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0) 교갱협 제24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누가복음 15장 25~32절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제가 호주에서 20년을 사역하고 한국에 온지 8년 되었습니다. 해외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에 한 번씩 오면 한국교회의 심각성에 위기의식을 많이 느꼈습니다. 제가 90년도에 호주에 갔는데 92년도부터 한국교회가 하향곡선을 그렸습니다. 위기를 너무 오래 겪으면 위기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8년이 되었는데 그 때보다는 위기의식을 덜 느낍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위기인지는 여러분 모두 아실 것입니다. 전운이 감돌고 있고 지방교회는 훨씬 더합니다.

한국교회의 돌파구는 무엇인가? 예전에는 교회 성장을 화두로 많이 얘기했는데 지금은 전혀 없습니다. 리더십에 대한 세미나도 많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했는데 역시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닌 백약이 무효한 현실입니다. 신학생도 줄어들고 있고 개척교회는 하지 않습니다. 이단과 외적, 내적 상황이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 이번에 교갱협에 오면서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오늘 본문은 탕자의 본문인데 맏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둘 다 탕자입니다. 둘째는 드러난 탕자라면 맏아들은 은밀한 탕자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맏아들은 애매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많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공간적으로 아버지의 곁을 떠났고, 맏아들도 공간적으로는 아버지의 곁에 있지만 끊임없이 아버지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소유에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성 속에서 살지 않고 오직 그 아버지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이사야서 53장과 같습니다.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자기의 왕국을 만들어가고, 자기의 세력을 키워가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두 아들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적인 것입니다. 큰 아들이 일을 하는 것도 아버지의 소유에 대한 관심이지 아버지의 아들로서 기쁨과 특권과 신분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신분에 관한 문제, 정체성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아버지에 속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무엇을 얻고자 하는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아버지의 것이 아들의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속한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품꾼의 모습입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큰 아들은 일을 하고 일의 대가를 얻고자 하는 품꾼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아들과 같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 속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유하려고 하고 그 소유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동생이 돌아왔을 때 불쾌하고 화가나고 짜증이 나고 기쁨이 없고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에서도 존재에 관한 문제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특별히 교인수를 많이 따집니다. 교회의 크기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권세에 대한 만족감이 아니라 외적인 것들로 내 삶을 포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맏아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별한 것은 바리새인, 유대주의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램브란트의 그림에서처럼 동생의 돌아옴을 기뻐하지 않는 모습은 예수님이 오셨지만 즐거워하지 않는 유대인의 모습과 같습니다. 율법의 틀 안에서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도적인 틀 안에서 충성과 열심을 다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칼 바르트는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적은 종교화”라고 했습니다. 맏아들은 열심은 있지만 진정한 즐거움이 없습니다. 형식과 틀 안에 갇혀서 모든 것을 하고 있지만 기쁨과 자유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하는 아버지의 행동으로 인해 노한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도 돌아오면서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합니다.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부유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거하면서 내면은 궁핍하고 불안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아들로서의 부유함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아들로서 누릴 특권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무엇인가 받아내려고만 혈안이 되어있고 쫓기고 있습니다. 계산만 하면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형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존재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유 중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가지느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소유 중심은 결국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 수에 따라, 규모에 따라, 예산에 따라, 외적인 조건이 적어지면 불안해지고 존재감이 떨어집니다.

여러분,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리면 당당해집니다. 요즘 담임으로 가는 경우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하고,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쳐서 팔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우리 부목사들한테 이력서를 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자로서 기름부으심 받은 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떠나서 사는 것을 꿈꿉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기대하며 열심히 일을 합니다. 모두 소유의 문제에 놓여있습니다. 목회도 일종의 소유적 개념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아들의 권세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 두 아들을 통해 주시는 공통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이 없는 소유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져도 하나님 없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인 것입니다. 큰 아들의 정체성의 혼란, 아들이지만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지위보다 소유에 눈독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께 속한 자,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저는 고린도후서 6장 10절 말씀을 좋아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자에게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이 자유가 있어야 목회에 집중력을 가집니다. 안 그러면 세상의 영향을 받고 좌지우지되고 성도들 눈치보고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겸손함을 품은 당당함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당당함과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신분의 영광스러움입니다.

조성진은 지금 23세 정도인데 '쇼팽 콩쿨'에서 1등을 하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젊은 친구가 포스가 대단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당당한지요. 여러분, 우리도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기죽지 않는 하나님 안에서의 존재입니다. 그 정체성을 분명히 이해할 때 어떤 외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언제나 당당한 흔들림이 없이 견고한 하나님의 사역자들로 서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인 조건이 우리의 삶을 결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외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넉넉함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유한 자들입니다.

