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은 은보 옥한흠 목사님이 떠난 지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가까운 사람을 앞서 보내고 남은 이들은 누구든지 그가 떠난 때가 돌아오면 의식하지 않아도 그 생각이 머리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추모하는 마음으로 은보 10주기를 맞으면서 평양대부흥 100주년 한국교회연합예배 설교 후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를 외치며 경기장에 모인 수만 명의 성도들과 한목소리로 “한국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부르짖던 모습이, 그 한 장면이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봄 노회 개회를 앞둔 시간이었습니다. 따스한 믹스커피 향기 사이로 낯선 목사가 보였습니다. 큰 키에 진한 곤색 슈트가 잘 어울렸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가 온순하고 착해보였습니다. 그는 안전지대라고 생각한 구석자리에 섬처럼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인상착의를 볼 때, 73번 목사가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속한 동대구노회는 위임목사가 73명입니다. 얼마 전, 이웃 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설교와 성품, 그리고 목회경력까지 부족함이 없다고 쉼 없이 자랑하던 그 교회 장로님의 행복
판기 형제가 우리 교회에 등록한 지 벌써 14년에 됐습니다. 어느 성도님이 그의 성실함과 탁월한 재능을 눈여겨보다가 교회로 인도한 것입니다. 보통 새가족이 등록하면 다들 얼마나 기뻐합니까?그런데 그를 맞이한 것은 성도들의 따뜻한 미소와 축복송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래 가사처럼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강경발언을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주 동안 어둡고 습기 찬 창고 옆에 우두커니 서서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성도들이 반대하는
어느 해 겨울이었습니다. 은퇴 장립집사님의 하관예배가 고향인 청송에서 있었습니다. 거의 산 정상에 위치한 장지까지 운구하는 일은 몇 번의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솔잎을 스치는 시린 바람조차도 거친 호흡으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발인예배 때부터 찬양대로 섬겨 주었던 성도들의 따뜻한 동행이 있어서 동토에 내리는 햇살은 포근하였습니다. 하관예배 후에 우리는 양지 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했습니다.그런데 식사를 마친 성도들이 두세 명씩 조를 이루어서 숲속으로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2020년이 시작된 이후 계속된 재난은 온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코로나19(COVID19)는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고, 삶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코로나의 장기화로 더욱 고립되는듯합니다.여기에 지난 6월말부터 시작된 장마는 물폭탄을 쏟아 부으며, 우리의 환경을 공허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 뿐 아니라 인간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경험합니다. 이는 거의 재앙의 수준입니다.이사야 선지자는 죄로 가득찬 이 땅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보라
비 내리는 월요일 아침, 교회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이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치던 가로등의 허리부분에 시커먼 액체가 찐득하게 응고되어 있었습니다. 전기 계통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누전에 의하여 가로등이 과열 되었고, 그 열기로 표면에 칠한 페인트가 녹아내리면서 생긴 현상이 분명했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가로등에 똑같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순간 양심불량인 시공업체가 교회를 우습게 보고 가로등을 불량품으로 설치를 하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과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6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억울하게 억류돼 있습니다.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김원호 고현철 함진우입니다. 이들은 북한주민쉼터와 대북지원용 국수공장을 운영하며 굶주린 북한주민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던 중 2013년과 2014년 북·중 접경지역에서 북한에 강제로 억류돼 무기노동교화형(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하루 10시간씩 7~8년째 복역 중입니다. 현재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인데, 더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조차 잊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반드시 가족과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담임목사가 된 이후에 처음 한 사역들은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첫 심방도 예외가 아닙니다. 부임하던 주일, 오전예배를 마치고 교회 마당에서 성도들과 첫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입구에 서서 힐끔 힐끔 쳐다보는 중년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올백을 한 그의 곱슬머리와 물광을 낸 구두가 유난히 반짝거렸습니다.먼저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일 자기 집에 와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는데, 심방대원들과 함께 오지 말고 꼭 혼자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
나이 많아지도록 소식과 인사를 전해오는 분들이 무척 반갑다.2020년, 코로라19 때문에 교회가 예배 모이기 힘들고, 성도의 교제가 단절된다. 선교사들도 형편이 어려워 귀국하기도 한다. 전망이 어둡다.멕시코에서 사역하는 임 선교사가 카톡으로 현지 소식을 전하면서 자기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란다. 그는 1989년에 동명교회가 파라과이로 파송하였으니 몇 년 전에 멕시코로 옮겼는데 지금은 60세를 넘긴 원로 선교사가 된 것 같다.답장을 띄웠다. “당신 부부도 나이가 많고, 사역지도 뜬금없이 멕시코로(파라과이에서) 옮겼으니 고생이 많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발의되었다. 이름은 정말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사탄의 세 가지 전략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첫째, 이 법이 통과되면 더 이상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이 법을 제정하려는 가장 주된 이유는 동성애 합법화다. 또한 ‘동성애는 죄’라고 말하면 법으로 처벌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동성애는 단순한 인권과 평등의 문제를 넘어 나라와 인류를 멸망시킬 심각한 죄의 문제다.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셨던가(창 19:24). 그런데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 오히려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것이 죄’다?
