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 내(가시)가 너무 많아 우리가 잘 아는 하덕규의 ‘가시나무’란 노래는 그렇게 시작된다.“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오늘날처럼 사회복지가 사회적으로 전폭적인 관심을 끈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만큼 가난한 자를 돌보는 구제가 개개인의 관심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고민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고린도후서에는 예수님을 ‘가난한 자를 위하여 오신 분’으로 표현한다(고후 8:9). 실제로 예수님의 메시지는 인간의 영혼구원에 대한 구속의 은총을 담고 있지만,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개인의 영혼구원만이 아닌 통전적(統全的) 구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병자들을 치유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
사랑하고 존경하는 목사님들. 요즘도 식당에서 버젓이 기도하고 음식을 드시고 있나요? 참 간도 크시군요. 교회 이름 붙여진 차량을 아무렇지 않게 몰고 다니시나요? 어쩜 그리 용감하십니까. 교회 밖 모임 장소에서나 길거리에서 동역자들 혹은 장로님들을 만날 때, 서로서로 “목사님!” “장로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부르며 서로 인사 나누시나요? 강심장들이네요.저는 요즘 밖에 나가는 게 두렵습니다. 심히 떨립니다. 대중들이 목사인 나를 쳐다보며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군가 내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
현재 교회의 현실은 잘못된 교회관의 영향으로 주의 말씀에서 벗어난 채, 방향과 목적을 잃고 달려가고 있는 비성경적인 연합운동과 극심한 교회분열로 인한 개교회주의화로 고통하고 있다. 개교회주의 경향은 교단 정치의 불신과 교회간 경쟁적인 교세 확장으로 이어져 교회 분열을 야기시키고 있다. 사사 시대의 혼동처럼 자기 생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므로 교회설립에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기업 생리를 닮아있다.이로 인해 오늘날 교회 안에는 물량주의가 팽배하여 그에 따른 세속화가 심각하다. 또한 권위를 중시하며 인본주의, 성직자의 사제주의적인 경향이
이제는 목사라며 병원심방을 가서 여러 분이 계신 병실에 들어가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맑은 물을 다 더럽혔다고 말할 수 있는 때도 지나간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독교인들의 추문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그래서 일부 기독청년들은 ‘목사들이 이래도 계속 교회를 다녀야 하는가’, 아니면 ‘이번 기회에 성당으로 가야 할까’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어느 여자 집사는 주일예배를 드리려 집을 나오는데 믿지 않는 남편이 “당신 오늘 교회 가서 목사에게 칼 맞지 않고 무사히 집에 돌아올 자신 있냐?”라고 말하는데 억장이
한국교회는 지금 성장을 멈추었는가? 성장을 멈추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성장이 둔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의 통계수치는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최근 한목협에서 출간한 ‘한국기독교분석리포트’를 보면 이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를 제시해준다. 한국갤럽의 ‘한국인의 종교 1984-2014’ 통계자료를 중심으로 연구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작년까지 기독교(개신교)를 떠나 타종교로 개종한 인구가 130만명이고,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개종이 아닌 무종교인이 된
지금 우리나라는 역사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역사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수면 밑에 잠복해 있다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드러난 형국이다. 국가를 앞세우는 진영과 민족을 앞세우는 진영의 첨예한 대립은 국민 분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논쟁의 결과는 이쪽저쪽 상관없이 상처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이념의 차이로 주고받는 상처는 높은 가을 하늘의 평화로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안타깝게도 역사문제에서 보듯 진영논리가 한국교회 안에도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년전부터 목회자들의 마음에 금
선교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며, 교회의 사명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최후 헌신할 터미널인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한 때 한국은 선교의 대국으로서 꿈과 자부심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정황은 예전과 다릅니다. 선교사 파송의 수도 현저히 줄고, 선교 예산도 대폭 삭감되고, 한국 교회의 선교의 열기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안식년이나 본국 방문하여 전화를 드려도 적극적으로 강단에 초대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와 속도로 진행된다면, 선교의 위기 또는 선교사 가정이 철수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어쩌면 이미
요즘 작은 교회 운동이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실제로 수년간 작은 교회 운동을 실천해 온 사람들 중에 이제는 자신들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를 작은 교회화(?) 하고자 하는 목표로 박람회까지 열고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굴지의 장로교단 신학교들에서 학기를 시작하면서 신앙세미나와 함께 작은 교회를 알리는 미니 박람회를 열었다고 한다. 왜 이런 열풍 이 일어나고 있을까? 긍정적으로는 건강한 교회를 위한 열망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작은 교회 운동에 적극 지지를 보낸다. 그러나 작은 교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진짜 동기
최근 목회를 은퇴한 후 선교지에 선교사로 나오는 목회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고 있으며, 이런 추세는 더욱 급증할 것으로 여겨진다. 국내 목회의 은퇴가 모든 사역에서의 은퇴가 아니기 때문에 백세시대를 맞이해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모든 사역과 마찬가지로 준비되지 못한 시니어 선교사는 여러 문제를 가져오기 때문에 미리 주의 깊게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본인 또한 교회 개척 사역 20년 후 조기 은퇴하고 선교지로 나왔기에 이런 점에서 더욱 절실히 깨닫는 점들이 많이 있다. 조기 은퇴 후 다양한 방식으로 선교를 위
