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미국교회가 많은 프로그램을 통해 가족들의 시간을 빼앗은 결과 교회는 크게 부흥했으나 이혼율이 늘어나고 이혼을 한 사람들로 인해 교회성장이 멈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교회도 성장이 멈췄다고 야단들인데 그 이유가 혹시 교회와 가정간의 신행(신앙과 행위)적 갈등 때문이 아닌가 점검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교회의 가정 사역이란 교회와 가정간에 여러가지 갈등의 폭을 좁혀 나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가정사역의 원리를 알아보자.첫번째 원리는, 교회와 가정의 동반자 관계를 성립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교회를 가장 큰 가정처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실정입니다. 모두 썩고 부패했다고 아우성입니다. 삼풍이 무너진지 얼마 안돼 부실공사의 사례들이 또 밝혀지고 있으며, 뇌물로 유지되던 기업들이 휘청거리며 국민경제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당대의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기고 서로를 음해하는 모습이 신문지상을 어지럽힙니다.이러한 환경에서 미래의 희망이랄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학원폭력은 상습적으로 일어나고, 가출 청소년이 날이 갈수록 늘고, 청소년 음란문화는 위험수위를 넘었습니다. '상
20세기 세계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은 '오순절 신학'일 것이다. 오순절 신학은 성령님을 교회 안에서 새롭게 발견했으며 교회를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순절 신학은 삶이 없고 십자가 없는 영성이었다. 제자도의 신학이 등장하게 된 것과 제사장으로서의 평신도 사역에 대한 관심이 태동한 것은 오순절 신학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제자도의 신학이나 평신도 사역의 입장은 교회가 가진 초월성, 성령의 역동성을 동시에 강조했어야 했다.21세기가 다가오고 있다. 21세기의 정치, 문
현대인과 신세대는 인간다운 삶과 현대사회의 비인간화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문화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복음과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들 가운데 존재해야 한다면 목회자의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와 통찰력은 차세대 교회와 목회를 위해 필수사항이 된다. 영원한 포도주와 같은 복음의 본질은 타협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을 담아내는 부대와 같은 교회 구조와 기독교 문화는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유효하게 변할 수 있어야 한다.이런 생산적인 변화를 제도와 조직, 과거 전통의 맹목적인
헌신예배를 드렸다. 강사로 오신 목사님의 설교는 아주 은혜로웠다.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 두 달 후 다시 헌신예배를 드렸다. 왠일인지 이번에 오신 목사님이 지난 번과 똑같은 설교를 했다. 강사는 다른데 설교는 똑같은 것이다. 성도들은 이번에도 은혜를 받았다. 성도들의 반응은 "이 말씀이 우리 교회에 얼마나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같은 말씀을 두 목사님을 통해 거듭 주시느냐"는 것이다. 두 달 후 또 헌신예배를 드렸다. 기적이 일어났다. 앞의 두 분과 예화까지도 똑같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엔 성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교회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은 교회가 패쇄되어 젊은이들이나 교회 밖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목회자들이 가졌던 인식의 전환이 오늘의 미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중에서도 이미 한국교회에 잘 알려져 있는 윌로우크릭, 새들백, 갈보리교회의 경우는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이들은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왜 나오지 않는지 질문을 던지고, 그들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그들의 자세는 방안을 찾았다. 그들의 자세는 '성경에 위배되지 않으면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