오래 전에 옥한흠 목사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지방의 젊은 목사를 만났는데 얼마나 자신감과 당당함과 부유함을 가지고 있었는지 옥 목사님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졌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정체성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기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니까 불안하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동생을 위해서 송아지 하나 잡는 것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아주 인색하고 매몰차고 비인간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것은 아들로서의 귀향,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이 누리는 특권과 신분과 풍성함,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내 목회가 안 되고,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를 안 믿고 절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불공을 드리고 새벽 제단 쌓고 목탁소리, 등을 달고 모든 것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전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집안입니다. 저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만으로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 하나, 이 행복, 이 황홀함, 이 특권을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번 여름 휴가 때 고통에 대한 책들을 좀 봤습니다. 왜 그랬냐 하면 교인들의 삶에 어려움이 너무 많았습니다. 대한민국이 지금 굉장한 부자가 되었지만 교인들의 속을 들여다 보니까 돈만 좀 많아졌지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성한 가정이 없고 고통 없는 성도가 별로 없었습니다. 어떤 것은 해석이 안 되었습니다. 고통에 대한 책을 보면 하나님 안에서 큰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들이 이해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난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붙들고 놓지 않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됨이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라고 합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두 아들은 종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들은 자유인입니다. 아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아버지의 몫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이 맏아들은 소유로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가려고 했습니다.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조건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길을 걸을 때도 힘이 있어야 합니다. 고아원에 가보면 요즘 옷도 잘 입히고 잘 먹입니다. 그런데 얼굴에 외로움과 사랑을 받지 못한 모습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애들은 다르잖아요. 고아는 하루 종일 고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있는 애들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호주에는 요트를 정박한 곳이 많은데 우리 아들이 저보고 요트를 가르키면서 “저거 하나 사자” 고 하더라구요.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합니다. 아무리 굶어 죽어도 자녀됨의 포스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작아도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 하나 31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 이것은 아버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와 공간적으로는 함께 있지만 그 임재는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아버지와의 만남이 없습니다. 관계는 없고 일만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영적으로 어두웠을 때 날마다 엘리는 그 자리에 앉아있지만 기도하는 한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버지의 곁에 있는데 아버지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활동과 엑팅은 있는데 펠로십이 없습니다. 그 분을 알아가는 경험이 없습니다.

저도 새벽기도를 하며 그런 것들을 노력해야 합니다. 새벽기도에 참여한 건지, 기도를 하는 건지, 세월이 흐르면 사역의 기능만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깊어져 가야 됩니다. 유진 피터슨은 말하기를 사역을 기능적인 것으로 한다면 2주면 다 배운다고 했습니다. 저의 고민은 '목회를 하면 할수록 주님과 교제가 깊어져 가는가? 깊은 동행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목회자상은 주로 사역을 잘한다는 관점에서 말합니다. 사역은 잘하지만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역자일 수 있습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가 없고, 주님을 깊이 알아가는 경험이 없는 세련된 사역자는 사고 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새벽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운전이나 컴퓨터나 강단에서 멋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30분이라도 말씀 앞에 앉아있으라고 합니다. 커피 들고 왔다갔다 돌아다니지 못하게 합니다. 해운대에 좋은 카페가 많으니까 아침에 회의를 다 거기 가서 합니다. 회의를 새벽기도 마치고 하니까 문제가 있어서 오후에 하도록 했습니다.

저도 이제 목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퇴하시는 분들을 자세히 보는데 은퇴하는 시점에 교회가 어려워지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한평생 영적인 일을 감당했던 분이라면 은퇴의 시점은 영적으로 무르익고 깊어질 때가 아닙니까? 누가 봐도 내공이 느껴질 정도로 부러워지고 기대가 되고, 감탄이 나오고 탄성이 나오고, 모든 교인이 볼 때 우리 목사님, 정말 예수님 닮았다고 하는 소리 듣고 싶잖아요. 동행하면 닮아야죠. 비행기가 뜨는 것도 중요하지만 랜딩이 중요하잖아요. 랜딩을 잘 못하면 끝납니다.

