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지역의 초기 선교역사를 보면 1백여 년 전 그 때도 의료선교를 통해서 복음을 접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좋은 일꾼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미국 남장로교회가 호남지역을 선교구역으로 배당받고 군산에서부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남지역에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를 파송할 때 나주에 선교부를 두기로 했지만 주민들 반대로 목포에 선교부를 세웠습니다. 오웬(한국명 오원) 목사가 의료선교사로 있었습니다. 그는 목포진료소만 아니라 지방을 순회하며 의료선교 활동을 했습니다.'김윤수'라는 사람이 어머니의 손에 난 악성 종양을
필리핀은 2월인데도 날씨가 더워서 밤에도 에어컨을 켜놓고 잠을 자야했습니다. 아침 8시. 우리 의료봉사팀 27명은 서둘러 호텔을 나섰습니다. 아라얏산 산족마을 까나나완교회로 이동합니다. 산파블에 있는 마갈랑나사렛교회에 들려서 워렌 목사님과 현지인 지원팀을 만났습니다. 까나나완교회는 7년 전에 윤순례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일행이 비좁은 지프니에 무릎을 포게 앉았습니다. 지프도 화물차도 아니고 그렇다고 버스도 아닌 필리핀식 승합차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소형 화물차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놓은 모양인데 사방이 뻥 뚫려있습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의료팀의 섬김 속에 계신 주님을. 그들의 수고와 땀 흘림과 사랑 가운데 계신 주님을. 그리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감사해하는 교인들의 눈망울 속에 계신 주님을. 꿈같은 한주간이 지나갔습니다..." 2004년에 필리핀 의료선교를 다녀온 후에 윤순례 선교사로부터(필리핀 마갈랑교회) 받았던 편지 한 부분입니다. 제가 인솔했던 의료봉사팀의 사랑의 섬김을 아름답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금년 1월에도 우리 의료봉사팀이 작년에 갔던 그 지역에서 한 주간 일정으로 봉사활동을 폈습니다. 분주한 일정과 필리핀의 무더위에 지쳐있는
박요한 목사님(1973년 제58회 총회장)은 금년 제90회 총회가 개혁측과 합동하고 축제로 드리는 감사예배에 설교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눈물이 나와서 설교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다시는 헤어지지 맙시다...' 하는 말씀을 시작으로 감동적인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박 목사님은 89세 고령도 불구하고 금년에도 다도해를 다니며 교회를 돌보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와 6·25 때 하나님이 살려주셨으니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일을 하시겠답니다. 매년 여러 달을 섬에서 지내는데 어느 해는 200여 섬을 다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박요한 목사님도 이러한 사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일제시대와 6ㆍ25를 겪으면서 교회가 당했던 시대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지(死地)에서 살려두신 것은 그에게 시대의 십자가를 지우고 역사의 증인으로 세우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당했던 6ㆍ25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함평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에 끌려가 함평내무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한 달 만에 풀려났습니다. 그 때 밤마다 불려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불같은 시련 가운데 성장해왔습니다. 일제시대는 천황숭배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는 이들이 많았고, 6·25때는 무신론 공산세력에 의해 역시 순교 당한 자들이 많았습니다.박요한 목사님은 전도사 시절에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궁산교회(함평군 손불면)를 시무하면서 6·25를 맞아 여러 차례 위기를 당했지만 특별한 은혜로 죽음을 피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8회 총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박 목사님(89세)은 그 때 일을 생생하게 들려주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일제 때 벌교읍교회 전도사로
