 명을 학살합니까? 밀로셰비치나 카라치치 이런 사람들은 처음에는 공산주의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나중에 당원이되고 관료가 되고 수상과 대통령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세계관은 유물론적 세계관이고 이 사람들의 인간관은 유물론적 인간관입니다.

유물론적 인간관은 뭔가하면 인간은 하나의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자기 고모부와 형을 죽이는 것은 공산주의의 인간관이 유물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존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예사로 필요없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을 물질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윈은 인간을 동물과 차이가 없는 것으로 봅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을 고상한 존재가 아니라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프로이드도 자기 처제하고 관계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다윈과 막스와 프로이드를 보십시오. 다윈은 20세기를 주름잡은 과학의 대표적인 사람이고, 막스는 전세계의 반을 붉게 물들게 한 공산주의의 대표자이고, 프로이드는 오늘날 교회까지도 내적치유니 정신분석이니 하는 사람들이 신봉하고 있고, 미국에서 나온 네오프로이드를 기독교인들이 특강도 하고 마치 교과서인 듯 사용하는 이 모든 것들이 인간관이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소위 자연주의자들인데 인간을 한낱 동물, 한낱 물질, 한낱 욕망으로 동물농장의 식솔들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인데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 뭡니까? '자유'와 '인권'입니다. 이 자유와 인권은 인간의 존엄성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확보가 안 된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을 우리는 왜 존귀하게 봅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존귀하며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인간관을 도입하지 않으면 지상의 어떤 철학이나 사상 중에 존엄성과 평등성을 동시에 말한 것은 없습니다.

목회는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정황을 잘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의 종이라고 말씀만 연구하면서 그렇다고 말씀의 파워도 없으면서 말이죠. 정작 우리는 성도들의 삶의 정황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터는 여러분이 아무리 설교를 해도 공중에 대고 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씨는 말씀이고 토양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정황인데, 우리는 이 비유에서 한 가지만 깨닫습니다. 좋은 밭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밭도 중요하지만 씨를 뿌릴 때 토양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군인이나 학생이나 다릅니다. 서울역이나 부산역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데 열심은 있지만 복음을 뿌리는 전략, 씨를 뿌리는 분석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뿌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토양은 다양한 것을 알고 설교로 원맨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정황을 알고 터치되고 울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성도들에게 전혀 다가가지 않고 마치 솜방망이 같아서는 완악하고 닳아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완고함, 뺀질거림, 영적으로 굉장히 무디어져 있는 마음을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력한 말씀을 전해야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문학의 기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기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데, 특별히 우리 목회자들은 독단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말씀의 권위는 지녀야 되는데 독단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목회자들이 독단에 빠지기 쉬운데 왜냐하면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절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절대 타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성도들이 절대 추종하는 목회자입니다.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군림적 태도는 맞지 않습니다.

독단적 사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지만 때로는 내가 불의하고 나의 생각은 절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 살면 교만하기도 쉽고 위축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면 내가 아무리 잘나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고, 내가 아무리 못나도 하나님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우리 인격의 전반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지 어려우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잘 되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변화를 추구해야 됩니다. 칼빈은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독은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고 우쭐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 앞에서 남을 변화시키기 전에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성도 목회하기 전에 네 목회나 잘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늘 강단 목회하기 전에 골방목회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입 목회하기 전에 귀 목회해라. 10%가 교회 목회라면 90%는 자기 목회입니다.

우리는 지성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설교할 때 ‘아멘’ 하면 좋아하고 설교 가지고 따지면 안 좋아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성에 대해 닫힌 태도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지성의 시대이고 지성적인데 복음주의자들이 반지성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면 안 되지요. '장사익'이라는 가수가 노래를 하면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오늘만큼은 편히 쉬라고 하면 사람들이 감동이 돼서 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 반응이 없으니까 '아멘' 하라고 하고 박수치라고 하고 쥐어짭니다. 무슨 감동이 쥐어짠다고 나옵니까? 그러니 요즘 지성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우리는 이 지성에 닫혀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하면 결국 복음주의자들은 무식한 집단이 될 수밖에 없고 지성인들은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인문학은 텍스트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본질을 파악해야 하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본질을 많이 놓쳤습니다. 구원은 구원파가 떠들고, 종말과 하나님 나라는 신천지가 가져가고, 사도행전의 은사는 끝났다고 말하는데 누가 끝났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폭발적인 역사를 제한할 권리를 누가 부여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데 이런 성령님의 폭발적인 역사는 신사도운동이 가져가고, 방언은 기도원에서 다 가져가버리고, 오늘날 교회는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아서 심리 설교, 내적 치유, 마음의 위안, 자신감, 자존감, 심리학 용어를 빌려와서 심리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윤리운동 한다고 윤리 이야기만 실컷 하고, 그런 식으로 하면 교회에 어느 죄인이 오며 윤리를 말하는 그 사람 조차도 강단에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빛과 소금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아무리 우리의 죄가 먹보다도 검을지라도 완벽하게 덮는 특별한 보혈입니다. 끝까지 정죄하고 지적하고 공격하니까 이 난리통을 피우는 겁니다. 우리가 윤리대로 바로 살아야 되지만 윤리가 복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받아야 되고 포용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기독교 세계관 운동하는 분들이 이것을 20년 동안 세계관은 무엇인가 하고 토론하고 담론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본래 세계관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하면 한국교회 성도들이 삶과 신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인데, 하도 지성적인 토론을 좋아하다 보니까 생명력도 없고 능력도 없고 파급력도 없고 그냥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납니다.

