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때문에 소록도 방문이 막혔다.며칠 전, 장인심 권사(신성교회)와 통화를 했다. 매일 모이는 정오기도회 모임에 함께 했던 분들 여럿이 고령으로 요양병동에 입원해서 열 명도 못되게 나온다며 아쉬워한다.“예배당 지을 때 고생했던 교인들, 머리 잘라 바쳤던 할머니들이 몇 안 남았어...” 하며 옛이야기를 이었다.그렇다. 소록도교회 예배당 건축 이야기를 정리해보자.지금의 예배당들이 1963년에 입당했고, 1966년에 헌당예배를 드렸던 건물들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1962년 8월 8일, 소록도병원 공회당에서 김두영 목사 위임예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소망하는 사람들.성경의 하나님 말씀과 그 언약들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기독교 신자이다.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며 죽음을 초월한 믿음의 소망을 이렇게 외친 믿음의 형제가 있다.오 질병아, 오려거든 오라!쓰라린 고통아, 너 오려거든 오라!이 몸은 썩고 썩어 저주의 권화가 될지언정주님의 손짓 따라 달음질하련다.그가 믿고 기도하고 찬양했던 대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신 성도, 세상의 슬픔과 눈물을 닦아주셨을 예수님의 품에 안겼을 소록도교회의 한 성도가 고
“순교殉敎”‘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소록도교회는 순교 믿음을 지켜온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6·25 때 김정복 목사님이 교회를 지키다 공산군에 붙들려 순교하였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2019년 소록도교회를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제12호, ‘순교 사적지’ 제3호로 지정했다.소록도 교회는 지금도 ‘순교 신앙’을 표어로 쓰는데 그러한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이며, 일제 때 한 일본인 목사의 순교신앙에서 흘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일본인 제2대 원장 하나이젠키치(花井
‘자애慈愛’‘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도타운 사랑’소록도 자혜의원慈惠醫院 제2대 원장 하나이젠키치(花井善吉)는 한센인 환우들을 대하는 언행이 ‘자애慈愛’였단다. 강제 수용되어 슬프고 억울하고 고달픈 그들은 감격하고 감동했다.개원 때(1916년) 원장 아라카와토오루는 환자들에게 일본식 생활양식에 일본식 의복을 입혔고, 음식도 일본식을 강요했다. 이러한 생활이 5년이나 이어지다가 그가 자리를 떠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제2대 하나이젠키치(花井善吉) 원장이 1921년에 부임한다. 중국과 조선에서 군의(軍醫)로 지냈던 60 고령에 겉으로 보
소록도 사는 분들이 5백여 명을 헤아린다.병을 낫고 소록도를 나가 살다가 노년에 재입원한 분들도 많다. 그렇다면 소록도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눌러 사는 분들이 절반은 될 것 같다. 대개는 손발에 장애를 가졌거나 시력을 잃었고 안면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신 분들아 계신다.나이들이 많아져서 외모를 자랑하지도 않지만 사진 찍는 것을 피하는 분들이 많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소록도에 가는 분들은 누구 앞에서나 찰칵! 찰칵!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소록도 어느 간호사가 쓴 글이 흥미롭다.“할머니, 사
소록도교회가 『소록도 교회사』-소록도교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간의 발자취-를 발간했다.지난 11월 14일에 ‘축하예배’를 드렸는데 안명환 목사(전 총회장)가 설교를 했고, 여러 교회와 기관 그리고 지역에서 내빈들이 참석했다. 특수한 환경에서 소록도교회의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을 지켜온 것을 이구동성으로 대단한 믿음이고 또 하나님의 은혜였다며 칭송했다.나는 책을 발간하기에 앞서 김선호 담임 목사로부터 ‘감수監修’를 부탁받았다. 원고를 출판사에 맡기고 처음 교정 작업부터 동참해야 했다. 덕분에 한여름 무더위를 그 일로 보냈다.교회
이미 작고하신 김신아 장로님(소록도 중앙교회. 2007. 9. 22 소천)의 자서전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찾아 읽었다. 오는 11월 14일 『소록도교회사』발간 감사예배를 드릴 예정이어서 장로님을 생각하게 되었다.아울러 심전황의『아으, 70년-찬란한 슬픔의 소록도』, 강선봉 자서전 『천국賤國으로의 여행』, 시인 강창석의 『내가 사는 소록도』, 이재성의 『하늘의 별을 딴 사나이』, 이명남의 『소록도여 안녕』를 꺼내놓는다.김 장로님이 별세하고 한 달이 지난 10월 27일에 사모님께서도 소록도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가 병상에서 하나님의 나
