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소설이지만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을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 중에 윤해원이란 사람은 미감아들을 양육하는 보육소에서 근무합니다. 자신도 그런 병력을 가지고 있고, 그의 누이도 가까운 병사지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누이를 그리며 이런 시를 썼습니다. '너의 얼굴에 분홍으로 고운 꽃 얼룩은/ 아무도 꽃이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도 이젠 꽃이라 말할 수 없다/ 너의 그 그리운 색깔을 위해/ 우리의 흘린 눈물에 낙화가 되었다면/ 누이여, 우리는 지금쯤 꽃 길 위를 걷고
구북리라고 불렀던 북병사 바닷가에 있는 화장장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의 육체는 마지막으로 이곳을 거쳐 갑니다. 한 줌의 재가 되어 조그만 상자에 담겨 납골당에 안치되는 것입니다. 한 줌의 흙, 그것은 건강한 사람이나 한 평생 몹쓸 병으로 살았던 사람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그 병든 육신의 장막을 벗는 순간 그 영혼이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하고 생각 해봅니다. 주님이 눈물을 닦아주시고 많이 많이 위로하실 것입니다. 세상 수고를 쉬라 하실 것입니다. 건강하신 분들보다 더 위로를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소록도에는 묘지가 없습
인터넷에서 소록도 정보를 둘러보니 이런 글도 있습니다. "저 내일 학교에서 소록도로 봉사활동을 가는데요, 거긴 나병환자들이 사는 섬이란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혹시 소록도에 갔다가 전염되지 않을까 걱정인데... 예방주사를 맞을 수도 없고... 어떡하죠? 혹시 가보신 분들 있으시면 조언 좀 부탁합니다. 이것저것 걱정입니다." 답 글도 올라있습니다. "소록도. 가보면 정말 좋습니다. 누가 가자고 안 해도. 한번 봉사활동 갔다 오고나면 그 다음번 다시 찾아갈 날이 자꾸만 기다려지는 곳이죠. 암튼 그곳에서 보람된 시간 보내고
'몰라 3년, 알아 3년, 썩어 3년'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이지만, 한센병 환자들 앞에서는 이런 말을 못했습니다. 마음 상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소록도에 들어가 공원 근처에 있는 생활유물관을 구경했는데 그 전시된 자료 가운데 '소록도 사람들의 은어'가 여러가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 말도 있었습니다. 지금 나이가 많은 분들이 발병 초기에 대개는 다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인 자혜의원이 처음으로 설립되어 환자들을 수용하던 때가 1916년입니다. 그 때는 병을 앓은 사람
사람들이 한센병 환자들을 두려워하는 만큼이나 소록도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육지와 가깝습니다. 녹동에서 배를 타면 바로 코앞에 있는 소록도 도선장에 10분도 채 안 걸립니다. 차량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어서 교회까지 금방 도착합니다. 주민등록증을 보이고 방문 목적을 말하면 방문증을 내줍니다. 지금 건설 중인 연도교가 완공되면 육지같이 드나들게 될 것입니다.제가 공무원으로 녹동우체국에 근무하던 60년대에는 뱃길이 어려웠습니다. 소록도로 들어가는 우편물을 가지고 섬에 들어갔다가 갇히는 때도 있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자랐던 남해안 땅 끝의 바닷가 마을 녹동은 소록도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바다를 향해 양지바른 쪽에 둥지를 잡은 남촌, 북촌, 평화동, 신정리 마을이 있고, 동네 서편으로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달림 머리'라 부르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소록도로 들어가는 한센병 환자들이 배를 기다리는 곳인데, 빨강색 기와를 얹은 작은 대합실 건물 하나가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그곳에 건물을 지은 것 같습니다. 바다로 불쑥 나온 작은 산 끝자락의 빨강 기와집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늘 무서
역사적인 제89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보고서에 어느 교회 수습처리위원회 보고가 있습니다. 전권위원회가 지도하여 목사측 대표와 장로측 대표 간에 합의를 도출하여 교회를 분립하여 일단락을 지었습니다. 내용대로라면 목사측에서 장로측에 일만교회운동 차원에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도록 교회분립보조금으로 상당액을 지원한 것입니다.이 일로 전권위원들과 당사자들이 모인 회의가 7차까지 모였습니다. 일만교회 운동에 한 교회를 더한 것으로 명분을 잡아보지만, 이런 분립은 애시 당초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당사자 모두가 너무 큰
우리 교회에 등록한 신혼부부를 심방했습니다. 이리가 고향인데 직장 따라 이사 와서 살림을 풀었습니다. 직장에 나갔던 남편도 출근했다가 잠시 돌아왔습니다. 예배상에 감사헌금봉투도 올려져있고, 심방대원들의 방석까지 여러 개를 내놓았습니다. 심방을 맞고 자리를 권하는 모습이 요즘 사람답지 않게 전통적인 믿음의 가정 냄새가 났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있는 집안일 것이라 생각되어 예배 후에 부모님의 신앙생활을 물었습니다. 부부 양쪽 부모들이 대물림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칭찬했습니다.교인들 가운데 5, 6대 째 믿음을
한국교회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문답하고 세례를 베풀 때는 믿음과 함께 신행을 확실하게 살폈습니다. 제사나 우상숭배 문화에 젖어있던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제사를 파했습니다. 양반이나 부자로 사는 사람들이 첩 두는 것이 별로 흉이 되지 않았지만 그것도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금주 금연도 확실했습니다. 임배세 작사 작곡의 금주가가 신정찬송가에 실렸습니다.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마라 그 술 조선사회 복받기는 금주함에 있나니라' 하는
교회가 마땅히 허물 있는 교인에 대해서는 죄를 지적하고 책벌해야 하는데, 책벌 없는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전보다 더 좋아져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허물을 덮어주면서 잘하기를 기대하는 사랑 때문이겠지만 책벌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는 신앙과 행위를 지도하는데 있어서 철저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섬마을 교회의 빚 바랜 당회록에 감동을 불러 일이키는 내용이 남아있습니다. 1916년 당회록 기록입니다. "출교 배치삼 - 우상 섬기고 권면 듣지 아니함. 최귀섭댁 - 우상 섬기고
황덕규, 조광천, 강요원 장로님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50년 전, 전라도 서남해안 섬마을 약산에 있는 관산교회에서 유년주일학교 교사와 학생으로 함께 했던 분들입니다. 이제 나이가 70이 넘어서 시무장로를 은퇴한 황덕규 장로님이나 다른 분들이 비록 어린 시절에 보고 겪었던 옛 생활을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1백 년 전 역사는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록된 자료들을 짜 맞춰보니 큰 감동이 됩니다.1928년에 발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완도군 관산리교회(冠山里)가 성립하다. 본리인(本里人) 정만일이 전도인 노학구