"수돗물은 한 주나 두 주에 한번씩 나와요. 물을 무척 아껴 씁니다. 가뭄 때에는 물 사정이 더 어렵고요." 정삼섭 목사님(흑산면 수리교회)의 부인이며 동역자인 김정자 사모님의 말씀입니다. 마을에 작은 상수원이 있지만 작은 섬이라서 물이 늘 부족하기 때문에 무척 아껴야 합니다. 대둔도에 들어온 지가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배멀미는 여전하답니다. 은행원과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왔던 육지사람이 섬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없지만 목회자의 아내로서 교회와 주민들을 섬기며 삽니다. 교인들의 일을 돕고 부인들 파마도 해준답니다. 짭짤하고
목회자들이 때로는 섬기고 있는 교회를 떠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저는 공무원으로 있을 때 근무지를 자주 옮기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승진을 하면서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직무상의 전문성, 그 일에 적절한 인물이라는 객관적인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나갔던 교회(녹동제일)는 그 마을에 교회가 하나뿐이라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광주로 나와서도 한 교회(동명교회)를 섬겼습니다. 198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섬기고 있는 동산교회를 개척해서 25년을 지내오고 있습니다
정삼섭 목사님(흑산면 수리교회. 56세)이 처음으로 예배당에 나간 것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 때 찾아오셨던 것처럼, 청년 정삼섭에게도 그러했습니다. 청년의 꿈을 펴보지도 못한 채 접어야하는 절망의 때에 외로운 곳으로 찾아오셨습니다.목포가 고향인 그는 성남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입원해서 넉 달이 넘게 치료를 받았으나 기억력이 가물가물한 교통사고 후유증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머리는 아프고 통증도 있었습니다. 조용하게 쉬려고 제주도 표선으로 내려갔습니다. 의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노래 흑산도 아가씨 가사입니다. 2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목포를 출항해서 흑산도로 들어오는 쾌속선 스피커에서는 섬사람이 다 듣도록 흑산도 아가씨가 흘러나옵니다. 사람들만 아니라 배를 따라 날아드는 갈매기도 육지 사람을 맞는 것 같습니다. 흑산도는
"내가 가리다. 나 말고 누가 그 낙도를 지원해 가겠소?" 순천노회가 도서지역 전도를 위해 여천군 남면 우학리에 교회(우학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교회는 목회자의 생활비나 식량도 넉넉하게 드릴 수 없었습니다. 목회자가 귀한 때이기도 했지만 섬으로 자원해서 갈 분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나섰습니다. "내가 가리이다. 나 말고 누가 그 낙도를 지원해 가겠소." 하고 나선 것입니다. 시무하던 벌교교회를 사임하고 어려운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선교회 제1기 목사로 1907년에 목사 안수를
목포에서 홍도 가는 배를 타면 중간에 흑산도에 닿습니다. 여객선이 항구로 들어가면서 주위를 돌아보면 건너편 대둔도에 큰 예배당이 보입니다. 섬마을 예배당으로는 특별하다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에 가면 믿음의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흑산도에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대둔도 도목리로 건너가보니 마을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고소득 사업인 가두리 양식장 사이 뱃길로 들어가면서 부자 섬이라 느껴집니다. 사방이 시원한 널찍한 마당에서 고개를 들면 이웃집과 이야기 할 수 있는 낮은 담장, 깨끗한 동네 안 길이 이웃 간에
장기실(張起實) 전도사는 평안북도 용천 사람입니다. 사촌간인 장기려 장로님 고향이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녀도 그곳에서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장죽섭 목사님이 4형제였는데 위로부터 장운섭 학섭 일섭 죽섭 이었습니다.장기려는 운섭의 둘째 아들로 1911년생이고, 기실은 죽섭의 큰 딸로 1904년생입니다. 할아버지 장정식이 4백석을 거두는 마름이어서 비교적 유복하게 살았습니다. 할머니 이경심은 입암교회 교인이었는데, 후손들이 그 할머니의 믿음을 물려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손자 기려를 등에 업고 교회에 다녔습
