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교갱협 수련회가 8월 20일부터 열린다. 삶의 휴식은 건강한 삶을 위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내리막길을 마냥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그 결과는 파멸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현대인은 쉴 줄 모르는 삶의 속도와 구조에 이미 갇혀 있다. 그 결과 다 무너져 버린 내면세계와 삶의 의미로 인해 깊은 절망 속에서 동물적인 생존을 영위하고 있다. 뒤늦게 안식과 자연을, 느림과 여유의 미학을 주장하고 있긴 하다.쉼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그 완성이며 결론이었다. 몰론 성경이 말하는
지난 년 초에 어떤 선배 목사님을 모셔 제직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목사님은 그 세미나 말씀 중에서 '지금에 비하면 옛날의 목회가 참 힘들었다 지금의 목회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다. 누구나 다 가난하고 못 먹던 시절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대한 많은 냉대와 박해가 가해지던 그런 시절 속에 목회를 하셔야 했으니 그 목회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러나 좀 미안한 일이지만 그 목사님이 내려오시자 나는 바로 그 강단에 올라 '옛날의 목회가 참 힘들고 어려웠지만 지금의 목회는 더 힘
지금 우리는 위대한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이것은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의 95개 반박문"을 우습게 여기느냐, 아니면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느냐 하는 것과 같다. 개혁교회의 자랑은 성경에 비추어 옳지 못한 것은 과감히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부패를 보면서 "성당" 앞만 어슬렁거리며 눈짓할 것인지, 아니면 그 정문에 반박문을 붙이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서 소리를 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다.최근 우리는 선거제도의 혁신을 이루어 총회가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며 자긍심을 가지도록 한 "제비뽑기
드디어 제86회 총회 임원선거를 제85회 총회 결의대로(제비뽑기)한다는 공고와 함께 임원 입후보자들의 등록공고를 하였고, 입후보자들이 이에 따라 등록을 하였다. 그동안 반론을 제기하며 보류 및 재론을 요구하는 분들도 소수 있었으나 묵묵히 총회에서 결의한 대로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총회 임원들과 선거관리 위원들을 바라볼 때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다.사실 어떤 제도가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은 해산의 수고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된 제도를 집행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의지와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
지역 내 목회자 모임에서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우리 교단의 총회장 제비뽑기 선거제도가 화제에 올랐다. 타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그 목사님 하는 말, "그거 진짜 그렇게 될까요?"하며 반신반의했다. 나는 총회가 결정했으니 그렇게 되겠지요 하며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생각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거 진짜 그렇게 될까요?"라는 말속에 내포된 의미가 서글펐기 때문이다.목회 현장에 발을 들여놓은지 4년차가 된 지금 교회개혁(교회지도자의 인간성 개혁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성싶다)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터득해가고 있는 중이라서
지난 3월, 광주전남 학복협에서는 학원복음화를 위한 연합부흥회를 개최하면서 순서지에 각 대학 캠퍼스에 침투되어 있는 이단사이비 동아리들의 명단을 게재하여 기독학생들의 경각심을 일깨워준 일이 있다. 그런데 결과는 엉뚱하게도 전남 대학교 내에서 활동하던 건전 기독교 선교단체 5개가 동아리연합회로부터 제명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는 타 동아리를 비방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는 동아리연합회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한편 지난 4월 27일에는 단군상 훼손사건과 관련, 재판을 받아오던 영주시기독교교회연합회 소속 목사 6명과 장로 1명이 법원의
나는 교단이 다르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고 한경직 목사님에 대하여 크게 존경하는 면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그 분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가를 깊이 알게 되었고 목회자로서 살아계실 때 그 분을 만나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그러던 차에 광주전남지역 교갱협에서 마련한 농어촌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여 충현교회 원로목사님이신 김창인 목사님을 뵙게 되었고 그 분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 분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단 1세대 목회자로서 여전히 설교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진지함과 그 분만이
