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19) 교갱협 제24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마태복음 28장 18~20절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한국교회의 갱신은 목회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하게 개혁됩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하시는 분을 많이 봅니다. 사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간단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는 형편이 된다면 개혁을 해라 말아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시는 것은 목회자들로부터 개혁이 일어나서 단순히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열방에 나아가서 쓰실 일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교갱협은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역사를 지난 23년간 해오셨는데 올해는 그 일을 더욱 뚜렷하게 이루시길 원합니다.

저희 교회 부목사님이 신촌의 큰 교회 담임목사님으로 가시게 되면서 저에게 취임예배에 축사를 부탁해서 준비하며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을 강하게 믿으시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에 대해서 생각나는대로 적다 보니까 열 개가 되었습니다.

첫째,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보이는 분처럼 바라보아지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둘째, 혼자 있을 때 예수님을 잘 바라볼 수 있으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셋째, 교인들을 볼 때 예수님이 함께 보이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넷째, 돈보다 예수님이 더 좋으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다섯 째, 사람들의 칭찬이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여섯 째,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일곱 째, 가난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부유함이 두려워졌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여덟째, 괴롭히는 사람, 가시와 같은 사람들도 오직 사랑만 하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아홉째, 목회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열 번째, 은퇴할 때 미련없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면 목사님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목사가 예수를 잘 믿으면 한국교회는 개혁됩니다. 저는 감리교 3대째 목사이고, 교단과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린 시절에는 교회가 싫었고 목사되는 것은 끔찍했습니다. 큰 아들이어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운명처럼 목사가 되었지만 제가 어린 시절에 두려웠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다는 사람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 시대에 자타가 공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목사와 장로일 텐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알아볼 수 있을까? 제가 어릴 때 목회자들, 장로님들을 보면서 가진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무서웠던 분은 장로님이셨습니다. 목회자의 자녀가 가진 아픔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제자들을 향하여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한 마디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의 말씀 때문에 이 명령이 가능해졌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가시겠다고 하시면 가능한 일인 거죠. 목회자인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약속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성경에서 믿어지지 않는 구절 중에 하나가 마태복음 18장 20절이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래서 예배드릴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가 보다. 우리 가운데 계시겠지. 어디선가 지켜보고 계실 거야’ 그건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예수님은 정말 함께 계시는가? 제가 처음 전도사가 되어서 감리교에서 가장 작은 지방회에 나갔습니다. 연초였습니다. 목사와 장로들이 각 교회의 대표로 모였는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치고받는 싸움은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싸움 같았습니다. 서로 마이크를 뺏으려고 하고 얼굴이 시뻘개지고 그 존경스럽던 목사님, 장로님들이 소리를 지르고, 그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목회자가 되어서 섬겨야 되는 한국교회가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지방회마다 그 해에 소천하신 장로님들 추도예배를 드리는데,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엉망인 상태에서 갑자기 추도예배 시간이 되었다고 순서자들이 강단으로 올라가더니 “묵도하시겠습니다.” 하고는 예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상황을 보면서 눈물만 나왔습니다. 싸우고 나서 해결하거나 화해하거나 회개하지도 않고 어떻게 갑자기 예배를 드리는 건가? 예배가 끝나고는 또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현주소입니다. 말씀은 너무나 놀라운데 목회자들부터 믿지 않습니다. 미국의 ‘해리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공개토론 내용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신학생 때 이 예화를 읽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릅니다. 무신론자와 공개 논쟁 제안을 받고 무신론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 두 사람을 데려오면, 나는 예수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 100명을 데려오겠다고 했더니 그 무신론자가 그냥 가버렸다는 일화입니다. 얼마나 통쾌했는지요.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나는 100명의 증인을 세울 수 있을까 점점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삶이 변화된 100명을 세울 수 있을까? 예수님 믿고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목회자 여러분께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믿습니까?