소록도에 갈 때면 중앙리 병사病舍에 들려 김신아 장로를 찾아갔다. 부인이 중병을 앓아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봉사자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우리 교회 여 성도들이 일 년에 몇 차례 김치를 담아다 교회에 나누어 드리는 길에 동행한 사람들이었다.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그가 지은 노래를 함께 불렀다. ‘겟세마네 쓴 잔 내게 아파도 주와 잔을 함께하면 영광 또한 같으리니…’ 찬송하면서 모두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 『찬미예수 1500.p.1320』차디찬 바위에 밤은 깊어가고겟세마네 쓴 잔 내게 아파도주와 잔을 함께하면 영광 또한 같으리
몇 년 전 여름, 주일 오후예배 때 일입니다.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와 폭염에 지친 성도들은 하나 둘씩 한계 상황 앞에서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평소에 그렇게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던 권사님의 눈은 밀려오는 하품을 저지하느라 글썽거렸습니다. 졸음마귀를 이기기 위하여 커피사탕을 늘 의지하던 집사님은 대표기도가 끝났지만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목이 뒤로 젖혀지는 바람에 잠에서 깬 찬양대원이 놀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그날따라 유난히 길고 어려운 설교를 겨우 마무리 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맨
밤 12시 조금 넘은 시간, 빨리 병원으로 와 달라는 안타까운 음성이 핸드폰 진동처럼 떨리고 있었습니다. 말기 암으로 며칠 못 넘기실 것 같다는 진단을 받은 은퇴 권사님의 큰아들에게서 온 전화였습니다.병실로 올라가는 텅 빈 엘리베이터는 야근이 피곤한 듯 천천히 숫자를 교체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 부임 후 첫 번째 임종예배를 드리러 가는 그날은 무학산 홈런타자인 어머니의 서원 기도로 목사가 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가장 두렵고 불안한 임종 순간에 예배를 통하여 환자와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천국의 소망을 줄 수
지난 1월말부터 시작되어진 코로나19(COVID19)와의 동거(?)는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생활에 깊이 다가 온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시대를 적응하기 위해서 몸부림쳐 왔던 우리 사회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어떤 영역보다 안정적으로 영위해 왔던 예배(신앙)생활은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전처럼 마음껏 입 벌려 찬양하며, 통성으로 기도를 편히 할 수 없게 되고, 공동체 안에서 누렸던 나눔의 교제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떤 곳에서, 어디로부
코로나19 때문에 소록도 방문이 막혔다.며칠 전, 장인심 권사(신성교회)와 통화를 했다. 매일 모이는 정오기도회 모임에 함께 했던 분들 여럿이 고령으로 요양병동에 입원해서 열 명도 못되게 나온다며 아쉬워한다.“예배당 지을 때 고생했던 교인들, 머리 잘라 바쳤던 할머니들이 몇 안 남았어...” 하며 옛이야기를 이었다.그렇다. 소록도교회 예배당 건축 이야기를 정리해보자.지금의 예배당들이 1963년에 입당했고, 1966년에 헌당예배를 드렸던 건물들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1962년 8월 8일, 소록도병원 공회당에서 김두영 목사 위임예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곳을 이동하며 살게 됩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 흔히 고향이라고 여기는 곳에서 부터 여러 곳으로 옮기며 살게 됩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지 떠 돌며 사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나그네 여정임이 분명한듯 합니다.물론 태어난 곳에서 삶을 마칠 때까지 평생 한 곳에서만 사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학교, 직장, 군대, 유학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이동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살아 온 삶 자체가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어느 순간부터 하늘도, 땅도, 나무도,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던 엘라 골짜기의 골리앗을 신천동에서 만난 것은 담임목사로 부임한 지 며칠 뒤였습니다. 언제나 그는 굉음을 내는 낡은 오토바이에 팔공산 막걸리 배달박스를 가득 싣고 나타났습니다.그의 머리에는 놋투구 대신에 공사장 인부들이 쓰는 안전모가 어설프게 매달려 흔들거렸고, 다부진 어깨에는 비늘 갑옷 대신에 빛바랜 국방색 야전점퍼가 서걱거렸습니다. 놋각반 대신에 신은 군화는 특수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유난히 크고 무거워보였습니다. 사십 일이 아니라 무려 십여 년째 계속되는 그의 끈질긴 출현이 우리에게는 집요한 고통이었습니다.
세상 일이 그리스도인에게 변화를 요구할 때가 있다. 그에 대처 하는 방식을 5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 있다.하나는 거부하고 떠나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이나 톨스토이의 문화 단죄의 방식이다. 하나는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다. 변화 자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고 순응하는 태도인데 자유주의자의 모습이다. 하나는 이 둘의 중간자의 입장으로, 순응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태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길이고, 로마가톨릭의 입장이다. 하나는 변화는 곧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필요로 한다고 여기는 역설적인 태도로서 마르틴 루터의 견해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도, “저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만 보며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아니,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전부일까요?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은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 다만 ‘신앙고백’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결단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벌써 56년 전의 일입니다. 그녀는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홈런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알토란 같은 적시타를 치면서 남부럽지 않은 인정과 사랑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야구의 꽃인 홈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포물선을 그리며 담장 밖으로 날아가는 공을 보면서 당당하게 그라운드를 돌고 싶었습니다.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은퇴할 때까지 홈런 세리머니를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꾸만 커져갔습니다. 왜냐하면 친정어머니의 통산 출산 성적 때문이었습니다. 1남 9녀. 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