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 아이가 집에만 있는 것을 답답해해서 집 앞 공원을 한 바퀴씩 돌곤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아이와 달리 아이가 장갑 끼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억지로 껴주어도 이내 빼버려서 손이 꽁꽁 언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어떻게 하면 추운 날씨에 장갑을 끼지 않는 아이를 따뜻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중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패딩 주머니에 손난로 두 개를 넣어주니 아이가 손난로를 꼭 쥐고 꽁꽁 언 손을 녹이는 것이었습니다.어느날 아이와 함께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방문한 마트는 체온계 아래에
얼마 전 TED 강연에 하버드대학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가 32년간 성인 5000여명을 대상으로 ‘사람의 행복과 불행의 사회적, 지리적 근접관계’ 에 대한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강연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행복지수가 높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주위에 행복한 사람이 많으면 가까이 사는 사람들도 행복해 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행복은 전염성이 높아 행복한 사람들이 속한 가정은 더 행복해지며 자연스럽게 행복한 사람들의 그룹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그룹으로 나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잠언 23장 24,25절)저에겐 마치 사진처럼 기억에 남는 어린시절의 장면이 몇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할머니 댁에 가는 길에 아버지께서 주유소를 들르시면 “이젠 차가 배불러서 잘 가겠어요”라고 이야기 했던 어린 제 모습입니다. 운전대를 잡으신 아버지를 믿었기에 긴시간을 걱정 없이 잠을 청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참 행복했음을 새삼 느낍니다.몇 달 전 지하철 역 앞에서 아버지를 픽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어느 날부터인가 제 안에서 가슴이 터질듯 한 뜨거운 열망이 끓어올랐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셔서 일으키시는 그 소원, 그 열망이 곧 나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총신신대원에 재학 당시, 기숙사 4층에 마련된 예배당에서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주시는 소원과, 스스로에게서 타오르는 열망을 비교해볼 기회를 얻었습니다.깜짝 놀랐습니다. “남도를 내게 주소서!”라고 그토록 열망했던 기도 안에 제가 탐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을 때마다 영적 상징물들을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세겜과 벧엘에 단을 쌓아 자신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야곱은 자신과 함께 열어갈 신앙의 역사를 약속하신 하나님 앞에 돌베개를 세우고 기름을 부으며 서원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영적 상징물들을 다시 접할 때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되새기며 흐트러진 신앙을 다잡고, 힘을 내어 새 출발을 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기울어가는 2021년 12월에, 내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되짚어보는 중입니다. 목회의 마지막 여정에 열정을 불어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힘입어 섬기던 교회를 떠나, 청소년 몇 명과 동생들을 개척 구성원으로 삼아 남향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제게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가라’는 사도행전 8장 26절의 말씀에서 착안하여 교회 이름을 정했습니다.목포 삼학도의 허름한 기와집 2층을 빌려 강단을 꾸미고, 의자를 들여놓고 설립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래층에 사는 고등학생을 전도해 함께 일하기도 했는데, 그는 지금 훌륭한 목회자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기고 있습니다.바닷가에 자리잡은 목포 삼학도에서 만나 전도한 이들 중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30여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시편 139편 1절)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막 16:24)이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십자가의 고난 없이 주님의 제자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요행의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결혼 전부터 ‘저에게 주실 자녀는 저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게 하시며 몇 배로 더 귀하게 쓰임 받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해 왔으나 하나님께서 쓰시는 좋은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냥이라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2012년 1월. 창밖으로 함박눈이 내리던 그날, 하나님께서 우리
어려운 교회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만 보면서도 그 상황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저를 질책하는 하루였습니다. 여러 미래자립교회들 속에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딱 한 가지 음향장비만 살펴보았는데도, 제 자신이 시골교회 목회자들의 애환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 다시 한 번 깊이 반성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30년은 사용했을,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앰프를 보았습니다. 낡은 스피커들과 케이블들까지 먼지 옷을 둘러쓴 채 이상한 소음을 내며 목사님의 말씀선포를 힘들게 만
작년 2월에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확산된 코로나(COVID19)는 벌써 만 2년이 되어갑니다. 코로나 시작이후 벌써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12월입니다. 늘 성탄이 다가오면 우리교회 관리집사님이 교회건물에 성탄절 전구를 장식합니다. 아주 오래된 전통이고, 성탄절 장식 전구를 보면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됩니다.우리 교회 주변에는 지난 2019년 가을부터 시작된 아파트공사가 이젠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진척이 많이 되었습니다. 2023년 봄에 완공하여 입주하게 될 날까지 이젠 1년 6개월정도 남겨놓은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 17장 3절)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연단을 받습니다. 쇳덩이를 그대로 쓸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쓸 수 없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연단하십니다.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연단하여 사용하시고 그 방법은 질병이나 어려운 상황, 자녀나 가족과 같은 사람을 도구로 하여 연단하십니다. 연단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뿐더러 연단을 받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건 아닌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때도 있습