만약에 이게 진짜라면 지금의 이런 분위기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시게 저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신다면 숙소 문제, 식사 문제, 강사 문제 등이 신경이 쓰이겠습니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려운 곳에서도 예수님 말씀 듣고 싶어서 따라 나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는다면 지금하고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기 때문에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진짜는 하나도 못보고 엉뚱한 것만 붙잡고 그대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사님들의 모임에 가서 계속 불평을 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그 목사님한테 말하기를 “목사님, 하나님 안 믿지요?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런 식으로 말해요? 하나님을 믿는데 그런 생각밖에 안들어요?” 그리고는 그 목사님과 계속 원수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어떻게 불평하고, 사람 탓하고, 환경 탓하고, 그렇게 부정적일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5장 11절 ‘너희는 열매없는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이 말씀이 지금 목회자들 사이에 은밀히 행하는 것이 말하기도 부끄러운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오래전 저희 교단에서 목회를 잘하시는 촉망받는 목사님이 교인과 간음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목사님은 마음에 가책을 받고 목회를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평소에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을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어서 그만두겠습니다.” 그리고는 엄청 야단맞았어요. “아니 그런 일로 목회를 그만둔다면 계속 목회할 사람이 누가 있어? 조용해. 아무 말 하지 말고 있어. 내가 교회 바꿔줄 테니까” 그랬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교회를 바꿨어요. 이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거하시는 것을 우리는 진짜 믿는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무서운 영적 교만과 분열, 다툼, 무서운 타락, 거짓말, 지금 우리 시대에 부딪힌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다른 시대보다 유난히 나쁜 사람들이라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들이 모이시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지난 2005년 4월 8일에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께서 공개적으로 회개를 하는 역사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 제가 40대였는데 그날 뉴스에도 나왔습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김창인 목사님은 “해방 직후 신사 참배한 목사들을 두고 '마귀당'이라고 하고 밥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뜻은 좋았지만 내가 잘났다는 교만심이 커지고 판단만 하고 사랑은 흐려졌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받고 살았으면서도 가장 무서운 교만함으로 함부로 입을 열어 정죄하고 저주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늘나라는 회개하는 자만 갈 수 있습니다. 이 교만했던 종이 바로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이 메인 채 그렇게 고백을 바쳤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는 힘을 쏟으면서도 정작 기독교단 사이의 분열에 대해서는 소홀했음”을 회개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결코 값싼 것이 아닌데도 무조건 축복만을 강조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을 좇아 썩어가는 옛 사람의 구습을 벗지 못했습니다.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았고 말로만 사랑하고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자기를 위해 살았습니다. 사회악에 대해 침묵했고 부정과 부패에 고개를 돌렸고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지 못하는 비겁함이 있었습니다. 70 평생을 죄인의 괴수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를 탈피하고 새 사람을 입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그 시절에 이 세 분은 대단한 분들이셨습니다. 그런 분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은 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목회를 성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서도 이런 일은 성령의 역사이기에 한국교회에 이제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개혁의 새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15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전히 답답한 숙제입니다. 도대체 그 목사님들은 왜 그랬을까를 지금까지도 생각해 봅니다. 저는 한가지 이유는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주님과 동행함’,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이 실제가 아니셨나? 만약 그렇다면 종교생활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가 목회자로 부름받고 교회를 섬기는데 조심해야 될 것은 우리가 종교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설교, 심방, 교육 모든 것을 열심히 하지만 종교적인 열심만으로도 다 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외적인 결과도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단순히 종교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중국 목회자들이 한국교회를 방문해서 배우고 하시는데 한번은 조심스럽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는데 왜 어려움이 왔습니까?”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기도는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잘못하면 종교적인 열심으로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현재 감독회장님은 부재중이고 대행을 뽑는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어른 목사님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놓치신 것 같아요. 그 분들이 열심이 있고 교회에도 충성하셨고 목회도 열심히 하셨는데, 그런데 한 가지를 놓치신 것 같아요. 내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지 않을까요?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할 당시에는 교회 성장이 모든 목회자의 꿈이었습니다. 교회 성장 붐이 한국교회에 뜨겁게 불었습니다. 큰 교회마다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랑의교회는 독특하게도 교회 성장보다는 제자훈련에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목회하셨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왕 목사가 되었으면 교회가 성장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도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목회했습니다. 그 때 제 꿈은 훌륭한 설교자라는 말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저 목사님은 교회를 엄청 부흥시켰고, 교인도 늘고, 헌금도 늘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선교사도 많이 돕고, 지역사회 구제하고, 정치인들이나 국회의원들이 존경하는 그런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집 사고 땅 사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목사라는 소리, 성공한 목사라는 소리 하나 듣는 거, 그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저는 그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안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하니까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스스로 점점 제 속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목회를 잘 한다는 소리도 듣고 좋은 평가도 듣고 했지만, 저보다 더 큰 교회가 있고, 저보다 작은 교회도 있는데 그 사이에서 교만과 열등감이 널뛰기를 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점점 말라가는데 신기하게도 겉으로는 부흥되었습니다. 교인들 모으는 것도 다 방법이 있었습니다.

