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되는 분이 많다.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생각이나 사상이 채워지는 것은 본인만 아니라 가족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교육기관이 바람직한 인격을 목표로 보편적인 것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이리라.기독교의 교육은 ‘새로운 인생, 변화된 삶’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한다. 옛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요, 변화되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옛 생각이나 습관을 떠나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변해가는 끝없는 ‘공사 진행 형’이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험을 잘 감당하면 이어서 은혜와 복이 연달아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옥한흠 목사가 늘 얘기했듯이 신자에게는 위기가 은혜와 축복의 문을 여는 위장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그런 공식이나 비밀이 있는 것인가. 간증을 들어보자.한경직 목사 이야기다.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오산학교서 조만식 장로에게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고, 평양숭실대학에 블레어(한국명 방위량) 선교사를 만났다. 그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이 열렸다. 어려운 시절에 특별한 행운이었다.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왔다. 그의 꿈은 예일대학 철학박사를 받아서 고국에 돌아와 학자
“시각장애로 글도 못 읽고 손가락은 감촉도 없으니 성경을 통째로 암송합시다.”양재평 장로의 제안으로 애양원교회 교인 몇이 모여 신약성경을 암송했다. 눈 밝은 봉사자가 읽어주면 몇 번이고 따라 읽으며 신약성경을 암송했다.동산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남전도회나 여전도회원들이 종종 애양원 성경암송반을 찾아가서 양장로님의 간증을 듣고, 함께 성경 읽고 기도하며 찬양했다. 과일과 떡을 준비했고, 함께 부를 복음성가도 챙겼다. 신곡보다는 한국 교회가 전통적으로 부른 그런 찬송이었다. 외로운 분들을 위로하는 것도 보람이지만, 우리의 메마른 심령
매일 정오가 되면 예배당의 종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그러면 밭에서 쟁기를 끌던 소가 멈추어 섰다. 쟁기를 잡은 주인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 때문이었다. 지나간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이다. 애양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양재평 장로님의 간증이었다.짐승에게 쉬는 날이 있을까마는 애양원 동네 소들은 주일이면 주인과 함께 편히 쉬었다. 마구간에 편히 누워 방울눈 껌뻑이며 여물을 씹었을 것이다. 짐승들도 예배당이나 집에서 들려오는 찬송가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그렇습니다
아침 8시 20분이면 아내와 함께 서둘러 집을 나선다.9시가 넘어서 도서관에 도착하면 자리 잡기가 어렵다. 먼저 온 노인들이 자리를 다 차지한다. 여름 들어 빛고을노인건강타운 도서관이 이렇게 인기리에 붐비는 것은 땡볕 날씨 탓이다.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에 스스로 갇혀 지낸다는 분들의 멋진 여름나기이다. 지난 8월 10일 이후 광주 날씨가 35도 36도를 넘는 폭염이었다. 도서관은 에어컨을 틀어서 시원하게 오후 4시 반까지는 지낼 수 있으니 전에 오지 않던 많은 분들이 찾는 것이다. 1천5백 원하는 점심을 먹으면 된다.월요일은 건
초들물 때면이렇게 고기가 잡힙니다.낚시 한 지 50년. 손재주도 없습니다.눈 똑바로 뜬 놈이 잡혔습니다.언제나 고기가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물 때가 있습니다.요즘, 많은 분들이 힘들게 삽니다.바닥을 치는 사람들이 있지요.그러나 아주 망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삶의 한 과정이지요.바다도 썰물 때엔 바닥을 다 드러냅니다.갯벌이 조개와 갯것을 다 내줍니다. 다시 밀물이 들어옵니다.그때는 지체말고 일어나야 합니다.거치고 넘어지고 망해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요 성공입니다.칠전팔기七轉八起가 딱 맞는 말이지