역사가 오래된 교회에는 믿음의 인물도 많습니다. 교회가 대를 이어 지내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인물을 낳고, 감동을 주는 간증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조 장로님 고향은 남해 바다 깊은 섬마을에 있는 관산교회인데 금년으로 1백년이 되었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그런 도서지방에 선교사들이 어떻게 들어갔을까 궁금해서 역사를 더듬어 보았더니 오늘 우리들이 도전을 받고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우리 교회 조광천 장로님의 말씀입니다."주일이면 밤이고 낮이고 예배당에 갔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관산교회를 가려면 섬 안에서도 산을 넘어 먼 길을
김순애 권사님이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가난하게 살면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남의 집 애기 담살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장로님 댁에 들어간 것이 복이었습니다. 가난한 농촌에 살면서 머슴의 아내가 되어 자수성가하여 아들들을 공부시켰지만 자녀들의 신앙생활은 어머니의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장자가 문제였습니다.큰 아들 성하의 신앙생활이 미지근하더니 불신 아내를 맞아서는 교회에 발을 아주 끊어버렸습니다. 아내는 철저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예수 믿는 집안에 들어왔지만 자기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음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오늘의 나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만 아니라 하나님이 내 생명을 부를 그 순간을 생각해보는 것 또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70년을 산다고 하면 1년은 365일이니 25550일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10년이 남았으니 3650일이 남았습니다. 반환점을 한참 지나서 종착 지점에 가깝습니다. 지금껏 교회를 섬겨왔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행한 대로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실 예
사람이 좋은 친구를 만나거나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김순애 권사는 철없던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남의 집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장로님 댁에 살면서 가족을 따라 예배당에 나가게 되고 주님을 영접했으니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몇 해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김순애 권사님(89세) 이야기입니다. 전라도 고흥 농촌의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난 순애는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새 엄마가 들어왔는데 구박이 심했습니다. 어린 순애는 한없이 서럽고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열 살 때 집을 빠져나와 이집 저집으로 돌
강채영 장로님은 교회를 개척하기가 어렵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울 때마다 물질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득량도교회 개척 후에 신개발지에 좋은 가게를, 연홍교회 개척 후에는 좋은 땅을, 월포교회 개척 후에는 돈이 되는 좋은 건물을 선물로 받았답니다."고흥군 도양면 녹동항은 신설된 항구로서 인구는 일만 오천 명이 조밀히 사옵고... 교회는 십 수년 전부터 설립되었으나 교인들이 빈약하여 수칸 초옥에서 예배하여 오든바 성전이 기우러져 넘어가는 형편은 누구나 볼 수 없는 모양일 뿐 아니라. 전도를 하여도 듣는
"하나님이 죽을 사람을 살려주셨는데 무엇으로 그 은혜를 보답할 것인가 깊이 생각하여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어요.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누가 전도도 하지 않는데 내가 그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취약지구만 골라서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지요."강채영 장로님(82세. 녹동제일교회) 말씀입니다. 1970년대, 교회가 무교회 지역인 고흥군 득량도에 교회를 세우기로하고 장로님이 그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인부들과 함께 선창 가 비탈에 터를 닦고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3년 간을 그곳에 드나들면서 전도하고 예배를 인도하다가 교
"용머리 댁, 남편이 저래서 얼마나 힘든가?. 나도 남편이 다른 여자 봐서 딴살림 차렸지만 이렇게 살아. 나 예수 믿고 마음잡고 사네. 나 따라서 교회 한 번 가보세…"죽기를 작정하고 물에 몸을 던졌던 김명금씨(해남 반석교회 권사). 그 어려웠던 때에 이웃에 살며 그 동네에서는 유일하게 예수 믿는 문씨 부인이 찾아와서 위로하며 전도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의 가정에 은혜의 빛이 임했습니다. 남편 박상묵씨(해남 반석교회 장로)는 술과 도박에 빠져서 육 남매 자식이나 가정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놀음 때
"아야, 내가 조금만 일찍 믿었더라면 이렇게는 안 살았을 것인데 후회스럽다."아내의 전도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박상묵 씨가 처음 교회 나갔을 때 아이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은혜를 체험하면서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들 창희에게 했던 말입니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생활로 아내와 자식들을 몹시도 고생시켰던 일들을 뼛속 깊이 후회하는 회한의 고백이었을 것입니다."가난하게 살았어요. 찢어지게요."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술과 놀음으로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어머니와
"내게 무슨 죄가 그리도 많아서 이런 저주를 내리셨단 말인가. 한센병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더니 시각 장애까지 겹쳐 앞을 보지 못하니…"이런 생각을 하면서 울고 또 울었답니다. 내 자신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런 슬픔 가운데 살아가다가 어느 날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다 잃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청각과 기억력이 남아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