점점 제 스스로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수요예배 끝나고 인사를 하는데 남자 속장님 한분이 나오시는데 몇 주째 빠지는 새가족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속장님, 그 아무개 성도님 요즘 안 보이던데 연락이나 심방해 보셨나요?” 그랬더니 그 속장님이 저를 보고 “목사님, 우리도 좀 삽시다.” 제가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저녁도 안 먹었습니다. 수요예배 참석하려고 직장에서 바로 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저를 보고 저녁이라도 먹었냐는 인사도 없이 심방했냐는 것부터 따집니까?”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너무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제 방에 가 계시도록 하고는 계속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버지가 목회할 때 별별 사람이 다 있었는데 나도 그런 사람을 만나는구나. 이럴 때는 절대로 화내면 안돼, 괜히 잘못하면 더 큰일이 되는거야.'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그리고 사무실에 갔더니 앉아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죄송합니다. 속장님이 저녁 안드신 것을 몰랐습니다. 얼마나 시장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그 새신자를 여쭤봤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저는 그 분이 안 보이고 염려가 되고 혹시 잘못될까봐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말하기를 “아니 교인이 안 보이면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넘기면 안 됩니까? 그걸 꼭 밝혀야 됩니까? 교인 입장에서 목사에게도 알릴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믿음이 작다 보면 주일 빠지고 놀러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걸 목사님이 알면 나중에 얼마나 민망합니까? 서로 알아도 모른 체 몰라도 모른 체 넘어가면 다시 또 교회를 나오고 이런 거 아닙니까? 하루 빠지면 심방 가야 되고, 왜 안 나왔는지 따져야 되고, 꼭 그런 식으로 해야 됩니까?” 이러는 거예요.

제가 참기가 힘들어졌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속장님이신데 주일에 빠진 사람 챙겨주고 심방도 하고 그래야 실족하지 않고 붙잡아주고 교회도 부흥되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 부흥이요? 아니 왜 우리가 목사님 성공을 위해서 희생해야 되는데요?” 부흥이 목사님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교인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어요. 당신은 서울의 큰 교회 몇 만 명씩 모이는 교회의 소식을 들으면 부러운게 아니라 얼마나 들볶였으면 저렇게 많이 모일까 하고 교인들이 불쌍하다는 거예요. 제가 하도 답답하고 말이 안 통해서 나가시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마음이 서글펐습니다. 아니 평신도 리더들이 이런 수준이면 목회를 어떻게 합니까? 속장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심방하고 마음을 모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교회 성장이 목사를 위한 것입니까?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 아닙니까? 왜 이 말을 안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제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얼마나 쉽지 않은 목회를 하고 있는지 제 마음 이해하시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가 다 봤다. 너 얼마나 고생하는지 내가 다 안다. 네가 어리석은 교인들 데리고 교회 부흥시키려고 애쓰는 거 내가 기억하겠다.” 하시며 제 마음에 위로를 하실 줄 알았어요. 그렇게라도 풀어주시고 힘을 주셔서 제가 다시 한 번 순교할 마음으로 심방을 가서 권사님 마음도 풀고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순서인데 왠지 하나님이 싸늘하신 거예요. 갑자기 마음이 힘들어졌어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위로자로 다가오시기 보다는 싸늘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제 속에 숨겨놓았던 의도가 들통난 것 같았어요. 권사님의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지만 제 속에 있는 숨길 수 없는 야심과 같은 것이 건드려진 것입니다.