살아서 다시는 못 만날 가족,가족과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고, 고향에 돌아오는 것도 생각하면 안되었다. 소록도 가는 길. 그래서 한센병을 천형(天刑)이라 했을까?소년 양재평도 자기 얼굴에 증상이 나타나면서부터는 집안에 들어박혀 지내며 바깥출입을 금했다.부모와 누이들이 짊어진 멍에 또한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웠을까.나 한 사람 때문에 가족이 겪어야하는 염려와 희생은 너무 가혹했다. 가족 가운데 나환자가 있으면 그 형제들이 결혼하기도 어려웠다. 잠복한 병이 누구에게 선가 나타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불안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
‘아름다운 이름’ 을 남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좋은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전도서에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라 하였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는 말씀이다. 그 ‘아름다운 이름’이 믿음의 자취를 남기는 것이라면 시련과 역경을 통해 연단 받은 믿음이요, 헌신과 충성을 말하는 것 아닐까. 원치 않은 한센병을 앓게 되어, 평생을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생활을 했던 양재평 장로님이 그런 한 분이라 생각한다. 그의 간증은 한국 교회, 그리고 한 때는 한국대학생선교회에 속한 젊은이들에게 들려졌다. 대학생선교회 총재를 지내셨던 김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기적 같다.혼인한 부부. 그들이 아이를 낳는 것은 신비요 행복이다.이렇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다. 부모와 자식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니 이는 신의 축복이요, 가정 창조이다. 그러나 결혼한 부부라도 임신은 죄악이고, 낙태하지 않으면 강제 퇴원으로 내쫓는 곳이 소록도였다.고복남(가명) 장로의 자서전 [엄니의 희생-강창석 씀] 내용이다.혼기를 훨씬 넘긴 그는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28세 된 자매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믿음의 축복이 세상의 은금보화와 바꿀 수 없는 보배’라고 말하며 아무것도 없는 남자와 혼인을 승낙했다
특별하게 어려운 일을 겪거나 어려운 형편에 있으면서 범사를 하나님의 은혜라 말할 수 있을까.원망과 불평과 한숨이 바람에 불티 날리듯 일어날 것 같은데.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을 더 잘 알아 가면 역설적인 상황에 감사할 수 있다. 불로 연단하는 시험을 겪으면서도 소망을 붙드는 것이다.양재평 장로님은 한센병자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미 고인이지만그가 남긴 간증을 오늘에 적용하며 은혜를 나누고 싶다. 나는 이런 준비로 그에게 간증을 강청했었다.“양 장로님의 간증을 기록으로 남겨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합니다.”했고,
기다리는 누구라도 있는 것처럼 서두른다.예배당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과실나무가 있는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아직은 빠른 줄 알면서도 노랗게 익은 살구가 반겨줄 것 같아서다. 작년에도 동네 사람들이 주중에 다 따버려서 열매를 구경도 못하고 맛도 못 보았다. 사실은 담밖에 있는 나무라서 먼저 따먹는 사람이 임자이다. 새콤달콤한 살구 맛, 그러나 아직도 파란 풋것이다.나 말고도 달려오는 사람이 또 있다.아산에서 병원장으로 있으면서 주일마다 내려오는 임영국 집사이다. 얼굴을 마주친다. 그도 그럴 것이 과실나무를 심은 분이다. 신품종 나무를
목이 탄다.지독한 통증에 똥물을 마시고, 식량 한 줌이라도 아끼느라 배곯고, 직원들과 그들이 앞세운 원생에게 억울하게 폭행을 당했다. 시편 42편 ‘갈급한 사슴’ 같은 소록도 사람들이었다.1953년 5월. 보리밭이 파랗게 춤출 때쯤,‘치료’라는 희망의 빛을 따라 섬으로 들어간 18세 청년 고복남(가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강창석 시인이 쓴 고복남 장로의 자서전 [엄니의 희생]에는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언사들을 접할 수 있다. 나는 쓸 수 없는.녹동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로 건너는 밤바다는 추웠다. 동생리 선창에 내린 것은 자정쯤. 기
나를 싫어한다.얼굴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경기라도 하듯 화들짝 놀라고 피해간다. 당황스럽다. 못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해 끼칠 일도 안했는데... 나는 사람이 아닌가?고복남(가명) 장로 이야기이다.자서전 형식으로 강창석 시인이 쓴 [엄니의 희생]을 슬픈 마음으로 읽었다. 한센인에 대한 지나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아야한다. 시린 바다처럼 파랗게 멍든 한센인 들의 슬픔을 이 글로 대언하고 싶다.사람들 눈을 피해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했던 어린 복남이,그도 부모에게는 귀한 아들이었다. 18세가 되도록 어머니의 한스러운 눈물이요, 내버
