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은 폭염이고, 가마솥더위이고, 열대야이며 살인적 더위이다.신문은 강원도 홍천의 최고 기온이 41도로(8월 1일) 76년 전 최고였던 대구의 40도 기록을 깬 ‘기록적 더위’란다. 더위를 피하는 요령도 가지가지이다.서울 도심 복합 쇼핑몰에 피서객들이 몰리면서 ‘몰캉스(쇼핑몰+바캉스)’라는 말이 생겼고, 백화점을 찾는 사람들을 두고는 ‘백캉스’(백화점+바캉스)라 한단다. 나의 피서는 또 다르다. 지난 6월에 캐나다에 갔다가 7월 31일 귀국했다. 아무리 더워도 대한 사람은 대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돌아왔지만 불볕더위는 큰
2018년 6월 18일. 광주를 출발해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신학교 1학기 강의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캐나다에 살고 있는 딸네 집과 아들네 집에 가는 길이다. 9시 출발 버스를 탔다. 인천공항에 오후 1시쯤 도착하면 오후 3시 25분 출발하는 밴쿠버 가는 비행기 출국 수속을 하고 탑승하는데 늦지 않을 시간이었다.그렇게 짐작했던 버스가 서해안 고속도로 행담도 부근을 지나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서울이 가까워지는 신호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인천공항 도착이 예정보다 30분은 늦어질 것 같다. ‘광주 출발을 30분 당겨서 8시
2018년 6월 18일 오후 3시 34분 캐나다 에드먼턴공항에 도착했다.한국 시간으로 6월 18일 아침 8시에 광주를 떠나서 고속버스로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오후 3시 45분에 에어 캐나다로 출국해서 비행기에서 하룻밤을 지내 캐나다에 왔다.아침 9시가 조금 넘어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고, 공항에서 4시간을 기다려 에드먼턴 오는 비행기로 여기 도착한 것이다. 광주를 출발하여 거의 24시간 만에 이곳에 왔으니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이곳 시간으로 6월18일 오후 3시 34분. 공항에 둘째 딸(용우)과 아들(은득)이 마중을 나왔다. 엄마
한국 교회의 고난과 나라 사랑의 기도를 담은 찬송을 모아 ‘나라 사랑 찬양예배’를 드렸습니다. 특별히 내국인들이 작사 작곡한 찬송가는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 그리고 6‧25 전란 때의 슬픔과 고통과 교회의 기도를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는 지나치게 개인과 개 교회 중심, 물량이나 세속적 성공주의임을 깨닫게 됩니다.‘오직 예수,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살았던 주기철 목사의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치누나’, 안이숙의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손양원 목사의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세월이 지나면 추억으로 떠오르는 일들. 그것이 고마움이고 그리움이고 사랑이고 눈물이기도 하지만 원치 않게 아픔과 섭섭함과 미움과 분노로 남기도 한다.목사로서 교회를 맡아 성도들을 돌보았던 일들이 목회를 마치고 은퇴한 내게도 이런저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가 하면 내가 기억하지 못한 일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생각하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이 많았을 것 같다. 사소한 일로 생각해서 관심을 갖지 못했고, 또 기억에도 없지만 마음의 상처로, 섭섭함으로 남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많았을 것 같다.경북 의성에 계시는 김 장로님
금번 성명서는 입춘 이어 우수 경칩 지나면 봄꽃을 만나러 나선다.무등산에 가면 잔설 사이에 올라온 노란 꽃잎 복수초를 만나고, 눈송이처럼 앙증맞은 변산바람꽃도 만난다. 우리 예배당 화단에는 튤립이 고개를 쏘옥 내밀고, 박물관에는 홍매화가 뽐내듯 홍매화를 피운다. 다들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맨몸으로 견디고 남풍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이다.꽃이 피면 금방 벌들이 찾아온다.나무는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지만 꽃은 고운 빛깔과 매혹적인 향기로 벌을 부르는 것이다. 벌들은 다른 꽃에서 묻혀온 꽃가루를 나눠주고 맛있는 꿀을