왜 그렇게 교회를 성장시키고 싶어하는가? 진짜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을 위해서인가? 나는 교회 부흥시키는 실력있는 목사라는 소리 듣고 싶은거 아니야? 마치 치부를 드러낸 것 같은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는 기도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왕 바리새인입니다.”라는 책을 내신 아마존의 고 허운석 선교사님과 남편 김철기 선교사님은 참 귀한 분이셨습니다. 언더우드 선교 대상도 받으시고 업적도 많고 열매도 크고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가슴찢는 회개”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한국이 배출한 가장 헌신적이고 모범적이고 열매도 많은 선교사님이 무슨 회개할 것이 많겠는가 하고는 그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다음에 자기가 주의 종이 아니고 종교적인 열심만 가지고 일중독에 빠졌던 사람임을 깨달았다는 내용입니다.

허운석 선교사님이 암으로 투병할 때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으로 생각했데요.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진 않으실거야.' 그래서 아내가 암투병을 하고 있는 중에도 열심히 선교를 도우라고 했답니다. 아내는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사역할 때 가장 먼저 아내가 도와주기를 바랐다. 그것도 흡족하게 잘해주기를 바랐다. 나도 선교사지만 너도 선교사다 마땅히 해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역자들에게 잘해주기를 강요했다. 모두 나로 인해 힘들어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종교적 야망이었다. 나는 생명의 주님을 버리고 거룩한 야망을 따랐다. 그것이 야망일 뿐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내가 내 곁을 떠난 뒤였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인디오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나는 희대의 사기꾼이었다. 위선자 중의 위선자였다. 그렇게 마귀에게 속아서 수십 년을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나는 58세에 홀아비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목회를 하면 안됩니다. 열심히 했는데, 충성했는데 이게 종교적인 열심뿐이었다는 차이는 예수님과의 동행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주님과 동행함이 아니면 그것은 나 자신의 야망 때문에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열심히 사역하시다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중병에 걸려 치료차 한국에 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참 귀한 분이세요.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면 몸이 망가졌을까 싶더라구요. 그 선교사님을 심방하면서 “선교사님, 두려움과 염려는 주님께 다 맡기세요. 맡기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세요.” 뭐 그런 약간은 상투적인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 선교사님의 얼굴을 보는데 아무말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계세요. "아멘" 해줘야 제가 마무리를 할텐데 아무 말이 없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 망설이고 있는데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게 안돼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이처럼 목회자들 중에 세상없는 설교를 하시는데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이 안되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염려와 근심이 주님께 맡겨집니까?

저는 오늘 여기 와서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지금 제 아내는 심장혈관이 막혀서 수술하고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정말 예수님 믿는 거 맞아?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어?' 그런 상황이 계속 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자는 ‘예수동행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동행운동’은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이 말씀을 실제로 경험하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는 진짜 예수님만 믿어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고 목회를 할 수 있을까요?” 목회자들이 가장 어려워 합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만 믿어서는 변별력이 없잖아요. 거기에 특별한 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봤는가?”

요한복음 7장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렇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질 않으니까 오히려 못 믿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분명하고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겠다 싶은 거죠.

주님은 또 믿어지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것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뭡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려고 사람이 되셨고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피흘려 죽으시고 속죄제물이 되어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그 분이 그리스도 이신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림하실 주님, 이것이 믿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믿어가지고는 생수의 강이 내게서 흘러나오고 주님이 하신 일을 나도 하고 더 큰 일을 할 거라는 것은 믿지 못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데 그러면 그것 말고 뭐가 또 있습니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는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까지 가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다시 언급하기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고 이제 예수로 사는 자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뭐가 이상한 일입니까?

존경하는 목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에 목사님의 아드님이 목사라면 딱 한 가지만 신신당부해야 한다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예수님을 사랑해라. 죽도록 예수님을 사랑해라. 온 맘 다해, 온 힘 다해 오직 예수님을 사랑해라. 그리고 진심과 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나머지는 네 맘대로 해라.”