누명? 억울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날벼락이다.누가 나를 죽음의 수렁에 처넣으려 하는가? 내 생명을 걸고라도 권리와 명예를 회복하리라.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해명한다. 그러나 이미 진흙탕에 내동댕이치고 믿어주지 않으면 오죽할까.소록도에서 살다가 나이 많아 세상 떠난,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영원한 자유 세상으로 떠난 고복남(가명) 장로도 그런 일을 겪었다. 한센병도 서러운데 살인 누명을 썼던 것이다. 8세 때 한센병 진단을 받았다, 나병이 전염병이라 이해했던 그때는 사람들이 얼굴 마주치기를 꺼려했고 접촉은 피했다. 터무니없는 억측과 소
"한빈아, 오늘 짜장 먹자. 교문 앞에서 기다려. 12시 20분. 목사님이 사줄게."빛고을노인건강타운 오전 시간, 문학반 수업을 받으면서 카톡을 날렸다.잠시 후에 확인해보니 읽아주질 않는다. 또... 지난주 금요일 수업 때"교수님, 다음 주에는 야외수업하시지요."한빈이가 제안했다. "그러자, 어디로 갈까?, 너희들이 작정해놔라."이렇게 약속을 했었다.다시 확인해도 메시지를 읽질 않는다. 전화를 누르니 연결이 된다.약속을 확인하고 교문에서 만나기로 했다.짜장면 집은 빈자리가 없다. 손님이 많다.대학생들만 아니라 동네 아저씨
사람이 기막히게 어려운 일에 맞닥뜨렸는데 금방 해결 방도가 없고,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다면 죽음의 손짓에 끌려가는 것 같다. 사실은 죽음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셨으니 어떻든 피할 길이나 감당할 능력을 주시지 않겠는가. 이 언약이 신자의 믿음이다.소록도교회를 여러 해 동안 다니면서한센인 성도들과 교제를 나눈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또 많은 것을 생각하며 깨닫는 것도 많았다. 그 가운데 한 분이 고복남 장로였다. 고 장로님은 여덟 살.그 어린 나이에 한센병 진단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그리고 망연자실이었다. 이렇게 서럽고, 억울하고, 슬픈 인생을 살았단 말인가. 소록도에 다니며 자주 만났던 고복남(가명) 장로의 지난 세월 이야기는 소설로도 쓸 수 없는 그런 슬픔이었다. 누가 이런 생각이나 상상을 했을까. 그러나 이런 눈물은 한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센인들 한숨이고 피멍이고 생채기였던 것이다.”소록도 시인 강창석이 쓴 수필집 『엄니의 희생』에 내가 쓴 ‘추천사’ 한 부분이다. 8세 때 한센병이 발견되었던 복남이. 아버지를 일찍 잃고, 어머니와 누나와 셋이 살았다.
사형수.목을 조이는 칼을 쓰고 앉아, 문 앞에 서있는 죽음의 사자가 언제 손을 내밀지 몰라, 짓눌리는 공포와 불안한 영혼일 것이다. 미집행 사형수의 처지, 그런 사형수와 손 편지를 주고받았다. 평범한 한 성도와 주고받는 대화 같아 큰 감동이었다.“샬롬! 평안하시지요? 보내주신 편지를 받아보고 많이 기뻤습니다.”그의 인사이다. 좁은 공간에서 제한된 생활을 하면서 보내는 인사가 평범하다. 공포나 불안 같은 것은 읽히지 않는다.“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니 ‘형제’라 불러야 하겠네요. 목사님께서 제게 주신
일송정황 영 준일송정 늘 푸른 솔자취도 없고 쓸쓸한 비암산용주사 종소리에얼굴 맞대던 애국 선구자들용문교 다리에서조국의 광복 굳게 맹세했네용두레 샘가에서고향 이야기 눈물진 아낙들해란강 천년 역사한 마디 없고 임들도 못 뵙네조선족. 한 핏줄 한 언어 우리 동족이다.두만강 건너 도문과 연길, 용정 그리고 훈춘을 왕래하며 만났던 반가운 사람들.목사인 내게는 오랜동안 단절되었던 이방인 같은 그들을 만남이 큰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사명이었다.일제 때 간도로 떠났던 한맺힌 사람들의 후손,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새 삶의 터를 찾았던우리네 조상들
며칠, 주일 강단에 설 것을 생각하며 가슴이 설렜다.목회 30년 동안 날마다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주일마다 몇 차례씩 설교했던 강단이니, 설교는 내 삶이고 생활이었는데도 이렇게 기쁜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오랜만에 우리 교회에 어떤 말씀을 전할까 기도하며 묵상했다. 담임 목사님이 두 주간 해외여행과 교회 탐방에 나서면서 강단을 부탁한 것이다.교회 개척으로부터 30년,몇 사람으로 시작한 교회가 대가족이 되기까지 함께 했으니 모두가 가족같이 지냈던 교인들이다. 그러니 후임 목사와 교인들의 새로운 관계 형성까지는 상당한 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