한 목회자의 이미지는 사역을 할 때보다 영적 수련을 할 때 나타납니다. 수도사적이고 하나님과 깊고 내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한국은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요. 정신없이 달려와서 지금 공허한 것입니다. 영적 깊이가 없고 자라지 못했고 종교화 된 것입니다. 종교화는 죽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아를 강화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사역하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영의 세계가 자라나고 있는가? 말씀의 세계가 깊어졌는가? 기도가 깊어졌는가? 우리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닙니까? 기독교 사역자로서 활동가로는 충분히 보여졌는데 너무 얕습니다. 대화를 해보면 속에 들어있는 것이 없어요. 제가 만나는 40대 목회자들이 있는데 3년 사역하고 나니까 바닥이 난다고 합니다. 1년만 해도 바닥이 납니다. 그리고는 요령으로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일 중심은 공로주의로 갑니다. 오늘 맏아들의 모습입니다. 왜 섭섭함이 오냐면 열심을 일을 했는데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에게 분노가 있습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있고 냉혹하며 자기 일 외에는 주변에 관심이 없습니다. 열심에 있어서는 맏아들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은 정말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저도 새벽마다 기도할 때 그 부분이 걸립니다. 저희 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정필도 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새벽마다 뭘 그렇게 기도하시는지 여쭸더니 “내 욕망과 싸워” 라고 하셨어요.

왜 우리가 분주하고 바쁩니까? 일 중심은 바쁘고 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분주함은 배교와 같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은 없고 자기라는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아무에게도 준 적이 없습니다. 맏아들은 분주한 활동 속에 오직 자기 일에 몰두 합니다.

바쁘다보면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돌아와서 보니 여전히 다 있는데 기도가 약해졌습니다. 우리 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인데도 예전의 기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깊어지고 있는가? 익숙해지고 있는가? 를 잘 보셔야 합니다. 깊어지지 않는다면 다 끝나고 난 다음 공허함만 남습니다.

사역의 기술과 경륜은 늘어나는데 인격은 깊어지지 않고 영적인 고고함이나 품격이 묻어나지 않고 장사꾼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외형적으로 치우칩니다. 비교와 경쟁, 성과주의에 내몰리면 동료들 간에도 피 튀기는 경쟁을 합니다.

지금 맏아들은 보상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역을 다 마치고 무슨 보상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어떤 것을 주면 만족하시겠어요? 목사님들끼리 만나면 다 이 이야기를 합니다. 내 노후를 어떻게 보장 받을 것인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안 주시면 굶어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명은 무엇입니까? 집을 나간 동생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무엇을 했다는 거죠? 아버지의 아픔, 아버지의 심장 한 가운데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수없는 세월 동안 기다렸던 아버지의 목마름을 맏아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자기의 의를 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본질을 놓쳤습니다. 진짜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놓쳤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혼란함입니다. 너무 복잡합니다. 교회도 복잡하고 목회도 복잡합니다. 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 모임도 많고 회의도 많고 감투도 많고 직함도 많고, 뭘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몇 년 전 부산성시화운동 할 때 대회 조직 없이, 직함 없이, 광고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집회를 했습니다. 해운대에 비오는데 10만 명이 모여서 회개기도만 4시간 했습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본질을 붙잡으면 파워풀해집니다. 개척하는데 교통 요지가 본질이에요? 인테리어가 본질이에요? 카페가 있어야 본질이에요? 아무필요 없어요. 광야의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1급수 물이 거기 있고, 전혀 듣지 못한 메시지가 거기 있으니까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LA 끝에 공장지대에 있는 카페에 사람들이 몰립니다. 교통도 좋지 않고 어스름한 공장인데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곳은 딱 하나 원산지를 찾아다니며 최고의 생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생두가 본질입니다. 두 번째 바리스타가 실력자들입니다.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기가 막히게 빼냅니다. 이게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될 일이 무엇인지, 목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이 밤에 그것을 찾아내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답은 다 알고 있어요. 본질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음을 복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호주에서 사역할 때 학교 건물을 50번 이상 옮겨다녔고 어떤 때는 매주 옮겨다녔습니다. 그렇게 옮겨다니는데도 새가족이 왔습니다. 어디서든 예배를 드리는 어노인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방법이 아니고 본질을 붙잡으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번 수련회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딱 하나씩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맏아들은 분노합니다. 화가 나 있어요. 놀라운 것은 아버지 집에 풍악이 울리고 잔치가 벌어집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동생의 귀환으로 축제가 일어납니다. 한 사람의 회심으로 온 교회가 축제를 벌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적 삶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내가 교인을 모은다고 모아집니까? 여러분, 교인이 몇 명이 모이면 행복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맏아들의 완전한 귀환은 그 축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안에 행복과 즐거움과 축제를 잃어버렸다면 다시 회복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고 즐겁지 않은데 누구를 행복하고 즐겁게 해 줄 수 있겠어요? 빌립보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우리는 어떤 것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원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기쁨을 너희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하겠다.” 아버지의 종이 아니라 아들로 살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시고 그 아버지와의 깊은 교제 안으로 날마다 더 깊이 들어가서 본질을 굳게 잡으시고 거기서 나오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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