설교는 목회자의 가장 큰 영광이며 동시에 가장 무거운 짐이다. 또한 목회 사역의 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 사역이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이라고 말하였다. 오늘의 한국 교회 강단의 설교를 보면서 조금은 안타깝고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거의 모든 설교자는 “내가 제대로 설교 사역을 하고 있나?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수없이 한다. 과연 설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주제를 성령의 역사와 결부하여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1. 무엇을 설교하는가? - 성령의 감동된 말씀설교의 정의는 다양하
제100회 총회는 수년 동안 끌어온 헌법 개정, 아이티, 납골당, 총신대학교 정관 개정 등 총회차원의 주요 현안을 마무리했거나 가닥을 잡은 총회로 기록될 것 같다. 필자는 제97회기 납골당 사법처리전권위원회 위원으로 조사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의 조사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총대들이 이번 총회 기간 중 납골당 관련자 선별위원을 맡게 한 것이라고 본다. 일련의 과정에서 파악한 납골당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첫째, 납골당은 출발이 잘못되었다. 최초의 20억 원 투자가 이사회 결의 없이 이뤄진 일로 명백한
역사적인 제100회 총회가 파회된 지 불과 수십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제101회 총회를 바라본다니, 너무 성급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평가해보고 싶다는 마음이다. 과연 제100회 총회는 올바른 방향을 잡은 것일까?은급재단 납골당 사건 · 아이티 구제헌금 사건 · 총신대학교 정관 개정 · 헌법 개정 등에 관하여 이번 총회는 중대한 결정을 했다. 이번 총회는 교회행정 · 교회입법 · 교회권징에서 본교단의 최고치리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고 과제도 있다.첫째로, 은급재단 납골당 사건은 해결의
높푸른 가을 하늘, 눈부신 결실의 계절 9월에 뜻깊은 제100회 총회총대로 참석하여 보람과 함께 역사적 책임감을 느꼈다. 총회 참석자들은 지난 100회의 역사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깊이 감사하며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다툼과 분열 그리고 자만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리게 한 죄를 회개했다. 더불어 새로운 100년을 향한 사명과 비전을 가슴에 품고 새 출발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힘찬 첫 걸음을 내 디뎠다. 개인적으로 100회 총회를 맞이하여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선교사들과 순교자 그리고 신학자들의 공적을 기려 그 후손들에게
이후 제97회(2012년)총회의 파행은 소위 노래방사건과 가스총 사건으로 기록된다. 총회가 변질되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99회(2014년) 총신의 정상화를 위한 정화와 개혁을 부르짖는 총대들의 중지를 모았으나, 총신대학의 총장자리를 정치적 협상카드로 제시하는 가슴 아픈 일도 벌어지게 되었다. 전망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고 사람은 역사를 만들어 간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역사를 기록할 것이고 순종의 사람은 축복의 발자취를 찍어갈 것이다. 과거는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100회 총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목회의 길로 들어서고 지역교회 목회의 직에서 은퇴하고 이제 선교사의 길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내게 이 일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미완성 과제다. 글로 담아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담겨 있는 목양의 길이다.50년의 삶을 평생 이 사역에 몸 바치신 지금도 살아계신 99세 되신 아버님의 서재에 걸려 있는 편액에는 목양일념(牧羊一念)이란 사자성어가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과거 우리 어른들의 세대엔 가정사역 또는 교회와 가정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 대신 교회가 최우선이었으며, 목양과 교회를 위해서
경인운하 아라뱃길을 자전거로 달린다. 한강하류 행주대교에서부터 시원스레 쭉 뻗어있는 18km를 저어 서해바다에 이르니 온통 땀범벅이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경인운하만큼 논란이 되었던 국책사업이 또 있을까. 그 역사는 무려 800년 전, 고려 고종황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1213년, 그는 운하착공을 윤허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조선 중종, 또 실패했다.그 이후 집권자들도 예외없이 이 패를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감사원은 ‘운하사업경제성, 과장됐다’고 발표했고,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2004년 이
2005년부터 2025년까지 정읍의 초등학교 학령인구 예상치를 근거로 저출산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9년이 경과한 지난 연말 교과부의 예측보다 훨씬 빠르게 감소한 것을 확인하고 당황스러웠다. 이런 흐름은 정읍만의 현상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청년 취업이 힘들고 그래서 결혼을 기피하고, 결혼을 하지 않으니 출산을 기대할 수 없는 소위‘3포 세대’와 함께 살고 있다. 결혼연령이 계속 늦어지는 것 역시 예삿일이 아니다. 저출산 문제는 더 이상 피해 갈 수 없다. 인구절벽이 코앞에 다가온 마당에 2006년부터 8년간 66조 원을 쓰고
만시지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식구라도 지켜야 할 책무가 있기에 비관적인 심정으로 필을 들었습니다.한국교회에서 아이들의 소리가 잠잠하고, 청년들이 떠나가 버린 현장을 보셨습니까? 구름떼처럼 모이던 집회와 요란하던 전도주일은 예전 추억이 되었습니다. 교회 오시라고, 예수 믿자고 전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반 기독교적이며, 냉소적인 사회 풍조가 SNS.와 젊은 층에서는 주류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서양 기독교의 추세에 비추어 한국교회 성장의 정체와 침체를 경고하던 것이 엊그제
지난 6월12일 국가에너지위원회가 고리 1호기를 폐쇄하도록 한수원에 권고하기로 결정했고, 한수원은 이것을 받아들임으로 고리 1호기는 결국 폐로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참 잘 결정했습니다.지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정부와 한수원이 하는 좋은 말만 듣고, 원전은 값싸고 청정한 에너지요, 안전한 에너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거나 아예 무관심하게 살아왔는데,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특별히 부산에 속한 고리 지역에 다량의 원전이 설치되어 있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