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배나무 아래서 예배드렸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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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배나무 아래서 예배드렸던 교회
  • 황영준 목사
  • 승인 2019.09.04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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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신 훌륭한 목사님들이 그리워서 이미 고인 되신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을 책으로 만난다.(한숭홍, 한경직의 생애와 사상. 1993).

1902년에 출생한 한경직은 고향 자작교회(평남 평원군 공동면 간리)에 나갔고 이 교회에서 믿음을 키웠다. 마펫(Moffett, Samuel Austin) 선교사가 하룻밤 묵어가면서 심은 복음을 받은 세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처음에는 언덕 돌배나무 아래 모여 예배를 드렸다. 밝은 햇빛과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사람들 구경거리였겠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향기로운 예배였을 것이다.

한 목사님이 태어나기 전이였다. 1895년 어느 날, 마펫 선교사가 원산에서 일을 보고 조랑말 타고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생각지도 못한 마을로 들어갔다. 평양에서 북쪽으로 100리 넘게 들어가는 산골이다.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인심 좋고 순박한 한 부자가 조랑말을 타고 온 손님들을 모셨다.

동네 사람들이 서양 사람을 구경하려 모여들었다. 마침, 그때, 선교사가 내놓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마펫은 우리말로 복음을 전했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을 전했고, 동행한 조사 한석진韓錫晉이 자기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와 간증을 들려주었다. 간리 마을에 이렇게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것이다. 결신자는 세 명이었다. 밤새워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었고, 마펫 일행은 다음날 떠났다.

세 명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평양으로 달려가 마펫을 만나서 마을에 교회 세울 계획을 말하고 지도를 받았다. 가족과 함께 돌배나무 밑에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자작교회(평남 평원군 공동면 간리)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온 동네가 다 믿는 대 역사가 일어났다. 한경직 목사의 조부를 비롯한 한 씨 20여 가구도 믿게 되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노천 예배를 계속할 수 없어 언덕 너머 법흥사法興寺의 한 건물을 헐어 그 목재와 기와로 예배당을 지었다. 절을 헐어 예배당을 세웠으니 특별한 교회의 역사 아닌가.

한경직의 어머니가 1908년, 그가 7세 때 세상을 떠났으나 믿음의 떡잎 같은 어린 경직은 교회생활에 더욱 열심이었다. 그가 드디어 목회자가 되어 한국의 대표적 장로교회 가운데 하나인 영락교회를 설립하여 평생을 섬겼고,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템플턴상을 수상(1992년) 하였다. 선교 초기, 한국 여러 교회 형편이 이와 방불하였을 것이다.

수년 전, 케냐 마차코스로((Machakos) 의료봉사활동을 갔었다. 박성기 선교사가 안내하는 농촌마을을 찾았다. 옥수수를 재배하는 붉은 황토 들판이었다. 그곳 교인들은 주일예배를 마을 위쪽 정자나무 아래 그늘에서 모이는 ‘나무밑교회’였다. 의료팀과 현지 교인들이 거기서 예배를 드렸고 나는 설교를 맡았다. 음향 시설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말뚝 하나를 박아놓고 나무판자를 붙여놓았는데 거기에 성경을 펴고 설교했다. 갈릴리 해변에서 말씀하시던 예수님과 거기 모였던 무리를 떠올려보았다. 예배 후에 진료소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마른 옥수숫대로 칸을 막았다. 검은 피부색에 얼굴마다 환한 보름달 웃음을 짓던 표정들이 떠오른다. 몇 해 후에 박 선교사에게 지금은 교회가 시멘트 건물로 ‘이야니교회 예배당’을 건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고향 녹동제일교회(녹동교회, 고흥군 도양읍) 처음 예배당은 평화동 초가草家였다. 아이들이 마당에 있는 종탑을 타고 놀았다. 주일 낮만 아니라 주일과 수요일 밤에도 어린이 예배에 참석했다. 어른들이 초등학생 우리를 관심과 사랑으로 품어주었다. 신나고 자랑스러웠다. 추운 날씨에 바람 솔솔 들어오는 바닥에 방석을 차지하려고 집을 나서면 경주하듯 골목을 달렸다.

주일학교가 부흥하던 1960년대, 주일 오후면 이웃 마을에 다니며 확장주일학교 야외 예배를 드렸다. 청년 4, 5명이 한 마을(용정리)을 맡아서 아이들을 불러 동네 가운데 팽나무 그늘에 모이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금방 30-40명이 모였고 어른들도 참석했다. 설교도 잘 들었지만 TV 없던 시절이라 동화가 무척 인기였다.

그렇게 성장한 나는 목사가 되었고, 은퇴한 지금은 고향교회에 종종 들려 담임 김용희 목사님과 교인들을 만난다. 행복했던 꿈같은 시절, 다 은혜였다.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몇 분이 하셨던 귀한 말씀이다.

"영락교회는 한 목사님의 성육신肉身身 이라 할 수 있다. 병 고치고 방언해서 키운 겻도 아니다. 신흥종교 교주들처럼 교회당을 구약성전화舊約聖殿化시키고 자신에게는 아론의 제사장 옷을 입혀 기복신앙을 팔아 이상한 소리들을 하며 비대해진 교회도 아니다. 사회운동으로 한몫 보고, 신학으로 인기 끌고, 성령의 깃발을 휘두르며 요란하고, 인간복덕방으로 교인을 모으고, 건물이나 위치나 프로그램으로 모은 교인들도 아니다. 성서대로 정통으로 키운 교인들이다. 한국 기독교 100년사의 밭 한복판에 유별나게 큰 거목巨木 한 그루! 조만간 언젠가는 그가 가고 뽑혀진 빈자리는 누가 메울 수 있을 것인지...." - 김준곤金俊坤, 한국대학생선교회 창설자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 목사라기보다는 한국교회에 필요한 목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강단의 설교자보다는 이 나라의 복음화를 위하여 필요한 일을 성실히 해온 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경직 목사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한경직 목사가 이 땅에 남기고 가는 목자상은 영원한 이 나라의 牧者像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한 인생이 살고 남긴 아름다운 사명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 백낙준白樂濬, 연세대학교 명예총장

선교사가 지나간 발자취에 복음으로 교회가 설립되고, 거기 진리를 사모하는 거듭난 영혼들의 예배가 있고, 회개와 변화가 있었던 모습들이 동화처럼 아련하다. 한경직 목사님의 생애를 읽으며 그의 교회 사랑과 헌신 그리고 한국 교회에 끼친 아름다운 사역에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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