인문학은 언어를 하는 것으로 언어 사용을 잘해야 합니다. 목사님들이 좋은 말은 많이 하는데 지겹습니다. 왜 지겨운지 압니까? 쓰는 용어가 늘 반복적이고 낱말이 몇 단어가 되지 않습니다. 언어는 풍요롭고 다양한데 같은 말을 계속 쓰니 안 들어도 다 알고 지루한 것입니다. 은쟁반에 금사과처럼 언어의 눈이 열려야 됩니다. 언어의 눈이 안 열리면 천편일률적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논리가 있어야 됩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논리가 없어서, 본문을 가져와서 결론이 나와야 되는데 앞과 뒤가 연결이 안 됩니다. 지성인들은 논리가 안 맞으면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논리를 구비해야 합니다. 그런 분이 바울 사도였습니다.

그 다음은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00인데 본인은 20~30만 이해하고는 와서 나머지는 TV에서 본 것이랑 또 중간에 노래도 부르고 박수치라고 하고 '아멘' 강요하고 자기 자랑 좀 하다가 어떻게 이렇게 합니까? 정말 살기 어려운 사람들 겨우 나와서 있는데 옆 사람이랑 인사하라고 하고, 인사는 마치고 해도 되는데 왜 그런 것들을 하면서 귀한 시간을 낭비합니까? 짜깁기 해서 잡다한 세상 지식으로 채웁니다. 우리는 말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수경실(修綆室)’이라는 서재가 있는데 ‘수경’은 ‘긴 두레박 줄’이란 뜻으로 옛사람의 학문이라는 깊은 우물물을 긷기 위해서는 풍부한 자료와 오랜 노력이라는 의미의 긴 두레박 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고전보다 더 깊지 않겠습니까? 긴 줄로 생수를 퍼 올려서 삶에 힘든 영혼들을 살려야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광인, 거룩한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부교역자들 너무 잘 생겼습니다. 훤하고 옷도 잘입고 멋진 젠틀맨들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에 미친 사람이 없습니까? 톨스토이의 말처럼 12개의 성냥개비가 있으면 세상을 불태운다고 했는데 사도 바울 같은 한 개의 성냥개비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대단한 분들이 많이 있는데 이슬람, 동성애, 이단의 공격 앞에서 수세하기도 급급하고, 교회마다 자중지란, 내적 분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영적으로 너무 취약합니다. 거기에다가 우리 시대는 너무 즐길 것이 많아서 목회자들도 놀자판입니다. 얼마나 많이 노는지 번질나게 해외 다니고, 언제 기도하고 언제 하나님 앞에서 깨어 사는가?

저는 학자라도 영적으로 깨어있으려고 정신을 차립니다. 정말 제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안 깨어있으면 끝나는 겁니다. 제가 왜 텔레비전을 안 봅니까? 그거 보면 영적으로 못 깹니다. 영적으로 깨기 위해서 정신을 차리고 삽니다. 왜 이슬람이 저렇게 흥왕합니까? 이슬람은 알라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겠다는 사람 수만 명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계몽된 시대에 저 극악무도한 이슬람이 일어납니다.

왜 우리는 거룩한 바보들, 바울처럼 미친 사람들, 이런 사람이 왜 없는가? 아무리 제자훈련 시켜도 복음서 뒤에는 제자들이 오합지졸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에서 성령님의 학교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에 땔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 땔감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무엇에 취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취하고 좌파에 취하고 우파에 취하고 정치에 취하고 놀음에 취하고 도박에 취하고 여자에 취하고 텔레비전에 취하고 골프에 취하고 취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주인이기 때문에 성령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만하면 안 됩니다. 교만이 주인인데 성령이 오실 수 없죠. 교만하면 성령은 떠납니다. 교만한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 죄가 있으면 안 옵니다. 성령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영이기에 더러운 곳에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취하지 않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사모해야 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성령충만을 사모하여서 한국교회를 변화시키는 귀한 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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