오늘은(2019. 10. 6) 소록도 4개 교회가 모이는 주일 오후 예배 설교자로 부름받았다. 성경 본문을 기도하고 작정했다.“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하는 내용이다(소록도교회는 구판 성경 사용). 한센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문둥이’란 단어이다. 망설이다가 결단했다.가족과의 생이별, 사람들의 차별과 천대와 경계와 혐오, 특정 지역이나 시설에 갇힌 생활, 육체적 고생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외로움과 서러움에 한 맺힌 저주스러운 말이기 때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 세량지로 향했다.아침 햇빛이 비칠 때 저수지에 반영으로 비추는 산벚꽃과 연둣빛 신록을 찍으러 나선다. 집에서 30여 분. 저수지 둑에는 이미 진사들이 몰려와(4백 명도 넘는다고) 삼각대를 세우고 자리를 잡았으니 나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진사들 저 끝 앞으로 가서 가파른 아래쪽 물가에 어렵게 끼어들었다.햇빛이 산허리를 넘어 저수지를 환하게 비쳐줄 7시 20분을 기다린다.“왔어! 왔어~~” 저수지 건너편에 햇빛이 들어오면서 나뭇가지가 연둣빛으로 환하게 비춘다. 하얗게 반영으로 드러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카톡에 올라온 글.김 장로님께 어려운 무슨 일이 있어 이런 글을 올렸나 싶어 내용을 열어보았다.“가슴이 터질 것 같아 가을 빛 동해 대진해수욕장을 찾았습니다.한센인이라 사람들 없는,아무도 없는 바닷가 갈매기 벗 삼아.속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기분 상쾌합니다.목이 터져라 소리도 질러보건만 아무것도 없네요.역시 혼자입니다.한센, 나 혼자뿐이네요.돌아섭니다. 그냥.아름다움 뒤로하고.9월 20일 오후 5시 17분”그래요. 한센병을 앓고 있을 때 소록도에 입원해 살다가 치료가 되어 정착촌(경북)으로
앞서가신 훌륭한 목사님들이 그리워서 이미 고인 되신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을 책으로 만난다.(한숭홍, 한경직의 생애와 사상. 1993).1902년에 출생한 한경직은 고향 자작교회(평남 평원군 공동면 간리)에 나갔고 이 교회에서 믿음을 키웠다. 마펫(Moffett, Samuel Austin) 선교사가 하룻밤 묵어가면서 심은 복음을 받은 세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처음에는 언덕 돌배나무 아래 모여 예배를 드렸다. 밝은 햇빛과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사람들 구경거리였겠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향기로운 예배였을 것이다.한 목사님이 태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순간순간이 결단이고 판단의 과정입니다.지혜로운 결과 함께 육체적으로도 땀 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수고로움이 불편하고 힘들며 인내해야 하기 때문에 불평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때마다 기도하며 나아갑니다.구약성경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받아 믿음의 조상들에게 언약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그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福地로 가는 것입니다.그 길이 거친 광야이며 무덥고 힘듭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주일 아침이다.오늘 설교할 성경을 묵상하다 마음에 차오르는 영혼의 찬송을 부른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오늘 초청받아 설교할 곳은 농촌(담양) 교회이다.성경을 강론하며 이해를 도울 쉬운 예화 하나도 건졌다. 미국 최고의 부자였다는 존 데이비스 록펠러의 ‘나눔의 즐거움’이다. 죽을 병에서 살아났던 감동적이고 누구나 한 번은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이다.록펠러는 어려서부터
새삼스럽다. 은퇴하고 10년 만에 다시 서게 된 나의 설교 강단.며칠 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한 설교를 마음에 담고 주일 예배에 나온 성도들을 만난다. 부담도 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서로가 나눌 은혜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기도하며 읽고 묵상했던 성경을 들고 강단에 서는 것은 큰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다.교인들도 은퇴한 원로 목사의 변한 모습(늙어가는)과 설교를 들으며 많은 생각과 추억들이 그림을 보듯 떠오르리라. 개인의 마음에 아련한 추억들로.2009년 3월에 동산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을 때 “오늘이 마지막 설