장기실 전도사님은 서울 돈암동교회를 섬기다가 안흥교회를 거쳐 1958년에는 고당교회(전남 해남군)에 부임했습니다. 농촌이지만 교인이 백여 명이나 되는 큰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를 1960년 1월 4일 사면했습니다. 햇수로 3년이지만 사실은 15개월 정도, 한 교회 담임목회자로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그만두고 신안군 흑산면 대둔도로 떠났습니다. 도서지역 그 가운데서도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흑산도에는 교회가 많지 않을 때였습니다. 바울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았던 것처럼 그도 복음을 고대하는 대둔도에 있
"장전도사는 도서지역 선교에 특별한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대둔도에 승천교회를 개척했고, 다른 여러 교회도 개척하고 건축했습니다. 장전도사님의 총신 동기생 교역자들이 좋아서 그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목포노회장을 역임했던 백영규 목사님(목포상리교회)의 말씀입니다.장기실 전도사는 평안도 용천 사람입니다. 1904년 1월 13일 장죽섭 목사님의 6남매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용천 지역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부터 중국 쪽에서 복음을 듣고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진 곳입니다. 부친
구정 아침, 소록도 중앙리에 사시는 김영자 할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떡국 한 봉지씩을 배급받아서 설 떡국을 먹었으니 이제 75세, 할아버지는 78세가 되었답니다. 교회에서도 떡과 바나나를 나눠주었다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랍니다. 언제나 무슨 일에나 그리고 오늘도 감사하는 감사 집사님입니다.소록도까지 자주 찾아오는 동생이 구정 며칠 전에도 다녀갔답니다. 부모 없이 언니와 함께 살아왔던 동생이 이제는 권사가 되어서 믿음 생활도 잘하고, 병든 언니를 위로하고 돌봐준다며 자랑을 합니다. 6·25 때 폭격을 맞아 부모가 죽고, 두
소록도교회 4천 6백 양무리가 5·16 때 원장으로 부임한 현역 군인에게 졸지에 예배당을 빼앗기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을 때 김두영 목사님이 들어왔습니다. 그의 강력한 추진력과 교인들의 헌신으로 여덟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고, 은퇴할 때 까지 31년 한 평생을 도시문화를 멀리하고 외로운 섬에서 연약한 양무리들과 함께 살아온 선한목자. 그는 청년 때부터 특별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1938년 동경대 문리대 학생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숙사에 가까운 후지미초교회(富士山敎會)에 처음 출석한 것이 수요일 밤예배였습니다. 그 때 국내에서는 조
5·16 때 공무원에 채용된 저는 광주전신전화국을 거쳐 녹동우체국에 근무했습니다. 우체국에 자주 오시는 점잖은 신사 손님이 계셨습니다. 소록도에 계시는 김두영 목사님이었는데, 그 때는 그 분을 잘 알지 못하면서 가볍게 인사만 했습니다. 저도 녹동교회 교인이었지만 우리 교회 목사님 외에는 아는 분이 없었고, 이웃 교회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오실 때마다 전국 여러 우체국에서 발행한 소액환증서를 여러 장 가지고 와서 돈을 찾아갔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3만원, 5만원, 10만원 정도의 소액이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순교신앙으로 기도하자" 남성교회에 걸려있는 프랑카드 입니다. 70이 넘는 고령의 교인들 가운데는 1950년에 순교하신 김정복 목사님의 순교 증인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하신 목사님의 사랑을 못 잊어 합니다. 또 일제시대와 6·25 때 순교한 형제들도 있습니다. 앞서간 목사님과 형제들이 순교 제물이 되었으니 우리도 그 믿음으로 기도하겠다는 다짐인 것 같습니다. 김정복 목사님은 구한말에 해외이주노동자로 자원하여 하와이로 건너갔는데 그곳에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귀국하여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 돌을 보십시오. 바다에서 건져온 바위들입니다. 산에서 가져온 돌에는 이끼가 끼었지만 바다에서 옮겨온 바위는 이끼가 끼지를 않습니다. 몸도 불편한 원생들이 강제노역으로 여러 섬에서 돌을 옮겨왔습니다."안내원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소록도중앙공원. 50년도 넘게 크게 자란 상록수들이 아름답습니다. 일제시대에 심어서 가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과 눈물과 피 맺힌 한과 죽음의 역사가 숨쉬고 있습니다. 양지바른 언덕으로 돌계단을 오르면 '개원 제40주년'이라 새겨진 기념비가 있고, 그 돌비 한 발짝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