새해를 맞을 때마다 무엇인가 기대하는 막연한 마음에 들뜨는 것은 지나온 날들이 어둡고 힘들었던 때문일 것이다. 근심이나 걱정거리를 떨쳐버리기에 갈급하고, 행복한 삶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새해를 맞는 정월 초하루 면 각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맞이에 나서는 것 아닐까.서울에서는 새로 개통된 서울 강릉 간 고속 열차를 타고 동해안으로 몰려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정동진만 아니라 동해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나 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출을 기다리고,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환호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텔레비전이 보여준다. 바닷가만
소록도에 갈 때면누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잠을 설치기도 한다. 날 반겨주실 모습이 떠올라 구름 위에 누워있는 것 같이, 꽃바람이라도 불어오는 것 같이 마음이 즐겁다. 만날 때면 우리 시대에 고생했던 이야기며 믿음으로 살아온 이야기며 하늘나라 소망으로 위로하고 소망을 채우기 때문이었다.금년 12월에도 갑자기 소록도에 갈 일이 생겼다. 지난 10월에 떡을 해 가서 전 교인을 대접했으니 성탄절은 그대로 지내도 덜 섭섭할 것 같았는데 서울 광염교회 조현삼 목사님께서 전화가 걸려왔다. “목사님, 소록도 가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금년에도 12월에 들어서니 괜히 분위기가 바빠지고, 썰물이 다 빠진 것처럼 정해진 시간이 다 된 끝자락 같은 기분이다. 11층 아파트 창밖으로 내다보는 어둑해진 산자락에 눈이 흩날린다.컴퓨터를 열고 성탄절 편지를 주고받았던 흔적을 들여다보다 반가운 이름 하나, 특별한 변화가 없겠지만(여전히 미집행 사형수로 남았을) 안부가 궁금한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울었습니다.○○식씨에 대한 한 순간의 동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종교인이요 목사로서잘못된 종교, 잘못된 신앙생활이 어떠한 불행으로 돌아
2014년 여름, 매 주일과 수요일이면광주에서 새벽에 나서서 소록도까지 달려가 주일예배와 수요일 예배를 인도했었다. 교역자 한 분이 은퇴하고 자리가 비어 있어서 목사님이 나를 불렀던 것이다.주일이면 예배를 2, 3회 인도했다.그 때 권사님 한 분이 주셨던 '꾸깃꾸깃 봉투 하나'가 감동이었다.그 사랑은 지금도 이어진다. 종종 먹거리며 기름값을 넣어준다.2014년에 받았던 봉투는 지금도 내 책에 끼워져있다. 버릴 수 없어서.그때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본다. 나도, 그분들도 건강해서 아직도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
2009년 3월 15일.1981년. 제가 앞장서 동산교회를 개척하여 계속 시무하다가조기 은퇴(65세) 하면서 마지막 주일 설교를 하고 썼던 글입니다.은퇴한 지 9년째하나님의 사랑, 섬겼던 동산교회 성도들의 사랑 힘입어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의 빚진 자의 삶입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은혜가 됩니다. --------------------장미꽃 가시 감사길가의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감사따스한 사랑의 가정 일용할 양식감사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제가 동산교회 주일강단의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고달픈 삶을, 비천한 가문을 물려주고 싶겠는가.비록 고생을 하더라도 자식에게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모 심정 아닌가.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가는 목회자는 세상 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어렵다. 그런데도 믿음의 자녀들은 부모의 헌신과 십자가 삶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나서는 역설적인 삶을 살기도 한다.박환규 목사님은 50년, 반 백 년을 목회자로 헌신하고 은퇴했다.전라도에 처음 들어온 선교사들을 도와 남도 땅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성경을 배포하고 복음을 전하던 조부(박문택), 평
주일 아침, 말씀을 묵상하며 찬송가를 불러본다.“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 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오늘, 주일 설교자로 초청받은 교회는 농촌(담양)에 있다. 예화 하나를 건졌다. 미국 최고의 부자였다는 존 데이비스 록펠러가 ‘나눔의 즐거움’으로 죽을 병에서 살아난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의 믿음의 권면이다.록펠러의 재능은 암산이었고 수학을 푸는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그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다.
