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김신아 장로님(83세. 소록도중앙교회). 예수님과 교제하며 '나의 밧모섬'이라 말씀하시는 조용하고 아름답고 믿음이 있는 작은 섬에서 은혜롭게 살아갑니다. 권사님은 병원에 입원하고 외롭게 혼자이지만 피아노를 연주하며 '내 영혼 평안해...' 찬양하며 '오직 예수', '오직 천국' 소망을 붙들고 살아갑니다.장로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병든 자들이 주님을 만나서
"...다른사람 어찌든지 나 주님의 용사되리 나는 주의 군사 되어 충성을 맹세하여내가 승리하기까지 주 은혜로 싸우리 주의 용사 된 나에게 주의 일 맡기소서"시각장애자로 살면서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저주했던 김재일.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확실히 새 인생을 삽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셨는데 바로 김목사님(50세, 오사카 일본사랑교회) 같은 사람이 그 증거입니다. "...다른사람 어찌든지 나주님의 용사되리 나는 주의 군사 되어 충성을 맹세하여..." 이 찬송을 부르며 소명을 일깨운답니다."하나
지치고 상한 내 영혼을 주여 받아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버림받고 깨진 나의 마음을 주여 받아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갑니다험한 세상에 날 혼자 있게 마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거친 비바람 불어올 때 나를 보호하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외롭고 서럽고 지치고 곤한 심령의 절규가 절절한 찬양입니다. 시작장애자 김재일 목사님은 지금도 이 찬양을 부르면 불행했던 시절에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한답니다. 7남매 시각장애자 가족. 점하는 집. 술로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한 평생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짓으로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김재일 목사님(50. 오사카 일본사랑교회)이 20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불렀던 복음성가입니다. 실명이나 다름없는 장애자이지만 겹겹의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1996년에 일본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복음의 척박한 땅 일본에 교회를 개척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그와 처음 만난 때는 1987년. 그가 밀알선교단 광주지부를
아득한 나의 갈길 다 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던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네빈들이나 사막에서 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늘 지켜 주시네 김신아 장로님(83세. 소록도교회)의 자서전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읽고부터 복음성가 '순례자'를 종종 부르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다녀오는 길에 사도행전 21장에 나오는 바울이 생각났답니다. 제3차 전도여행에 겪었던 죽음의 위험과 핍박과 고난. 그렇지만 이방인 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은혜를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 앞에서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차디찬 바위에- 밤은 깊어가고-/ 겟세마네 쓴 잔- 내게 아파도-주와 잔을 함께하면 영광 또한 같으리니-/ 주께서 마신 잔-을 내 어이 사양 하리까- (찬미예수 1320)이 노랫말을 지은 김신아 장로님(83세)을 소록도에서 만나서 이 노래를 들었습니다. 한센병 초기에 약을 잘못 써서 그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고 두 손의 손가락도 굳어졌습니다. 앞을 잘 못보는 김 장로님은 양 손으로 좌우를 더듬거려 조심스럽게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며 '차디찬 바위에- 밤은 깊어가고...' 찬양합니다. 80고령. 이제는 삶의 끝자락에 이
"멀고 험한 이 세상 길 소망 없는 나그네의 길/ 방황하고 헤매이며 정처 없이 살아왔네의지할 것 없는 이 몸 위로 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죄수들이 갇혀 있는 구치소에 찬송이 퍼집니다. 좁은 새장 같은 감옥에 갇혀서 천만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심령의 노래입니다. 김석균 선교사는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예수 사랑, 구원의 찬송을 부른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들려주었던 간증과 찬양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형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작곡인 이 찬양을 불렀습니
많은 찬송가 가운데서 어떤 것은 꼭 내 기도와 고백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전에는 예사로 불렀던 찬송이지만 어느 날은 그 찬송 가사와 리듬이 내 영혼의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찬송은 내 애창곡이 되어서 교회에서만 아니라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불러집니다. 더러 나로 하여금 애통하며 회개 하게하기도 하고 눈물과 함께 심령 깊이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실패와 낙담의 자리에서 믿음을 새롭게 하며 소망을 채워주기도 합니다.'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갑자기 마음 따뜻하고 정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소록도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찾아갈 때마다 문을 열고 나오며 반가워하는 분. 김우자(가명)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전화를 돌렸습니다."나 광주 황목사예요. 잘 지내셔요?" 목소리만 들어도 나를 알아보시는 분입니다."황목사님...? 일본이랑 잘 다녀왔어요? 사모님도 잘 계시고요?"앞을 보지 못하니 전화를 찾느라 여기저기 더듬었는지 신호가 여러 차례 간 후에야 수화기를 듭니다. 지난달에 일본으로 집회 가면서 특별기도를 부탁했었는데 그 결과를 묻습니다. 나는 기도 부탁
작년 10월. 이찌노에 미쓰루(57세) 목사를 만난 곳은 도쿄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관동기도원이었습니다. 깊은 산골에 온천을 개발해서 새로 건립한 환경 좋은 신설 기도원 책임 목사로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자주 만났고, 특별한 사연을 나누었기에 서로 부둥켜안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5월, 그가 일본 선교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며칠씩 강의를 했는데 그 후로도 여러 차례 그 분을 가르쳤습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분이어서 강의시간 말고도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학교