간신히아주 간신히큰놈이 졸업했습니다.베를린서 대학원 졸업한아들 소식 자랑스러운 목사 제자자네도 그랬지간신히아주 간신히그 학교서 박사 받기까지거듭된 연구와 토론 기다림 15년나 역시 마찬가지네교회 개척 첫해자네 만난 때로부터 30년기도 징검다리 건너서간신히, 그러나 행복한 은퇴였네.-------내가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광주에서 '동산교회' 간판을 달고 교회 설립예배를 드렸고그해(1981년) 처음으로 등록한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전남대학에 진학한풋내기 대학생 김용주 군이었다.그렇게 만났던 김군은 졸업 후 총신대학 신학대
교회를 섬겼던 목회牧會 사역을 마치고 물러난 은퇴목사들이 모이는 ‘은목회’ 모임에 가는 길이다. 10시에 집을 나서 우리 아파트 건너 사는 홀 사모(남편이 별세하고 혼자 사는 사모)를 모시고 가야 한다. 김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을 잊지 못해 하는 모습이 유별나다. 자주 목사님 이야기를 하신다. 말하자면 그리움과 아쉬움과 사모하는 정을 드러내는 것이다.자녀 2남 3여가 결혼해서 어머니와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어서, 사모님 혼자 살면서 주일은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한다. 사모님 말씀대로라면 한 달에 네 번은 만나보는 목사 아들이
목회를 내려놓은 지 9년. 1981년에 광주동산교회를 개척해서 2009년까지 섬기다 원로목사로 물러앉았다. 후임 목사가 목회를 잘 하도록 도와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성도들이 행복한 교회가 되도록 조심스럽게 지내왔다.개척 초기부터 만나서 가족처럼 지내왔던 정든 교인들, 시련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 또 젊은이들과 귀여운 아이들까지 다 정이 들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하며 ‘눈물의 관계’를 고백하지 않았던가.2009년 3월, 마지막 주일에 "오늘 설교가 저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하고 말씀드렸고, 은퇴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의자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이 나비 춤추듯 양팔을 벌리고 훨훨 날 듯 흔들며 찬송한다.속울음인 듯 흐느낌인 듯. 정오 기도회에 앞서 개인 기도를 드리고 계신다.아~, 이것이 소록도의 모습이다. 찬송하는 섬, 기도하는 섬, 소록도는 이런 곳이다.정오 기도회에 앞서 중앙교회 예배당 안을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남자 세 분에 여자 다섯 명이 기도드리고 있다(2018. 10. 25).몹쓸 한센병을 원한
9월 2일. 소록도 교회 5개 처가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여름에 뵙지 못했으니 오랜만에 가는 것입니다.9시 10분에 출발하니 11시 반에 도착해서 점심을 약속한 집사님 댁으로 갔습니다.정성스러운 집 밥을 준비하셨더군요. 녹동 시장에 나가서 사 왔다는 반찬까지.동행한 장로님 한 분이 잘 잡수실 수 있도록 제가 되장국에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소록도 갈 때면 종종 신세를 지는 집사님 댁입니다.한때는 도시락을 싸갔지만 언제부터인가는 밥을 얻어먹습니다.그렇게 식사 대접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모습이 참 감사했던 것입니다.오후
우리 사는 것이 영락없이 훨훨 날아다니다 약속도 없었던 어디에 내려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민들레와 닮았다. 어린 것들만 그런 줄 알았더니 나이 먹고 보니 홀씨 다 떠나보낸 허전한 꽃대가 바로 아이들 다 내보내고 노인들만 남은 우리 부부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어찌 가족관계만 그렇겠는가. 공무원 객지 생활 십수 년에 목회 30년, 사실 평생 목회를 마치고 교회를 떠나니 교인들과의 관계가 거의 끊어지고, 함께 했던 기관이나 사람들과도 안부를 모른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허전함이 노년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옳을 것 같다.『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