젊은 날부터 이 말씀이 제 가슴 속으로 훅 들어와 버렸습니다. ‘순금 같은 믿음’이 좋아서였을까요.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늘 되새겼습니다. 우리 어릴 적 학생회나 청년회 헌신예배 시간에 회원 호명할 때는 어김없이 이 구절을 외웠습니다.시간이 흘러 사명의 때가 다가왔습니다. 남도를 섬기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훈련하시는 과정에는 솔직히 후회도 있었습니다. 교인 10여 명과 청소년 30여 명으로 남도선교를 시작하면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짐바리 자전거로 시장을 봐오고, 버스터미널마다 찾아다니며 기타를 들고 청소년들을 보내달라고
장흥군과 보성군 사이에는 해발 807m 높이의 제암산이 있습니다. 그 산 북동쪽에 있는 자연휴양림 웅치계곡에는 남도 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곳 7부 능선에 자갈이 깔린 청소년광장이 있습니다. 거기에 700여 명의 학생을 모아놓고 청소년복음잔치를 열었습니다.내 아내는 50인분 밥솥 여러 개를 머리에 이고 그 고지까지 나르느라 파김치가 되었고, 남자 스태프들은 5t 트럭을 주 무대로 힘들게 꾸몇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한 무리의 양복 차림 신사 분들이 나타나더니 전기를 끊어버리는 게 아닙니까? 알고 보
초등학생 때 즈음 필자가 살던 동네의 선박은 돛단배나 노를 젓는 배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섬에서 처음으로 발동선을 사오셔서, 어린 마음에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모릅니다. 시간이 흘러 가세가 기울자 아쉽게도 그 배를 팔게 되었습니다.그런데 군복무 시절 암호병만 쓰던 독방 속에서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임하시자 팔아버렸던 그 배가 내 마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더니, 선교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배를 타고 남도의 마을과 섬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꿈이 마음에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남해안을 내게 주소서!” 정말로 그 꿈은 하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겔 22:30)우리나라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탓에, 농촌에서는 70살을 먹어서도 제일 젊은이로 취급받으며 교회를 섬깁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 가누기도 힘겨워하는 노인들이 오늘날 겨우겨우 예배당을 지키고 있는 것이 농어촌 교회의 현실입니다.미래자립교회 지원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그 사정을 가까이에서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부임하고 2년여 동안 보일러도 가동되지 않는 냉골 방과 거
2020년을 맞이할 무렵 까닭 없이 몸무게가 14kg이나 빠졌습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병원을 찾았더니 급성 당뇨로 혈당수치와 당화혈색소 수치가 매우 높다고 나왔습니다.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하게 검사한 결과 신장에 암이 발생한 것 같다는 진단을 받고, 부천 성모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런데 수술 직전에 비뇨의학과 교수께서 저의 경우 95% 신장암으로 판단되는데, 별도로 췌장에도 이상이 있다는 새로운 진단을 내렸습니다. 외과수술 집도의 교수님, 소화기내과 교수님, 영상분석학과 교수님 등이 종합적으로 진단한 결과 췌장 머리와
며칠 전 한 목회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분과 저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결손가정 아이들과 어렵게 공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시골교회에 돈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성미는 조금씩 남아서, 모아 가져왔노라’고 쌀 한 자루를 내려놓고 가신 분이 바로 이 목사님이셨습니다. 배고팠던 우리에게는 그 일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그런 분과 한 노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10여 년 전 어느 날에는 그 목사님께서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급히 달려가 보니 목사님 혼
하루는 쌀통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작은 시골교회 목사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그래도 목포 시내에서 사역하는 중이었고, 그분은 무안군 운남면 농촌마을에서 목회하는 분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비록 우리 교회가 가난하지만, 성미만큼은 넉넉합니다” 하면서 쌀 한 자루를 던져놓고 가셨습니다.봄 방학 때와 여름 방학 때는 아이들을 불러들여 청소년수련회인 ‘복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해변 마을들과 섬마을들을 찾아가서 성경캠프를 열었습니다. 보통 성경캠프에서는 5~7명으로 구성된 팀과 함께 사역을 하곤 했습니다.그
6·25전쟁 직후 갈 곳 없는 전쟁고아들은 무작정 기차를 탔다가 종착역인 목포에 내렸습니다. 그래서 목포에는 고아원이 많습니다. 유학생들이 가장 많은 곳도 목포입니다. 험악한 파도와 싸우며 내 자식만큼은 잘살게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부모들은 모질게 돈을 모아 육지인 목포에 집을 사고, 거기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특히 항구에는 결손가정이 많았습니다. 가난 속에 홀로 자식들 먹여 살리려는 아낙네들의 억척스러운 삶이 그 항구에 있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서 시청이나 항만청 소유지에 몰래 밤에 들어가서, 겨우 비만 피할 수 있는 집을 짓고
공유지 무허가촌, 성매매의 온상이었던 곳에 남향교회를 개척한 후 그 같은 형편의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눈치보지 않으며 밥을 먹을 수 있고, 잠을 재워주고 함께 살 수도 있다는 입소문이 돌았겠지요.그 중에 한 사람 금산이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공부머리가 없어 항상 맨 끝에 앉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짓밟히는 것이 일상이었던 아이였습니다. 게다가 심하게 말을 더듬기도 했습니다. 금산이가 우리 공동체에 들어와 살 때 즈음, 결손가정 청소년들과 함께 ‘청소년 복음잔치’를 열었습니다. 상처 입은 청소년 한 영혼이라도 건져내자는
교사 발령을 기다리던 시기에 저는 한 주간의 절반쯤을 기도원에 머물면서 기도하거나 성경 읽는 데 몰입했습니다. 당시는 1970년 초기로 한참 기도원 운동과 부흥회가 자주 열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치유나 방언의 은사 등을 구하였는데, 성령께서는 저에게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구하게 하셨습니다.말씀을 사모하며 하루에 500여 장씩 성경을 읽으면서 탐구하였습니다. 그 무렵 전국 주일학교 성경고사대회 준비를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중이었는데, 이 때 사용 중이던 마저도 거의 외울 정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