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선정해 발표했다. ‘견리망의’(見利忘義)가 그것이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이다. ‘각자 자신의 이익 찾기에 급급해 의로움을 버리는 사회’, 우리 사회 전체가 공동체성을 잊어버린 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공멸(共滅)의 길이다.한국교회는 여기에서 예외일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중심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됐고, 이젠 ‘각자도생’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한해를 마감하고 새해
지난 9월 19일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지나 2023년을 보낸 한국교회가 새롭게 진입하게 될 2024년을 어떻게 사역해야 할 것인가를 내다보는 가 발간됐다. 책 속에는 2023년을 분투하고 있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리서치한 결과를 데이터화한 것에 기초해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대표 저자인 지용근 목회데이터연구소 대표는 한 마디로 2024년은 ‘교회수축시대’라고 어둡게 전망했다.이런 상황 속에서 각 영역에서 전문성을 가진 저자들이 10차례에 걸친
제22대 총신대학 총장이 지난 4월 11일 선출되었다. 학내분규사태와 3년 여 동안의 임시이사체제를 겪고 선출된 총장이며, 무엇보다도 신대원 미달 사태와 같은 학교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리더의 선출이었기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 교계 언론인은 이번 총장선거를 “잔인한 선거”로 정의하였다. 금권 선거는 물론이고, 총장 후보자들의 언론 광고나 인터뷰도 금지하고, 오직 공개적인 발전계획발표와 총장추천위원회, 법인이사회의 심층면접을 통해서만 당선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총장추천위원회의 간결하고 탁월한 진
학폭이 그렇게 끔찍하도록 잔인한 줄 몰랐었다. 피해자의 영육을 완전히 피폐시키는 무서운 악마 같은 폭력 행위였다. 10대 청소년들이 철이 없어서 하는 장난의 수준이 아니었다. 의도적이며 지속적인 계획을 가진 폭력이었다. 물론 가해자는 폭행을 하면서도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것 같긴 했다. 그래도 한창 꿈을 갖고 자라는 10대 청소년의 세계에서 해서는 안되고 있어서도 안되는 학교내 폭력이었다. 더 글로리가 방영되면서 학폭이 크게 주목받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학폭은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고, 그 수준이 드라마에서
2022년 제107회 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교인 수가 전년 대비 9만59명(3.8%) 감소한 229만2745명(2021년12월31일 기준)으로 집계됐다. 교회 수도 전체 교인 수와 비슷한 비율(3.6%)로 줄어 1만1262개로 확인됐다. 코로나19 장기화에 결국 버티지 못한 중소형교회의 이탈 결과로 보인다.교인과 교회 수가 크게 줄어든 반면, 목사 수는 1년 전보다 691명(2.7%) 늘어난 2만6168명으로 조사됐다.(기독신문 22년 9월 25일) 이런 상황 속에서 총회와 총신신대원 간 사역자 수급 계획에 따른 마스터플랜을 시급하
이태원 참사 100일이 지났다. 158명의 안타까운 죽음을 마주하며 교회는 무엇을 했을까? 어떤 교회는 침묵했고, 어떤 교회는 심판했고, 어떤 교회는 함께 눈물 흘리고 기도하고 위로하며 함께했다.참사가 일어나고 다음 날, 용산구가 녹사평역 광장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한국교회봉사단에서 용산교구협의회에 분향소 옆에서 차 봉사를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는 도움을 요청해왔다. 모든 준비는 우리 교회의 몫이었다. 테이블을 챙기고 생강차를 끓여 전기 포트에 담고 여분의 차와 커피를 준비한 뒤 각 교회에 자원봉사자를 요청하고 조를 편성했다. 봉사
한 사람의 삶은 관계(Relationship) 곧 대인(對人) 대아(對我) 대물(對物) 대직(對職),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인 대신관계(對神關係) 속에 있다고 믿는다.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나에게 관계의 축복을 선물로 주셨다. 먼저 믿는 부모 즉 개척교회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나 성장하는 남다른 은혜를 입었다. 나의 인생관은 가정교육을 통해 형성됐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의 나의 삶의 기초는 가정예배와 교회학교 교육의 열매이다.부모님께서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성경적 가치를 심어주셨다. “정호야,
2020년 12월 13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날은 온 교우들이 ‘커피 한 잔의 기적’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새로남카페 사회 기부 20억 돌파 감사예배’를 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미래목회포럼 이사장이신 거룩한빛광성교회 정성진 목사님은 ‘네 떡을 물에 던지라’는 제목으로 성도들, 특히 자원봉사자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말씀을 전하셨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의 총회장 소강석 목사님과 대전광역시 허태정 시장님, 총신대학교 이재서 총장님과 대전교육청 설동호 교육감께서 영상으로 축사를 하셨다. 참석자 모두 가슴 설렌 시간이었다.커피
새 예배당 입당 후 2008년 감격스러운 헌당 감사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헌당은 헌신의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었다. 담임목사로서 교우들의 조건 없는 헌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미래를 열어가는 동력이 돼 열매를 맺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건물은 재정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헌신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질문했다.“사랑의 주님! 예배당 건축과 헌당 이후 우리는 어떤 방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주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게 해주세요!”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고민했다.새 사명을 위해 평신
새로남교회 역사는 곧 이단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이다. 우리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이단들과 맞서 싸우는 일에 앞장섰다. 구원파(박옥수 측)와는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투쟁에서 최종 승리하는 경험도 했다. 2004년 구원파는 시내버스 광고와 언론을 통해 무차별 홍보와 포교를 일삼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대전기독교연합회 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오정호 목사)는 구원파의 폐해를 담은 전단지를 중앙 일간지에 끼워 넣으며 대전 시민들에게 널리 알렸다.구원파는 전단지에 기재된 협력 기관을 모두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2005년 11월