가문의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기는 이들의 간증을 들으면 좋은 교훈이 되고 큰 은혜가 된다.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갈 때 부친 손종일 장로가 하셨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손 목사야, 누가복음 9장 62절과 마태복음 10장 37절로 39절을 기억해라.” 했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말씀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2017년 9월 1일 금요일 정오.소록도중앙교회 예배당 높은 종탑 스피커에서 울리는 찬송가 소리가 소록도 섬에 울려 퍼진다. 고요한 솔숲을 지나고 바닷가를 가로질러 막힘없는 바다로 자유롭게 멀리멀리 퍼진다.잔잔한 종소리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고향을 떠나 이 섬에 들어와 평생을 살아온 한센인 들의 슬프디 슬픈 숨결처럼 내 마음에도 깊은 서러움으로 파고든다.일제 때부터 있었던 정오기도회가 언제부턴가 사라졌다가 2016년부터 일부 교인들에 의해 회복된 것이다. 소록도교회를 섬겼던 천우열 전도사가 고령으로 은퇴하고 소록도에 주저앉아 살게
목사님들이 모이면 자녀들이 목회하는 분들을 만난다.그럴 때면 "목사님은 목회 기도를 못 쉬시지요. 아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 하며 인사를 나눈다. 목회자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고도 아버지를 이어 목회를 지망하는 자녀들이 대단하는 생각을 한다. 근래에 돌아가신 박환규 목사님 장례식장에서 목회하는 세 아들을 만났다. 케냐에서, 캄보디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광주에서 개쳑교회를 하는 분들이었다.그 때 그 가문의 아름다운 믿음과 헌신 이야기를 신문에 올리기로 마음 먹었다.그들의 역사가 바로 광주전남 선교 역사와
가문의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기는 이들의 간증을 들으면 좋은 교훈이 되고 큰 은혜가 된다.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갈 때 부친 손종일 장로가 하셨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손 목사야, 누가복음 9장 62절과 마태복음 10장 37절로 39절을 기억해라.” 했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말씀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초등학생으로 바닷가 마을 초가지붕 예배당(녹동제일교회)에 다니던 때는6·25 전쟁이 휴전으로 잠잠해진 시기였다. 어린이 예배시간이면 청년 교사가 ‘총칼 위협 앞에서도 나는 예수 믿는다고 말해야 한다. 죽더라도 믿음을 지켜야 천국 간다.’고 설교했다. 그때 교회들이 순교 믿음을 강조했던 것이다.박병근 전도사가(함평 나산교회) 6·25 때 공산군에 붙잡혀함평내무서 유치장 갇혔다. 이웃 교회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들도 끌려왔고 지방 유지들도 있었다. 박 전도사는 일제 때도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감옥생활을 했다. 8.15 해방 후, 좌우익
《죽으면 죽으리라》를 쓴 안이숙은1948년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제가 없는 동안에 먼저 천당 가시지 마시고 기다려야 합니다. 석 달 후면 꼭 돌아오겠습니다.’ 다짐했으나 그렇게 헤어져 미국으로 간 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이젠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지 않았을까.지난 5월 20일 91세로 소천하신 박환규 목사도매서인이었던 조부(박문택)와 6·25 순교자인 부친(박병근)을 천국에서 만나 뵙고 선교사와 목사 세 아들을 응원하고 계실 것 같다.박병근(朴炳根)전도사(박환규 목사의 부친)는 1950년 6·25 때 나산교회(함평군 나산
나이를 먹으면 사소한 일에도 감격하고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물론 섭섭한 일이나 앞일을 두고 걱정과 근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래저래 마음에 또렷하게 그려지는 지난 일들과 얼굴들이 나로하여금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한다.지난 7월 2일,주일 오후예배에 '남성중창단 찬양발표회'가 있었다. 맥추감사주일 행사였다. 지휘자와 반주자를 포함하면 22명이었다. 담임 목사님(이한석)과 장로님 두 분, 그리고 집사님들이었다. 나는 찬양을 듣기 전부터 감동을 먹고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앞에 나와 두 줄로 서는 찬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