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민족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이할 때마다 따뜻한 마음을 느낍니다. 한편으로는 과분한 사랑을 받는 것 같아 몸둘 바를 모르고, 여전히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늘 마음 한켠에는 보이지않는 부담감도 함께 있습니다.그럼에도 따뜻한 마음을 담은 정성에 큰 위안과 힘을 얻게 됩니다. 이번 추석은 코로나19로 인해서 모든 분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터인데도 잊지않고 베푸시는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그 가운데 우리 청년들이 매년 보내는 따뜻한 감사카드가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청년의 향기를 느끼게 만드는 글씨가 넘 아름다웠습니
2003년 태풍 매미 때의 일입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의 굉음 사이로 전화벨이 불안하게 울렸습니다. 발신인은 관리집사였습니다. 처음에는 교회 지붕에 또 다시 문제가 생긴 줄 알았습니다. 강대상 위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전화한 줄 알았습니다.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울먹이며 전했습니다. “목사님! 사람이 죽었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우리 교회 담장 바로 밑에 살고 있는 할머니 성도였습니다. 월세로 사는 그 할머니의 조그마한 단칸방에는 부엌이 따로 없었습니다. 슬레이트 지붕 처마를 우리 교회 담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제105회 총회가 역사상 최초로 온라인 화상총회로 개최되고 있습니다.노회장으로 노회 파송 총대 14명 모시고 지역 총회 거점인 새목포제일교회에 와 있습니다.예정대로라면 전국 161개 노회 1600여 총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년간 총회를 섬길 임원 선출과, 교단 주요 안건, 총신대학교를 비롯한 기관 살피는 등의 업무를 5일간 처리하였었죠.하지만 금년은 새에덴교회를 본부로, 전국 35곳을 거점 회의장 삼아 50명 숫자 제한하여 교단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비록 전국에 흩어져 비상 총회로 모이지만 성총회로 쓰
대구시 중구 동인동에는 제가 즐겨 찾는 수리 센터가 있습니다. 2013년 겨울에 거창한 개업 이벤트도 없이 오픈한 이곳은 참 특이합니다. 매월 첫째와 셋째 목요일, 겨우 이틀 영업을 합니다. 시간도 아침 6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두 시간만 문을 엽니다. 다른 수리 센터와 비교하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매번 찾아오는 단골 고객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일곱 명의 남자가 전부입니다. 다들 까만색 교복과 국방색 군복을 입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대 중년의 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왠지 입만 열면 썰
9월 2일은 은보 옥한흠 목사님이 떠난 지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가까운 사람을 앞서 보내고 남은 이들은 누구든지 그가 떠난 때가 돌아오면 의식하지 않아도 그 생각이 머리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추모하는 마음으로 은보 10주기를 맞으면서 평양대부흥 100주년 한국교회연합예배 설교 후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를 외치며 경기장에 모인 수만 명의 성도들과 한목소리로 “한국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부르짖던 모습이, 그 한 장면이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봄 노회 개회를 앞둔 시간이었습니다. 따스한 믹스커피 향기 사이로 낯선 목사가 보였습니다. 큰 키에 진한 곤색 슈트가 잘 어울렸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가 온순하고 착해보였습니다. 그는 안전지대라고 생각한 구석자리에 섬처럼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인상착의를 볼 때, 73번 목사가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속한 동대구노회는 위임목사가 73명입니다. 얼마 전, 이웃 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설교와 성품, 그리고 목회경력까지 부족함이 없다고 쉼 없이 자랑하던 그 교회 장로님의 행복
판기 형제가 우리 교회에 등록한 지 벌써 14년에 됐습니다. 어느 성도님이 그의 성실함과 탁월한 재능을 눈여겨보다가 교회로 인도한 것입니다. 보통 새가족이 등록하면 다들 얼마나 기뻐합니까?그런데 그를 맞이한 것은 성도들의 따뜻한 미소와 축복송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래 가사처럼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강경발언을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주 동안 어둡고 습기 찬 창고 옆에 우두커니 서서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성도들이 반대하는
어느 해 겨울이었습니다. 은퇴 장립집사님의 하관예배가 고향인 청송에서 있었습니다. 거의 산 정상에 위치한 장지까지 운구하는 일은 몇 번의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솔잎을 스치는 시린 바람조차도 거친 호흡으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발인예배 때부터 찬양대로 섬겨 주었던 성도들의 따뜻한 동행이 있어서 동토에 내리는 햇살은 포근하였습니다. 하관예배 후에 우리는 양지 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했습니다.그런데 식사를 마친 성도들이 두세 명씩 조를 이루어서 숲속으로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비 내리는 월요일 아침, 교회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이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치던 가로등의 허리부분에 시커먼 액체가 찐득하게 응고되어 있었습니다. 전기 계통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누전에 의하여 가로등이 과열 되었고, 그 열기로 표면에 칠한 페인트가 녹아내리면서 생긴 현상이 분명했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가로등에 똑같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순간 양심불량인 시공업체가 교회를 우습게 보고 가로등을 불량품으로 설치를 하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과열되기 시작했습니다.