목회자는 많은 만남, 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라는 곳도 많고, 가야할 곳도 적지않다. 각종 단체의 모임들 뿐만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많은 각종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모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귀한 만남의 장이라고 본다.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모임이 우리끼리의 모임이다. 즉 이미 믿음을 가진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만남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달라야한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서다. 구령의 사명을 우리가 받은 것이다. 막가는 시대라고 불러도 좋은 이 세상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살아갈 때에는 나라가 번성하고 평안하며 흥왕해져서 그 명성이 세계에 떨쳐졌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악 된 길에 섰을 때, 하나님은 가차없이 매를 가하셔서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이다.사사시대에는 사사들을 통해 죄악에 빠진 백성들을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인도하셨고, 죄로 인해 위기 가운데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음을 본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인 안목을
밑바닥에 구멍난 배를 타고 있으면서 물이 콸콸 들어오는 구멍 막을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생명부지를 위해 그저 배 안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람을 보며 가질 수 있는 평가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 외에 다름 아닐 것이다.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무수하게 직면한 근원적 문제에 대해서 너무 안일하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이런 형편에서 뜻있는 이들이 교회갱신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힘을 모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그런데 뜻을 함께한 동역자들과 교회갱신 사역을 계속 진행해 가면서 갱
5월 7일, 교단총회에서 주관하는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열린다.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기도회 참석과 함께 동기 목회자들도 만날 기대에 부풀어있고, 장로들 역시 모처럼의 서울여행길에 대한 기대도 있으리라 짐작된다.특별히 38년 전 예장통합 과의 교단분열이라는 상처받은 상황 속에서 시작된 기도회는 총회 산하 교회들의 결속과 교단의 정체성 확립, 그리고 새로운 목회정보 교환과 신학적 입장의 정리 등 여러가지 뜻을 담은 의미에서 대 내외적으로 칭찬받을만한 범교단적 행사였다. 그리고 38회라는 긴 역사를 가지면서 이제 기도회는 타 교단에서도 부
땀 흘리는 농부의 마음은 여느 가을 풍성하게 맺힐 열매에 벌써 마음이 가있을 것이다. 1년 2년 시간이 가도 열매를 얻지 못한다면 농부는 일할 의욕을 잃고 농기구를 내려놓고 말 것이다.개인적으로 자그마치 15년여 남도 땅의 낙도 선교와 청소년 선교사역에 힘써오면서 사실상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분명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지금 이 시대에 무엇보다 보람있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큰 교회, 넉넉한 삶에 대한 성공지향병에는 사실상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년 심지만 떠나고 돌아오지 않
말씀의 강물 생명의 강물 “넘치게 하소서”하나님께서는 부르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능력과 재능이나 인격에 개의치 않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그를 통하여 나타내기 위함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거룩함과 풍성한 생명의 역사는 말씀 안에 있다.요한복음 1장1절에는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셨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시작이요,말씀이 출발의 근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맡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말씀으로 하셨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38년 된 병
목회자들 사이에 노회는 중요한 치리회로서 그 위치를 확보하고 있지만, 평신도 사이에는 갈수록 노회라는 이름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지교회들이 갈수록 개인주의화되어가면서 전체 노회와 관련된 상호교류 적인 일에 소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노회가 평신도들에게 너무나 닫혀져 있음으로 인해 목회자들만의 전유물로 인식된 것에 큰 이유가 있다.실제로 지교회를 섬기는 평신도들이 노회의 일에까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평신도들이 노회를 그저 목회자들만의 정치적 조직으로만 오해하게
최근 청소년 문제와 학교 교육은 우리 모두에게 뾰족한 해법이 없는 피할 수 없는 중대한 과제로 다가왔다. 자살사이트, 음란사이트, 온라인게임 중독 살인과 추악한 원조교제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처럼 쌓여 우리를 덮치고 있다. 심각하게 교회가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교회 교육이 이에 대한 해답이나 대안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니 더 정직하게 "교회의 기성세대와 지도자들은 여기에 대한 문제 의식이나 그 심각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두말할 것도 없이 교육은 미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역
장로교회 정치의 골간은 당회, 노회, 그리고 총회이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바른 교회론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초대형 교회는 노회보다 크고, 총회보다 위대한 것같이 보여진다. 우리는 말씀의 적용을 편식함으로 기존의 전통과 권위는 부정하고, 자신의 아성을 쌓으려는 소위 성공한 목회자와 교회의 초법적인 언행에 우려를 표하고, 성경의 문자적 알레고리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작금의 신권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물론 초교파 연합운동과 복음주의 신학의 활로 개척도 중요하지만 1907년 이래로 이 땅에 허락하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인 본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