그런데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면 됩니까? ‘존 비비어’ 목사님의 ‘무엇이 선인가?’에서 1980년대 미국 TV 설교가로 유명했던 목사님이 간통죄와 공금횡령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어서 존비비어 목사님에게 감옥으로 면회를 와달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모르는 분이지만 너무 유명한 목사님이고 그 목사님께 꼭 물어볼 말이 있어서 면회를 가셨답니다. 이런저런 깨달음을 나누다가 존 비비어 목사님이 정말 하고 싶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언제부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기 시작하셨나요?” 그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목사님, 저는 한번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은 적이 없습니다.” 계속 말하기를 “한 번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은 적도 없었고, 사랑이 식은 적도 없었지만 예수님이 두려운 적도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또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나면 사랑하지 않고 감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다 그래서 목회자도 되고 교회의 여러 일들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말하고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주님을 사랑하는데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주님이 내 앞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그렇게 못합니다. 자랑도 못하고, 교만하지 않고, 거짓말도 못합니다. 욕심도 못내고 은밀한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이게 바로 디모데후서 3장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주님이 그를 다르시지 않습니다.

2007년이니까 13년 전입니다.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이 수술, 저 수술 겹치면서 병원 생활을 해야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약간의 오진도 겹치고 해서 꼼짝없이 병원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하루는 혼자 병실에 있으면서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데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제 속에서의 답답함이 말로 표현이 안되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한참 울며 무슨 말로 기도하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속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한참 기도하고 나서 가슴 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설교하는 것과 실제로 삶에서 사는 것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을 절대로 작게 여기면 안된다.' 그게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설교한 대로 살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어지지도 않았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것과 실제의 삶 사이의 틈을 작게 여기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이제 나는 설교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 답도 주셨습니다. 그것은 24시간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는 이 시간에도 청중보다 주님을 더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게 되면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육신은 끊임없이 욕망을 쫓아가는 죄성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존경하는 목사님들을 모시고 가도 모든 것을 그 분께 맞추지 않습니까? 정말 존경하는 분이 계시면 말 한마디라도 조심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어떻게 말씀과 삶이 다르겠어요.

예수 믿으면 사람이 변한다는 것을 저는 안 믿었어요. 다 자기 성질대로 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믿음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여기 목사님 부부들 많이 계시는데 교회 장로님 모시고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느낌이 드세요? 끔찍할 것입니다. 하다못해 교회 청년이 같이 산다고 생각하면 달라질 것입니다. 교인 한 명만 와도 우리 가정 생활이 다 달라진다면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진짜라면 어떻게 바뀌지 않겠어요?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9년 동안 매일 일기를 쓰면서 내가 오늘 주님과 동행했는지, 주님을 바라보고 살았는지, 일기를 쓰면서 그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동안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치기는 쉬웠어요. 평가하기도 쉬웠고, 제자훈련도 가능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과 동행하는지는 검증이 안되고, 가르칠 수도 없고, 나 자신을 확인할 수도 없었는데 일기를 쓰면서 이 일이 열렸습니다.

‘예수동행일기’를 쓰면서 서로서로 주님과 동행하는지를 점검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함께 안 살아도 됩니다. 인터넷으로 서로의 일기를 봅니다. 처음에는 부목사들 속을 모르겠더라구요. 동역하는 사이에 서로 마음을 몰랐는데 일기를 쓰고 나누면서 부목사님들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알게 되고 회의 때 보면 무척 가깝게 느껴집니다. 장로님들과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를 봅니다. 주일에 한 번만 만나는게 아닙니다. 선교사님도 일 년에 한번만 만나는 게 아닙니다. 전에는 피상적으로 만났는데 이제는 매일 일기를 나누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훈련해줄 수 있는 길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함께 훈련시킵니다. 크리스천의 변화된 삶이고 한국교회가 변화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9년 동안 ‘예수동행일기’를 쓰면서 믿어지지 않는 일들도 벌어졌습니다. 저는 ‘예수동행일기’를 쓰기 전에도 꽤 괜찮은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경건이었어요. 항상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적인 경건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평가를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모범적이고 충실했고 칭찬을 듣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9년을 지나면서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리고 나니 이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경건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아시면 충분하고 주님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너무 큽니다. 이제는 좋은 평가를 받기위한 사역이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가 너무 기뻐서 사역합니다.

전에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옳은 길인 줄 알면서도 가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없었지요. 저를 움직이는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기 시작하니까 이제는 고난 당하는 일이 기쁘고 주님 앞에 서는 일이 기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서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시작하면 그것도 금방 확산될 것입니다. 이제는 진짜 한국교회가 ‘예수동행운동’을 같이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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