담임목사가 된 이후에 처음 한 사역들은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첫 심방도 예외가 아닙니다. 부임하던 주일, 오전예배를 마치고 교회 마당에서 성도들과 첫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입구에 서서 힐끔 힐끔 쳐다보는 중년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올백을 한 그의 곱슬머리와 물광을 낸 구두가 유난히 반짝거렸습니다.먼저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일 자기 집에 와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는데, 심방대원들과 함께 오지 말고 꼭 혼자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
몇 년 전 여름, 주일 오후예배 때 일입니다.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와 폭염에 지친 성도들은 하나 둘씩 한계 상황 앞에서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평소에 그렇게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던 권사님의 눈은 밀려오는 하품을 저지하느라 글썽거렸습니다. 졸음마귀를 이기기 위하여 커피사탕을 늘 의지하던 집사님은 대표기도가 끝났지만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목이 뒤로 젖혀지는 바람에 잠에서 깬 찬양대원이 놀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그날따라 유난히 길고 어려운 설교를 겨우 마무리 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맨
밤 12시 조금 넘은 시간, 빨리 병원으로 와 달라는 안타까운 음성이 핸드폰 진동처럼 떨리고 있었습니다. 말기 암으로 며칠 못 넘기실 것 같다는 진단을 받은 은퇴 권사님의 큰아들에게서 온 전화였습니다.병실로 올라가는 텅 빈 엘리베이터는 야근이 피곤한 듯 천천히 숫자를 교체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 부임 후 첫 번째 임종예배를 드리러 가는 그날은 무학산 홈런타자인 어머니의 서원 기도로 목사가 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가장 두렵고 불안한 임종 순간에 예배를 통하여 환자와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천국의 소망을 줄 수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곳을 이동하며 살게 됩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 흔히 고향이라고 여기는 곳에서 부터 여러 곳으로 옮기며 살게 됩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지 떠 돌며 사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나그네 여정임이 분명한듯 합니다.물론 태어난 곳에서 삶을 마칠 때까지 평생 한 곳에서만 사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학교, 직장, 군대, 유학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이동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살아 온 삶 자체가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어느 순간부터 하늘도, 땅도, 나무도,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던 엘라 골짜기의 골리앗을 신천동에서 만난 것은 담임목사로 부임한 지 며칠 뒤였습니다. 언제나 그는 굉음을 내는 낡은 오토바이에 팔공산 막걸리 배달박스를 가득 싣고 나타났습니다.그의 머리에는 놋투구 대신에 공사장 인부들이 쓰는 안전모가 어설프게 매달려 흔들거렸고, 다부진 어깨에는 비늘 갑옷 대신에 빛바랜 국방색 야전점퍼가 서걱거렸습니다. 놋각반 대신에 신은 군화는 특수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유난히 크고 무거워보였습니다. 사십 일이 아니라 무려 십여 년째 계속되는 그의 끈질긴 출현이 우리에게는 집요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도, “저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만 보며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아니,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전부일까요?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은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 다만 ‘신앙고백’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결단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벌써 56년 전의 일입니다. 그녀는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홈런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알토란 같은 적시타를 치면서 남부럽지 않은 인정과 사랑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야구의 꽃인 홈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포물선을 그리며 담장 밖으로 날아가는 공을 보면서 당당하게 그라운드를 돌고 싶었습니다.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은퇴할 때까지 홈런 세리머니를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꾸만 커져갔습니다. 왜냐하면 친정어머니의 통산 출산 성적 때문이었습니다. 1남 9녀. 원래
코로나19로 인해 미루고 또 미루었던 부울경 교갱협(대표회장. 이상근 목사) 임원모임이 어제 남산제일교회(신원욱 목사)에서 가졌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뜻깊은 일은 지난 2월 총회에서 10여년 이상 대표회장을 하시고 고문으로 추대되신 정연철 목사님(양산 삼양교회)께 공로패와 함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었습니다.정연철 목사님은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보면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영적으로 많은 도전과 은혜를 주신 훌륭한 선배 목사님이십니다. 따뜻하고 인자한 성품과 뜨거운 기도의 영성으로 목회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입니다.요즘 처럼 어려운
지난 주간 "스승의 날"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래된 제자들로부터 가까운 날(?)의 제자들에게 감사의 문자와 꽃과 선물을 받고 보니 잠시 감회에 젖어 봅니다.나 역시 살아오면서 만났던 좋은 분들로 인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영역이든지 그 분야의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진리인것 같습니다.그리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확인되는 듯합니다. 현재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세월이 흐른 후에 그제서야 서로의 마음을 더 헤아리게 됩니다.사제지간에는
2020년의 새해는 코로나19(COVID19)라는 감염병의 영향으로 우리의 일상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시간들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코로나19와의 전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생활화하며, 발열체크, 손 씻기, 마스크착용은 생활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와 공동체 활동을 일시 중단하기도 하며, 모든 모임을 온라인으로 대체하기도 했습니다.코로나19라는 재난을 맞이한 전 세계 모든 나라와 사람들은 하루 속히 전과 같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지만 이미 이로 인한 삶의 모습은 변화가 불가피하게 보입니다. 이번 재난은 인
코로나19로 인해서 부모님의 생신 축하모임도 하지 못했는데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부모님과 가족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식사후 막내동생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축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요즘 같은 때에는 함께 모이는 것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나 연로하신 어르신들을 함께 모이는 것이 약간의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80대 중반을 넘어가는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 같아 죄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그럼에도 가족은 만나야 하고 부모님은 따뜻하게 찾아가야 합니다. 코로나19는 가족공동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