전북 금산에 있는 금산교회에 찾아가면 큰 감동을 받습니다. 1908년에 건축된 'ㄱ'자 목조 예배당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진한 감동을 주는 미담이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전라도지역은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구역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인천을 떠나 군산으로 들어왔고 전북과 전남지역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때 이야기입니다. 전북에 처음으로 들어온 테이트(최의덕, L. B. Tate) 선교사가 사냥을 나왔다가 두정리 마을의 지주 조덕삼을 만났습니다. 조 부자는 서양손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잘 대접했는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중국 방문 길에 용정에 들리면 비암산에 오른다. 일송정에 올라가서 해란강을 내려다보면서 선구자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다. 이 노래가 민족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비장감마저 갖게 했었는데 작사자와 작곡자의 친일문제가 불거지면서 생각이 착잡해진다. 가곡이라며 불러야 하는지... 일송정에 오르면 사방으로 훤히 열려 끝이 없이 넓은 땅. 하늘과 땅이 맞닿은 아련한 지평선. 우리 민족의 애환이 깃들인 역사의 땅이다. 그런
여러 해 전. 교인이라고는 단 한 사람이 출석했던 농촌교회에서의 그 주일 예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며 광주동명교회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시절에 교역자가 비어있는 작은 교회 임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전도사가 더 버티지 못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진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전도가 되지 않고 교역자 생활도 무척 어려웠습니다. 교인 가운데 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 갈만한 사람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예배는 중단되고 허름한 예배당은 문을 닫았습니다. 그 마을이 고향인 최목사님 말씀에 따라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주
태국의 농촌마을 빡통차이(Paktongchai)초등학교에서 진료를 했습니다. 학생 230명인 작은 학교였습니다. 2월 15일, 그 날은 섣달 그믐날. 구정 연휴기간이지만 예수 사랑으로 이웃들을 섬긴다는 사실이 오히려 큰 기쁨이고 감격이었습니다. 의사들이 이런 때가 아니면 병원을 비우고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료준비를 하고는 먼저 찬송과 통성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 사랑이 증거 되기를 바라면서 뜨거운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가 복음 전도의 도구가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라며 드리는
태국에는 두 차례 의료봉사활동을 다녀왔습니다. 국내 벽지만 아니라 해외봉사를 갈 때도 의료계통 대학생들도 여럿을 데려갑니다. 차세대 의료선교사나 봉사자들도 훈련하는 차원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봉사활동을 하고 저녁에는 선교사의 현장 강의를 들었습니다. 아침 QT도 선교 현지에서만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은혜가 차고 넘쳤습니다. 태국에서 신학교와 산족 사역, 나환자 사역, 교회개척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성곤 선교사를 도와서 중부 농촌지역을 찾아갔습니다.양력으로 2월 구정기간이라서 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출발 이틀 전에야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돕는 여러 가지 사역 가운데 의료봉사활동이 비록 일회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참 좋았습니다. 현대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지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병중에 있는 사람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질병에 대한 호소를 듣는 것부터가 좋은 만남입니다. 봉사팀의 예수 사랑과 정성스러운 돌봄에 대개는 크게 감동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아프리카 케냐에 다녀온 후에 박성기 선교사로부터 받은 편지입니다."항상 여러분의 기도 후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희들이 주님의 사랑 가운데 인사를 드립니다. 4박5일 동안 머물면서 쉴
케냐 정광호 선교사님과 의료봉사를 계획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그는 의료봉사활동에 대해 반신반의였습니다. 그러나 봉사활동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올 때는 기뻐하고 고마워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환영하지 못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멀고먼 아프리카까지 찾아오는 단기선교팀이 종종 있지만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고 짐이 되는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원의 의료팀이 엄청난 경비를 들여서 온다지만 과연 효과가 있을 것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답니다. 근래에는 교회와 선교팀들이 선교지를 방문합니다. 현지 선교사는 자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검은 대륙 아프리카였습니다. 저희 교회가 협력하는 정광호 선교사님 사역지로 동명교회 의료선교팀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의사로는 방충헌 양한모 조동헌 손관희 그리고 간호사와 약사들 외에도 최기채 목사님(동명교회)과 안기영 목사님(지산교회). 또 선교 비전 가진 대학생들까지 30여 명 대가족이 구정기간에 봉사활동에 나섰습니다. 프랑스를 거쳐 2박 3일의 먼 여정이었고 경비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모두가 개인부담으로 나서는 것을 보면 선교 열심이 대단합니다. 1996년 2월. 우리는 구정을 케냐에서 보내야
해외 선교지를 방문해서 특별한 사역을 하려면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사전에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봉사활동에 동참해줄 현지인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관리의 동행도 필요합니다. 신변 안전문제나 돌발사고 대처에도 필요합니다. 남미 파라과이와 페루 의료봉사 때는 고생이 컸지만 파라과이에서 우리가 받았던 '명예시민장'은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시민장에 "인덴벤덴시아 주민을 위해 봉사하신 황영준 목사님께 이 명예장을 드립니다. 1992년 5월 9일. 시장 아키노"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페루
상당히 오래전인 1992년 5월에 남미 파라과이와 페루에 의료봉사를 다녀왔습니다. 그 때는 파라과이에 임한곤 선교사를 파송한 광주동명교회 의료팀으로 내과 외과 치과 파트가 함께 나섰습니다. 저로서는 그 때가 해외의료봉사 사역으로는 처음이었습니다. 남미는 너무나 멀고 먼 여정이었습니다. 미국과 브라질을 거쳐 파라과이까지 3일 길. 위치로 보면 한국에서 지구 반대쪽 나라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많아서 큰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파라과이는 비자 받기도 쉽지 않아서, 출발 2일 전에야 비자가 나왔습니다.의사로는 방충헌 양한모 장로님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