2002년 2월 24일,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예배당 건축 기공예배를 드렸다. 예배당 건축의 의미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그 건물이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존귀하게 쓰임 받느냐다. 부임 당시 나는 예배당 건축은 전혀 생각치 못했다. 분열된 목회 현장에서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하는 일만해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 주일마다 새로운 가족이 몰려오니 지하 예배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안전 문제는 더 심각했다.어느 해 폭우가 들이닥쳤을 때 조성민 전도사와 밤새도록 물을 퍼낸 적도 있었다. 조 전도사는 지금 상도제일교회
새로남교회의 제자훈련 첫 입학 예배는 감격적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은혜로운 일에는 시험도 뒤따랐다. 1996년 가을, 전 교우를 위한 집회를 열었다. 강사님은 평소 존경하던 대구서문교회 이성헌 목사님이었다. 모든 성도가 은혜로 충만했다. 집회가 끝나는 날, 어떤 장로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은혜받은 열매가 나타나는구나! 이 장로님이 교회를 위해 어떤 헌신을 하시려는 걸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장로를 대면했다.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내 예상을 뒤엎었다. “목사님, 이제 저희 가정은 새로남교회를
대전 새로남교회 부임한 이후 교우들과 소통하기 원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된 심통(心通)을 넘어 영과 영이 이어진 곧 영통(靈通)을 소원했다. 영통의 핵심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중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마치 다니엘과 세 친구, 다윗과 요나단처럼 말이다. 처음 부임 심방을 하면서 들은 말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마음에 박혀 있다.“목사님은 언제 떠나세요?” 첫 방문에 이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로하신 교우였다. 부임했다 갑자기 서울로 떠난 목회자에 대한 실망과 서운한 감정이 내게 분출된 것이다. “집사님, 저는 여
1994년 11월 6일,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새로남교회 부임을 확정했다. ‘내가 담임목사로 교회에 부임한 순간, 나에게는 주일에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사라질 것이다.’ 부임하기 일주일 전 주일, 대전을 방문했다. 주님께서 나를 대전으로 인도하셨다면 부임에 앞서 교단을 초월해 대전의 선배 목사님들께 인사드리고 대전 지역 교회 형편을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장로님께서 내 뜻을 흡족히 여기시며 협조해 주셨다. 대전 거점 교회들의 새벽 예배부터 낮 예배, 저녁 예배까지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목사님들에게 이렇게 인
1994년 5월 미국에 세미나 인도 차 오신 옥한흠 목사님은 나를 만나자마자 대뜸 물으셨다. “오 목사는 목회자요 교수요?” 나는 평소 가졌던 소신대로 말씀드렸다. “목사님, 저는 목회를 위해 배웁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이 있네. 대전에 있는 어떤 교회가 갑자기 담임목사가 떠나면서 어려움이 생겼는데, 후임자 추천을 나에게 부탁했네. 내가 생각하기에 오 목사가 적격인 것 같으니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봤으면 하네.”미국 풀러신학대학원 박사과정을 시작한 상황에서 전혀 예상 밖의 말씀을 하시니 당황스러웠다. “네 목사님, 시간을 좀
1990년 겨울 옥한흠 목사님께서 부르셨다. “오 목사, 그동안 사랑의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수고했네. 이제 목회 안목을 넓힐 때이니, 해외로 유학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네.” “예?”전혀 예상 못했던 제안이었다. 많은 부교역자들이 부러워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기도로 준비했다. 그러나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유학 첫 단계인 비자신청부터 막혔다. 그것도 두 번이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유학비용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컸다. 어렵게 돈을 빌려 통장 잔고를 만들고 다시 서류를 준비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옥한흠 목사님이 사랑의교회를 담임하실 때 부교역자 생활을 했다. 제자양육의 열매가 왕성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 유학의 청운까지 품게 됐다. 그 원동력은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인 ‘증인들’에 있다.청년 시절 형님(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과 함께 제자양육의 실제를 경험했다는 것은 평생의 축복이다. 그것은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갔다. 형님과 나는 단순히 혈육의 형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영적 동지이기도 했다.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하신
1978년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여름 수련회를 마친 어느 날이었다. 형님(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이 이런 제안을 했다. “정호야, 작년에는 내가 아버지께서 담임하시는 부산가야제일교회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했다. 올해는 네가 준비했으면 좋겠다.”은혜받은 대학부 동료들과 함께 그 여름을 불태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형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겠어, 형. 올여름은 내가 성경학교를 인도할게.”부산가야제일교회에 내려가니 아이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당시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이 출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신학도인 나는 나름대로
1976년 봄바람이 불 때 서울 총신대학의 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그 배지가 결코 예비 목회자로서 소명을 불타오르게 하지는 못했다. 장학생 선발시험으로 입학한 것은 은혜였지만, 자동으로 신앙 성숙의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이러한 갈등은 진로에 대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휴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다른 데 있었다. 신학교 교육과정 연단과는 별개로 공동체를 예비하신 것이다. 그 공동체가 바로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 ‘증인들’이었다. 증인들과의 만남은 믿음 생활의 즐거움과 역동성을 재발견하게 했다.당시 형님(
우리는 주일마다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한다. 공회란 공교회를 뜻한다. 이는 개교회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하나하나의 개교회가 모여 공회를 이룬다. 이 공회에 노회도 총회도 포함된다. 공회도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인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총회도 교회이다. 확대된 교회이다. 그 생명은 거룩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 총회는 거룩한 공회인가?거룩을 하나님께 적용하면, 죄가 없으시며, 장엄하시며, 순결하시며, 완전하심을 뜻한다. 사람에게 적용하면, 구별되고,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하나님께 바쳐진 상태를 의미한다. 총회가